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3
2014. 04. 15
저 단단한 몸통 어디에
눈물과 웃음 흐르는 핏줄이 있을까
사람들은 팔짱 낀채 물끄러미 무대를 본다
한 여인 갓난 아기같은 바이올린 품에 안고
긴 활로 구애를 펼친다.
주유기로 기름을 넣듯
분주한 팔놀림 위로 가쁜 호흡을 쏟아붓는다
바이올린은 여인의 눈길과 숨결을
되새김질 한 뒤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인의 눈물보다 짜고 웃음보다 달콤한 선율들
팔짱을 푼 사람들은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도
꼽혀있는 주유기를 발견한다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선율들이 밀려들고
네 줄의 실에 매달려
연극하는 인형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지진처럼 흔들린다
견고했던 세상의 끈은 모두 끊어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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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가곡마을에서 열린 이선이 모스크바 국립음대 교수님의 바이올린 독주회도 감동이었습니다.
어릴 적 클래식 음악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처음 발목을 적시게 해 준 모짜르트의 소나타에서,
종교적 경건함으로 언제나 이 부산한 세상에서 나뭇잎처럼 굴러다니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세자르 프랑크의 소나타, 그리고 러시아의 웅혼한 대지와 슬픈 역사가 잉태한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의 압도적인 힘으로 언제나 내 영혼을 옭아매는 차이코프스키의 '소중했던 시절의 추억'과,
바이올린 독주의 고전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까지~
바이올린의 깊고 넓고 높고 강렬한, 애잔하고 요염하고 정열적이고 발랄한 선율에 홀린 연주였습니다.
도대체 이 작은 악기가 어떻게 온갖 오묘한 소리를 다 품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이 경이로운 연주를 들을 때마다 도무지 궁금해지는 수많은 물음 앞에
소금물을 들이켠 입처럼 갈증이 샘솟습니다.
이선이 교수님은 네 곡의 연주에 인간의 노여움(怒)과 기쁨(喜), 즐거움(樂)과 슬픔(哀)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는데요,
유교적 사유로 본다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이성이 아닌 감성을 대표하는
칠정(七情)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말 이 네 곡들은 연주자의 의도대로 노여움과 기쁨, 즐거움과 슬픔을 품고 있는 곡일까요?
이 곡을 작곡한 네 사람의 작곡가, 그리고 연주를 듣는 청중들은 이런 감정의 변화를 연주자와 똑같이
느낀다는 뜻일까요?
극히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장조의 음악, 템포가 빠른 멜로디, 고음의 선율은 밝음, 기쁨, 환희, 정열을
상징할 수 있고, 단조의 음악, 템포가 느린 멜로디, 저음의 선율은 슬픔, 비탄, 음울, 노여움 등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구별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듯 합니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분명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 슬픔을 녹여 멜로디와 음표에 넣었는데, 엉뚱하게도
듣는 청중은 기쁨이나 환희를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환희에 겨워 곡을 써 내려갔는데 청중은
그 음악을 듣고 알 수없는 비애와 허무에 사로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이 교수님이 첫번째 들려준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노여움의 기분을 자아내기 보다는
마치 추운 겨울이 지나고 산에 들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어여쁜 꽃들이 돋아나는 듯한 경쾌한 멜로디로
내게는 들렸습니다.
두번째로 들려주신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도 환희의 노래라기보다는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신 앞에 무릎 꿇은 수도승의 경건한 기도처럼 들렸습니다. 기쁘기보다는 한없는 슬픔과 회한을 담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연주할 때 작곡가와 연주자의 감정을 담는 것은 가능할까요?
또 그 연주자의 의도는 청중들에게 오차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음악이 의미를 담을 수 있는가'라는 소위 '음악 의미론(Music Semantics)'의 문제는 음악사에서
혹은 철학사에서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였던 듯 합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는 음악이 분명 음악 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쪽이 우세했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실체를 두고는 논란이 많습니다.
뉴욕 필 하모닉을 오래동안 이끌었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음악은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Music is never about anything; music just is)."
그러니까 음악에 담긴 '의도'나 '목적'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사실은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예를 들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을 때 어떤 이는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을 노래한 감미로운
선율이라고 느끼는가 하면 (아마도 이런 사람은 연인과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낸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혹은 이 곡은 연인들의 사랑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느끼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야금을 만든 명인 우륵의 일대기를 그린 김훈의 소설 '현(絃)의 노래' 에서 우륵은 그의 제자 니문과
악기의 소리와 느낌에 대해서 이런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 금(琴)의 소리는 줄의 것입니까?"
" 북은 가죽의 소리고, 피리는 바람의 소리이다. 징은 쇠의 소리고 목탁은 나무의 소리다.
소리의 근본은 物을 넘어서지 못한다."
" 하오면, 물이 어찌 사람을 흔드는 것입니까?"
" 울림이다. 울림에는 주객이 없다. 그래서 소리가 울릴 때, 물과 사람은 서로 넘나들며 함께 울린다.
개소리, 닭소리, 꿩소리가 다 마찬가지고 대장간 쇠망치소리와 다듬이 소리며, 파도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눈길에 소달구지 미끄러지는 소리와 어린아이 울음소리와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다 이와 같다.
" 하오면, 듣는 자가 여럿이면 한 소리가 여러 소리가 되어 소리는 정처없는 것입니까?"
바로 이 마지막 부분, 만일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고 할 때 듣는 자가 여럿이면 각기 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비슷한 혹은 동일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륵은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고, 이 우륵이 유보한 답변에 제 의문도 자리합니다.
어둠을 밀어내는 휘영청 보름달이 비단자락처럼 깔리고 그 아래 대숲에서는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를
도둑처럼 스치는 바람소리에 섞여 우륵이 타는 가야금 소리가 은은하게 흐를 때, 듣는 이들은 어떤 소리로
들을까요? 파도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눈길에 소달구지 미끄러지는 소리, 군사들의 말발굽소리 중
어느 소리로 들릴까요?
아마도 듣는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들리는 소리는 다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소리로 듣는다고 해서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듣는 이들의 다양한 주관적 감성, 그 감성이 그려내는 다양한 이미지와 뻗어가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이야말로 음악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더해주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작곡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악보상의 음표는 연주자에 의해 새로운 음표로 거듭나는 것이고, 연주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음표는 다시 청중의 몸 속에서 새로운 음표로 환생합니다.
노래는 마치 누에고치가 나비되듯 뱀이 허물을 벗듯 무수한 노래로 사분오열함으로써 음악을 풍요롭게
하고 인간의 감성을 충만하게 합니다.
이마에 땀을 뚝뚝 흘리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이선이 교수님이 새롭게 창조해 낸 모짜르트와 프랑크와
차이코프스키와 사라사테는 다시 수십명 청중의 귀에서 또 다른 작곡가와 노래로 태어났습니다.
그 감동의 순간, 나도 노래의 숲속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고 벌이 되어 두시간 동안 신나게
쏘다녔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되는 이선이 교수님의 공연엘 다시 가봐야겠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선율이 불러 일으킬 내 감정이 엊그제 가곡마을에서 일어났던 감정과 같은 것일지
다른 것일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 여의도에서 goforest -
첫댓글 늘 좋은글로 연주자와 연주홀에 힘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두가 너무나 아픈 4월이 가고 내일이면 벌써 5월이 되네요...
선생님 리뷰를 읽으며 아픈 마음으로 힘겹게 음악회를 준비하는
많은 연주자분들께도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아픈 마음으로 힘겹게 5월 연주홀 음악회 일정을 짜고 있습니다
말하는 것도 글을 쓰는것도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5월달에는 아름다운 음악회로 심한 상처를 받은 우리모두
서로 치유하고 치유받는 좋은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