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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맹호사단 안케패스작전의 치욕
박경석
맹호제1진 초대 在求大隊長(예 육군준장)
군사평론가협회 회장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세계 일급 군대로 명성을떨치며 분전하고 있었지만 파병 중반을 넘어서자 여러 분야에서 생기를 잃고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첫 전투부대 파월시의 당당하던 긍지와 명예 또한 석양이 기울듯 스러져 갔다. 한편,파월 지휘관의 선발에서의 잡음은 계속 이어졌다. 잡음은 대개 금전과 연관된 것이므로 군으로서는 명예에 큰 흠집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지휘관들은 월남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 무공훈장을 받기 위한 전과 조작으로 때때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모든 병폐는 1969년 5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귀국하고 일본군 출신 이세호 장군이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잡음은 계속 확대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세호 장군은 육사 2기로 전임자 채명신 장군의 육사 5기보다 육사 3개 기수 선배이다. 이 기형적인 인사는 많은 지휘관들에게 회의를 안겼다. 더욱이 일본군 리더십의 퇴조를 월남전 참전으로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시점에서 다시 일본군 리더십의 출현은 때때로 예하 사단장과 트러블을 일으켰다. 특히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과 김영선 백마 제9사단장과의 충돌은 위계질서에서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당시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제외한 예하 지휘관 대부분은 미국 군사학교를 이수했기 때문에 새로운 한국형 리더십으로의 발전과정에 있었음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 무렵 주월 맹호사단 기갑연대의 안케패스 전투는 치열한 정규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시종일관 지휘력 부재로 졸전이 이어지면서 피해 또한 가장 많이 입어 주월한국군은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안케패스 전투는 치욕의 판정패였지만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승전으로 미화하여 홍보했다. 더구나 실패한 작전을 승전으로 미화하기 위하여 패전 당사자들에게 많은 무공훈장을 쏟아부었다. 안케패스Ankhe Pass란 베트남 빈딩성의 성도 퀴논에서 크메르 국경지대까지 관통하는 19번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고갯마루를 일컫는다. 월남군 제2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플레이크로 관통하는 유일한 보급로로서 군사적 중요성이 클 뿐 아니라 19번도로는 군사작전에 중요한 생명선이기도 했다.
안케패스는 원래 미 제1기갑사단의 예하부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970년 7월에 철수함에 따라 맹호 기갑연대 제1대대 제1중대가인수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 일대는 안케고개 정상인 638고지를 비롯하여 553고지, 544고지, 240고지 등으로 높고 낮은 고지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안케패스의 중요 지형지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지대 고갯마루에서 가장 높은 638고지라는 것이 당연했지만 웬일인지이 평범한 기초 전술을 무시하고 제1중대는 같은 능선상의 638고지를 피해 가까운 거리의 그보다 얕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했다.
제1중대는 부근 일대의 정찰은커녕 매복 등 적극적인 경계대책을 포기한 채 안케패스 안전통행을 위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고 한국군도 철수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72년 3월 29일 정오를 기하여 월맹군의 일제 공세가 각처에서 시작되었다. 4월 11일 새벽 4시경, 안캐패스의 제1중대 기지에 한발의 조명지뢰 폭파음이 울려 퍼지면서 공격의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월맹군이 이미 1중대 기지를 가까운 거리에서 감제하고 있는 638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월맹군은 일제히 중대기지에 공격을 가해 왔다. 맹호사단 기갑연대장 김창렬 대령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수색중대와 제3중대를 투입, 안케패스로부터 19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수색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오부터 쌍방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적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맞붙었다. 순식간에 2소대의 6명이 전사하고 더 많은 전상자를 내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철수하느라 2소대장을 비롯한 6구의 시체를 회수하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중대장까지 부상했다. 시체 회수를 위한 작전마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사단장 정득만 장군과 주월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은 연대장 김창렬 대령에게 제각각 명령 지시를 내리자 지휘의 혼선 속에서 연대장은 당황한 나머지 갈피를 못 잡고 제2대대의 6중대, 제3대대의 10중대, 11중대 등의 혼성부대를 지휘계통상 전혀 관계없는 제1대대장이 지휘토록 하여 638고지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혼합편성은 건제를 무시한 하책이었다. 건제대대(建制大隊)를 새로운 방향에서 투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부대를 동일 방향에서 축차투입하자 피해는 계속 늘어났다.
제1대대장과 제1중대장 모두 이미 작전 개시 1개월 전에 월맹군이 638고지에 그 전에 맹호가 구축해 놓았던 진지를 보강한 후, 점령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적은 계속해서 유리한 감제지형 638고지에서 아군에게 정조준하며 각종 화력으로 공격을 가했다. 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포병화력으로 638고지를 강타했지만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진지는 끄떡 않고 저항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아군의 희생은 계속 늘어났다.
4월 14일에도 중대전술기지에 계속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졌고,638고지 탈취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던 공격축선상에서 공격은 계속 시도되었다. 제3중대는 분대단위로 전진시켜 겨우 7부 능선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638고지 일대가 조용해지면서 갑자기 적측에서 반응이 없자‘ 적이 철수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아해하며 9부 능선까지 접근하자 숨죽이고 있었던 적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며 기관총 사격을 가해 순식간에 3명이 전사하고 19명이 한꺼번에 부상했다.
전투가 시작된지 5일째가 되었는데도 아군 지휘관들은 적의 규모는 물론 상대가 월맹군인지 베트콩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주월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은 현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한 채 무전기로 연대장과 대대장들에게 호통만 쳐댔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 중인지휘관들은 누구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도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동안 지휘의 혼선이 이어졌다.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다.
4월 15일, 638고지 및 그 일대에 대한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미제7공군 소속의 F-4전폭기 연 41대가 네이팜탄과 고성능 폭탄 14만3천 파운드를 쏟아부었다. 이틀간에 걸친 포격과 폭격을 마친 다음 4월 17일 오후 제1대대장은 638고지에 대한 재차 공격을 개시했다. 그때 판단으로는 포격과 폭격으로 적이 모두 죽었거나 도주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별 경계심 없이 접근했다.
그러나 뜻밖에 아군이 8부 능선 가까이에 도달하자 숨죽였던 적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와 총 한 발 못 쏘고 희생자만 내고는 일제히 철수했다. 재차 공격에 실패하자 비로소 사단장 정득만 장군은 4월 18일 08시에 대대규모 작전에서 연대규모 작전으로 확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동일 목표에 대한 공격을 중대작전에서 대대작전으로, 대대작전에서 연대작전으로 확대하는 하책(下策)으로 치달았다.
4월 18일, 연대작전으로 다시 638고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부대 건제가 각각 다른 혼성부대의 지휘 혼란으로 이 공격마저 실패했다.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다. 4월 20일, F-4전폭기 4대를 불러들여 638고지에 4만 2천 파운드의 폭탄을 퍼부은 뒤 제61포병대대의 공격준비사격으로 강타하고 재차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적은 깊숙이 숨어 있다가 맹호가 수류탄 투척 거리에 도달하면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했다. 도저히 적을 무찌를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할 수 없이 폭격과 포격만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4월 24일 06시 40분,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적 저항은 이상하게도 없었다. 단숨에 638고지 정상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적의 흔적은 없었으며 텅빈 638고지를 무혈점령함으로써 치욕의 안케패스 작전은 끝났다. 적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철수해 버린 것이다. 이래서 19번도로는 겨우 개통되었다.
이로써 기갑연대는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12일간에 걸쳐 전개한 638고지의 전투를 마감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안케패스 전투를 미화하여 매스컴과 고국에는 승전으로 크게 홍보했고 전투 유공 장병이라 하여 엉뚱하게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을 쏟아부었다. 또한 638고지 정상에는 적을 축출 후 점령했다고 하여 놀랍게도 전승비(戰勝碑)가 크게 건립되었다. 이 안케패스 전투는 월남전 전 기간을 통하여 최대의 치욕적인 패배였고, 세계 전투사상 드문 난센스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미군 당국은 패전 장소에 승전비를 세운 한국군을 조롱했다. 이 전투의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전사 75명, 전상 222명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축소 발표되었다. 그후 확인된 전사자의 수는 배를 훨씬 넘었지만 비밀에 붙여졌다. 이 전투의 결과를 분석하여 다음 교훈으로 남긴다.
안케패스작전 실패의 교훈
1. 모든 전투에서 지휘의 통일(Unity of Command)은 기본원칙이다. 지휘의 혼선으로 참사를 맞았다.
2. 전투 시 건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휘의 혼선을 막는 기본책이다. 건제가 뒤죽박죽이었다.
3. 중대전술기지를 638고지에 설치하지 않은 것은 최대의 실책이다. 분명한 직무유기이다.중대장은 물론 대대장 연대장의 책임이 크다.
4. 실패한 축선에의 축차 투입으로 계속 공격을 시도한 것은 실패를 자초한 결정적인 하책이다.
5. 638고지에 1개월 전 월맹군의 진지 구축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정보수집, 수색정찰을 포기한 증거다.
6. 주월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을 비롯한 지휘선상의 모든 지휘관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7. 한국군 월남전 참전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치욕의 패전으로 기록된다.
8. 패배한 전투를 승전으로 미화한 것은 주월한국군의 최대의 굴욕이다.
첫댓글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때 되풀이되지 않는 방책이 선다.
여러 군사관련 매체에서 안케패스전투에 대해 문의가 옴으로 오래전에 쓴 평론을 게재한다.
지휘관들의 무모한 작전으로 희생된 모든 전우의 명복을 빕니다.
성공한 작전으로 미화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전승비는 베트남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