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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petros
전삼용 요셉 신부 2017,11,26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 몸을 괴롭혀야 측은지심이 발동한다.mp3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7년 가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복음: 마태오 25,31-46 몸을 괴롭혀야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마르티노 성인은 순교자가 아닌 분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입니다. 이처럼 그가 사랑받는 것은, 검소하게 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애쓴 자비롭고 온유한 모습 때문입니다만, 무엇보다도 그의 유명한 회심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에 큰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316년 무렵 헝가리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티노는 자신의 이름을 ‘전쟁의 신’ 마르스에서 딴 것에서 보이듯, 고급 장교로서의 삶이 기대되었고 또한 그 길을 걸었습니다. 마르티노의 인생의 변혁이 일어난 것은 그가 젊은 장교로서 말을 타고 성문으로 들어가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거지 하나가 성문 밖에서 벌거벗은 채로 덜덜 떨며 서 있는 것을 본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마르티노는 완전 무장의 상태에서 가진 돈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장검으로 군용 외투를 반으로 잘라 주어 거지의 몸을 감싸게 합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의 꿈에는 자신이 잘라 준 절반의 외투로 몸을 두른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구나.” 이 신비 체험 후 마르티노는 세례를 받았고 제대한 뒤 사제의 길로 들어서 프랑스 투르의 주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심판은 이생에서 가장 작은이들에게 어떻게 하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봐주었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께 한 행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우편의 양들이나 좌편의 염소들이나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이 예수님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왼편에 있는 이들은 사랑을 베풀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인 줄 알았다면 구원받기 위해 일부러라도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그렇게 일부러 한 선행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인 줄 몰라도 도와줄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지니고 살았던 오른 편에 서게 된 양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심판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에 달려있기 보다는 그 마음 안에 ‘측은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착하다’는 말은 바로 이 측은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생활은 잘 하지만 이 마음을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부르십니다. 측은지심은 상대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고통 받는 가장 작은이들을 당신 자신으로 느끼시고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이 곧 당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느끼십니다. 따라서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품으면 상대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내가 아프면 치료하고 배고프면 먹는 것처럼 이웃에게도 그렇게 아프면 치료해주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가난한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마르티토 성인은 예비신자였지만 이미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이였고 예수님은 그를 더욱 완전한 믿음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사악의 며느리감을 찾으러 종을 보냅니다. 종은 자신이 타고 온 낙타 10마리와 자신에게 물을 주는 여인을 하느님께서 자신 주인의 며느리감으로 내려주신 것을 알고 레베카를 데려갑니다. 종이 레베카에게 물을 청할 때 레베카는 그에게 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10마리의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습니다. 낙타 한 마리당 40리터의 물을 마시니 이 여인이 목마른 이들에게 가진 측은지심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측은지심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렇지만 왼편에 있었던 이들이 ‘왜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을 넣어주지 않았습니까?’ 라고 따질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측은지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느냐고 묻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마음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측은지심입니다. 그런데 그 측은지심은 내가 그 아이를 구해주어 그 부모에게 보상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요,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닙니다. 이 측은지심은 외부의 영향에 상관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 측은지심을 느껴 그가 아프면 내가 아프기 때문에 그 아이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바빠서 그냥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들이 우물에 빠진 아이처럼 죽어가는 데도 우리의 마음은 왜 무뎌졌을까요? 왜냐하면 이 측은지심은 내가 사랑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 사그라지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은 관심입니다. 만약 돈에 관심이 있다면 측은지심은 그 다른 관심 때문에 그만큼 힘이 약해집니다. 측은지심은 마치 불꽃과 같은데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마치 습기처럼 그 불꽃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하실 때 광야에서 유혹과 싸우셨던 이유는 바로 이 이기적인 관심과 욕망을 끊지 않으면 참 사랑이 우러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이 칼로 망토를 끊어버렸던 것처럼 그런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의 끊음이 없다면 내 안의 측은지심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티노 성인처럼 칼로 내가 세상에서 찾는 즐거움을 과감하게 끊을 줄 알아야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존경받는 이유는 그분만큼 측은지심이 발동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킨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부유한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습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 평생에 걸쳐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가난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과 평생토록 동고동락했기에 수녀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동료 수녀님들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수녀님은 분명 순교자였습니다. 수녀님께서 여행하실 때 이용하셨던 열차는 언제나 3등석이었습니다. 수녀님은 매일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로 흙먼지를 마시면서 빈민가를 돌아다니셨습니다. 수녀님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있었습니다. 엄청난 더위에도 선풍기 하나 없는 작은 방 좁고 딱딱한 철제 침대 위에서 주무셨습니다. 말로 표현 못 할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불평불만 한 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큰 고통을 겪을 때 마다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시겠지요, 지금은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순간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가난과 극기 없이는 측은지심이 발동하지 않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측은지심의 발동을 위해 육의 욕망과 싸워야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고통 받는 이들을 보며 측은지심이 생깁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면 굶어 죽는 이들이 보이지 않지만 다만 하루라도 굶어보면 눈이 맑아져 먹을 음식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이 보이게 됩니다. 측은지심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욕망으로 내 안에서 무뎌지고 감추어졌던 측은지심을 찾아내야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고아로 자라셨기 때문에 고아들만 보면 집에 들여 씻기고 먹이고 재워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아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극기하셨던 것처럼 일부러라도 내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측은지심은 주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우리가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빛입니다.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곳에 주님의 눈길이 머뭅니다. 주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와 하나처럼 느끼시지만 당신이 그러하셨듯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들과도 한 몸처럼 느끼고 사랑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