토바섬 폭발로 다양한 유인원이 모두 멸종… ‘기억’을 기반으로 등장한 상징문화가 현생인류의 생존기반
?독일의 도시 울름(Ulm)에서 발견된 홀레 펠스(Hohle Fels)동굴. 이곳에서 인간을 최초로 조각한 홀레 펠스 비너스(Venus of Hohle Fels)가 출토됐다. / 사진·중앙포토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서로를 수용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러나 7만5000년 전 토바 화산 폭발로 그들은 최악의 빙하기를 맞아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할 운명을 맞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문자 이전의 문화를 매개체로 결속했다. 드디어 인간만의 창의적인 문화가 탄생했다.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파보(Svante Paabo) 박사. 파보 박사는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1~3% 정도 남아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 사진·중앙포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대한 사건들이 있다. 20세기 들어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유럽의 운명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주었다. 역사학자들은 1차, 2차대전 같은 전쟁이나 기근을 넘어선 인류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심층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방법론을 도입했다. 최근 데이빗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 빅 히스토리 입문>이나 신시아 브라운의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현재까지>는 우주의 역사를 한 장의 거대한 수묵화에 담기 위해 대담한 주제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고대, 중세, 그리고 현대로 역사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현대는 학문이 점점 세분화되어, 한 분야에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아 한 분야를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자기만의 우물 안에서 보는 조그만 하늘을 전체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세한 역사적 사건들에 집착한 편협한 역사를 구원하여, 거시적인 안목으로 희망의 불씨를 제공한 역사학자가 등장했다. F.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다.
그는 1949년 <필립 2세 시대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라는 책을 썼다. 지중해가 그것을 둘러싼 세계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들은 서로 밀접하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전 학자들은 역사를 개인이나 전쟁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혹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역사라는 시간 틀 안에서 역사를 보았다. 브로델은 ‘라 롱 뒤레’라는 긴 시간 안에서 인류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의 ‘라 롱 뒤레’ 시선에서 중요한 주제는 바다, 사막, 그리고 산맥과 같은 자연 환경이었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라 롱 뒤레’는 무엇인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상상한 모형. 유인원과 다를 바 없던 초기 얼굴형이 현재의 얼굴형으로 진화했다. / 사진·중앙포토
사막이 형성되면서 이전에 정착하여 살던 농경민들이 유목민이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시절을 좇아 산지와 평지를 오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하였다. 브로델은 1929년 마크 블로흐와 루시아 베브레가 주도한 프랑스 역사학파인 ‘아날’에 합류하여 역사를 인접 학문들과 결합했다. 현생인류의 등장을 네안데르탈인과 아프리카에서 새로 이주해온 호모 사피엔스와의 만남과 경쟁으로만 해석하기엔 부족하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라 롱 뒤레’는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인간이 외계인과의 만남을 다룬 는 영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과 유사한 인종과 함께 공존했다는 사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약 4만년 전 우리의 조상인 현생인류가 유럽에 등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을 만났다. 머리가 크고 눈 주위가 튀어나왔으며 키는 작지만 레슬링 선수이면서 단거리 육상선수 같은 몸집을 지녔다.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던 최초의 유인원은 호모 에렉투스였다. 그 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유럽에 정착해 생활하였다. 이 두 유인원은 이미 자취를 감춰 소멸하여 자신들의 유골과 유품만 남겼다.
2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주해와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은 나름대로 정교한 문화를 구축하여 생존했다. 그 후 1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해온 새로운 인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기원 전 7만년 전부터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혹독한 빙하기에 살고 있었다. 7만5000년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토바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지금의 토바 호수에서다. 토바섬 폭발은 마지막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폭발 후 10년 동안 화산재가 하늘을 덮어 지구 온도는 5°C나 떨어졌다. 거의 모든 식물이 말라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토바 화산폭발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식물, 특히 다양한 유인원은 멸종하였다. 이 현상을 ‘유전적 병목이론’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던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이 혹독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과 최근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호모 사피엔스들도 거의 멸종하여, 학자들은 기껏해야 3000명에서 1만 명 정도만 생존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스페인의 지브랄타와 같은 해변가로 이주해 소수만 살아남았다. 남동아시아에 생존하고 있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와 같이 작은 인간은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날 인간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7만년 전에 생존한 1000명에서 1만 명 정도의 현생인류의 자손들이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본격으로 이주해 온 시기는 토바 화산폭발 이후다. 그들의 활동은 서아시아에서는 4만5000년 전, 유럽에서는 4만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감지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뒤를 이은 현생인류를 크로마뇽(Cro-Magnons)인이라고도 부른다. 크로마뇽은 프랑스에 있는 지명이다. 이전에 다른 인종과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는 표본이라고 말할 만한 유물이 없다. 18세기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현생인류에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인간’이란 학명을 부여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
?홀레 펠스 동굴에서 출토된 지공이 5개인 오음계 피리. 호모 사피엔스들은 이 음계로 하늘의 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상상했다. / 사진제공·배철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문화를 선명하게 구별하기는 힘들다. 그들의 유골에 치명적인 흉터나 기형 흔적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생존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 모두 노약자나 병든 자를 돌보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 두 인종은 문화적으로 상이한 점도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장신구에 색을 칠해 자신들을 다른 그룹과 구별했다. 사후사계에 대한 의식은 있었지만, 예술적인 조각품이나 장신구, 혹은 매장 의례의 증거는 없다. 이들의 도구는 거의 석기였지 크로마뇽인들처럼 뼈, 상아, 조개 혹은 사슴뿔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긴 창은 주로 동물을 찌르는 용도였지 던지지는 않았다. 크로마뇽인은 자신들이 만든 창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어깨와 손 구조가 진화하였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동굴에 오랫동안 거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곰이나 다른 동물이 살던 장소를 이들이 잠시 사용한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들이 현생인류와 지근거리에서 살았다면, 그들이 성적으로 접촉했을까?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성교했다는 증거는 유전학에서 밝혀졌다.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파보(Svante Paabo) 박사는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1∼3% 정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네안데르탈인들이 2만8000년 전쯤 모두 사라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문화를 통해, 그 이유를 역추적할 수 있다. 오늘날 유전학자들은 현생인류의 미토콘트리아 DNA를 분석하여 추적하였다. 그들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 있는 한 공동의 여성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이 여성은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l Eve)’라고 부르며 9만9000년에서 20만년 전 사이 언젠가에 생존했다고 본다.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 성교를 할 정도로 유사한 인류였다면, 무엇이 우리를 생존하게 만들었을까? 학자들은 기원전 10만년 전에 유럽으로 유입된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기원전 4만5000년부터 독특한 ‘상징문화’를 들여온 두 번째 새로운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어떤 전략으로 네안데르탈인을 소멸시켰을까? 네안데르탈인들도 원시적인 도구를 제작하였지만, 현생인류는 좀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다. 네안데르탈인이 활동하던 무스테리아 시대(60만 년∼4만5000년) 도구와 비교하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한 오리냑 문화에는 섬세한 도구들뿐만 아니라 상징예술이 등장한다.
현생인류는 자신들이 축적해온 문화를 ‘기억’이란 장치를 통해 저장하고, 그 기억에서 산출해낸 상징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소통의 도구로 사용했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은 <문화 기억>(2005)이라는 책에서 “기억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전자”라고 설명한다. 개인이 각각의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아져 집단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쳐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개인의 특별한 경험은 사회 안에서 그 경험이 수용될 것인지 아니면 거절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평가된다. 집단은 안전하게 구축된 기억을 통해 공동의 예술품을 만들어 향유한다. 이 예술품들은 그 공동체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상징물이며 개인은 그 물건을 통해 무언의 문화적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억문화 유적
?동굴 속 네안데르탈인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모형.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토바 화산폭발로 인해 네안데르탈인들은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 / 사진·중앙포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겐 오늘날 우리처럼 기억을 보장해주는 간편한 도구인 문자가 없었다. 이들의 소속감을 보장해주는 상징체계가 등장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상징체계는 공동의 기억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스토리다. 이들은 구전을 통해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자신들의 후손에게 들려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조상들과 자연에 깃들어 있는 신과 영웅에 관한 신화다. 기억문화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교육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 동일한 신화를 듣고, 춤을 추고 음악을 듣는 의례를 행한다. 이들은 의례를 행하는 신화적인 시간과 일상시간을 구분한다.
기억을 기반으로 등장한 상징문화는 서남부 독일의 오리냑 문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오리냑 시기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활동한 문화로 4만3000년 전부터 2만6000년 전까지를 지칭하는 고고학적 용어다. 오리냑은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 근처에 위치한 고고학 지명이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드와르 라트테는 오이냑을 발굴하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활동한 시기를 오리냑 문화라고 불렀다. 서남부 독일 홀레 펠스에서 발견된 피리, 비스너상, 그리고 사자인간상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억문화의 유적들이다.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 빠질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결혼, 장례식, 졸업식, 군대행진, 올림픽 게임, 기도, 멋진 식당에서 저녁식사 심지어는 어머니가 아이를 잠들게 할때도 그 사건을 중요하게 만드는 마술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시작하면서 음악의 신 뮤즈를 부른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전해들어와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신, 인간, 사랑, 우정, 그리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음유시인 노래의 장단과 곡을 맞추어 피리와 리라가 연주된다. 음악은 인간 삶의 중요한 일부이며 사람이 호흡이나 걸음처럼 인간 문화를 지탱해주는 기반이 되었다.
사실 음악은 인간의 언어보다 먼저 등장했는지 모른다. 음악은 인류의 보편적인 언어로,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로 만든다. 만일 어떤 고고학자가 한 악기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사용한 집단은 현생인류이며 복잡하지만 상징적인 소통을 했다는 증거다. 오리냑 문화의 중심엔 뼈로 만든 피리가 있다. 인간은 이미 3만5000년 전에 피리를 부는 연주자가 있었고, 그의 연주를 듣는 청중이 있었다. 독일 스바비 알브에 위치한 울름이란 도시 근처 홀레 펠스(Hohle Fels) 동굴에서 피리가 발견되었다. 이와 유사한 피리는 남서 프랑스 아브리 블랑샤드(Abri Blanchard)에서도 발견되었다.
2008년 9월 17일 독일 홀레 펠스 동굴에서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한 개의 피리와 여러 개로 부러진 세 점의 피리가 발견되었다. 이 피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난다는 흰목대머리 독수리의 노뼈를 다듬어 만들었다. 노뼈는 독수리 날개뼈를 이르는 용어다. 흰목대머리 독수리는 몸길이가 93~110㎝, 날개 편 길이는 234~269㎝, 몸무게 6∼13㎏이나 되는 몸집이 큰 조류다.
이 피리는 길이가 21.8㎝나 되고 지름이 8㎜다. 이 독수리의 앞다리 뼈 길이가 34㎝ 정도니 그 중간을 정교하게 잘라 다듬어 제작하였다. 이 피리의 표면과 뼈 구조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호모 사피엔스가 피리를 만든 제작과정이나 그 이면에 담긴 문화적인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이 피리는 다섯 개 지공이 있고 마우스피스는 V형태다. 지공 근처에는 작은 선들이 새겨져 있어 날카로운 석기로 구멍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너스상은 인류 예술의 탄생을 의미
?독일 스타텔 동굴에서 출토된 사자인간 조각상. 이 조각상은 공동체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역할을 했다. / 사진제공·배철현
호모 사피엔스는 마우스피스를 별도로 끼우지 않고 끝부분에 입을 대고 연주했다. 이곳에는 백조의 앞다리 뼈로 만들어진 세 개의 지공이 있는 피리도 발견되었다. 피리의 끝이 부러져 있어 원래는 네 개의 지공이 있으며 오늘날 플루트처럼 옆으로 불도록 마우스피스가 뼈의 끝이 아니라 위에 달려 있다. 그 외에도 지공이 세 개 있는 조그만 피리도 남아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입으로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신의 목소리를 자신들이 만든 도구에 담아 흉내 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신에게 가장 가까이 높이 나르는 흰목대머리 독수리의 뼈로 신의 음성이 담긴 소리를 내려 시도했다. 홀레 펠스에서 발견된 이 피리는 지공이 5개 달린 오음계다. 동양음악이 궁상각치우로 이루어진 오음계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이 음계로 하늘의 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이들이 피리를 불고 그것을 들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들에겐 이미 정형화된, 그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곡이 있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빙하가 수백m 덮인 혹독한 자연에서 사냥한 후, 동굴로 돌아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냥 무용담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혹은 몸집이 큰 맘모스나 사자와 같은 동물을 보고 느꼈던 공포 경험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우주 안에 생존하는 특별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홀레 펠스 동굴 안에는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주술적인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홀레 펠스 비너스(Venus of Hohle Fels)는 맘모스 상아를 다듬어 만들었다. 풍만한 여성을 묘사하여 비너스라는 용어가 붙었다. 이 조각상은 인간을 조각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 이 조각상을 발굴한 독일 튀빙겐 대학의 니콜라스 J. 코나르드(Nicholas J. Conard)는 이 조각상의 연대를 3만5000년 전으로 추정하였다. 이 비너스 상은 근처에서 발견된 사자-인간상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되었다. 오리냑 문화는 지금은 사라진 맘모스, 하마, 타르판과 같은 멸종된 포유류와 인간과 동물의 하이브리드 조각품들을 생산하였다.
이 비너상은 인류 예술의 탄생을 의미한다. 왜 인류는 이런 모양의 조각상을 만들었을까? 풍요로운 공동체 안에서 생존과 장수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이유에서 제작한 것 같다. 한마디로 비너스상은 풍요를 상징한다. 이 동상은 밀로의 비너스상과는 다르다. 몸집이 거대하고 가슴이 강조되었고 특히 성기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홀레 펠스 비너스상은 오스트리아에서 100년 전에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과 유사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자신들의 풍요를 보장해주는 상징으로 이런 형식의 비너스상을 수천 년 동안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이 동상이 제작되었을 때 유럽은 심각한 빙하기를 겪고 있어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여성이 아이를 낳은 후 풍만한 몸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이 동상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크게 다섯 가지다. ▷실제 여성을 그대로 묘사했다 ▷구석기 시대 가장 매력적인 여성의 상징이다 ▷풍요의 상징이다 ▷종교의례와 연관되었으며, 여자 사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원시인들의 조상을 상징한다. 우리는 왜 구석기 시대에 사냥채집경제로 연명하던 현생인류가 이 동상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학자는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은 유동성과 투과성
독일 남서쪽 알프스산 근처 울름(Ulm)이란 도시의 스타텔 동굴에서 1939년 8월 반인반수 동상이 하나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반발되기 며칠 전이라, 고고학자들은 1970년에 200개 조각으로 깨진 이 조각상을 조립했다. 이 조각상은 상아를 다듬어 제작했다. 현재는 30% 정도가 소실되었다. 1989년 조각상을 재조립하여 사자와 사람이 합쳐진 하이브리드라는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조각상이 남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만 엘리자베스 슈미트는 4만 년 전 유럽은 모계사회이기에 조각상이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이 조각상의 크기는 30㎝다. 사자인간상의 표면은 기름과 가죽으로 정교하게 닦였다. 학자들은 이런 수준의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적어도 320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개를 약간 들어올려 먼 거리를 응시하는 사자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의 왼쪽 팔에 새겨진 6개 줄은 무슨 표시인가? 왜 오른쪽 팔에는 그런 표시가 존재하지 않는가? 남성인가 아니면 여성인가도 논란거리다. 사자인간이 여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는 모계사회란 점을 강조한다. 이 당시 여성들은 집에서 음식을 하거나 아이를 돌본 것이 아니라, 맘모스를 사용하고 공동체 의례를 주관했다.
사자인간은 동굴 입구로부터 27m 떨어진 구덩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에는 불탄 흔적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구덩이에서 정교하게 장식한 사슴의 치아, 북극 여우의 앞니, 그리고 상아로 만든 목걸이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사제나 샤먼이 입는 의복에 달린 장식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구덩이는 샤만이 의복을 갈아입었던 장소였는지는 모른다. 사자는 구석기인들에게 용기와 힘의 상징이었다. 특히 사자인간의 배꼽은 강조되어 심하게 부풀어져 있다. 배꼽은 출산의 상징으로, 사자인간은 강력한 주술적인 힘으로 공동체의 풍요를 비는 신비한 동물이다.
사제는 현실의 세계와 죽음 너머의 사후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다. 그 경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경계에 등장하는 존재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이란 괴상하게 생긴 동물이 아니다. 괴물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몬스터(monster)’는 그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몬스터는 ‘손으로 넘어오지 말아야 할 타부를 가리키는 존재; 손가락으로 지칭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영원한 사후세계에 정결한 의식없이 들어오는 자를 쫓아내는 괴물이다. 스핑크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목졸라 죽이는 존재’라는 의미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유동성이며 다른 하나는 투과성이다. 유동성이란 자신과 자연, 특히 자신과 동물이나 식물이 유동적이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을 신봉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달리 구석기인들은 자연에도 힘이 있고 동식물에도 신적인 영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이들이 비록 생존을 위해 나무를 베고 동물을 사냥하지만,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들이 정기적으로 컴컴한 동굴로 들어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해 나오는 ‘엑스터시’ 즉 황홀경을 경험하였다. 사자인간은 이런 의례를 주관한 사제의 상징이자 의례에 참여한 예배자들의 진입해야 할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투과성이다. 구석인들은 죽음이 자신들의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나 네안데르탈인이 사후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여 무덤을 장식하였다. 구석기인들은 사후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는 상관없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현재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 동굴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려는 삶과 죽음을 여행하려는 투과성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사는 것이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인류는 비로소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그 공동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음악과 조각, 그리고 의례라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공동의 기억을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끈이 되었다. 4만5000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다. 그전에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를 수용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러나 7만5000년 토바 화산 폭발로 점차로 최악의 빙하기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남긴 음악과 조각, 그리고 의례는 기억이라는 매개체로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창의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토바섬 폭발로 다양한 유인원이 모두 멸종… ‘기억’을 기반으로 등장한 상징문화가 현생인류의 생존기반
?독일의 도시 울름(Ulm)에서 발견된 홀레 펠스(Hohle Fels)동굴. 이곳에서 인간을 최초로 조각한 홀레 펠스 비너스(Venus of Hohle Fels)가 출토됐다. / 사진·중앙포토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서로를 수용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러나 7만5000년 전 토바 화산 폭발로 그들은 최악의 빙하기를 맞아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할 운명을 맞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문자 이전의 문화를 매개체로 결속했다. 드디어 인간만의 창의적인 문화가 탄생했다.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파보(Svante Paabo) 박사. 파보 박사는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1~3% 정도 남아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 사진·중앙포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대한 사건들이 있다. 20세기 들어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유럽의 운명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주었다. 역사학자들은 1차, 2차대전 같은 전쟁이나 기근을 넘어선 인류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심층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방법론을 도입했다. 최근 데이빗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 빅 히스토리 입문>이나 신시아 브라운의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현재까지>는 우주의 역사를 한 장의 거대한 수묵화에 담기 위해 대담한 주제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고대, 중세, 그리고 현대로 역사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현대는 학문이 점점 세분화되어, 한 분야에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아 한 분야를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자기만의 우물 안에서 보는 조그만 하늘을 전체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세한 역사적 사건들에 집착한 편협한 역사를 구원하여, 거시적인 안목으로 희망의 불씨를 제공한 역사학자가 등장했다. F.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다.
그는 1949년 <필립 2세 시대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라는 책을 썼다. 지중해가 그것을 둘러싼 세계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들은 서로 밀접하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전 학자들은 역사를 개인이나 전쟁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혹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역사라는 시간 틀 안에서 역사를 보았다. 브로델은 ‘라 롱 뒤레’라는 긴 시간 안에서 인류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의 ‘라 롱 뒤레’ 시선에서 중요한 주제는 바다, 사막, 그리고 산맥과 같은 자연 환경이었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라 롱 뒤레’는 무엇인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상상한 모형. 유인원과 다를 바 없던 초기 얼굴형이 현재의 얼굴형으로 진화했다. / 사진·중앙포토
사막이 형성되면서 이전에 정착하여 살던 농경민들이 유목민이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시절을 좇아 산지와 평지를 오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하였다. 브로델은 1929년 마크 블로흐와 루시아 베브레가 주도한 프랑스 역사학파인 ‘아날’에 합류하여 역사를 인접 학문들과 결합했다. 현생인류의 등장을 네안데르탈인과 아프리카에서 새로 이주해온 호모 사피엔스와의 만남과 경쟁으로만 해석하기엔 부족하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라 롱 뒤레’는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인간이 외계인과의 만남을 다룬 는 영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과 유사한 인종과 함께 공존했다는 사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약 4만년 전 우리의 조상인 현생인류가 유럽에 등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을 만났다. 머리가 크고 눈 주위가 튀어나왔으며 키는 작지만 레슬링 선수이면서 단거리 육상선수 같은 몸집을 지녔다.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던 최초의 유인원은 호모 에렉투스였다. 그 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유럽에 정착해 생활하였다. 이 두 유인원은 이미 자취를 감춰 소멸하여 자신들의 유골과 유품만 남겼다.
2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주해와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은 나름대로 정교한 문화를 구축하여 생존했다. 그 후 1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해온 새로운 인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기원 전 7만년 전부터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혹독한 빙하기에 살고 있었다. 7만5000년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토바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지금의 토바 호수에서다. 토바섬 폭발은 마지막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폭발 후 10년 동안 화산재가 하늘을 덮어 지구 온도는 5°C나 떨어졌다. 거의 모든 식물이 말라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토바 화산폭발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식물, 특히 다양한 유인원은 멸종하였다. 이 현상을 ‘유전적 병목이론’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던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이 혹독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과 최근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호모 사피엔스들도 거의 멸종하여, 학자들은 기껏해야 3000명에서 1만 명 정도만 생존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스페인의 지브랄타와 같은 해변가로 이주해 소수만 살아남았다. 남동아시아에 생존하고 있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와 같이 작은 인간은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날 인간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7만년 전에 생존한 1000명에서 1만 명 정도의 현생인류의 자손들이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본격으로 이주해 온 시기는 토바 화산폭발 이후다. 그들의 활동은 서아시아에서는 4만5000년 전, 유럽에서는 4만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감지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뒤를 이은 현생인류를 크로마뇽(Cro-Magnons)인이라고도 부른다. 크로마뇽은 프랑스에 있는 지명이다. 이전에 다른 인종과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는 표본이라고 말할 만한 유물이 없다. 18세기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현생인류에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인간’이란 학명을 부여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
?홀레 펠스 동굴에서 출토된 지공이 5개인 오음계 피리. 호모 사피엔스들은 이 음계로 하늘의 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상상했다. / 사진제공·배철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문화를 선명하게 구별하기는 힘들다. 그들의 유골에 치명적인 흉터나 기형 흔적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생존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 모두 노약자나 병든 자를 돌보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 두 인종은 문화적으로 상이한 점도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장신구에 색을 칠해 자신들을 다른 그룹과 구별했다. 사후사계에 대한 의식은 있었지만, 예술적인 조각품이나 장신구, 혹은 매장 의례의 증거는 없다. 이들의 도구는 거의 석기였지 크로마뇽인들처럼 뼈, 상아, 조개 혹은 사슴뿔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긴 창은 주로 동물을 찌르는 용도였지 던지지는 않았다. 크로마뇽인은 자신들이 만든 창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어깨와 손 구조가 진화하였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동굴에 오랫동안 거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곰이나 다른 동물이 살던 장소를 이들이 잠시 사용한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들이 현생인류와 지근거리에서 살았다면, 그들이 성적으로 접촉했을까?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성교했다는 증거는 유전학에서 밝혀졌다.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파보(Svante Paabo) 박사는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1∼3% 정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네안데르탈인들이 2만8000년 전쯤 모두 사라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문화를 통해, 그 이유를 역추적할 수 있다. 오늘날 유전학자들은 현생인류의 미토콘트리아 DNA를 분석하여 추적하였다. 그들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 있는 한 공동의 여성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이 여성은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l Eve)’라고 부르며 9만9000년에서 20만년 전 사이 언젠가에 생존했다고 본다.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 성교를 할 정도로 유사한 인류였다면, 무엇이 우리를 생존하게 만들었을까? 학자들은 기원전 10만년 전에 유럽으로 유입된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기원전 4만5000년부터 독특한 ‘상징문화’를 들여온 두 번째 새로운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어떤 전략으로 네안데르탈인을 소멸시켰을까? 네안데르탈인들도 원시적인 도구를 제작하였지만, 현생인류는 좀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다. 네안데르탈인이 활동하던 무스테리아 시대(60만 년∼4만5000년) 도구와 비교하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한 오리냑 문화에는 섬세한 도구들뿐만 아니라 상징예술이 등장한다.
현생인류는 자신들이 축적해온 문화를 ‘기억’이란 장치를 통해 저장하고, 그 기억에서 산출해낸 상징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소통의 도구로 사용했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은 <문화 기억>(2005)이라는 책에서 “기억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전자”라고 설명한다. 개인이 각각의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아져 집단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쳐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개인의 특별한 경험은 사회 안에서 그 경험이 수용될 것인지 아니면 거절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평가된다. 집단은 안전하게 구축된 기억을 통해 공동의 예술품을 만들어 향유한다. 이 예술품들은 그 공동체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상징물이며 개인은 그 물건을 통해 무언의 문화적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억문화 유적
?동굴 속 네안데르탈인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모형.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토바 화산폭발로 인해 네안데르탈인들은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 / 사진·중앙포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겐 오늘날 우리처럼 기억을 보장해주는 간편한 도구인 문자가 없었다. 이들의 소속감을 보장해주는 상징체계가 등장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상징체계는 공동의 기억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스토리다. 이들은 구전을 통해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자신들의 후손에게 들려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조상들과 자연에 깃들어 있는 신과 영웅에 관한 신화다. 기억문화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교육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 동일한 신화를 듣고, 춤을 추고 음악을 듣는 의례를 행한다. 이들은 의례를 행하는 신화적인 시간과 일상시간을 구분한다.
기억을 기반으로 등장한 상징문화는 서남부 독일의 오리냑 문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오리냑 시기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활동한 문화로 4만3000년 전부터 2만6000년 전까지를 지칭하는 고고학적 용어다. 오리냑은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 근처에 위치한 고고학 지명이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드와르 라트테는 오이냑을 발굴하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활동한 시기를 오리냑 문화라고 불렀다. 서남부 독일 홀레 펠스에서 발견된 피리, 비스너상, 그리고 사자인간상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억문화의 유적들이다.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 빠질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결혼, 장례식, 졸업식, 군대행진, 올림픽 게임, 기도, 멋진 식당에서 저녁식사 심지어는 어머니가 아이를 잠들게 할때도 그 사건을 중요하게 만드는 마술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시작하면서 음악의 신 뮤즈를 부른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전해들어와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신, 인간, 사랑, 우정, 그리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음유시인 노래의 장단과 곡을 맞추어 피리와 리라가 연주된다. 음악은 인간 삶의 중요한 일부이며 사람이 호흡이나 걸음처럼 인간 문화를 지탱해주는 기반이 되었다.
사실 음악은 인간의 언어보다 먼저 등장했는지 모른다. 음악은 인류의 보편적인 언어로,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로 만든다. 만일 어떤 고고학자가 한 악기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사용한 집단은 현생인류이며 복잡하지만 상징적인 소통을 했다는 증거다. 오리냑 문화의 중심엔 뼈로 만든 피리가 있다. 인간은 이미 3만5000년 전에 피리를 부는 연주자가 있었고, 그의 연주를 듣는 청중이 있었다. 독일 스바비 알브에 위치한 울름이란 도시 근처 홀레 펠스(Hohle Fels) 동굴에서 피리가 발견되었다. 이와 유사한 피리는 남서 프랑스 아브리 블랑샤드(Abri Blanchard)에서도 발견되었다.
2008년 9월 17일 독일 홀레 펠스 동굴에서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한 개의 피리와 여러 개로 부러진 세 점의 피리가 발견되었다. 이 피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난다는 흰목대머리 독수리의 노뼈를 다듬어 만들었다. 노뼈는 독수리 날개뼈를 이르는 용어다. 흰목대머리 독수리는 몸길이가 93~110㎝, 날개 편 길이는 234~269㎝, 몸무게 6∼13㎏이나 되는 몸집이 큰 조류다.
이 피리는 길이가 21.8㎝나 되고 지름이 8㎜다. 이 독수리의 앞다리 뼈 길이가 34㎝ 정도니 그 중간을 정교하게 잘라 다듬어 제작하였다. 이 피리의 표면과 뼈 구조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호모 사피엔스가 피리를 만든 제작과정이나 그 이면에 담긴 문화적인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이 피리는 다섯 개 지공이 있고 마우스피스는 V형태다. 지공 근처에는 작은 선들이 새겨져 있어 날카로운 석기로 구멍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너스상은 인류 예술의 탄생을 의미
?독일 스타텔 동굴에서 출토된 사자인간 조각상. 이 조각상은 공동체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역할을 했다. / 사진제공·배철현
호모 사피엔스는 마우스피스를 별도로 끼우지 않고 끝부분에 입을 대고 연주했다. 이곳에는 백조의 앞다리 뼈로 만들어진 세 개의 지공이 있는 피리도 발견되었다. 피리의 끝이 부러져 있어 원래는 네 개의 지공이 있으며 오늘날 플루트처럼 옆으로 불도록 마우스피스가 뼈의 끝이 아니라 위에 달려 있다. 그 외에도 지공이 세 개 있는 조그만 피리도 남아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입으로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신의 목소리를 자신들이 만든 도구에 담아 흉내 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신에게 가장 가까이 높이 나르는 흰목대머리 독수리의 뼈로 신의 음성이 담긴 소리를 내려 시도했다. 홀레 펠스에서 발견된 이 피리는 지공이 5개 달린 오음계다. 동양음악이 궁상각치우로 이루어진 오음계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이 음계로 하늘의 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이들이 피리를 불고 그것을 들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들에겐 이미 정형화된, 그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곡이 있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빙하가 수백m 덮인 혹독한 자연에서 사냥한 후, 동굴로 돌아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냥 무용담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혹은 몸집이 큰 맘모스나 사자와 같은 동물을 보고 느꼈던 공포 경험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우주 안에 생존하는 특별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홀레 펠스 동굴 안에는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주술적인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홀레 펠스 비너스(Venus of Hohle Fels)는 맘모스 상아를 다듬어 만들었다. 풍만한 여성을 묘사하여 비너스라는 용어가 붙었다. 이 조각상은 인간을 조각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 이 조각상을 발굴한 독일 튀빙겐 대학의 니콜라스 J. 코나르드(Nicholas J. Conard)는 이 조각상의 연대를 3만5000년 전으로 추정하였다. 이 비너스 상은 근처에서 발견된 사자-인간상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되었다. 오리냑 문화는 지금은 사라진 맘모스, 하마, 타르판과 같은 멸종된 포유류와 인간과 동물의 하이브리드 조각품들을 생산하였다.
이 비너상은 인류 예술의 탄생을 의미한다. 왜 인류는 이런 모양의 조각상을 만들었을까? 풍요로운 공동체 안에서 생존과 장수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이유에서 제작한 것 같다. 한마디로 비너스상은 풍요를 상징한다. 이 동상은 밀로의 비너스상과는 다르다. 몸집이 거대하고 가슴이 강조되었고 특히 성기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홀레 펠스 비너스상은 오스트리아에서 100년 전에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과 유사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자신들의 풍요를 보장해주는 상징으로 이런 형식의 비너스상을 수천 년 동안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이 동상이 제작되었을 때 유럽은 심각한 빙하기를 겪고 있어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여성이 아이를 낳은 후 풍만한 몸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이 동상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크게 다섯 가지다. ▷실제 여성을 그대로 묘사했다 ▷구석기 시대 가장 매력적인 여성의 상징이다 ▷풍요의 상징이다 ▷종교의례와 연관되었으며, 여자 사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원시인들의 조상을 상징한다. 우리는 왜 구석기 시대에 사냥채집경제로 연명하던 현생인류가 이 동상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학자는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은 유동성과 투과성
독일 남서쪽 알프스산 근처 울름(Ulm)이란 도시의 스타텔 동굴에서 1939년 8월 반인반수 동상이 하나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반발되기 며칠 전이라, 고고학자들은 1970년에 200개 조각으로 깨진 이 조각상을 조립했다. 이 조각상은 상아를 다듬어 제작했다. 현재는 30% 정도가 소실되었다. 1989년 조각상을 재조립하여 사자와 사람이 합쳐진 하이브리드라는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조각상이 남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만 엘리자베스 슈미트는 4만 년 전 유럽은 모계사회이기에 조각상이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이 조각상의 크기는 30㎝다. 사자인간상의 표면은 기름과 가죽으로 정교하게 닦였다. 학자들은 이런 수준의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적어도 320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개를 약간 들어올려 먼 거리를 응시하는 사자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의 왼쪽 팔에 새겨진 6개 줄은 무슨 표시인가? 왜 오른쪽 팔에는 그런 표시가 존재하지 않는가? 남성인가 아니면 여성인가도 논란거리다. 사자인간이 여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는 모계사회란 점을 강조한다. 이 당시 여성들은 집에서 음식을 하거나 아이를 돌본 것이 아니라, 맘모스를 사용하고 공동체 의례를 주관했다.
사자인간은 동굴 입구로부터 27m 떨어진 구덩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에는 불탄 흔적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구덩이에서 정교하게 장식한 사슴의 치아, 북극 여우의 앞니, 그리고 상아로 만든 목걸이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사제나 샤먼이 입는 의복에 달린 장식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구덩이는 샤만이 의복을 갈아입었던 장소였는지는 모른다. 사자는 구석기인들에게 용기와 힘의 상징이었다. 특히 사자인간의 배꼽은 강조되어 심하게 부풀어져 있다. 배꼽은 출산의 상징으로, 사자인간은 강력한 주술적인 힘으로 공동체의 풍요를 비는 신비한 동물이다.
사제는 현실의 세계와 죽음 너머의 사후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다. 그 경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경계에 등장하는 존재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이란 괴상하게 생긴 동물이 아니다. 괴물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몬스터(monster)’는 그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몬스터는 ‘손으로 넘어오지 말아야 할 타부를 가리키는 존재; 손가락으로 지칭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영원한 사후세계에 정결한 의식없이 들어오는 자를 쫓아내는 괴물이다. 스핑크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목졸라 죽이는 존재’라는 의미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유동성이며 다른 하나는 투과성이다. 유동성이란 자신과 자연, 특히 자신과 동물이나 식물이 유동적이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을 신봉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달리 구석기인들은 자연에도 힘이 있고 동식물에도 신적인 영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이들이 비록 생존을 위해 나무를 베고 동물을 사냥하지만,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들이 정기적으로 컴컴한 동굴로 들어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해 나오는 ‘엑스터시’ 즉 황홀경을 경험하였다. 사자인간은 이런 의례를 주관한 사제의 상징이자 의례에 참여한 예배자들의 진입해야 할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투과성이다. 구석인들은 죽음이 자신들의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나 네안데르탈인이 사후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여 무덤을 장식하였다. 구석기인들은 사후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는 상관없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현재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 동굴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려는 삶과 죽음을 여행하려는 투과성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사는 것이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인류는 비로소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그 공동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음악과 조각, 그리고 의례라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공동의 기억을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끈이 되었다. 4만5000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다. 그전에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를 수용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러나 7만5000년 토바 화산 폭발로 점차로 최악의 빙하기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남긴 음악과 조각, 그리고 의례는 기억이라는 매개체로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창의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