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영화 보니 참 좋네
2023. 8월 19일
아들이 86인치 TV를 한 대 들여놔서 요즘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다. 요 몇 달 사이에 벌써 수십편을 봤다. 매월 요금 얼마 내면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으니 참 세월 좋다.
어릴 때 고향에는 극장이라는 게 없으니, 국민학교 운동장에다 큰 천막을 쳤다. 어린 것이 돈 주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아무리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려도 기도 아저씨들이 지키니 못 들어간다.
끝날 때쯤이면 아저씨들이 슬쩍 없어진다. 그 때사 잽싸게 들어가서 다 끝나가는 영화를 보곤 했지.
요즘은 평소에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으니 뭐, 늙어지면 영화보는 것도 괜찮다. 시도 때도 없이 오전에도 보고, 한 밤중에 자정을 넘겨서도 본다. 나이들어 직업이 없으니 참 좋다. 책을 보다가 눈이 아파도 영화를 틀고, 컴퓨터로 유튜브를 보다가도 지루하면 영화를 본다.
결혼한 후에도 17인치 흑백 TV도 못 사서, 저녁이면 마누라와 애는 집에 두고, 남의 집에 가서 연속극을 보던 시절에, 친구 봉선이 내게 TV를 사주었다. 고마웠지. 암.
그 때를 생각하면 86인치는 달부 극장이다. 먼저 보던 55인치는 지금 퇴출되어 마루 한 켠에서 사치스럽게 쉬고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영화를 많이 보니 문제가 생기더군. 방화, 외화, 환타지, 서부 영화, 뭐 가리지 않고 보지만, 영화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살살 보이기 시작했는데, 내가 자꾸 이상한 환각에 빠질까 봐 걱정도 된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잔인한 살상장면이다. 그런 장면에서는 영화들이 서로 더 자극적으로 살상하는 경쟁을 하는듯 너무 심하게 죽인다. 4차산업시대에 접어든 요즘은 고도의 촬영기술이 뒷받침되니 총알이 몸을 뚫고 나가면서 피가 튀는 장면조차 세밀하게 묘사되어 너무 섬뜩하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더 자극적인 죽음을 연출하려고 애쓰고 있을 것 아닌가?
옛날에는 외국 영화가 잔인했는데 요즘 방화도 장난 아니다. 너무 심하다.
그 다음은 손쉬운 섹스. 무슨 정조관념이 그렇게도 희박한지, 노다지 이혼한 주인공에, 숨겨논 자식에,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에, 만나서 바로 섹스에 들어가기까지 하는, 가벼운 건지, 격정적인 건지, 특히 대학생들은 물론 고교생들까지도 이를 주저하지 않는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난 그저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그런 장면을 만난 것인데, 하필 그 장면에 지나치던 아내는 “뭐 맨날 그런 거나 보느냐?”고 핀잔을 준다. 억울하다(궁시렁궁시렁).
마약 관련이거나 무슨 첩보영화 등에서는 심지어 FBI와 CIA 영화조차도 동료를 믿을 수 없고, 상사나 부하를 의심해야 하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경찰도 범인과 한 패고, 정치가도 친구도 애인도 누구도 믿기 어려운 반전에 반전이 이어져서 이거 인간을 믿어야 하는지, 인간은 반드시 의심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첩보영화나 특수임무를 띤 영화들은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무슨 전기 회로까지 통달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배역은 대부분 허약하게 생긴 샌님 타입의 남성이나 혹은 섬세한 여성들이 맡는다.
또, 사람을 놀래키는 데는 격투장면이나 사격 등에서도 남성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원더우먼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가능한 일인지, 안 가능할 것 같아서 일부러 호기심 끌려고 그렇게 만든 건지, 영화 많이 보니 알게 되었다.
가족 사랑에 대한 영화도 많다. 가족의 구출이나 위험 제거, 복수에 대한 내용이 참 많다. 대개 잔인한 복수극이 펼쳐진다. 자폐 등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내용도 많다.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자연 이야기를 보면 더 좋다. 대자연의 숲과 들판 그리고 호수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심리 변화나 사랑 이야기는 경치만 봐도 본전 뽑는 판인데, 내용도 너무 좋은 게 많다.
요즘 ‘아바타’ 같은 판타지도 있지만, 현실과 가상을 쉽게 넘나드는 판타지 영화가 많아졌다.
불가능 없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내용, 절대 죽지 않고, 중국영화에서는 죽었다가도 특별한 처방을 해서 되살아나는 불사조 주인공도 있다. 처음에는 판타지 영화를 너무 허구적이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좀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거 뭐 일종의 과거 회상 또는 꿈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여, 이제는 친숙한 편이다. 한 영화에서 대여섯 번씩이나 조선시대를 오가는 내용에서는 이건 재미를 느끼기보다 영화가 치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판타지 영화는 정교한 과학이 뒷받침해야 새롭다. 납득이 안 되는 대충대충은 관객이 외면한다.해저 영화에서는 특히 조명이 필수인데, 아바타에서는 ‘자체’ 발광(發光)하는 해초가 있고, 심지어 특별한 색을 발산하는 해초로 길 안내도 한다고 설정하니, 아무튼 야광 해초는 어떤 원리로 전기를 만드는지 연구하고 싶다.
수십 년 간 전기를 만들며 산 나는 전기 뱀장어나 발광 해초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원리에 대해 좀 새로운 과학기술이 영화에도 도입되어야 하겠다는 도전적인 생각을 한다.
아바타에서는 물 속에 사는 인간은 ‘복식호흡’이라는 것으로 숨을 쉬지만, 원천적으로 인간도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숨을 쉬면서 신속하고 격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영화에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내가 만들면 기똥차게 망들 것 같다.
중국 영화 랑야방 1편 권력의 기록과 2편 풍기장림은 내가 본 드라마 중 최고라 생각되어 다른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있다. 각기 약 50편씩으로 대작인데, 삼국지나 다른 작품들을 넘어서는 웅장한 교훈을 얻는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의리, 충절, 배신, 변절, 우애, 정의, 복수, 인내 등 많은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삼국지는, 특히 조조를 대표자로 하여,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갖은 음모 술수를 다 부리는 내용’이 강하게 지배한다. 랑야방에도 그런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만 삼국지와는 판이하다. 랑야방은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우국 충정과 인간의 도리’를 배울 수 있어 참 좋다. 앞으로도 더 많은 새 영화들을 보게 될 터이지만, 랑야방 같은 작품을 더 만났으면 좋겠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 장예모 감독은 대단한 거작을 많이 만들고 내용도 대부분 좋은데, ‘황후화(皇后花)’ 같은 작품은 “아 결국 저런 비참한 꼴 보라고 영화를 만들었나?”라는 생각이 들더군. 화면 전체가 시종일관 황금색으로 채워진 초거대 작품이었고, 많은 소재를 담고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비밀과 반전의 연속이어서, 내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뭘 배우라고 이 영화를 만든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재미나게 보면 되지 무슨 교훈까지 따지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재미에다 더해지는 교훈이 있을 때 영화의 의미가 더 크다는 생각이다.
그 때문에 황후화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라.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외롭다는 말이 있다. 영화 속 황제도 너무 외롭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장감독이 한국에 와서 설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설정 자체가 그다지 감명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이 들어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영화를 많이 봐도 좋은 점이 하나 있더군.
재탕 삼탕 보니 주인공 얼굴은 알겠는데, 저 영화를 전에 언제 봤던 건지, “가만있자, 며칠 전에 본 것 같은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더라?”라는 의문을 지니면서도 그걸 기억하지 못하니, 새로 봐도 새삼스럽다. 만약에 젊었을 때처럼 한 번 봤다고 줄거리 다 외우면 두 번 볼 영화 없게?
아! 내가 멋진 영화 하나 만들면 어디 덧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