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시, 봄》
11부 ― 오래전 우리가 스쳤던 자리
토요일 오후, 도현은 약속 장소를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서윤이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는 “가 보면 압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차는 도심을 벗어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더니 낮은 담장과 넓은 정원이 있는 한 집 앞에 멈췄다.
서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기….”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도현이 조용히 웃었다.
“뭔가 기억납니까?”
서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나무, 마당 한쪽의 돌계단, 낮은 처마. 건물은 많이 달라졌지만 정원의 구조만큼은 어딘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설마.”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편지에 나온 그 집입니다.”
“우리 예전에 만났다는 곳?”
“네.”
서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떻게 찾았어요?”
“예전 회사 사람들 모임 장소였던 집이 지금은 작은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다음 데이트 벌금 내라고 했잖습니까.”
서윤이 웃었다.
“벌금 치고 너무 거창한데.”
“저는 위반이 많아서요.”
“무슨 위반?”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진 죄.”
“또 시작.”
도현은 웃으며 정원 쪽으로 걸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마당을 걸었다. 오래전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시간은 대부분의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서윤이 돌계단 앞에서 멈췄다.
“잠깐.”
“왜요?”
“나 여기 기억나요.”
도현도 멈췄다.
“정말?”
“아주 희미하게.”
서윤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안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나는 밖에 나와 있었어요.”
“글 쓰고 있었습니까?”
“아마.”
“그때도 혼자?”
“응.”
도현이 웃었다.
“그때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군요.”
“그런데 누가 와서 음료수를 줬어.”
“제가?”
“모르겠어요.”
도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가 아니면 곤란한데.”
“왜요?”
“추억에 다른 남자가 들어가면 싫습니다.”
서윤이 웃었다.
“또 질투.”
“이제 숨기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맞아요.”
조금 더 걸어가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서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저 나무.”
도현도 바라보았다.
“기억납니까?”
“응.”
이번에는 확신이 있었다.
“저기서 종이가 날아갔어요.”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응.”
서윤은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쓰던 글 몇 장이 바람에 날렸고, 어떤 남자가 주워 줬어.”
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저도… 기억나는 것 같습니다.”
“뭐가?”
“하얀 종이가 나무 아래로 날아오던 것.”
도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정말 화난 얼굴로 뛰어오던 것.”
서윤이 웃었다.
“내가?”
“아마.”
“왜 화났는데?”
“제가 종이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기억났습니다.”
“그게 도현 씨였어?”
“아마도.”
“내 글을 밟아?”
“바람 때문에 잡으려고 그랬겠죠.”
“지금 생각하니 첫인상이 별로였네.”
도현이 웃었다.
“그래도 다시 만났잖습니까.”
“30년 넘게 지나서.”
“그 정도 기다렸으면 용서해 주세요.”
서윤이 피식 웃었다.
“기다린 건 아니면서.”
“지금부터 기다린 걸로 하죠.”
“역사 조작.”
“사랑은 약간의 편집이 필요합니다.”
둘은 한참 웃었다.
정원 끝에는 작은 찻집이 있었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도현이 메뉴를 보다가 말했다.
“차 뭐 마실래요?”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메뉴에 없습니다.”
“그럼 도현 씨랑 같은 거.”
그 말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좋아서.”
“뭐가?”
“같은 거 마시겠다고 해서.”
서윤이 웃었다.
“그게 뭐라고.”
“별것 아닌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자꾸 감성적이네.”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건축가 맞아요?”
“요즘은 연애업이 더 바쁩니다.”
서윤이 웃었다.
차가 나오고 둘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현 씨.”
“네.”
“만약 우리가 그때 조금 더 오래 이야기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혹시 그때도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제가 연애했을 수도 있고.”
“누구랑?”
“서윤 씨랑.”
“그럼 준혁은?”
도현이 얼굴을 굳혔다.
“그 이름은 오늘 금지합시다.”
서윤이 웃었다.
“질투 진짜 심하네.”
“서른 해짜리 경쟁자라니까요.”
“경쟁 끝났어요.”
“그래도 싫습니다.”
“왜요?”
도현은 차잔을 내려놓았다.
“서윤 씨가 그 사람 이야기할 때 가끔 눈빛이 아주 멀리 갑니다.”
서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알아요.”
“그때의 나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압니다.”
“그럼 믿어요.”
도현은 서윤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정말?”
“네.”
“완전히?”
“80퍼센트.”
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머지 20퍼센트는?”
“제가 더 잘하면 없어질 겁니다.”
“뭘 얼마나 잘하려고.”
“평생.”
서윤이 웃었다.
“또 평생.”
“이제 습관입니다.”
찻집을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정원을 걸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도현이 멈췄다.
“서윤 씨.”
“왜요?”
“여기서 사진 하나 찍읍시다.”
“사진?”
“30년 만에 재현.”
“싫어요.”
“왜요?”
“어색해.”
“그럼 자연스럽게.”
“어떻게?”
도현은 직원에게 부탁해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리고 서윤 옆에 섰다.
처음에는 어깨 하나 정도 거리가 있었다.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가까이 붙으세요.”
서윤이 도현을 흘겨보았다.
“일부러 부탁했죠?”
“아닙니다.”
“수상해.”
직원이 다시 말했다.
“조금만 더요.”
도현이 아주 조심스럽게 서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윤은 순간 굳었지만 곧 웃었다.
찰칵.
사진이 찍혔다.
도현이 확인하고 웃었다.
“잘 나왔네요.”
서윤도 화면을 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웃고 있었다.
화려한 사진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된 나무 아래 선 두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보내 줘요.”
“싫습니다.”
“왜요?”
“제 휴대전화 배경으로 할 겁니다.”
“내 사진인데?”
“우리 사진입니다.”
서윤이 웃었다.
“욕심 많네.”
“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이 차를 천천히 몰았다.
서윤은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좋았어요.”
“뭐가 제일?”
“우리 과거가 꼭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리고 조금 신기했어요.”
“뭐가요?”
“그때는 서로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도현이 웃었다.
“그러게요.”
“사람 인연이 참 이상해.”
“저는 요즘 우연을 조금 믿게 됐습니다.”
“우연을 믿어요?”
“아니요.”
도현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
“우연인 척하는 인연.”
서윤이 웃었다.
“건축가가 그런 말도 해?”
“연애하면 바뀐다니까요.”
신호등 앞에 차가 멈췄다.
도현이 갑자기 말했다.
“손 좀.”
“왜요?”
“그냥.”
서윤이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그 손을 잡았다.
“운전해야죠.”
“신호 빨간불입니다.”
“초록불 되면 놓을 거예요?”
도현이 잠시 생각했다.
“싫은데.”
서윤이 웃었다.
“위험해요.”
“그럼 잠깐만.”
그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밤 서윤은 집에 돌아와 사진을 다시 보았다.
30년 전 어쩌면 스쳤을 두 사람이 같은 나무 아래 다시 서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현이었다.
〈사진 봤습니까?〉
서윤이 답했다.
〈네. 생각보다 잘 나왔네요.〉
〈생각보다? 저는 아주 좋습니다.〉
〈왜요?〉
답장이 조금 늦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요.〉
서윤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러다 곧 다시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말 비워 두세요.〉
〈왜요?〉
〈여행 갑시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
〈어디로요?〉
도현의 답은 짧았다.
〈바다. 1박 2일.〉
서윤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1박 2일.
둘만의 여행.
곧이어 도현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은 따로 잡겠습니다.〉
서윤은 피식 웃었다.
〈누가 걱정했어요?〉
답장이 즉시 왔다.
〈제가 조금 했습니다.〉
〈왜요?〉
이번에는 한참 뒤 답이 왔다.
〈같이 있으면 자꾸 욕심이 생겨서요.〉
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메시지.
〈그래도 천천히 갈 겁니다. 약속했으니까.〉
서윤은 오래 고민하다 짧게 답했다.
〈좋아요. 같이 가요.〉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음 한쪽이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그 1박 2일의 바다 여행에서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사랑해요’라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을.
그리고 그 말을 먼저 하게 되는 사람이 뜻밖에도 서윤 자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