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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장군과 [볼만=장만] 낱말의 유래
여러분도 국어사전이나 인터넷 사전에서 “볼만” 이나 “볼만장만”을 한번 찾아보세요!
국어사전에서 “볼만”을 찾아보면 이상한 낱말이 하나 나옵니다. - 어느 사전에서나 “볼만=장만”이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뜻의 해설도 요상합니다. “구경만하고 참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의 유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낱말의 뜻을 찾아서 알리고 있습니다.
“볼만” 하면 상식적으로 볼만한 구경거리나 멋진 풍경이 상상되는데 뜸금없이 “참견은 하지 않고 오르지 구경만하는 방관자” 라니, 참으로 궁금합니다. 왜! 이런 말이 만들어 졌을까요? 이 낱말은 장만장군 때문에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나 장만장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장만장군 때문에 만들어진 낱말은 또 있습니다.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장만한다”는 말도 장만장군 때문에 만들어진 말입니다.
[장만장군은 아무도 모릅니다]
필자는 임진왜란 이후에 역사를 살피다가 장만장군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장만장군의 공로가 이순신보다도 또 권율보다도 더 대단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팔도도원수 장만장군》이라는 책을 써서 국민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워낙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볼만=장만”이라는 낱말의 유래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학자들도 모릅니다. 조선 말기까지는 아주 유명했던 말이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장만장군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분 임금으로부터 발탁되어 전쟁시대에서 국방에 최고책임자로써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을 살려냈습니다. 장만장군은 백성 살려내는데 천재적인 재주를 갖고 정성을 다하니 백성들은 감동하여 하나로 뭉쳐지며 장만장군을 찬양 하였습니다. 광해군과 인조때 백성들은 “장만이는 볼만 이래요~” 라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고, 이 노래는 조선 말기까지 300년을 이어오며 장만장군의 업적을 칭송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조선 말기까지 유명했던 말이니 혹 90세의 노인 분들께서는 아실지도 모릅니다. 처음 국어사전을 만든 사람은 이 노래의 뜻을 알고 넣었지만 지금은 그 뜻이 왜곡되어 “구경만하는 사람” 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해설은 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조선의 전쟁시대를 지켜낸 장수 장만장군!]
조선의 역사 한복판에 [전쟁시대]가 있었습니다. 임진란부터 병자란 까지 45년 동안에 7번씩이나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시대가 있었습니다. 불과 45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무려 7번씩이나 전쟁을 겪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그야말로 아비귀환의 지옥 같은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지켜낸 이가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백성들의 영웅인 장만장군입니다. 임진왜란ㆍ정유재란ㆍ심하전쟁· 인조반정ㆍ이괄의 난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까지 이어지는 조선시대의 굵직굵직한 전쟁은 모두다 이 시대에서만 일어났으니 필자는 이 시대를 「조선의 전쟁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조선은 이전 200년과 이후 270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조선의 전쟁은 오르지 이 시대에서만 일어났습니다.
조선의 전쟁시대를 지켜낸 장수는 권율장군과 이순신장군과 장만장군입니다. 초기 7년간은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이 나라를 지켜냈지만 그 후 30년 동안은 장만장군이 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임진왜란은 지긋 지긋한 전쟁시대의 서막에 불과 하였습니다.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은 전쟁시대의 시작단계인 임진왜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그 뒤를 이어 장만장군이 임진란의 전후 복구에서부터 심하전쟁과 이괄의 난 · 정묘호란까지 모두 막아내며 위급했던 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장만장군은 조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쟁시대에 태어나서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장상(將相)의 직분으로 30년 동안이나 국방의 총책임자로써 위급했던 이 나라를 지켜낸것입니다.
장만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선조에게 발탁되어 국방을 책임지게 됩니다. 임진왜란의 전후복구와 백성들을 살려낸 업적은 모두 장만장군이 기적처럼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임진왜란의 전후복구가 기적처럼 빨리 이루어진 것은 모두 장만장군의 천재적인 재주와 정성 때문입니다. 장만장군의 경제 살려내는 아이디어는 모두가 놀라며, 백성 살려내는 정성에는 모두가 탄복하며 따르니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져 개혁은 저절로 이루어 졌습니다.
제갈공명을 능가하는 재주는 임금이 먼저 알아보고 신임하며, 죽어가는 백성들 살려내는 정성은 백성들이 먼저 알아보고 찬양하니, 전쟁시대에서 30년 동안이나 국방을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3분 임금에게 신임 받고 전쟁시대에서 30년국방을 지켜낸 인물이 장만장군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제갈공명을 능가하는 천재장수 장만장군이 어떻게 국난의 시대에서 이 나라를 지켜냈는지 그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낸 이야기입니다.
28. 장군의 민본(民本)사상 <볼만장만은 백성들이 붙여준 훈장이다>
◇ 장만장군은 어떠한 사상을 가졌을까?
장만장군은 선조조와 광해조와 인조조 3대에서 30년 동안이나 국방을 맡아서 이 나라를 지켜낸 장상으로써 장군의 사상은 이 나라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번씩이나 전쟁이 일어나는 처참했던 전쟁의 시대에서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장군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장만장군의 사상은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사상 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억제하고 희생하는 겸양사상 이었으며 난국을 헤쳐 나가는 일에는 유비무환의 대비사상 이었다.
*민본사상이란?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사상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사상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주권도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을 위하는 정치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민본주의는 주권은 임금에게 있지만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뜻하는 것이다. 주권의 주체만 다를 뿐 행위하는 목표는 같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주권이 100% 국민에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선거에 당선만 되면 그 다음날부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정치를 하는 선량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당시의 민본주의보다도 못한 면도 많이 있다. 각설(却說) 하고,
어쨌든 장군이 지향하고 있던 사상은, <“백성들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 나라가 있는 목적이다. 당연히 임금도 관리도 백성들을 잘살게 해주는데 주력해야 한다.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서 백성들을 괴롭힌다면 폭군과 탐관으로 지탄받아야 한다. 군주의 권한과 관리의 권한은 오직 백성들을 잘살게 해주는 목적으로만 써져야 한다.”> 옜다. 이것이 장군이 지향하는 민본주의 사상이다. 장군은 평생을 민생과 민본을 실천하면서 사셨다. 그래서 장군은 전쟁의 시대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백성을 위하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적이 없으며 아무리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기피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장군을 “볼만 장군” 이라고 불렀다. 볼만 장군이 “볼만=장만”으로 된 것이다.
⑴ 장군은 평생을 민본/민생을 실천하면서 사셨다.
① 선조조 때.
장군은 선조조의 임진왜란 때는 전후복구의 책임을 맡아 심각하게 파괴된 충청ㆍ전라ㆍ함경ㆍ평안ㆍ경상도 등 변방의 5개도를 돌면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경제를 일으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병역법에 나이상한 제도를 두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또 함경도에서는 정탐전(偵探戰)을 활용해서 오랑캐들을 복종시키고 탐관들을 잡아내어 버려진 땅 함경도를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었다. 산속으로 도망갔던 백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성위에 누각을 짓고 ‘낙민루(樂民樓)’라고 현판을 붙여 백성들이 즐겁게 살기를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차천로선생의 《대작하는 상소문》에서 보면 ‘장만은 성을 쌓을 적에도 백성을 힘들게 하지 않고 쌓는다.’고 했으며, 신흠선생의 《낙민루기》에서도 ‘대개 장만의 정치에는 백성들이 불평하지 않고 즐거워하며 스스로 하였다.’고 하였다.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장군의 정성은 지극함에 경지를 넘어섰다. 신흠은 장만을 <행정에 달인> 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② 광해조 때.
새로 즉위한 광해군도 장만장군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광해군 정권 15년 내내 장만장군에게 국방을 맡겼다. 장만장군을 예우하는 광해군의 정성도 대단하였다. 장군은 광해조때도 국방의 책임을 맡아서 개혁을 이루며 백성들을 살려냈지만 광해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죽어가자 장군은 백성들을 살리고자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항거 하였다. 자신을 아껴주는 주군이지만 민생이 더 중요한 철학이었다. 장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금쪽같이 아껴주는 주군에게 질책에 상소를 19번씩이나 올린다. 이는 백성을 살리려고 자신의 부귀영화도 또 목숨까지도 버린 진정한 용기다. 현직 국방장관으로써 임금을 질책하는 상소를 올린 장수는 오르지 장만장군 뿐이다.
‣ 전하께서는 이 나라를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 국가가 보존되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이 있음으로써 입니다.
‣ 백성은 나라의 근본(根本)입니다. 백성이 병들면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 위졸 들의 봉급은 위졸 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녹봉을 속히 내려주소서.
‣ 수령은 사납고 탐욕하여 약탈함이 강도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도 모르고,
‣ 채찍과 몽둥이가 낭자하니 마을의 쓸쓸함이 병화를 치른 듯 원한이 하늘을 덮으며,
‣ 이익은 간사한 놈의 손으로 들어가고 원망은 전하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신은 간절히 아파합니다. 백성들이 한번 흩어진 뒤에 누구와 더불어 이 나라를 호위 하오리이까.
‣ 탐관오리를 베어 백성에게 사과하시오면 인심과 세도가 환연하게 일변할 것이며 백성들은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부디 성군이 되소서!
*이글은 늙은 정승이 어진임금께 올리는 진언이 아니다. 변방에 나가있는 장수가 무시무시한 폭군인 광해군에게 올리는 질책이었다. 감히 변방의 일개 장수가 임금께 이런 상소를 올릴 수가 있는가? 이순신장군이, 권율장군이, 또한 김종서장군이 이런 질책을 임금께 올릴 수가 있었겠는가? 김유신장군도 또 연개소문도 권력이 확보된 다음에야 이런 진언을 올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만장군은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런 진언을 올렸다. 장군이 겨우 정2품에서 종1품으로 올라 있을 때였다. 직책도 부체찰사에 병조판서 옜으니 이런 진언을 올리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리였지만 죽어가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백성 살리려고 폭군을 질책 하였다. 혹 자들은 광해군이 그 만큼 너그러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가질 것이다. 허나 광해군이 거슬리는 상소를 올린 대신들마다 어떻게 내쫓았는지를 안다면 너그럽다는 상상을 못 할 것이다.
공포정치의 대명사인 광해군시대에서 이런 상소는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올릴 수가 없는 진언 이었다. 그렇다 장군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폭군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었다면 적에게 죽으나 임금에게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장군의 민본사상은 목숨이 두렵지 않았다. 장군은 광해군에게 위와 같이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심각한 질책성 상소를 다섯 번씩이나 올렸고 민생을 살리기 위한 사직상소는 19번씩이나 올렸다. 모두 폭정을 걱정하는 상소였다. 이는 모두 폭정이 극심했던 광해군 말년 4년 동안에만 일어난 일들이다. 광해군에 폭정은 1618년에 인목대비가 폐출되고 이항복이 죽으면서 더욱 극심해 졌다.
◇ 위졸 들의 봉급이 지급되지를 못하여 위졸 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광해군이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서 진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장군만이 나서서 위사들의 봉급을 속히 내려줄 것을 청하여 위사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었다. 삼정승들은 겁이 나서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본조의 녹정(祿政)은 비단 위사(衛士)들을 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조정의 실직이 없는 자들은 모두 그 녹봉을 바라고 있습니다. 속히 녹정(祿政)을 마련하여 위사(衛士)들의 소망을 풀어주시고 신의 직임을 체차하여 직무 없는 몸으로 조리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녹정은 아관(亞官)으로 하여금 처리토록 하였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위졸 들의 봉급지급요청을 왜! 장군이 해야 하는가? 삼정승이 있고 장군위로도 권세 높은 직책이 10사람이나 더 있으며 직급이 낮아도 맡은 책임이 진언을 올리는 대사헌 대사간과 언관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위졸 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걸지 않았다. 장군이 위와 같은 상소를 두 번 올리자 임금이 위졸 들의 봉급을 내려주었다. 위졸 들은 장군으로 인하여 녹봉을 받게 되자 장만이 최고라고 하며 장군을 진심으로 따랐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을 구해내는 것이 용기이며 민본철학이다. 장군은 항상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어서 백성들을 구제 하였다.
[광해군과 장만장군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광해군의 민생파탄철학과 장만장군의 민본철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장군은 광해군과 4년에 걸쳐서 끊임없는 투쟁을 지루하게 이어나갔다. 심각한 갈등을 왜! 이토록 오랫동안 이어갔을까?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단칼에 날아갔을 터인데? 광해군은 왜! 장만을 자르지 않고 4년 동안이나 다독거렸을까? 그 이유는 광해군은 광해군대로 국방 때문에 장군을 잘라낼 수가 없었고 장군은 장군대로 군신(君臣)간의 의리 때문에 광해군을 버리고 부하들의 주장대로 주군을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4년 동안이나 지루한 싸움을 이어간 것이다. 광해군과 장만장군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광해군은 국방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과 덕량을 갖춘 사람은 오직 장만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장군의 사직을 수락할 수가 없었다. 장군 또한 명예를 생명으로 여기는 선비로써 주군을 치는 반의리(反義理)를 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4년씩이나 지루한 갈등이 이어져온 것이다. 그러다가 4년 만에 줄기차게 올리는 장군의 질책에 광해군이 더는 참지 못하고 파직시키니 이때부터 군부의 빗장이 풀린 것이다.
[광해군의 폐출은 장만장군 파직때 결정된 것이다.]
*장군이 파직되어 광해군 곁을 떠나자 광해군 호위에 빗장이 풀렸다. 이전부터 쿠데타를 계획하던 이귀가 최명길과 함께 김포 통진 까지 찾아왔다. 이귀는 장군의 형님에 사위이고 최명길은 장군에 사위이다. 그래서 그들이 대표로 장군을 설득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장군은 임금도 살리고 백성도 살리는 방책으로 목숨을 걸고 임금을 설득해왔지만 실패하였다. 그들은 장군에게 “이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광해군을 치는 길 뿐이다.” 라며 장군을 압박하였다. 그들은 이전부터 장군에게 백성 살리는 길은 오직 쿠데타뿐이라며 쿠데타를 건의 하였지만 장군은 그때마다 군대를 사사로이 움지이는 것은 군자의 의리가 아니라며 반대를 해왔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설득에 실패한 장만은 이제 거듭되는 그들의 압박에 더 이상 반대만 할 명분도 없었다.
나의 방식인 설득은 실패를 하였다. 이제 그대들의 방식에 말릴 명분도 없다. 그러나 나는 쿠데타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답이다. 하였다. 이 대답에 이귀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제까지 장만의 반대 때문에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는데 이제는 빗장이 풀린 것이다. 이후 반정세력들은 힘을 얻어 순식간에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시키고 인조정권을 세웠다. 인조의 쿠데타는 군사적 쿠데타이기 때문에 성공이 가능하였다. 또 군사적 쿠데타이기 때문에 당시 군권의 실세였던 장만의 반대가 최대의 빗장 이었다. 광해군 정권의 최대의 빗장이었던 장만장군이 파직을 당하자 광해군의 호위가 무너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이 장만의 진언을 들어만 주었어도 광해군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광해군은 장만의 질책에 18번을 참다가 19번째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파직시켰다. 이때 광해군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이때 장군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폭정을 고치지 않으면 반정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여러 번 들어가 있었다. <“백성들이 한번 흩어진 뒤에는 누구와 더불어 이 나라를 호위하오리이까?”>이는 장군이 주군에 대한 의리(義理)때문에 백성도 살리고 주군도 살리는 길은 오직 광해군의 설득뿐이라고 생각하여 목숨을 걸고 설득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끝내 장군에 진언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광해군이 쫓겨나는 날 광해군을 위해서 아무도 나서서 싸우는 자가 없었다. 광해군은 백성을 구박하고 민심을 잃었다. 장군의 암시처럼 누구와 더불어 호위 할까나?
③ 인조조 때.
장군은 인조정권에서도 또다시 등용되어 개혁을 맡았다. 인조가 정권을 잡았지만 국방일은 위급하였다. 그리고 장만보다 능력 있는 장수가 없었다. 그래서 쿠데타에도 참여하지 않은 장만을 최고장수로 등용을 하였다. 당연히 쿠데타에 목숨을 걸고 참여한 공신들이 반대를 했지만 인조는 국경이 위급한데 참여공신들만으로 국경을 지킬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내며 장만의 등용을 고집하였다. 이에 장만은 강경하게 사양을 하였다. “소신은 늙고 병들어 직임을 수행키가 어려우니 젊은 장수에게 맡겨 실책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허지만 인조는 “국가가가 위급할 때 재주 많은 인재가 뒤로 빼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사양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지금은 사양할 때가 아니다. 어렵겠지만 위급한 국가를 위해 사양만 하지 말고 경은 재주를 다하여 국가를 지켜 달라!” 하시니 장군은 더 이상 사양도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국경으로 달려 나갔다.
장군이 병든 몸으로 과도한 직무가 너무도 어려워서 진심으로 사임을 청했지만 모두가 이 어려운 난국을 건져낼 사람은 장만뿐이라며 위기의 상황에서 사임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고 말하니 장군은 사임도 못하고 아픈 몸을 수레에 의지하여 전방으로 나갔다.
장군이 변방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죽이는 탐관들을 모두 잘라내고 개혁을 이루니 백성들은 살기가 좋아졌다. 그러나 장군은 이때 잘려나간 탐관들로부터 끊임없는 비방을 받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서 사직을 청하였다. 인조는 <“자고로 국가에 중책을 맡은 자가 남에 비방을 받게 되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니, 장군은 사직도 못하고 <“이것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구나!”> 하였다.
장군은 “관직은 백성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며 전쟁도 백성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백성을 죽이는 도적에는 3도적이 있는데 1도적은 폭군이요, 2도적은 탐관오리요, 3도적은 외적이다.” 라고 하였다.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목숨을 걸고 항거했으며, 외적이 침공하자 목숨을 걸고 막아냈으며, 탐관오리가 기승을 부리자 모두 잡아내었다. 장군은 잘려나간 탐관들로부터 극심한 비방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편해졌다. 장군이 자신의 몸을 버려 백성들을 구원한 것은 이밖에도 수도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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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만장군은 임금과 백성들로부터 동시에 찬양을 받았다.
*장군이 40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살려낸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 반대로 말을 한다면 만일 장군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을까? 정말로 장군은 전쟁의 시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위대한 영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변방의 5개도를 돌면서 뛰어난 재주와 정성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우며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전쟁대비를 철저하게 하여 ‣심하난과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막아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냈다.
‣또 광해군의 폭정을 막고 탐관오리들을 잡아내서 백성들을 살려냈다. 장군은 조선시대에서도 가장 어려운 전쟁의 시대를 맞아 장수로써 전쟁도 총괄했으며 재상으로써 민생도 다스려서 수많은 백성들을 지켜냈으니 장군이 살려낸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나?
장군의 업적이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위대하였다. 이것은 임금이 인정하고 백성들이 인정하였으니 임금은 ‘한(漢)나라의 장량’이라고 장군의 공(功)을 말하며 대신들은 ‘당(唐)나라의 곽분양’ 이라며 장군의 겸손과 덕을 칭송했으며 부하들은 ‘촉나라의 제갈량’ 이라며 지략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볼만장군”이라며 노래까지 지어 부르고 300년을 이어가며 칭송하였다.
‣<곽분양>:본명은 곽자의로 문ㆍ무 장상의 재주로 공을 세우고도 겸손과 덕을 겸비하여 백성들로 부터 칭송을 받은 당나라 최고의 재상이다. 고사 사전에 곽분양팔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부귀와 공명을 겸비했다는 최고의 칭송으로 장만을 비유하였다.
‣<장량>: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재주와 꾀가 한나라를 세우는데 1등 공로자였다. 이후부터는 계책이 많고 모든 일에 미리 대비를 잘 하는 사람을 장량 이라고 부른다.
‣<제갈량>:삼국지에서 유비를 도와 촉나라를 세운 1등 공로자이다. 전쟁 때마다 계책이 많아서 약한 군대로도 강한 적들을 물리치니 이후부터는 계책이 많은 사람을 제갈량 같다고 하였다.
◇ 후대에서 장만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준 이는 영조와 정조였다.
영조와 정조는 우리역사 속에서도 현군으로 이름이 나신 분들이다. 이 두 임금은 장군이 돌아가신지 일백 수십 년이나 지났지만 장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알아보시고 <“장만은 참으로 위대하다. 장만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232년 만에 끝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장공이 피폐한 백성 병든 백성 소생시키며 국경으로 나가니 사나운 오랑캐들조차 복종하였다. 장공의 공적은 가히 한(漢)나라의 공승과 황패로다.”> 하시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장군의 민생철학을 뜻 깊이 새겨 마음속으로 흠모하였다. 두 분 임금께서 내려주신 제문에는 두 분 임금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리고 영조임금께서 사당을 지어주셨다.
<낙서집 임금의 제문. 참조>
⑵ 볼만=장만. 볼만하다. 장만하다. 꽹과리. 라는 말이 생겨난 유래
일정시대 때 누군가가 우리말 사전을 만들면서 ①“볼만=장만”도 끼워 넣었다. 이 말이 일정 때까지도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②“장만하다”라는 말도 또 ③“꽹과리”라는 말도 끼워 넣었다. 모두 장만장군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말이란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또한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볼만장군”이라는 말은 이제는 없어졌다. 그러나 ‘볼만=장만’은 아직도 국어사전에 남아있으며 ‘장만하다’와 ‘꽹과리’라는 말 또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서 쓰이는 말들이다.
*그런데 왜! 국어사전의“볼만=장만”에는“보기만하고 참견하지 않는 사람” 이라고 하였을까? 이 말이 비난이지 무슨 칭송인가? 맞다 그 말은 비난하는 말로 백성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장군을 시기하는 자들이 만든 말이다.
원래는 백성들이 장군의 팔도도원수 출정식을 보면서 “볼만한 구경거리” 라는 뜻으로 “볼만=장만” 이라는 말을 만들고 이 말이 유행된 것이다. 백성들이 만든 “볼만=장만”은 “볼만하다”라는 말로 굳어져서 사전에 ‘볼만한 구경거리’로 설명 되었지만,
“볼만=장만”은 시기하는 자들이 “참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비틀어서 퍼트리니 이 말도 국어사전에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볼만=장만”에는 상반된 두 가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장군에게 시기하는 자들이 많은 이유는? 장군은 뛰어난 재주로 세 분 임금이 총애하고 훈적은 날로 쌓아지고 벼슬은 날마다 높아지니 또한 백성들까지도 “볼만장군” 이라고 노래까지 지어 부르니 경쟁하는 자들이 어찌 시기가 없었겠는가? 더구나 장군은 오랫동안 높은 관직에서 예리한 눈으로 수많은 탐관들을 잘라 냈으니 그 잘려나간 탐관들이 어찌 장군을 시기하고 비방하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장군을 비방하는 글을 <실록>에도 7차례씩이나 남겨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비방 글은 일일이 해명할 가치도 없는 내용들이지만 후세사람들 중에는 그 비방을 믿는 자도 있는 것이다. 장군에게 잘려나간 탐관들의 종족들 중에서 언관으로 등용된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암암리에 파당을 짓고 장군을 시기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하여 장군의 개혁을 몰아붙이니 장군이 사직을 유난히 많이 하게 되었다.
장군의 사직은 기록에 남은 것만도 45회나 되었으니 장수로써는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더구나 병조판서나 도체찰사 같은 최고의 요직으로 사직하는 예는 흔치 않은 일이다. 어쨌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 쌓이는 것만큼 시기하는 자들도 늘어났으니 장군의 염치철학이 이를 견디기가 어려워 여러 번 사직을 청원하였다.
장군의 사직상소를 보면 인사치례의 사직이 아니라 구구절절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직들 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장군의 간절한 마음을 더 높게 보고 장만같이 사심이 없는 자가 개혁을 맡아야 한다며 더욱 중용하였다. 시기하는 자들은 장군의 사직하는 절절한 마음까지도 쇼를 하는 짓이라며 교활하다고 비방을 하였다.
어쨌든 장군은 임금이 믿어주는 마음에 감격해서 또 백성들이 알아주는 마음에 감동해서 시기와 비방을 참아가면서 개혁을 성공시켜 많은 백성들을 살려낸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 선비로서는 남의 비방을 받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장군이 여러 번 사직을 한 뜻은 또 정묘호란 후에 유배를 스스로 자청한 뜻도 시기하는 자들이 많다는 현실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택한 것이다.
[“장만=견만(見萬)” 이라고 불렀다.]
*시기하는 자들은 ‘장만=견만(見萬)’이라고 불렀다. ‘장만=볼만’은 무지한 백성들이 만들어준 말로 한자로는 쓸 수가 없는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장군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이 말뜻을 비틀기 위해서 ‘장만=견만(見萬)’ 이라고 한자(漢字)로 써놓고 ‘장만은 구경만하는 사람이다.’ 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이 ‘장만=견만’이라는 말에는 참으로 묘한 뜻들이 숨어 있었다. 어느 날 장군을 심하게 미워하는 무리 중 한사람이 장만장군을 비방하는 이야기책을 짓고 있었는데 시중에 떠도는 ‘장만=볼만’을 격하시킬 생각으로 ‘장만=볼만’을 달리 꾸밀 방도를 찾고 있었다. ‘장만=볼만’은 무지한 백성들이 만든 말이라 한자로는 쓸 수가 없었는데 이 선비는 무식한 백성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이 말을 한자로 ‘장만=견만(張晩=見晩)’ 이라고 써놓고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스스로 웃음보를 터트리며 박장대소 하였다.
<장만은 구경만하는 사람이라?> ‘볼만하다’ 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뜻도 내포하고 있는 참으로 묘한 글자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좋게도 보이고 또 나쁘게도 보이는 이중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한문을 모르는 자들에게 읽어주면 그들이 말을 전할 때는 ‘장만=견만(見晩)’ 으로도 될 수 있으니 참으로 묘한 말이다. 하였든 장만을 욕한 것이 시원해 계속 웃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만’자 마저 ‘일만 만(萬)’자로 고쳐보니 그 뜻은 더욱더 다양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꾸며낼 수가 있었다. “장만=견만(張晩=見萬)”
◇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로 가장 혜택을 본 사람들은 상민들과 아녀자들이다.
선구자가 고생한 노력은 조용한 가운데 백성들이 누리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눈을 뜨게 하는 위대한 혜택을 주었다. 상민과 아녀자들이 글을 배우게 되니 이때부터 한글로 된 이야기책들이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한글이 없던 시절 글을 아는 사람은 불과 수십만 인에 불과 하였는데 한글이 창제된 후로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열배이상 늘었다. 이제는 상민들도 한글정도는 모두가 읽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세종대왕의 거룩한 업적 덕분이다. 수백만의 상민들과 아녀자들이 글을 읽게 되자 그들이 원하는 책은 공자 맹자의 글이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책이 인기가 있었으니 한글소설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TV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는 이야기책이 유일한 재미거리 였으니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야기책 한권에 쌀이 한가마 라도 없어서 못 판다. 마을마다 골목마다 이야기책 읽는 백성들로 넘쳐나니 이는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 이었다. 만일 세종대왕이 이를 목격하신다면 감격에 눈물을 적지 않게 쏟았을 것이다. 언문(諺文:상민의 글)으로 된 이야기책이 허균의 《홍길동전》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 하였는데 그 속에 장만장군에 대한 이야기책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야기책이란 재미있게 써야 팔리니 “장만=견만”이라는 말이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만=견만”은 한글로 써야 하는데 일부러 한자로 적어 아리송하게 하였다. 한글로 적게 되면 당연히 “볼만”으로 적어야 하는데 일부러 “견만(見萬)”으로 적어 폄하시키며 무지한 자들을 자극시켰다. 그래야만 책이 잘 팔린다.
*이는 인조반정 때 부하들이 그렇게도 반정에 앞장 설 것을 종용했어도 장만은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시기하는 자들이 전해 듣고는 그럴듯하게 비틀어서 ‘장만은 나서지 않고 구경만하는 사람이다.’라고 설명을 붙여놓으니 이말 또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그럴 듯해 보였다. 그래서 장군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이 말을 대대적으로 퍼트리기 시작하였다. 장군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물려 나간 것은 장군의 개혁정치로 잘려나간 탐관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종족들이 출세를 못하게 되니 대를 이어가면서 장군의 업적에 흠집을 내었다. 한글 소설이 한몫을 거들었다.
그들은 주로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을 많이 썼는데, 장군을 야사에 등장시켜 확실한 내용은 치켜세우는 듯하다가 ‘장만은 구경만하는 사람’이라고 비방으로 끝마감을 하였다. 처음에는 장만/견만(張晩/見晩)으로 하다가 후세에 이야기꾼들이 더 재미있게 꾸미려고 이제는 장만/견만(張晩/見萬)으로 고쳐 ‘장만은 만(萬)가지를 보는 사람(이쪽저쪽 양쪽보기)이다. 앉아서 천리를 보고 한쪽 눈을 감고도 만리(萬里)를 내다본다.<이괄의 난 때 한쪽 눈을 실명하니 이런 말도 나오게 되었다.> 심하난 때도 정묘호란 때도 앉아서도 오랑캐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훤히 알고 전쟁대비를 하였다. 장만은 귀신같은 사람이다. 만리뿐이 아니라 만(萬)가지를 내다보는 사람이다. 이괄의 난 때도 양쪽보기를 하느라고 우물우물 미적거린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꾸며서 퍼트리고 정묘호란 때도 관망만 했다고 꾸며서 퍼트리니 내막을 모르는 후세의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어 하였다.
하지만 비방도 인기는 인기였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비방을 해준 덕에 장군에 이야기는 300년을 이어 가면서도 살아 질 줄을 몰랐다. 조선말기 까지도 장군에 이야기가 회자 되었으니 비방꾼들도 도움이 된 것이다. 일정(日政)때 까지도 “볼만=장만” 이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사전에까지 올라 있었으니 장군에 업적과 역사를 모르는 자들도 이 말은 사용하고 있었다.
◇ 영조 14년 4월 5일 영조가 대사헌 정익하에게 묻는다.
영조 6년에 장만장군의 문집이 발간되었다. 장군의 방계후손 장보현(도정공)이 최명길 후손에게 찾아가서 문집발간 사정을 말하고 자료들을 돌려받아서 책으로 엮어서 발간하였다. 이때 인쇄경비는 영조 때 삼영대장으로 유명한 도정공의 조카인 장붕익이 감당을 하여 장군의 문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다시 한글로 번역된 것은 필자가 2007년 12월에 인터넷에 공개하였다.
어쨌든 장군의 문집이 최초로 발간되면서, 이때부터 장군의 역사를 만인이 훤히 알게 되었다. 이때 영조께서도 장군의 문집을 보시고는 감동하여, <“과연 장옥성은 듣던 대로 만고에 충신이다.”>라고 하시었다. 영조는 역대의 충신들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다.
▸영조께서 이르기를, <“장만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이괄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하시며 대신들에게 물으셨다. <“정사에 보면 장만은 그 공적이 참으로 훌륭하고 상소문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 뜻이 충정으로 가득한데 어찌하여 시중에 떠도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는고?”> 하니,
♠<이때 시중에는 “장만은 구경만하는 사람이래요!” 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
▸대사헌‘정익하와 좌의정‘조현명이 아뢰기를, <“그 말은 시기하는 자들이 꾸며 만든 말이라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괄의 난 때 장만이 지휘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면 부하들이 저절로 나가서 그 많은 이괄의 대군을 잡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군사는 지휘관의 세밀한 작전이 없으면 저절로 나가 싸울 수가 없는 조직입니다. 장만이 관망만 하였다는 말은 맞지가 않는 말입니다. 시기하는 자들이 모함하기 위해 꾸며낸 말인데 그럴듯하니 모르는 자들도 재미로 퍼트리는 것입니다.”> 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경의 말 이 옳다” 하였다.
▸정익하가 또다시 아뢰기를, <“또 하나를 설명하면 이것은 계해년(1623년) 인조반정에서 시작이 됩니다. 정사(인조반정)의 공신들이 모두 장만공의 친척과 막하의 이름난 무장들이라, 공(장만)이 이미 그 일을 알고 또 지휘함도 많았겠지마는 친히 공(功)을 범하려고 아니하여 의거에 앞장서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시기하는 자들이 비방하기를 장만은 만 가지를 본다하여, ‘장만/견만’ 즉 양쪽보기를 했다는 뜻으로 말이 재담(才談)에 가까운 소치라 아래로 하인배들 까지도 재미로 전하여 외우다가 노래가 된 것입니다.”> 하며 그 내막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낙서집 제8권 라항. 참조>
이렇게 해서 ‘볼만=장만’이라는 말이 조선 말기까지 전해져왔는데 일정 때 우리말사전을 만든 사람들은 이 내용을 소상하게는 모르고 그저 시중에서 떠도는 ‘볼만=장만’을 그대로 우리말사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볼만=장만’이라는 말이 ‘구경만하는 사람’ ‘참견하지 않는 사람’ ‘아기가 울어도 젖을 주지 않는 사람’ 등으로 시중에서 떠도는 말 그대로 올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 뜻을 바르게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볼만장군(볼만한 장수)’ 이라는 말도 되찾아서 우리말사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볼만장군’은 장수중에서도 최고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며 ‘백성을 위하는 진정한 장상(將相)이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장만장군에게만 붙여준 거룩한 훈장이었다.
◇ “장만하다” 라는 말도 장만장군에서 유래된 말이다.
“장만하다” 는 ‘대비하다’ 라는 뜻으로 변방에 군사들이 장군의 함자를 따서 유행시킨 말이다. ‘장만하다’는 말 또한 한자(漢字)로 쓸 수가 없는 백성들의 유행어로 생겨난 말들이다. 무지한 백성들이 장만장군을 빗대어 유행시킨 말이기 때문에 어원(語原)이 없고 한자로는 쓸 수가 없는 말들이다.
그렇다고 순수한 우리말도 아니다. 한자 어음(漢字語音)이지만 백성들이 따다가 조합시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이므로 한자어가 없는 것이다. 장군이 변방에서 하도 ‘대비대비’ 외치니 부하들이 준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너도 장만이냐.’ 하던 것이 ‘너도 장만하냐’로 바뀌어서 ‘장만하다’가 ‘대비’의 대명사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유행시켜 만든 말들은 한자로 쓸 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굳이 쓴다면 장군의 함자를 따서 써야하는데 백성들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어디 문서에 적을 경우도 없었다. 서찰에 적을 때도 한글로 적었으니 한자로 ‘장만하다’ 라는 글자는 없다. 글을 아는 선비들은 백성들의 유행어를 잘 쓰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문헌들에서는 ‘장만한다’는 글자대신 준비ㆍ대비 등 다른 글자들로 표기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원래의 뜻은 모르지만 “장만한다”는 말은 많이 쓰고 있다.
◇ 꽹과리 라는 말은 이괄의 난 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괄 군이 장만의 군사를 공격할 때마다 관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소ㆍ징을 요란스럽게 쳐대며 진격하였다. 그러다가 인왕산 전투에서 장만의 군사에게 참패를 하게 되니 백성들이 야유를 하며 소징을 칠때 나는 ‘꽹~’ 소리에 이괄의 ‘괄’자를 붙여서 ‘꽹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백성들은 “이괄이는 꽹과리요, 장만이는 볼만이라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꽹과리’ 라는 말도 이때부터 생겨서 국어사전에 소징의 대명사로 올라있게 된 것이다.
‣<소징>:징을 작게 만든 것으로 소란한 소리를 내며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효과가 있다. 사냥을 할 때도 많이 쓰이며 요즘에는 운동경기를 응원할 때도 많이 쓰인다. 육이오 전쟁때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들도 꽹과리를 요란하게 쳐댔다고 한다. 이는 요란한 소리로 상대방의 사기를 꺽으려고 하는 작전이다. 그래서 운동경기 때도 꽹과리를 요란하게 쳐댄다.
⑶ 장군의 인본사상은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장군은 부하들은 물론이고 억울한 사람이 죄를 입게 되면 힘을 다하여 구원하였다. 남이흥ㆍ정충신ㆍ김기종ㆍ윤의립ㆍ김신국ㆍ안륵 등 모두 장군이 구원하였다. 그리고 장군이 돌아가시던 해에도 옥사에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인조를 설득하여 죄인들을 다시 심리하게 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였다. 장군은 억울한 사람들을 구원 할 때마다 늘 인재를 국가에서 보호해야 한다. 작은 죄로 인재들을 죽이는 것은 국가가 두 번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늘이 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죄요,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죽이는 것이 두 번째 죄가 된다고 하였다.
▶ <남이흥 장군>
남이흥은 우직하고 용맹으로는 첫째가는 장수다. 장군이 심하전쟁 때 남이흥의 용맹과 의리를 알아보고 총괄장수로 등용하였다. 그런데 인조반정이 나자 남이흥은 변한 세상에 빨리 적응을 못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대항 하려다가 체포되어 광해군의 세력으로 몰려 처형되기 직전 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구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까운 인재가 억울하게 죽을판이다.
이때 장군이 나서서, <“남이흥은 참으로 아까운 인재 입니다. 그를 살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이루게 하소서.”> 하며 두 번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남이흥의 죄는 중죄이니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하시며 불허 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남이흥은 능히 이 나라를 건져낼 준걸입니다. 그로 하여금 공을 이루어 죄를 씻도록 하여 주는 것이 군왕이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입니다.”> 하며 세 번째 상소를 올려 끝까지 구원하니 인조가 감동하여 살려 주었다. 장군의 구원으로 간신히 살아난 남이흥은 죽을때까지 장군의 곁에서 결초보은 하며 공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남이흥은 마침내 이괄의 난에서 나라를 구했으며 정묘호란에서도 나라를 구하여 큰 공을 이루게 되었다. 정묘호란때 남이흥이 치룬 안주성의 전투는 역사에서도 유명한 전투로 기록된다.
▶ <정충신>과 <안륵>
정충신과 안륵은 이괄의 역적모의에 가담 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게 되었는데 장군이 그들에게 죄가 없음을 잘 아는지라 두 장수를 이괄의 토평전쟁에 맨 앞에 서게 하여 큰 공을 이루게 하니, 그 죄는 스스로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로는 모두가 ‘장군이 억울한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귀신과 같다.’ 하며 많은 장수들이 진심으로 충복하고 따르게 되니 장군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정충신과 남이흥은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 처럼 죽을때까지 장군을 의형제로 섬기며 3번씩이나 이 나라를 구해낸 준걸들이다.
▶ <김기종>
김기종은 장원급제를 한 수재인데, 광해조 때 한때 길을 잘못 들어 이이첨의 당파에 붙어 다녔다 하여 인조반정후 모두가 외면하고 버렸는데, 장군이 그의 재주와 충의를 알아보고 구원하여 등용시키니 장군의 막하에서 큰 공을 이루게 되었다.
▶ <윤의립>
윤의립은 서조카가 이괄의 책사로 역적이 된 윤인발인데 그의 죄에 연좌되어 죽게 되었다. 이에 장군이 나서서 윤의립의 죄가 없음을 여러 번 상소하여 살려내니 윤의립 또한 장군의 뜻에 감복하고 나라를 위해서 많은 공을 이루었다.
▶ <김신국>
김신국은 재주가 있어 광해군 때 잘 나가던 재신으로 인조조에서도 등용되어 평양성을 쌓고 지키다가 <“성은 넓은데 지킬 군사가 없다”>는 상소를 올려 수비의 어려움을 진언했다가 간원들의 탄핵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는 김신국을 시기하던 자들이 김신국의 말실수를 역적으로 몰아 부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구원하는 이가 없어 죽게 되었을 때 장군이 나서서 <“김신국은 죄는 있으나 역적에 마음은 없으며 또한 재주가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일 만하니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 합니다.”>하니, 인조가 장군에 말에 힘을 얻어 용서하였다. 김신국 또한 큰 재주로 큰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장군은 나라를 위해서 쓰일 인재들이 억울하게 죽게 될 때마다 자신을 버리고 적극 나서서 끝내 구원하였으니 모두가 의롭다하며 진심으로 따랐다.
‣임진왜란 때는 전후복구의 책임을 맡아서 전국을 돌며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성으로 백성들을 감동시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냈다.
‣심하난 때도 압록강으로 나가서 침공하는 청군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살려냈다.
‣광해군이 폭정으로 민생을 파탄내자 목숨 걸고 막아서서 백성들을 살려냈다.
‣이괄의 난 때도 아픈 몸을 채찍질하며 도적들을 토멸하고 백성들을 살려냈다.
‣정묘호란 때도 모두가 반대하는 전쟁대비를 홀로 감당하며 막상 전쟁이 터지고 모두가 뒤로 숨었지만 장군 홀로 나가서 적들을 막아내니 수많은 백성들을 구한 것이다.
‣광해군이 위졸 들의 봉급을 주지 않자 모두가 눈치만 보고 나서지 않았지만 장군홀로 나서서 졸병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며 질책을 하니 광해군이 위졸 들의 봉급을 주라고 하였다.
◇ 장만장군은 왜! 이토록 위험한 일에 홀로 나섰는가?
왜! 모두가 나서지 않는데 장군만이 나서서 그 많은 사람들을 살리려 하였는가?
왜! 전쟁 때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위험한 전쟁터로 나갔는가?
왜! 목숨을 걸고 광해군에게 대들어서 민생을 구하려고 하였는가?
왜! 모두가 반대하는 전쟁대비를 홀로 감당하며 나라를 구하려고 하였는가?
왜! 그 많은 비방을 받아가면서도 탐관오리들을 잘라내고 어려운 개혁을 이루려고 하였는가?
그것은 위대한 장군의 민본ㆍ민생(民本/民生)철학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명(人命)을 중요시하는 인본(人本)사상 때문이었다.
‣장군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백성들을 구원하였다.
‣장군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 아픈 몸을 채찍질하며 위급한 나라를 구하였다.
‣장군은 자신을 자제하고 탐욕과 부귀영화 모두 버리고 오직 백성만을 위해 사셨다.
‣장군은 민본/민생 철학을 평생을 실천하면서 사셨다.
‣장군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根本) 이라는 민본철학을 신봉하면서 사셨다.
*반대로 장군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임진왜란의 전후복구에서도 장군의 특출한 노력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그리고 심하전쟁 때도 장군의 지략이 없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그리고 이괄의 전쟁 때도 장군의 의지가 없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그리고 정묘호란 때도 장군의 대비가 없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그리고 함경도에서의 천재와 같은 장군의 개혁이 없었다면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오랑캐에게 죽고 탐관들에게 죽어갔을까?
*장군은 실로 많은 백성들을 살려낸 위대한 백성들의 영웅이었다. 장군의 백성 살리기 철학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준 것은 천재와 같은 두뇌였으며, 자신을 버리는 사랑이었으며, 위를 어우르는 겸손과 염치였으며, 아래를 끌어안을 수 있는 인자함이며, 죽음을 뛰어넘는 용기였다.
<팔도도원수 장만장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