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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화백 백영수 수상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를 읽고(2011.9.24)
청당(靑唐) 백영수(白榮洙)
의정부시 행복소식지 10월호에 의정부 이사람이라는 코너에 첫 소개되는 인물로 선정된 원로화백 백영수 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다. 20년 동안 일본에서 자랐고 30년 동안 한국전쟁 등 격변 속에서 남한사회에 발붙이고 살다가 30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작가로서 활동해 모자상 이라는 작품세계와 작품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현재 의정부시 호원동 연립주택 숲속에서 200여평의 대지 위에 70대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집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주는 편안함은 가족이 주는 편안함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격변의 시기에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온 백영수 화백의 잔잔한 미소에서 삶의 여유를 발견한다.
생활수기 형태로 쓰여진 글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서양화가 청당 백영수는 192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본 오사카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며, 1945년 귀국하여 목포고등여학교 미술 교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해방 후 최초의 국전이었던 미 군정청 문교부 주최 조선미술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한국현대미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해방 이후 순수하고 분명한 조형의식을 바탕으로 한 추상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특히 백영수의 작품들은 타원형의 둥근 얼굴과 정다운 녹색을 위주로 어린아이의 순진함과 단순하고 평온한 느낌이 특징적이며, 일관되게 가족의 모습을 통해 지상에서 유일하고 진정한 행복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1977년 이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요미우리 아트센터의 전속 계약 화가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 밀라노 파가니 갤러리 초대전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100여 회에 이르는 전람회를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초대전으로 갖는 등 세계적인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Salon Comparaison Realite Second 회원
서문 세월이 가도 그리움은 남아
1.창호지에 쓴 연문(戀文)
지리산의 생활은 내게 여러 가지 면에서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언제나 둥지 안에서 어미새의 보호를 받고 있던 새끼새가 처음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경험함직한 일들처럼 갑자기 밀려왔던 많은 일들을 지리산 맑은 산공기에 용해시키며 인간관계의 심오함을 정리하고 사색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눈 내리는 화엄사 길
1946년12월30일 : 지리산은 공기도 맑고 경치도 좋아 그림 그리기에 좋을 것입니다. 조용 할 때 한번 와서 쉬어 가십시오.
○귀국
부두에서 일주일을 노숙하며 배 타기를 기다렸다. 넘실대는 밤바다를 보며 그래도 20여 년 동안 정들었던 일본을 떠나는 섭섭함과 한국에서 있을 새 출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로 뱃전에서 밤을 지새웠다. 여수항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너무나 빤하고 좁은 곳이라 내가 일자리를 찾고 몸 붙일 곳이 못 될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를 물어 목포로 가게 되었다.
23세에 목포고등여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다. 그림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목포에서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그 후 녹영회(綠影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두 차례의 단체전도 가졌다.
○배신
1946년 목포를 떠나 광주로 이사를 했고, 시인 이동주의 소개로 시내 중심가에 하숙방을 하나 빌려 광주에서의 첫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대학교에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과 설립(천경자, 윤재우, 백영수)
○구층암(九層庵)
겨울 지리산은 특히 더 아름답거든요. 방학도 되고 해서 이때쯤은 꼭 오실 줄 알았어요. 내 집처럼 생각하며 편히 계십시오.
1947년 새해 아침을 맞으면서 나의 구층암 생활이 시작되었다. 구층암의 생활은 더없이 깨끗하고 편안하였으며 어떤 해방감마저 느끼게 하였다.
며칠 쉬면서 여러 스님들의 자상한 보살핌으로 아팠던 마음, 놀란 마음, 찢겼던 마음이 아물고 조금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내가 구층암에 온 것이 잘한 일로, 기쁜 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지리산 호랑이
영험한 호랑이가 천불당을 돌며 염불하는 스님과 함께 불공을 드렸다는 등의 그런 일들이 나의 삶을 싱싱하게 가꾸어 주고 있었다.
○눈이 큰 아이
목욕하던 아이의 고한이 훌떡 벗겨지고 아이는 숨을 거두었다.
○유년 시절
미즈하라 기요시(水原淸)
사쿠라가와 소학교, 이마미야 중학교를 거쳐 오사카 미술학교
그날처럼 흠씬 얻어맞은 매는 내 평생에 다시 없었으며 그 무서웠던 매 때문인지 그날의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정말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다.
○오사카 미술학교 시절
오사카 미술학교는 교토와 오사카 중간에 있는 고뎅야마라는 산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시절 나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는데, 하루에 크로키를 200장씩 그렸다. 전차간과 식당, 어디에서든지 손을 쉬어 본 적이 없었으며 학교에서도 아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날이 저물어 그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렸다. 여러 단체전에 입선하게 되고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자, 나는 꿈에도 그리던 야노 교손 교장댁에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내 일생에 참으로 기쁜 날이었으며 또 내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창호지에 쓴 戀文
이것이 바로 본사에 계신 일본 불교전문학교 출신 스님이 보내 온 연애 편지랍니다.
1947년4월 나는 한번도 가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을 찾아보려는 마음에 짐을 챙겼다. 스님은 나도 머리 기르고 세속으로 가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나를 전송해 주었다.
2. 그렇게 흘러간 언어들
1947년 26살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첫 화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내게는 참으로 많은 행운이 따라서 좋은 벗과 선배를 쉽게 만나 사랑을 받았으며, 유엔 공보관이었던 알베르그랑은 내게 크나큰 변화를 안겨 주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황금기이며 몸도 마음도 전성기였다. 또 우리나라 문화계에서도 가장 바삐 성장한 시기였다.
○심형구와 수제비
1947년 이화여대 미술과 설립 심형구(김자경의 남편)
○여운형과 현수막
1947년8월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 이 전시회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국제보도라는 잡지의 화보 때문이다. 우연히 본 그 화보에는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장례 행렬이 화신백화점 앞을 지날 때 찍은 사진에 내 전람회 현수막이 찍혀 있었다.
○조선미술전
배운성 씨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파리 유학을 했던 분이고, 그 무렵 이종우씨가 파리 살롱 도돈느에 출품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과도기의 물결
미국풍 -남대문 시장 노점판엔 미제 과자니 술이니 옷감이니 유행 잡지니 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알베르그랑과 나
김헌규 박사-덕수궁 관리하던 미24군단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유엔 한국위원단과 한국 사람들과의 교량 역할
알레르그랑(유엔 한국위원단 공보관)-김구 선생이 선물한 포도주 다 마심
1948년3월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을 정리하여 유엔 한국위원단 초대로 나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것이 덕수궁 석조전(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문총(文總) 창립과 플라워 시절
플라워에서는 월탄 박종화, 소설가 염상섭, 소설가 계용묵, 시인 정지용, 시인 조지훈, 시인 구상, 박목월, 모윤숙, 서정주, 시인 공중인, 소설가 김동리, 김송, 박계주, 평론가 조연현, 곽종원, 백철, 이헌구, 시인 박인환, 손소희, 전숙희, 화가 김환기, 도상봉, 이종우, 심형구 씨등이 자주 얼굴을 비쳤다.
초대 문총회장으로 춘곡 고희동씨가 선출되었고, 문학가협회장으로 월탄 박종화씨가 선출되었다.
○박목월과 구상-플라워에서 심하게 다툼
○플라워의 벽화 조지훈
천성으로 머리를 숙이지는 않는 조지훈을 우리는 플라워의 벽화라고 불렀다. 플라워의 문을열고 들어설 때 그 머리가 큰 플라워의 벽화가 자리에 보이지 않으면 왠지 온 방안이 비어 있는 듯 허전해지곤 하였다.
○문간에 서 있는 서정주
서정주는 언제나 흰 두루마기에 신사모인 듯한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반쯤 취한 얼굴에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플라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인 장만영- 자살을 강요한 시인
○간혹 들리는 소문
○이러면 안되는데.....
○자연장(紫煙莊)-클래식 음악 다방
배인철이 한 여인과 함께 남산에서 사랑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총으로 그들을 쏘았다. 시인 배인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여인은 관통상을 입었다는 기사였다. 김현경이 바로 그때 배인철과 함께 있던 여인이란 말에 나도 조금 놀라워했다.
당시 김현경은 이화여대 국문과에 재학중이었다.
○콜롬방과 돌체
돌체다방과 콜롬방이라는 제과점
○대낮이 달이 떴네
내가 수화 김환기씨와 근원 김용진 씨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겹쳐서 생각나는 것은 그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함이 지긋했던 탓인 것 같다.
○김환기의 삽화
○월탄의 작은 키
○명동 소야곡
○김소운의 유혹
○나무꾼 이무영
○초특급 취사
○검은 머플러의 마돈나
○구겨진 미술개론-1950년 갑진문화사 출간후 30년이 흐른 때 홍익대학 학보에 소개되다.
○새벽에 찾아온 이인성
○청계천가에 버려진 그림
3 성냥갑 속의 메시지
끔찍한 6.25 전쟁 속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허덕였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나는 좀 더 현명한 눈으로 사회를 볼 수 있는 지혜를 배웠고, 내 나라의 소중함을 절실히 체험했다. 또한 해는 지고 다시 뜨는 진리도 터득할 수 있었다.
○적막한 도시-1950년6월 백영수 화백 29세
○청룡의 끈끈한 뱃속 -고급술집 청룡-북한군 장교들이 많이 출입
○산부인과-충무로2가에 있는 산부인과에 며칠 묵었다.
○성냥갑 속의 메시지
인천상륙
○말없이 그리고......
붉은 완장
○내가 본 문인들의 프로필
1950년9월28일 서울 수복
조연현-문예지에 실린 내가 본 문인들의 프로필 이란 코너 때문에 끌려가지 않아
○가람처럼
○이인성의 죽음- 파출소 앞 순경이 쏜 총에 죽음
○낮 주인 밤 주인
○악야(惡夜)와 춘향전
영화감독 신상옥이 멋부리고 다닌 시절 (영화감독 홍성기,배우 황남씨와 더불어)
김광주의 단편소설 악야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감독 이규환씨 춘향전 기획 - 서울 국도극장에서 상영 -엄청난 상영 기록
○피난 길
4. 청마(靑馬)따라 걸은 지름길
피난이라는 어려움 속에 인간애는 크게 꽃을 피웠고 나도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떤 조건아래서도 힘껏 나래를 저어 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들 벌거숭이 상태였던 이 피날 시절, 우리는 서로 아끼고 위로하며 다가올 날들을 설계했다.
○쫓겨난 화가
세찬 바람속에 흔들리는 트럭을 타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처음 문화인이 자리잡은 곳은 광복동 입구에 있는 에덴다방으로 문총의 조연현 외 김동리를 위시한 많은 문학가들이 모였다.
○저승 문턱에서의 하룻밤
김창섭에게 속아서 해군 소령부인이 방 얻으라고 준 돈 다 날림. -김창섭의 집에서 잔다고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공동묘지 한복판
○다정한 벗 두선
피난 시절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윤두선이다.
○백치의 아름다움
○사람이면 대답하고.....
○금강의 가난한 예술가들
당시 사회는 오랜 전쟁으로 기진맥진하였고 부산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로 그득하였다.
○필승각의 잊지 못할 위문 공연
부산 피난 시절의 많은 모임 중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씨의 필승각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모윤숙씨가 김활란 박사와 실무진 사이를 뛰어다니며 모든 일을 추진하였다. 모임이름은 필승각. 음악부장 임원식, 미술부장 백영수, 방송부장 이계원, 강연부장 유치진. 춘곡 고고희동
○철없는 대결
임원식과의 싸움 -금강다방에서 멱살을 잡고
임희숙-이대 약학과 출신 대단히 우아하고 청초한 미인
○빗방울의 오케스트라
빗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재빠른 솜씨로 깡통을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에 정확히 갖다 놓았다. 그 깡통이 예닐곱 개쯤 되었다. 곧이어 적막한 창고 안엔 어느 우주의 음악이 연주되는 듯 통탕 똑 통탕 딱 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도해
나는 해군 종군 화가단에 있었다. 이종우, 김환기, 강신석, 남관, 양달석, 그리고 조각가 윤효중 등이 멤버였다.
○신사실파와 굴뚝
이중섭은 두 장의 작은 그림을 출품하였는데 세워져 그린 두 장의 화면에 굴뚝을 똑같이 그려 나란히 출품하였다. 당시 이중섭은 어린이와 고기와 소 같은 것을 많이 그려/t고, 그런 그림들을 금강다방에 가져와 보여 주곤 하였다.
신사실파 동인은 서울에 환동하여 제4회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었다(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열릴 예정이었다)그러나 수화 김환기의 파리행이 급진전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밤에 울던 중섭
밤마다 미안해서 울었다는 이중섭의 이야기
○윤효중의 충무공 앞에서
○깨진 연회장
김환기가 서성찬의 얼굴을 가격
○럭키 스트라이크
미스터 부르너: 미국 공보원의 문정관
미제 담배 럭키 스트라이크
부르너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사온 그림재료: 두꺼운 전지 몇 백장과 팔레트, 오일박스, 물감, 기름, 붓 그리고 아사 캔버스 한 두루마리 등 한 지게 분량
○비에 젖은 꽃다발
전봉래의 자살 (스타다방이라는 지하 음악다방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
바하의 음악소리가 들린다.
아무렇지도 않다.
친구들이여-
문인장으로 거행 - 장례식장에서 평론가 윤동주는
너! 건방지다 자식아! 자살이 뭐야? 지금 같은 세상에 자살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 근데 네가 뭔데 자살해!
이 전봉래의 이야기는 후에 조향씨가 약간 각색하여 구관조(九官鳥)라는 소설로 소개한 바 있다.
재주 있고 번쩍이는 마음의 눈을 가진 젊은 시인 전봉래의 허무한 죽음
○방명록
당시 우리는 방명록에 생활을 쓰고 비평을 쓰고 그림을 그려 놓고 하는 후한 여유와 푸근한 겸손이 있었던 것이다.
○김소운의 화술(話術)
황홀한 눈빛으로 김소운씨 얘기를 듣고 있던 채양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청마(靑馬)따라 걸은 지름길
○제2국민병
○불타는 갈대
○정든 부산을 떠나서
5 삶은......그리고 떠나 가는 것
환도하여 본 서울은 암담하였으나 급속히 재건되었다. 그러나 예술인들이 몸담을 곳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는 보헤미안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야만 했다. 그래도 이 시기 우리는 엄청난 열기를 가지고 예술을 토해 냈다. 신념과 희망과 사랑과 진실을 가지고 똘똘 뭉쳐 있었다.
○명동의 모나리자
1953년 기차를 서울에 올라왔다. 나는 낯설기만 한 서울역 앞에서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모나리자다방은 파괴된 명동에서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한 다방이었으므로, 자연 사람이 모일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수표교(水 標橋)
성냥갑 속의 메시지는 해방과 6.25를 거치며 예술과 삶 사이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해야 했던 예술가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김기창, 김환기, 이중섭 등의 화가와 박목월, 조지훈, 김동리, 서정주 등의 문인, 신상옥, 최은희를 비롯한 영화인에 이르기까지 당시 문화예술계 인물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人情)이 넘치던 당시의 모습이 한 점 담채화처럼 은은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지금은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 시대 예술가들의 일화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한국현대문화의 형성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예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종상(서울대 미대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백영수 화백은 그의 그림 속에 숨겨진 삶의 조그마한 흔적들을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때로는 전쟁의 극렬한 대립 한가운데서, 때로는 교우했던 문화인들의 틈 사이에서, 때로는 생명을 유지하느라 피했던 도시의 그늘에서, 그가 독특한 화가의 시각으로 포착해 낸 삶의 장면들은 짧고 간명하고 담백하다. 그의 글은 그의 그림과 예술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숭고한 감동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박동규(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성냥갑 속 메시지
초판 인쇄 2000년5월27일
초판 발행 2000년6월5일
지은이 백영수
펴낸이 전성은
펴낸곳 (주)문학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