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크아트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무시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 구성된 미술로서, 미국에서 이 운동의 기원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의 ‘콤바인 combines’ 혹은 결합시킨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우센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붙이기 시작했다.(워홀 29)
일반적으로 쿠르트 슈비터스가 사용한 콜라주 기법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 라우센버그는 존 케이지 철학의 영향으로 이를 시작했다.
존 케이지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 기법을 활용하였으며 이후 타블로tableaux와 아상블라주Assembladge로 이어졌다.
타블로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판지와 나무, 금속, 실 등을 모아 제작한 구성물과 1912년부터 종이를 풀로 붙이는 파피에 콜레에 붙인 명칭이다.
콤바인 회화에서 이루어진 사진의 활용은 멕 아트mec art의 개척자들에 의해서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멕 아트는 기계미술mechanical art의 약칭으로 1964년 자케가 자신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설명하면서, 파리에서 파리에서 사용되던 은어인 멕mec을 동음이의어로 사용한 데서 기인했다.
사진 기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합성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미술을 말한다.
라우센버그는 1950년대 중반 사진을 포함한 실제 사물을 채색된 화면에 붙이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콤바인 회화였다.
그는 콤바인 회화로 옮겨 가기 전 붉은색 콜라주 구성을 다수 제작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신문조각, 끈 사진, 녹슨 못 등과 같은 실제 사물들은 회화 표면을 형성하는 뿌려진 물감과 결합되었다.
<샤를렌>(워홀 28)은 콤바인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라우센버그가 3차원적인 실제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 온 환영적인 공간을 부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태도는 작곡가 존 케이지의 철학과 유사하며 그가 케이지로부터 직접 받은 영향이었다.
또한 동시적이고 다원적인 암시성을 지닌 이미지로 “관람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원한 점에서도 케이지와 공통적이다.
1950년대 말 라우센버그는 잡지나 신문의 그림이나 사진을 전사하기 위해 프로타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프로타주frottage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개발한 자동주의 기법 중 하나로 놋쇠 기념패를 탁본하는 과정과 유사한 이 방법은 막스 에른스트가 고안했다.
그에 의하면 1925년 8월 10일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했다.
라우센버그의 다양한 물질을 사용한 콤바인 회화와 3차원적 작품은 미술을 새로운 어휘, 새로운 문장 구성으로까지 발전시켰으며,
이는 입체주의가 가속화하고 확대시킨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고,
오브제 조각과 콜라주는 피카소의 초기 조각(폴록 18)과 다다이스트(뒤샹 93), 뒤샹(뒤샹 187), 슈비터스(뒤샹 231)의 작품에 의해 설정된 방향을 유지한 것이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정크아트라고 부른 후 존 체임벌린, 로버트 맬러리, 리처드 스탕키에비치, 마크 디 수베로, 리 반터쿠 등이 금속조각, 망가진 기계부품, 쓰다 남은 목재 등으로 제작한 조각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정크아트는 좋은 재료를 고집하는 전통에 대하여 반대하고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사물들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195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었으며, 미국의 정크아트는 타피에스를 비롯한 여러 스페인 미술가들의 작업과, 부리, 아르테 포베라 등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업과 유사했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70년에 처음 사용한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계가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했다.
이 명칭은 버려진 물질로 작품을 제작한 데서 비롯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 및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운동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의 예술가들은 전쟁 후 버려진 폐품과 쓰레기로 작품을 제작했다.
라우센버그와 그 밖의 예술가들은 폐품과 쓰레기를 이용할 때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우유병이나 연재만화책과 같은 일상용품이 급속히 폐품이나 쓰레기로 바뀌게 되는 속도감을 암시하는 것 이외의 정서적 의미는 전혀 포함시키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정크조각이나 부리와 타피에스의 작품은 쓰다버린 기계부품, 못쓰게 된 들보 재목 및 녹슨 금속, 찢기고 더렵혀진 천 조각, 산업화된 도시 생활의 일반적인 파편들을 사용하여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정크아트에서 체임벌린과 디 수베로의 작품은 유명한데, 두 사람 모두 산업용 재료를 사용한 입체주의 조각가 앤소니 카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인디애나 주의 로체스터 태생 미국인 조각가 존 체임벌린은 원색 에나멜을 칠한 자동차의 몸체를 일그러뜨려서 추상 아상블라주 조각을 제작하여 유명해졌다.(워홀 55)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는데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의 네오다다 미학과 다르지 않았다.
체임벌린의 조각은 마치 회화에서 빌렘 드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가 분출하도록 했다.
정트아트에 있어 도시와 관련된 주제는 드 쿠닝의 대중적인 이미지와 현대사회의 대량생산품에 대한 관심에서 그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1927~)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1957년 시카고의 웰스 스트리트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대부분 쇠 파이프로 제작된 초기 조각은 데이비드 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50년대 말 그는 버려진 자동차의 금속 부품을 구부리고 용접한 작품을 제작해 정트아트에 속하는 예술가로 분류되었다.
그가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인 논평보다는 완성된 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었지만, 재료의 원래 출처가 작품 속에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의 표현적 에너지는 액션 페인팅과 비교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우레탄과 유리 섬유 같은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아연 도금한 철과 알루미늄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1960년대에 그는 정크아트의 대표적인 금속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작품은 미국과 유럽에 널리 전시되었다.
상하이 태생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1933~)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 조각을 제작했다.
디 수베로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인 원리를 반기하적인 균형으로 나타냈다.(워홀 56)
1997년 퀸즈 뮤지엄은 개관 25주면 기념전을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디 수베로의 작품을 포함시켰으며 정크아트에서의 그의 위치는 늘 당당했다.
디 수베로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1957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린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강렬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제작했지만 1960년대에 철거된 건물이나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건들로 기념비적인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면서 정트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디 수베로는 커다란 나무막대들과 거칠고 두꺼운 판자 주위로 불안하게 비대칭적으로 자리잡은 구조물에 종종 간이의자를 집어넣어 관람자를 작품의 공간과 긴장 상태 안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발하여 베네치아로 이주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에 정크아트 예술가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정크 조각을 선보였다.
짐 다인(1935~)도 목수가 사용하는 연장들을 캔버스에 매달았는데 그에게 연장은 “우리의 손”과 같았다.(워홀 57)
일반적인 물질을 주제로 사용한 다인은 말했다.
“내가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들을 느낌의 단어들처럼 여긴다. ...
나의 작품은 자전적이다.”
그에게 연장이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이유는 할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에 어릴 적 할아버지의 연장을 갖고 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며,
연장이 자전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버지가 고향 신시내티에서 철물점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신시내티 대학, 보스턴 미술관학교, 오하이오 대학에서 수학한 다인은 1959년 저드슨 화랑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와 함께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다인은 미국 팝아트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회화적 특성이 강조된 배경과 끈, 잔디 깎는 기계, 가전제품, 세면대 등의 실제 사물들을 대비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9~60년에 올덴버그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해프닝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었다.
다인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프로세스 아트 또는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그리스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 예술가 루카스 사마라스(1936~)도 평범하지 않은 어지러운 쓰레기를 나무상자 안에 아상블라주하여 고전주의 감각에 일치하는 형태들로 제작했다.(워홀 58)
사마라스는 상자 안에 물질을 채워넣기를 즐겨했다.
어려서부터 금지된 물질과 에로틱한 물질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상자들은 변태성욕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예술이란 고요한 느낌을 깨뜨리는 것이며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작품에는 다다의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사마라스는 1955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고, 1955~59년 럿거스 대학, 1959~62년 컬럼비아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공부했다.
예일 대학과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50년대 말 석고에 적신 넝마로 인물상을 제작했으며,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팝아트의 도상을 결합한 파스텔화도 그렸다.
1960년대에는 수천 개의 핀, 털실, 못 등의 혼합매체를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실험적인 아상블라주 작업을 선보였다.
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