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시기
조용휘
겨울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매일 커다란 솥단지에 갱시기를 끓였다. 오전에는 아점(아침과 점심 사이)을, 오후에는 점저(점심과 저녁 사이)를 먹기도 했다. 한 끼 분량의 식량을 절약하려고 하루 세끼를 두 끼로 때우는 것이 다반사였다. 가끔 고염, 홍시, 고구마를 간식으로 보충했지만 식욕이 왕성했던 유년시절이라 늘 배가 고팠다. 특히 갱시기를 먹은 날은 배가 금방 꺼졌다. 밤에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일찌감치 불도 끄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옷깃을 여미는 겨울이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별미가 생각난다. 허연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두레상 위에 놓인 커다란 냄비. 우리 오 남매가 상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앉아 저마다 숟가락 위의 뜨거운 국물을 식히느라 분주했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후후 불어가며 갱시기를 한 두 숟갈 떠먹다보면 어느 새 이마엔 구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식량 절약하느라 먹었던 갱시기는 주로 경상도 내륙지방의 겨울철 음식이다. 식은 밥에 묵은 김치, 콩나물, 시래기, 고추장 등을 넣어 물을 붓고 끓였다. 어떤 때는 밥, 김치 외에 국수나 수제비를 넣었다. 먹다 남은 밥과 반찬을 전부 넣고 끓였기 때문에 ‘꿀꿀이 죽’이라고도 했다. 즉 돼지 먹이라는 뜻이다. 돼지가 먹는 음식을 사람도 같이 먹으니 어쩌면 돼지와 사람은 동등한 반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평소 아무거나 잘 먹는 식성 좋은 막내 동생을 꿀돼지라고 놀렸다.
가을추수가 끝난 후에도 흉년이 들면 우리 집엔 때 이른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중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제 때 월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립중학교는 국가의 재정 지원이 전혀 없었다. 농촌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농사 짓는 자녀이기 때문에 수업료 미납이 많았다. 쌀독 바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텃밭에서 키운 고구마와 무를 잘게 썰어 넣고 밥을 지었다. 부족한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노란 색깔의 고구마 밥은 달짝지근한 맛에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물기가 많은 무밥은 양념간장에 비벼 먹었는데도 질척거려 맛이 별로였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예전엔 먹을 것이 부족해 자주 먹었던 갱시기가 오늘날은 추억의 별미가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이 되면 갱시기 생각이 간절하다. 특히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엔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 주는 해장국으로 갱시기 만한 음식도 없다. 그럴 땐 아내에게 갱시기를 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한다. 아내는 밥과 김치, 시래기 등 각종 야채에 다진 양념, 돼지고기, 계란, 참기름까지 듬뿍 넣어 끓이지만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 옛날 시원함과 감칠맛 났던 어머니 손맛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처럼 몸과 마음이 추운 날은 유년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갱시기 생각이 굴뚝같다.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추위에 얼었던 몸을 녹여주었던 뜨끈뜨끈한 갱시기, 얼큰하면서도 알싸한 그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주 : ‘갱(更)’은 ‘다시’ ‘새롭게’ ‘고쳐서 라는 뜻이 있다. ’갱시기(更食)‘가 ’다시 새롭게 고쳐서 먹는다고 붙인 이름 아닐까, 라고 믿는 다. 갱죽은 ‘갱(羹)’+‘죽(粥)’이다. ‘갱’은 국, 국물이다. 국물이 있는 죽이 갱죽이다. 김치를 볶고 끓인 다음 식은 밥을 더하고 있다.
‘갱시기’, 밥이자 죽이다. ‘갱시기’는 갱죽 혹은 ‘갱식’이다. 식량이 부족하다. 게다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밥상에는 밤과 국 그리 고 반찬이 있어야 한다. 한식의 기본이다. 국거리와 반찬은 늘 부족하고 서글프다. 이때 갱죽은 아주 유용하다. 김치와 식은 밥은 늘 있다. 멸치를 부숴 넣는다. 곰삭은 김치를 넣고 팔팔 끓인다.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넣고 끓이면 끝. 갱죽이 된다. 별다른 반찬은 없어도 좋다.
(출처 :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은, 지혜로운 밥이자 죽 ‘갱시기’∥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작성자 Shinsby)
첫댓글 갱시기, 참으로 구수합니다. 그런 우리내 시절이 있었는 걸 , 현 아이들은 모를 거예요. 부모가 가르쳐 주어야지요. 역사는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닌 밥상머리에서부터요. 6,70년대의 우리네 생활을 돌아보게 하네요. 그렇지만 성공한 추억은 역시 행복이예요. 이렇게 잘 살게 된데는 남다른 지도자가 등장을 한 것이지요. 역사 통틀어 대한민국 시대만큼 발전적이고 다이나믹한 시대는 없었죠. 이젠 선진국을 리더하는 국가로 우뚝섰으면 합니다. 재미있는 수필들 아주 잼나요. 히히~ 일기장을 보노라면 지금의 안정된 생활이 행복하시지요?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