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저의 직계선조를 중심으로 쓴글이기에 극히 주관적인 글이오니 오해말기를 당부드립니다(대동계원 명단 사진은 동계 시작전에 여러분이 보았기에 증조는 찾지 못하고 제가 아시는 몇분만 찍었습니다) .
1. 2020년 1월 4일 모산 대동계 참석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간은정은 내가 통산에서 태어나서 5살 때부터 살았던 간은정이다.
그리운 고향, 탯자리는 이목동이지만 당시는 아래간은정(현 황금동)에 부모형제와 살았던 곳에 숙종이후 모산 대동계원으로 할아버지들이 활동하셨기에 대동계원 자격을 이어 받아 참석하였다.
신북면장 류인구선조님(이하 선조 경칭 생략함). 류경연은 일제강점기에 분인데 류인구는 사교당후손이고 류경연은 남재공후손으로 참의공후손으로 양자손이다.
2. 신북면 역사
① 대한제국(1897.10.12-1910.08.29) 시대임이며 1895년(고종32)까지 8도(전라좌우도)를 13도(전라남도)로 지방제도 개정하여 부(府) 군(郡) 면(面)으로 면장(面長) 리정(里正, 이장)을 두고 지방민을 면장 이정으로 임명하였고
3. 모산리 출신 신북면장
㉠ 신북면사무소에 있는 전임 면장 공덕비에 경연(敬淵, 철종임자, 철종3년 1852-1924) 족보에는 능참봉
㉡ 인구(寅龜, 고종을미, 고종32년 1895-1955), 珍烈아저씨 아버지, 족보에 관직 없음.
㉢ 병하(秉夏, 철종신해, 철종2년, 1851-1929, 군참사) 족보에 향리칭선수비(鄕里稱善竪碑,고향 마을에 훌륭하다고 칭찬하여 비석을 세우다) : 면사무소에 있는 비석을 해방후에 말 많은 족속들이 철거했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경연, 병하, 인구께서 신북면장을 하셨다는데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 감정기에도 면장이며 이들 세분이 면장을 하셨다는 구전과 신북면 사무소에 공덕비(경연 인구)가 있고 서당동 제각인 영모재 중수에 병하선조가 도유사로 병하(댁호 이동양반) 부인(이동할머니)께서 서당동에 대형 가마솥을 먀련하여 중수에 참여한 인부에 식사를 제공 했다는(수택어머니 월산댁 증언)데 기록과 비석을 찾을 수 없다. 월산댁이 자유당때 주조장을 하셨는데 구전으로 전해온 내용을 말씀하신 듯하다.
㉤ 영모재(永慕齋) 자료 : http://cafe.daum.net/moonwharyu/L2lO/169 에 1958년 이후 증수기 현판이 없어 휘 병하 선조가 도유사를 했다는 것은 모강공 계책을 확인해 봐야 겠다.
㉥ 秉夏 선조(아시아종묘 류경오사장님 증조)는 후손들이 직장(直長,종7품)이라 해서 시제 때 “직장 류공”으로 축문을 썼는데 군참사(6개면 관장)로 수정해야겠다(문제는 군 참사나 면장으로 족보에 남기면 친일파가 되기에 인구 선조처럼 관직을 생략하든지 후손들이 말하는 "직장"으로 하여야 할 듯하다.
㈆ 해방후 신북면 1대면장은 류인흥(柳寅興,1948.08.05~1952.04.05) 5대면장 류형열(柳亨烈, 1960.12.11~1961.05.26) 9대면장 류동열(柳東烈, 1968.08.06~1973.03.08) 12대면장 류 웅(柳雄, 1988.11.14~1995.11.17) 인흥선조와 동열선조는 사교당 후손이며 형열선조와 웅님은 남재공 후손이다.(1973년 3월 31일 결혼후 6개월간 간은정 아버지집에 집사람이 있었고 또 방학때 신북에 오면 동열아저씨를 비롯한 모산 어르신들 술상을 하루에도 몇번 차렸기에 집사람은 모산 어른분을 대부분 알고 있음)
㈇ 동열 아저씨는 할머니가 수시로 집으로 불려들었고 또 자주 집에 인사차 오셨는데 할머니가 동열아저씨를 부른 것은 (슬픈 이야기 이지만) 모산에 모모분이 가끔 이목동을 비하 발언할 때 동열 아저씨를 불러 우리집에서 양자간 자손이기에 생가를 잊지 말라는 뜻이였고 모산에 살지만 남재공후손으로 참의공과 사교당집안으로 양자간 후손들의 묘를 쓰도록 허락하여 경연선조와 동열아저씨 선조분들 묘가 이목동 남재공 문중산에 모셔져 있다.
4. 숙종33년(1707년) 조직된 모산 대동계(계원명단이 3권이기에 나의 직계만 사진 찍었으나 순서가 바꾸어짐)
※ 대동계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존했으면 함(문화재 등록을 하고)
정사년(1857) 이강(이후기록) 대동계원명단 권2
을묘년 영조11(1375)년 3월 동계안
① 313년전 숙종33년(1707년) 창립 : 영한(남재공 증손자) 한징(남재공 증손으로 참의공후로 양자감) 이름아래는 싸인임, 모산에 정씨 이씨도 대동계원임.
진사 영한은 10대조 경창과 4촌형인데 나주 향교에서 활동하셨고 재산이 너무 많아 아버지 즙을 증형조참의(인조때 나주목에 배정된 공명첩으로 증직을 받은 듯함)로 하신분임.
경창(10대조) 류지 : 영팔정중수시 대동계 도유사임
진사 수익 : 남재공종손 봉석 10대조
필세 : 봉석 9대조
② 경연 : 신북면장
③ 금열(아버지, 간은정)
※ 고조는 이목동에 사셨지만 모산으로(당시 모산임) 조부는 이목동으로 아버지는 간은정(월평리)으로 표기됨(증조와 윗대 명단은 대동계 명단을 자세하게 보면 있을 것임)
※ 고조는 이목동에 사셨지만 모산으로(당시 모산12동네임) 조부는 이목동으로 아버지는 간은정(월평리)으로 표기됨(증조와 윗대 명단은 대동계 명단을 자세하게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임
류수택 : 하정공종회장
④ 인화 : 조부(字 學來, 이목동)
병현(고조) : 당시 이목동이 모산이기에 이목동이라 안씀
재욱(봉석아버지) 동열(신북면장), 신걸(신일 : 남재공영암종회장)
인구(신북면장)
수득 : 경창 아들로 당시 나주목에 근무했다는데 여기는 봉사로 기록됨
대동계 참석하고 증조 후손들 결산보고하고 시간이 없어 서당동 영모재각위 남재공과 아들 손자 묘를 멀리서 인사하고 왔다.
남재공과 아들 사복사정의 묘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고속도로에 묘지가 수용되어 아버지 모강공과 형님4분(참의공, 판서공, 내금의공, 청계공)이 계신 서당동으로 이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 문관석과 망주가 문화재급이기에 이곳으로 2017년 모셔왔고 아버지와 4분 형님들의 묘비가 오래되어 새로 비석을 세우면서 구비와 신비 2개가 묘 앞에 있기에 남재공은 새비석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하정공과 약재공처럼 묘역 안내문을 설치했는데 모산에 없는 풍습이라 말이 많지만 경기도에 있던 대로 옮겼는데 말이 많아 힘들다.
망우정 이씨 광산김씨 등도 묘안내판이 있는데 모산에서는 안내판이 처음이라 말이 많지만 내가 남재공 집행부가 아니기에 방법이 없지만 몇가지 시정을 건의 했다.
2019년 모강공 시제 때 모강공 묘역에 안내판을 세우기로 했다니 모산도 조금씩 변화가 있을 듯하다.
5. 아버지 자랑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유교 덕목을 실천한 것이 아버지 신조이였기에 내가 어렸을 때 보면 수 많은 일가분들이 전국에서 오셨고 1960년대는 손님으로 오신분의 한복을 세탁하여 다리미질해서 가실 때까지 보통 10여일간 먹고 자면 그 분을 만나기 위해 모산에서 오시면 술상에 식사 대접을 어머니가 주로 하셨고 집사람은 1973년부터 어머니 대신 술상과 식사 대접을 아버지의 당숙인 인형(寅亨,1897-1976, 분토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까지 이목동 반남대월리 디시 다도 왕곡 본량 분들이 오셨고 아버지는 대승공 19세 남재공(몽삼, 직산군수)부터 31세 아버지 인화(寅化,1879-1962)까지 묘비를 세우고 위토답을 마련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셨지만 본인 이름 석자를 세기지 않고 묘비는 종손이름으로 위토답은 종중으로 구매하여 남재공부터 할아버지까지 각자 위토답이 있게 하신분이다.
1946년 해방후 바로 후손들이 벼 한근(600g) 두근, 좀 잘살면 5근, 10근 모아 위토답을 사고 1978년까지 경기도 사리현 남재공 시제에 모산에서 寅鎬 東烈 寅伯 寅甫 泰淵 明淵 여러분이 가셨고 가신 여비를 지출한 계책이 있다.
묘비를 보면 장흥인 고광열, 전주인 이현재(고모 시숙)이 撰(짓다)한 비문은 아버지가 일 하셨구나하는 것이다.
태리동 영수재각에도 아버지가 주도적으로 하여 재각을 지였으나 당시 계책에 유사로만 기록이 있고 영수재에는 아버지 이름이 없다. 고양시에 1970년에 1,000평 논을 산 것이 평당백만원이면 100억 재산(2000년에 40억임)인데 분토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정읍 친척과 함께 일부 모산후손들 반대를 설득해서 지금 팔 예정은 없지만 큰 재산이다.
첫댓글 훌륭한 선조님들의 기록이 있어 좋습니다.
글씨가 대단한 내공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