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성만을 보려 하기에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에너지만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에너지만 보려고 하기에, 에너지만을 취합니다. 에너지에 달라붙든, 에너지를 밀어내든...에너지만 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에너지 대신 의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무의식 혹은 근본의식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용만을 보려고 하면...작용을 밀어내든, 작용에 달라붙든...작용을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취한 작용'을 '유심'이라 이름하고, '취한 작용이 스스로를 강화하는 과정'을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취한 작용'에 있어 '스스로의 성립과 소멸에 대한 앎'이, 바로 불법입니다. 그 앎은, 그 앎의 소멸을 허용하는 앎입니다.
지엽적일 수 있지만, 좀 세부적으로 살펴 볼까요? (^o^ ㆀ) 최대한 짧게 적어 보겠습니다.
유심" 혹은 "유식"은, "용어"입니다. 그러나 "일체유심조"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입니다. 말하자면..."명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흡사 한자로 표현된 용어처럼 쓰이지만...실제는 '한자 표현' 아니라 '한문'입니다. 외국어 문장인 겁니다. 중국어죠... "유심"과 "유식"은 동일한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아주 엄밀히 들어가면,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심'의 '심'은 능동적입니다. '감지한다'는 것이죠. 반면 '유식'의 '식'은 수동적입니다. '감지되었다'는 것이죠. 불교에는 수동적 완료인 표현이 많습니다.
'무아의 교의'와 '조건'의 측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유심]은 ['작용으로서의 식온(감지 기능)'만이 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유심론은 '작용으로서의 식온'을 좀 더 구체화하여, '작용으로서의 알라야식'이라고 봅니다. [작용으로서의 알아야식]은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알라야식의 성립]이라는 측면이 있고, ['성립한 알라야식'이 스스로를 대상으로 증대(강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성립한 알라야식'이 스스로를 대상으로 증대]하는 측면에 따라, '여섯가지 경계(육경)'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육경의 사실성을 부정하고, '알라야식의 성립'에만 사실성을 긍정하는 개념이...바로 [유식]입니다.
'유식'은 '유식무경'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글자상으로 유심과 유식은, 뉘앙스 이외의 의미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교학적으로는 동일한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일체유심조]는 [일체는, 유심에 따라(유심을 조건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의미는, 상좌부의 교학에 따르면 '육경'입니다. 일체유심조의 일체도...그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무난한 편입니다. 참고로...육경은 여섯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보통 무난합니다. 위의 "취한 작용", "취한 작용이 스스로를 강화하는 과정"등의 표현은...내용에 맞춰, 보다 쉽고 구체적이도록, 딴에는 교학의 표현을 약간 변용한 겁니다.
첫댓글 I am sure this is the collection of replies.^^
Nonetheless it is useful to me.
아무래도 틀리다고 하긴 좀 그런... f(^~^ ㆀ)
그냥...알라야식의 자기목적적 되먹임 현상이라 이름할 것은, 6식의 출현을 전제하죠...
유식학파 내부에서 견해가 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해의 모델입니다. 고정된 객관적 사실의 기술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조건에서,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있어요... 체험 말이죠... 무색계 선정들은 대단히 단순해서, 다를 수가 없어요... 색계 선정도 그런 측면이 있는데요... 그래서 객관적인 측면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객관적 측면이 강한 사실들인 선정을 이해하는 방식이, 유심론의 교학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방식이, 하나만 있지는 않아요...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구요. 하나만 있어야 한다면, 여러 학파 중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고를 가려야 하겠죠... 그런데 그래야만 하는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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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실들을 파악해야 하구요... 그 다음, 그와 같은 이론구성이 나오는 까닭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심론은, 체험이 없는 경우...이해가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어요. 사실들 파악이 되지 않는단 말이죠... 그래서 얼마전 이와 관련해, [괴로움 마주하기] 게시판, 394번글 [ Re: '나'라고 동일시 하는 작용 (방문객) ]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
욕계 선정의 관찰에서, 혹은 꿈의 관찰에서...감각기관은 선명하게 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는 점이 알려집니다. 예로...욕계 선정 혹은 꿈에서의 형상은, 눈으로 보는 형상보다 선명하지 않아요... 여기서, 감각기관을 취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선명하게 자세히 알려고 한거죠...
물론 이는, 이해방식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거죠... 알려지는 사실은, 선명성의 차이구요... 그죠?
유심론을 이해하려면, 반대로 접근하는게 더 쉽습니다... 적어 봅시다. 시작을 알 수 엄는 때로부터 우리는 뭔가를 취하고, 그 뭔가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몸 즉 감각기관을 취해 왔어요... 끊임 엄이 태어남을 선택한 거예요... 이는 교학적 설명이죠... 우리가 취한 무엇이 알라야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뭡니까? 6식이죠... 시작을 알 수 엄는 때로부터 6식이 뭔가를 취해 왔어요... 그 뭔가를 이름하여, 알라야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6식이 스스로의 대상으로 삼았단 말이죠... 그러면 6식이 근본인가?
그건 아니죠... 연기는 함께 성립하는 겁니다. 8식과 7식 그리고 6식은 함께 성립해요. 하지만 6식이 스스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6식과 7식 그리고 8식이 함께 성립하더라도, 8식을 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위와 같은 설명을 뒤집어서, 8식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유심론 교학입니다. 8식이 더 근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즉...알라야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6식과 7식을 발생시킨다는 설명을 하게 되는 거예요. 무상유식과 같은 경우, 일단 알라야의 통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일단 소위 심해탈을 추구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온 말이 유식무경입니다. 한마디로, 경계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인 겁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일단 선정수행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식무경에 따라 경계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식에 초점을 맞춰서 무자게 열심히 선정수행했단 말이죠... 그러면 끝인가? 아닙니다. 유식에 따라 식을 추구하여 이제 경계가 사라졌다면, 다음으로 경식구민이란 말이 나옵니다. "경계와 식은 함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껏 열심히 추구한 식조차, 이제부터는 부정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그래야 심해탈이 가능한 겁니다. 여기까지가 무상유식이예요...
유심론을 이해해 보면, 대단히 교묘한 측면이 있어요... 6식이 알라야를 대상으로 하는데, 유식무경에 따라 경계가 부정되면...결국 알라야도 부정되죠.
애초 출발부터, 부정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식무경이라는 말 자체가, 애초부터 세움이 없이 세워진 수행의 방편이라는 거예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사실에서 구성된 이해방식이자, 수행의 방편이라는 거죠...
일단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요... 그 다음부터는, 경우에 맞게 쓸 수 있습니다. 개념은 일단 정립이 되면, 그 자체의 생명력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는 글들 대다수가...알라야식을 무슨 객관적 사실처럼,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건 아니거든요...
사실 글들을 보면 갑갑한게 있어요... 그런데 제가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누차 강조한 바 있듯...교학은, 동업중생에게 있어 사실의 서술이자 방편이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그 모두 수행을 위한 거예요... 의심을 제거하는 것도 신심을 일으켜 수행하도록 함이구요... 방편인 거죠... 물론 방편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면, 그와 같은 것이 사실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점 역시 다른 글들에서 적었죠? 세움 없이 세워진 건데 말이죠... 방편인데 말이죠... 그 방편에 의지하면, 사실로 드러나고 말이죠... 이게 참 묘한건데요...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고...참... 참 쉽고도 절묘한건데... 전달이 잘 안되는 듯... 제가 모자라서 말이죠... 방편바라밀이 딸려서리...
''그 방편에 의지하면, 사실로 드러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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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 거시기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어쨓든 '드러남'에 놓이는 것이니, 별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열심히 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더 깊은 뜻은 모르니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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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유식은, 기본적으로 그와 같습니다.
6식과 7식은...알라야식"이라 이름하는 작용"이 드러날 때(현현할 때),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식작용이라 이름할 것"을 따로이 분별하여 "식작용으로 이름"한 거죠. 말이 좀 복잡한데...따옴표에 주목하면, 별 어려움 엄이 파악이 될 거라고 본다는...
좀 다른 이야기인데, 과거 적은 적도 있구요... 조건의 면을 중심으로 보는가? 형성의 면을 중심으로 보는가?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발견인가 아니면 발명인가?"의 문제이기도 한데요... 대승의 본지는, 형성의 면을 중심으로 보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아요...사실 정작 저 자신에게서조차, 조건의 측면이 훨씬 우세합니다.
정작 저 자신도 그러니까, 어려운거라 할 수 있지만...우리 조건이 마음을 일으킴에 그러기가 힘들단 말이죠...그래도 최소한 교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목적론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가? 왜 이러한 방편이 제시되는가?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와 같이 일으킨 작용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까? 이러한 측면들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보기에는 설령 교학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릇되게 이해하여 붙잡았을 가능성이 많아요... 이는, 거의 피할 수 엄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법의 이해는, 불자 자기 자신을 빼고는 성립할 수 엄습니다.
결국 불법에서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입니다. 불법에서 혹은 불법과 함께 하는 삶에서...불자는,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입니다. 주체인 거죠... 심지어, 단순히 배우 정도에 그치는게 아니라, 감독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 진심으로 굴복했기에, 비로소 스스로를 온전하게 주체적으로 확립하는 역설이 있는 거죠...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게, 스스로의 나약함에 기인하는 굴종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굳건함에 기인하는 극도의 존경심인 거죠... 우리 중생이야, 사실 부처님 앞에서 벌레 수준도 몬되는데...불법속에서, 우리 중생은 부처님과 평등하게 드러나는 거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