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풍향차보의 저술 연대
조선 후기 영, 정조 시대는 유교 사상과 서양의 종교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동서문화의 충돌기로 면면하게 이어지던 차문화도 연경과 복건성 무이계곡을 다녀온 사대부와 실학파 그리고 남부지방 사찰의 승려들에 의해 부활하는 시기이다.
이운해현감은 1710년생으로 몰의 연대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부풍향차보의 저작 연대는 표기가 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추론은 부안 현감으로 재직하던 1755년 또는 56년에 쓴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54년도 저술은 그해 10월에 부임한 현감의 업무 여건으로 볼 때 불가능하여 모두가 제외한다. 본 고는 저술 시기를 1755년 또는 56년으로 추론한다. 이유는 일반적인 제다시기에 작설차로 만들었을 경우는 1755년 봄철에 찻잎을 따서 향차를 만들고 부풍향차보를 쓸 확률이 높지만, 각주처럼 별서 처리한 맥아차나 겨울 찻잎으로 향차를 제다했을 경우는 1755년 10월부터 동짓달 섣달에 거쳐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고 부풍향차보는 1756년도 정월 이후에 써졌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부풍향차보존협회, 변산제다 긴봄의 짧은 생각
이운해는 부안현감을 마치고 왕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을 제수받아 중앙정계에 진출한다.
현감의 몰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조선에서 벼슬을 한 사대부로서는 특이한 사례 보인다.
왕세자의 필선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출세의 길을 걷는게 정석처럼 되어 있지만,
세자가 왕이 못되거나 왕이 되더라도 정변에 의해 축출될 경우에는 필선을 했던 자들을 결국 처형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이 시기 왕조의 격변기에 휘말려 미증유의 힘에 의해 강제 퇴출되고 기록도 삭제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사도세자의 삼정승 필선들은 모두 자결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이하의 필선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확인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