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리는 길안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7km 정도를 가서 왼쪽에 난 작은 도로를 따라 가면 나타난다. 이 길의 입구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마을 뒤쪽에는 계명산이 있는데 요즘 여기에 자연휴양림이 개발되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란리는 원해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고종 32년에 길안면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사리, 미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란리에는 57가구에 136명이 거주하고 있다.
▶ 골안?고란(古蘭)?원고란
이 마을은 고란리의 자연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국도에서 고란리로 접어드는 도로를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나타난다. 주위에는 높은 산으로 둘러져 있어서 분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14세기 경에 개척되었는데 입향시조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보백당 선생도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할 때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골안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주성을 이루면서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중미고개:원고란에서 아랫미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메고개라고도 하는데 마을과 마을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사랫골:현재 휴양림이 있는 골짜기이다. 싸리골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싸리나무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용 소:원고란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울이다. 여울 위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용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용바위를 내리치면 비가 온다고 하여 바위를 많이 쳤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용의 턱 부분이 깨어져 나갔다고 한다.
◇ 행정골:원고란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고란에서 모치골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너븐등 입구에 해당되기도 한다.
▶ 모치골?모치곡(茅治谷)
고란리의 남쪽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 원고란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을 개척할 때 잔디가 우거진 곳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모치곡(茅治谷)이라고 한다. 또 모치새가 많이 있다고 하여 모치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2가구가 살고 있으며 복부공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 기장재:모치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능선이 길어서 붙인 명칭으로 예전에는 이 길을 통하여 대사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제당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모치골의 동제당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모치골 주민들이 매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 잠뱅이재:모치골에서 구수리의 잠뱅이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잠뱅이 마을로 통하는 고개라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 너븐등?넓은등?광등(廣嶝)
이 마을은 원고란과 모치골 사이에 있다. 이 마을은 1965년 각처의 도시 근교 노동자들이 화전(火田)을 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것이다. 마을 명칭은 산등(山嶝)이 넓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떠나고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 아랫미내?하미천(下眉川)
이 마을은 원고란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금곡리(金谷里)의 미천 아래 쪽이 된다. 냇물이 눈썹처럼 반월형(半月形)으로 흐르는 모양에서 미천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곡리 미천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하미천, 아랫미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하미천에는 묵계(?溪)와 송사(松仕)를 잇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 옆에 비스듬히 돌출한 웅장한 모습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오뉘바위라 한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옛날 이 바위 옆을 지나던 오누이가 있었다. 이들은 멀리 사는 친척집을 다니러 집을 나섰는데 이곳을 지날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워낙 세차게 내리는 소낙비여서 앞뒤를 분간 할 수 없는데 다가 인가도 없는 외딴 산골이라 오누이는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산비탈의 바위굴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날은 어두워져서 오누이는 바위굴 속에서 옷이 젖은 채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우게 되었는데 두려움과 추위로 떨다가 그만 이성을 잃고 불륜을 저지르려는 그 순간 하늘이 노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앉으면서 큰 바윗덩어리가 오누이를 덮쳐 그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뉘바위라 불렀다고 전하며 오뉘바위에는 한쪽이 무너져 내려앉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고 큰 바윗덩어리에는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사람들은 오뉘바위를 '신명(神明)이 지켜준 천륜(天倫)의 성역(聖域)'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 장수궁디바우:오뉘바우가 있었던 자리에서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움푹들어 갔는데 이것은 장수가 엉덩이를 박았다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명칭이 유래한다. 또 이것을 쌀개바우라고도 하는데 바위의 모양이 방아의 쌀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졌다.
◇ 미천들:미내 앞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미내들이라고도 한다. 이 들판에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길안천에 보가 설치되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