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대한민국 정당정치에서 가끔 여소야대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명실상부한 다섯의 정당이 난립한 때는 없었고, 국회교섭단체만도 네 정당이다. 여의도 여인천하라는 말이 회자될 만큼 세 정당의 대표가 여성이라는 특징 또한 처음인 것으로 안다. 조선시대 朋黨붕당의 폐단이 당파싸움이었는데, 지금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정당 심벌마크와 유니폼과 배경이 붉은 색 상징성인 보수 巨野거야 정당은 與黨여당을 진보 종북 세력이라 몰아붙이면서도 노골적으로 빨갱이들 못지않게 억지를 부린다는 느낌이 들고, 근간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5행시 모집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했던 탈당파 다른 野黨야당 대표로 어제 여성이 선출되었고, 같은 날 과거 지금의 與黨여당과 함께했던 다른 野黨야당은 지난 대선에서 의도적으로 네거티브 했음을 시인하며 고개 숙여 국민께 사과했다. 예나 지금이나 朋黨붕당의 폐단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조선 왕조시대 권력의 정점은 공신세력인 勳舊派훈구파와 儒林유림 곧 선비세력의 士林派사림파로 대별되는데 이것이 朋黨붕당이다.
수양대군이 癸酉靖難계유정난으로 단종의 권력을 찬탈하고,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니, 世祖세조 때부터의 功臣공신들 세상을 勳舊派훈구파라 한다.
고려 말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李穡이색의 제자들은 정치의 뜻을 접고 지방으로 낙향하여 性理學성리학에 몰두했다. 그들은 成宗성종 때부터 과거제도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자 중앙에 차츰 진출하여 자리를 잡아갔으며 宣祖선조 때는 오히려 士林派사림파가 득세했다.
어느 세력이 좋은 정치를 했냐? 보다는 항상 폐단은 있었다. 勳舊派훈구파와 유사한 대한민국 정치집단이 친일파 / 친중파 / 군부와 그 추종세력이라면, 士林派사림파와 유사한 정치세력이 문민정부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중앙 부서 6조(吏曹이조 戶曹호조 禮曹예조 兵曹병조 刑曹형조 工曹공조) 중 하나인 관직으로 吏曹이조 정5품 정랑과 兵曹병조 정6품 좌랑을 합쳐 부르던 吏曹銓郞이조전랑이 있었다고 한다. 비록 관직은 낮았지만 여론 기관인 三司삼사(司憲府사헌부 司諫院사간원 弘文館홍문관)의 관리를 임명하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어서 그 권한은 매우 막강했다. 임금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고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기에 勳舊훈구와 士林사림은 서로 자기편의 인물을 이 직위에 임명하려 혈안이었다. 임금을 주무르거나 흔들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士林사림은 東人동인(동쪽 건천동에 거주하던 김효원 중심)과 西人서인(서쪽 정동에 거주하던 심의겸 중심)으로 나뉘어 朋黨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뉘고, 민주당이 더블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500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宣祖선조는 적장자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후궁의 아들 光海君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鄭澈정철을 파직한다. 鄭澈정철은 鄭汝立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사하며 己丑獄死기축옥사를 주도한 인물인데, 鄭汝立정여립의 피해자들인 北人북인(南冥남명 曺植조식 제자들)은 鄭澈정철에 대해 강한 처벌을 주장했다. 이와는 달리 南人남인(退溪퇴계 李滉이황 제자들)은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다. 두 학파 거두의 후학들은 스승을 높이는 붕당이 되어 새로운 정치세력을 다져갔던 것이다.
光海君광해군 때 北人이 정권을 잡았지만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몰락했고, 새로운 정권창출의 南人이 잠깐씩 정권을 잡은 적은 있지만, 대부분 西人의 시대였다.
과거시험으로 많은 선비를 발탁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빈둥대던 儒林유림의 수는 肅宗숙종 때 극에 달했다. 오늘 날 많은 대학에서 고학력 청년들을 배출했지만 일자리가 부족하여 사회문제가 된 것과 흡사했다. 肅宗숙종은 西人과 南人의 세력을 견제하느라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뺏었다 하며 정치판을 번갈아 뒤엎는 換局환국을 세 번이나 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1680년 肅宗숙종 6년, 기름칠 한 천막 사건을 빌미로 南人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을 죽이고 西人의 시대를 열어주니 이것이 첫 번째 庚申換局경신환국이다. 이후 西人의 세상이 되었지만 西人은 노장층 老論노론과 소장층 少論소론으로 분열되고, 송시열의 주축인 老論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근간 보수 여당의 분열 형태와 아주 흡사하다.
肅宗숙종의 여인들은 애환 그것이었다. 정비인 첫 부인 인경왕후는 병사했고, 西人 가문의 딸 인현왕후를 맞이했지만 왕자를 두지 못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역관 장현의 딸이 원자 균(훗날 景宗경종)을 낳으니 그녀가 장희빈으로 南人의 시대를 연다. 이에 반발하는 西人의 영수 송시열을 삭탈관직 귀양을 보내고 결국 사약을 내려 죽게 하니 이것이 1689년 두 번째 己巳換局기사환국이다.
장희빈의 방자함으로 인현왕후는 폐위되었고, 무수리 최씨에게서 연잉군을 얻으니 훗날의 英祖영조이다. 숙빈 최씨는 폐비 인현왕후 복위를 돕는데, 이를 엄히 다스리라는 南人의 상소가 빗발쳤다. 肅宗숙종은 결국 장희빈을 사사케 하고, 송시열 등 西人의 처형문제에 강경론자였던 민암을 제거하며 또 정권을 교체하니 1694년 세 번째 甲戌換局갑술환국이다.
민주제도에서는 대선과 총선이라는 국민의 힘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지만, 옛날 왕조의 왕권 특히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써 조정 대신들을 적절히 교체하면서 왕권을 구축 강화했던 肅宗숙종의 정치력은 냉혹한 면도 없지 않지만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격한 세자 균은 겨우 14살이었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 어머니를 상실한 세자는 사무쳤던 그날의 아픔과 영향이었는지 시름시름 앓았다. 병약한 세자로부터 肅宗숙종의 마음은 차츰 멀어졌으며, 세자를 폐하고 연잉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이에 반대한 이들이 바로 少論소론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肅宗숙종은 사망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景宗경종이다.
景宗경종은 즉위 후에도 계속 골골했고 후사도 없었다. 즉위 1년 만에 景宗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후계자로 결정된다. 景宗경종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때 대비전에서는 왕의 쾌차를 빌며 게장과 생감을 보냈고, 의원들은 게장을 올리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우애가 돈독했던 연잉군은 반발을 무릅쓰고 게장을 왕에게 올린다. 왕은 그날 밤 게장을 먹고 설사를 심하게 했고, 연잉군은 인삼 처방으로 기운을 돋게 하자 했다. 의원들은 반대했지만 이번에도 세제는 기운을 차리는 데 인삼만큼 좋은 게 없다며 끝내 인삼을 올린다. 결국 왕은 인삼을 먹은 후 사망하고 마니 이것이 유명한 景宗경종 독살설이다.
景宗경종 독살 의혹에 모친이 천출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왕위에 오른 英祖영조는 불안한 재위 초기를 보낸다. 그러나 英祖영조는 격렬한 붕당의 갈등을 蕩平策탕평책으로 진화시키고 공론을 장악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으니, 붕당 갈등을 해결할 개혁 군주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군대와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 제도를 개혁했다. 조선 후기 붕당의 피해를 막고자 蕩平策탕평책을 추진하던 英祖영조는 銓郞전랑의 通請權통청권을 제한하였다. 정당정치의 폐단을 줄이자는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펴겠다는 蕩平策탕평책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최장 52년 왕위를 지켰던 영조에게는 모두 6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런데 아들 복이 없었던지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병으로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2살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이다. 귀한 아들이라서 영조는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지만, 훗날 불행한 왕세자는 뒤주에 갇혀 아사하고 만다. 역사서에는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해서 구구절절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어려운 처지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했고, 왕위에 오른 다음 붕당의 갈등과 정치적 어려움에서 괴팍해진 영조의 성격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서양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도입하기 전, 수백 년간 이와 유사한 붕당정치를 했지만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고, 자력에 의해 오랜 세월 식민지로 국치를 당했으며, 타력에 의해 해방은 되었지만 완전한 독립을 못하고 남북이 분단, 동족상잔의 부끄러운 비극도 겪었다. 건국 이후 햇수로 70년, 어쩌면 한반도는 거대 붕당이 대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타협할 줄 모르고, 양보할 줄 모르며, 헐뜯기 일쑤인 정당정치는 붕당정치라 아니할 수 없다. 국력을 만끽하면서도 애국은 남의 이야기이고, 오직 사리사욕과 붕당의 이익만이 계속되는 이 나라 정당정치가 참으로 부끄럽고 불안하기만 하여 한 번쯤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역사를 거울삼아 정리해 보았다.
분열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다당제로 전락한 20대 국회. 일촉즉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어정쩡한 유사 식민지가 아닌 완전한 통일과 독립은 요원한 것인가? 정당의 여성대표 때문에 여의도 여인천하라는 말이 생겼다. 한강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의 형상이 여의도라면, 국회는 물고기 꼬리에 해당된다. 국운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일 거라고 이해하지만, 허허벌판의 여의도일 때 물고기 머리에 해당되는 지금의 63빌딩 위치에 국회를 지었더라면 어쨌을까? 정당 간판이야 수 십 번 바뀌었지만 동작은 전혀 바뀌지 않고, 마치 개꼬리 흔들 듯 권력자의 시녀가 되어 꼬리만 흔들더니 이제 그 꼬리가 갈가리 찢겨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중무장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우리 또한 중무장을 해야 할 것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했듯이,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붕당과 그 집단을 찢어 없앨 힘은 군대밖에 없다고 본다. 120년 전처럼 군사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이웃나라에 먹혔던 망국을 반복할 것인가? 북한의 적화통일도 엄밀한 망국이다. 인민군과 맞장 뜰 국군통수권자의 통치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인가?
군대는 전쟁을 하기 위함이고, 전쟁에 이겨야 나라를 세우거나 지키는 것이며, 그래서 국제정치학적으로 나라는 전쟁을 하는 단체라 했던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위치에 처한 대한민국에 국방의 힘은 충분하다고 본다.
지난번 정책결정이란 글에서 개인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정책결정을 한다고 했지만, 그 결정은 지도자 한 사람의 강한 의지와 지도력이 가장 크다. 곧 지도력이 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