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원지역 답사 -
경상우도의 봄나들이
박경훈
답사 날 새벽은 온 집안이 종갓집 설날처럼 부산스럽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대강 정리해 놓지만 그래도 아파트 문을 나서면 아차! 하고 빼먹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특히 이번은 올해 첫 답사인데다 <흔적>2집을 배포한다는 공지를 했기 때문에 버스 두대가 꽉 찰 정도로 회원들이 쇄도했다. 그래서 챙길 것도 많고 준비할 것도 많은데, 두어달 쉬는 동안 녹슨 손발이 어둔하기만 한다. 뒤죽박죽 되는대로 챙겨서 가까스로 출발지에 도착하니 예고없이 안 오신 회원이 일곱 분이나 된다. 공교롭게도 모두 회비를 입금하지 않고 전화로 예약하신 단체 분들이다. 씁쓰레한 기분은 잠시뿐, 인원 점검에 이어 떡과 우유, 패찰, 답사자료 배분에 들어가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아직 어둠살이 머물고 있건만 고속도로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차량 행렬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행락의 열기가 일요일을 맞아 대폭발을 한 것 같다.
차량이 두대가 되면 바빠지는 건 원장님이시다. 현장에서는 해당 유적유물에 대한 각론적 해설을 하시지만 그 지역에 대한 총론은 차안에서 강의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 차를 왔다갔다 하셔야만 한다.
우리가 가는 곳은 창원시다. 마창진(마산, 창원, 진해)를 포함하는 지금의 거대 창원시 중에서 불모산, 천주산, 장복산, 정병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 한 면만 바다로 열려 있던 개발 전의 창원지역을 답사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일본으로 진출하려 했던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는 유적, 몽고정이 있고, ‘가고파’ 이은상의 고향이고, ‘울고 넘는 박달재’ 등 4500여 곡에 달하는 대중가요를 작사해서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반야월 선생이 태어난 마산시가 창원보다 인구도 많고 더 큰 도시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창진이 통합되면서 왜 이름이 마산이 아닌 창원시로 되었는지 크게 궁금했었는데 원장님의 강의를 듣고 의문이 풀렸다. 지금의 마산이 고려시대에는 회원현이었는데 조선이 건국하면서 회원현과 의창현을 합쳐서 창원부로 승격했다는 것이다. 마산이 개항한 것은 창원이란 지명이 생기고 나서 500년 후인 1900년, 러시아 영사관이 들어서면서라고 하신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합방이 되자 러시아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마산항을 폐쇄시켜버리고 대신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했다는 것이다. 한산한 어촌으로 변해버린 마산이 재개항 한 것은 해방 이후의 일로, 특히 6.25 때 국군병참기지와 의무사령부가 마산에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구가 달구벌국이었던 2000년 전 골포국으로 정체가 드러나는 창원의 긴 역사 전통을 계승하고, 경상우도의 거점도시로서의 명맥을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로 경남의 새 도청소재지 이름을 창원시로 한 것은 당연한 처사인 것 같다.
아침 안개 속으로 입김이 빠르게 흩어지는 영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이번 답사는 구마고속도로로 내려가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통해서 돌아오는 긴 나들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를 한바퀴 도는 장정인 셈이다.
국내 최초의 근대적 개혁도시란 명망과는 다르게 좁은 길을 요리 돌고 조리 돌아 도착한 곳이 창원 상북초등학교다. 왜 도심 속으로 들어왔는지 영문도 모르고 원장님을 따라 교정으로 들어가니 자그마하지만 야무지게 생긴 삼층석탑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초등학교 소풍 때 찾기 힘든 곳에 꼭꼭 숨겨둔 보물을 찾아낸 것 같아 으쓱한 기분이 든다. 원래는 봉림산 봉림사 금당 앞에 세워진 탑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부산까지 갔다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구출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그후에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을 1960년 창원교육청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원래는 2층 기단이었겠으나 1층 기단은 사라지고 없다. 2층과 3층 몸돌과 상륜부는 뒤에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 분명하다는 원장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돌의 재질과 색깔과 조각 수법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특히 2층 몸돌은 중앙에 문짝 형으로 가로가 긴 직사각형의 홈이 새겨져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탑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석공이 몸돌의 기둥을 표시한다는 게 그만 소양 부족의 소치로 천하에 둘도 없는, 유일한 모양을 연출하고 말았을 것이란 원장님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증을 옳게 받지 못한 채, 비전문가에 의해서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복원된 문화재가 부지기수일거라는 걸 생각하니 괜스레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도 모르는 부아가 치민다.
녹은 눈으로 질퍽해진 운동장을 가장자리로 돌아 나와 봉림사 터 입구로 향했다. 오늘 강의를 해주실 신라대학교 배상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배 교수님은 고성답사와 김해답사때 해설을 맡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 답사단과는 이미 친숙한 사이다.
봉림사지
응달엔 잔설이 쌓여 있지만 봉림사지로 이어진 좁은 산길은 촉촉하게 젖어 있어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촉이 마치 봄꽃을 밟는 것 같이 가뿐하다. 상큼한 향기를 내뿜는 대숲 터널을 지나 항아리 속 같이 오목한 봉림사터에 도달했다. 개인이 관리하고 있는 절터에 허락을 얻어 식장을 만들고 <흔적>2집 출판 기념식을 조촐하게 거행했다. <흔적>2집 출간에 수고를 많이 하신 소진 선생님(편집위원장)과 박종안, 파정 선생님께 공로패를 드릴 때는 회원 모두의 박수소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메아리로 되돌아 왔다. 한마음이 되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한국선종 초기에 형성되었다는 9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본산인 봉림사터에는 지금 문화재 안내판과 발굴 때 출토된 기와 조각 무더기와 부도탑과 비석을 옮겼다는 표지석만 서 있고 나머지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예전엔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동네까지 바다였다고 한다. 사하촌에 배를 대고 산으로 올랐을 그때의 봉림사는 산문의 본산답게 화려한 가람에 수많은 대중들로 늘 붐볐을 것이다.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사찰이 사라지자 사람도 흩어지고, 그 흔적인 유물들도 이산가족 신세가 되어 떠돌고 있다. 탑은 상북초등학교에,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부도비는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한다. 다시 만나 옛날의 영화를 되찾을 날이 올거라는 기대는 나만의 사치한 생각은 아닐것 같다.
진경대사부도비에 의하면 봉림산문 개산조인 진경대사 심희(855~923)는 김유신의 후손으로 9살에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787~868)를 찾아가 19살에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혜목산이라면 2009년 27회 답사 때 탐방한 여주 고달사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뜻한 봄햇살이 꽃잎에 쏟아지던 그때의 정경이 뇌리를 스친다. 고달사를 찾아온 참배객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산을 이루었다는 ‘신털뫼’에서 하차해서 넓디넓은 고달사지를 둘러보는 답사단의 긴 행렬이 마치 사막의 모래산을 오르는 대상의 행렬 같았었는데.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라의 수명이 경각에 달했던 890년 경 창원, 김해 지방의 세력가 소(김)율희(신라시대에는 ‘김’을 ‘쇠’로 발음했을 가능성)가 봉림산에 큰 절을 지어 진경대사를 청하니 그 제자가 500명이었다고 한다. ‘모든 법은 공하고 온갖 인연은 고요하고 세상살이는 뜬구름’이라 했다는 진경대사의 열반 게송을 가슴에 안고 답사단은 봉림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나가기로 했다. 해발 290m밖에 안되는 산길이 생각보다 길었지만, 봄의 향기에 가득 취해 힘들다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적셔주는 시원한 공기와 흙냄새! 이 또한 우리 답사회의 또다른 맛이리라.
성산패총
창원서 제일 정갈하다는 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성산패총(조개무지)으로 향했다. 패총이란 김해 패총에서 보았듯이 고대인들의 쓰레기장이다. 인간이 가장 쉽게 사냥할수 있는 것이 조개다. 조개를 채취해서 먹고 껍질을 일정한 장소에 버린 것이 지금의 패총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패총은 100 여 곳이 된다고 한다. 성산만 하더라도 패총이 세 군데서 발견되었다.
성산패총은 창원 기계공단안에 섬처럼 떠있는 녹색공원지대다. 1974년 창원이 기계공단으로 지목되었을 때 공사에 필요한 토사를 높이 50m밖에 안 되는 성산을 까뭉개서 채취하고, 평지로 만들어 공단 용도로 사용한다는 꿩먹고 알먹는 계획을 세웠다. 발굴조사가 시작되자 패총 밑바닥에서 1cm 두께 로 삼한시대 철을 생산해냈던 야철의 흔적이 나타났다. 공사를 강행하려는 공단 측과 발굴보존 해야 한다는 여론을 환기시킨 언론사의 대결이 팽팽히 맞섰다. 이때 공단현장을 시찰 나온 박정희 대통령이 야철지를 비롯한 성산패총 일대를 사적지로 지정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려 삭막한 공단 한가운데 녹색의 허브로 남게 된 것이다. 불모산에서 캐낸 철광석을 녹여냈던 야철지, 이렇게 보면 창원 기계공단은 삼한시대에 이미 예견된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야철지가 발견됨으로 해서 삼한시대 가야가 철을 생산해서 중국과 일본에 수출했다는 역사기록을 뒷받침 하게 되었다니 생각할수록 소중한 유적으로 와 닿는다.
마치 학교 체육관처럼 생긴 건물 속으로 들어가니 중간은 통층으로 해놓고 위층 가장자리에서 유적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충북 보은에 삼년산성의 성벽처럼 수직으로 깎아낸 밑바닥 경사진 면에 쇳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다. 여기서 중국 한무제 때 사용했던 오수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것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중국과 교류했다는 증거물인 것이다. 이외에 패총은 쓰레기장이다 보니까 부서진 토기, 화살촉, 칼, 당나라 화폐인 개원통보등 많은 유물이 동시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불모산 성주사
우리민족의 자긍심의 현장인 패총을 뒤로 하고 창원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불모산 성주사로 갔다. 성주사는 최근 시왕전 복장물에서 ‘불모산웅신사’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노인들이 ‘곰절’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알게 하는 증거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있었던 절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지으려고 목재를 다듬어 놨는데, 곰이 나타나 하룻밤 새에 5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다 옮겨 놓았는데, 이를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짓고 곰의 공덕을 기려 ‘웅신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다른 하나는, 산에서 내려온 곰이 스님들의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흉내낸 공덕으로 사후에 인간으로 환생해서 이 절의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이 되었다고 한다. 미련했던 이 부목이 아궁이에 불을 계속 때고 있을 때 조실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쳐서 확철대오시켰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곰절‘이라 한다는 것이다.
성주사「사적기」에는 신라43대 흥덕왕때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무염국사가 성주사를 지어 불력으로 왜구들을 물리쳤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성주산문의 본산인 보령 성주사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성주산문의 개산주 무염국사와 관련시킨 것으로 믿기 어렵다,
향내보다 분 냄새가 진동하는 성주사를 떠나 철새들의 낙원인 주남저수지로 향했다.
철새들의 낙원 주남저수지
낙동강 하류의 배후습지 주남저수지는 중북부 지역에 비해 결빙기가 짧아 조류가 월동하기에 유리해서 1980년대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겨울 철새 도래지로 명성을 날렸다. 사계절 먹이가 풍부하고 서식 공간이 넓어서 먹이 사냥이 수월하기 때문에 검독수리, 독수리, 매, 말똥가리, 참수리, 물수리, 쇠황조롱이, 흰꼬리수리, 흰죽지리 같은 사라져 가는 맹금류가 살아갈 수 있는 근거지이다.
지금은 주변 지역의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먹이터와 쉼터가 감소하여 과거에 비해 도래하는 철새의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매년 10월부터 수만 마리의 겨울 철새가 찾아오고 있는 곳이다.
갈대와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얽은 위장막 속에서 망원경으로 철새들의 움직임을 탐사하는 멋진 모습을 상상하고 이번 답사에 참여한 학생들도 적잖을 텐데, 이를 어쩌나! 막상 와보니 철새 대군들은 다 떠나고 미처 떠나지 못하고 처진 놈들만 몇 마리씩 무리지어 꿱꿱 소리 지르며 왔다 갔다 할뿐, 저수지는 휑하니 비어 있다. 철새 떠난 호수를 바라보며 축방 위를 걸으니 귓전을 때리며 지나가는 갈대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저절로 몸을 웅크러지게 한다. 쌍안경에 보리, 콩, 호박씨 같은 먹이를 준비해온 어린 학생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어서 겸연쩍기 그지없다.
바람이 조용한 둑밑 공터에서 행운권 추첨을 끝내고나니 노루꼬리처럼 짧은 봄 햇살이 황혼으로 짙게 물들었다. 싸늘한 저녁 공기에 모두들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봉림산을 가로지른 강행군의 여독이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실내등마저 꺼버린 차안은 바다 속 같은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