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중들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 잔치
누가복음 14:7-14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너는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
예루살렘 인근의 어느 부유한 바리새인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안식일 식사 자리였죠. 그 집의 주인은 이름을 대면 누구라도 알만한 명망가였습니다. 이날 잔치에는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초대되었습니다. 웬일인지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도 끼어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 식사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은 유대인 신앙과 정체성의 핵심이었고, 그 안에서의 식사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사회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해 질 무렵이 되면 집안의 안주인(어머니)이 등잔불을 켜며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에는 보통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낮 두 끼를 먹었는데 금요일 저녁 식사가 가장 성대한 만찬이었습니다. 음식은 미리 준비된 빵과 포도주, 생선, 채소, 꿀, 고기 등이었으나 부자와 서민들의 차이가 컸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아버지가 차려진 음식을 축복하고 포도주와 빵을 떼어 나누어 줍니다. 또 토라(율법서)를 읽고 영적인 대화를 통해 유대의 신앙과 전통을 배우죠. 그러니 안식일 식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율법을 기억하는 공동체적 예배의 공간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안식일 식사에는 보통 가까운 가족, 친지, 사회적으로 지위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이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이는 기브엔 테이크, 나중에 보답(‘초대의 상환’)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망을 유지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라삐나 서기관이 함께하고, 안식일 예법이 잘 지켜졌다면 더욱 권위를 가진 자리로 인식되었죠. 그러니 안식일 식사는 그 자체로 체면, 서열,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식사 자리는 U자 형태로 배치했는데 중앙에 주인이 앉고, 그 좌우로 서열대로 초대된 사람들이 앉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주인과 가까운 자리일수록 상석이었습니다. 식사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그 사람의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나게 되는 구조였죠. 특히 부유층의 안식일 식사는 자리 배치를 통해 ‘누가 존귀한 사람인지’를 증명하였습니다(눅 14:7–11 참조).
바리새인 집에 초대된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은근히 눈치를 보고, 서로 서열을 따지며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 사람이 조용히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의 몸은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수종병(水腫病)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수종병은 혈액 중 액체 성분이 신체 특정 부위에 차 몸이 붓는 병입니다. 이병에 걸린 사람은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말라 증세가 심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병이 걸린 사람들은 죄인이나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수종병은 당시 ‘돈에 환장한 사람’을 표현할 때도 썼다고 합니다. 계속 물을 마셔도 달랠 수 없는 갈증과 주머니가 두둑하면서도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고 혈안이 된 모습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예수 앞에 나온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께 간절한 눈빛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오늘이 안식일인데, 저를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초리가 날카로워졌습니다. 속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가?” 말하며 책을 잡으려 했죠. 예수를 시험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그 사람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눅 14:3)"고 물으셨죠.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손을 잡으시자, 곧 굳었던 손이 풀려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여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눅 14:5)"고 말이죠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있었지만, 동시에 사람을 돕는 자비의 행위가 옳다는 양심의 소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할 것이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너는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4:8-11)."
주인은 난처해졌습니다. 초대된 고관대작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죠. 예수께서는 이어서, 잔치 주인을 돌아보며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눅 14:12-14)."
또다시 잔치 자리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은 평소 안식일 식사에 자신에게 도움 될만한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죠. 식탁의 주인에 대한 말씀은 안식일 잔치의 진짜 목적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안식일 식탁은 더이상 권력과 체면의 무대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잔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3가지 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안식일 준수가 신앙 정체성의 핵심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철저히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유대 지도층들의 위선을 드러내며 ‘민중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짜 의미인 것을 강조하였죠. 5절의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여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는 반문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안식일 식탁의 전통적 서열문화를 바꾼 것입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잔치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회적 서열을 드러내고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안식일 식탁의 좌석 배치는 곧 사회적 지위의 표시였으며, ‘명예-수치 문화’ 속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계질서를 뒤집으며 민중들이 존중받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였습니다, 즉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겸손과 타인 존중의 가르침이었죠.
셋째, 안식일 잔치 자리는 조건 없이 베푸는 나눔과 포용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당시의 잔치는 주고받는(give & take) 사교와 거래의 장이었습니다. 야훼 신앙의 고취와 이스라엘 전통과 율법 수호라는 것은 명분에 불과했던 것이죠. 때문에 대부분의 안식일 식탁은 ‘주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는 식탁은 되갚음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니 그 자리에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초대해야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그들을 대신해서 하느님이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식일 식탁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이며 포용과 은혜의 자리라는 것이죠.
오늘날 해방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억눌린 자들의 편에 서신다.’ 민중신학적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민중의 눈물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치 비유는 바로 이런 선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권력자의 만찬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기업의 회장단 모임도 아니란 것이죠.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쪽방촌에서, 비닐하우스 외국인 노동자 숙소에서,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 현장에서, 사회적 참사 유가족 천막 안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권력을 쫓아 다투는 자리에 앉지 말고, 민중이 고난받는 그 낮은 자리에 앉아라. 그곳이 바로 내가 있는 자리’라고 말이죠.
지난 25일(현지 시간)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 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트럼프의 계획된 압박을 잘 막아냈다는 평가입니다. 물론 이 회담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트럼프의 조석개변하는 태도로 보아 앞으로의 과정이 더 험난할 것도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회담이 3가지 점에서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미일 3국의 극우세력들의 준동을 제압한 것입니다. 회담 3시간 전, 트럼프 대통령이 X에 올린 글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숙청이나 혁명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업을 할 수 없다"는 트럼프의 글이 있었죠.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극우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국내 일부 보수 정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 대통령의 방미 협상을 비관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 글이 마치 트럼프가 이 대통령을 거부하는 것처럼 선동하며 특검 활동까지 정치적 야욕이라고 덧씌우며 공격했죠.
하지만 극우 세력의 준동을 미리 예견한 한국 정부가 강훈식 비서실장을 보냈고, 트럼프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수지 와일스(Susie Wiles) 비서실장과의 회담을 통해 가짜 뉴스임을 분명히 함으로 우려를 불식시켰습니다.
두 번째는 방위비와 주한미군 현대화라는 주제로 한국을 중국에 대항하는 한미일 동맹체제에 귀속시키려는 네오콘의 계략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피스메이커(peacemaker)와 페이스메이커(pacemaker) 발언을 통해 전쟁 논제를 평화 논의로 바꾸는 신공을 발휘했습니다. 이로 인해 북미 대화와 남·중·미 대화의 가능성이 제기되었죠. 이 과정에서 남한이 패싱 될 것이라는 우려도 완화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간 신뢰 관계 구축입니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몰라도 트럼프가 만난 국가 지도자들 중에 극상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이재명 대통령이 유일합니다. 트럼프는 회담을 마치고 친필 메시지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당신은 위대한 사람이자 지도자다. 한국은 당신과 함께 더 높은 곳에서 놀라운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항상 당신 곁에 있겠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지렛대가 되길 바랍니다.
엊그제(현지 시간 8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IEEPA(국제긴급경제권력법)를 근거로 부과한 ‘상호관세’에 대한 연방항소법원(Federal Circuit)의 판결이 떨어졌습니다. 법원은 7대 4로 대통령의 IEEPA 권한이 관세 부과를 포함하지 않는다며, 트럼프 관세 정책이 권한 남용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IEEPA의 비상 권력은 일반적인 관세나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판결은 바로 적용하지 않고 10월 14일까지만 효력을 유예하였습니다.
아마도 트럼프는 대법원에 상고할 것이고 그 판결에 따라 세계의 경제는 또다시 요동칠 것입니다. 쟁점은 IEEPA 권한에 대한 중요문제 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의 적용 여부입니다. MQD는 ‘의회가 명확하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행정부의 중대한 행위에 대해서는 법원이 개입할 수 있다는 ‘법리’입니다. 역사적 전례의 부재, 범위의 광범성, 그리고 막대한 경제·정치적 영향력을 포함한 ‘세 가지 지표(history, breadth, significance)’가 모두 충족되는 경우 MQD가 적용될 수 있는데, 이번 경우는 그 모두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만일 중요문제 원칙(MQD)이 적용된다면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전면적, 영구적 무효가 될 것이고, 트럼프 역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중요문제 원칙(MQD)’은 1기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정부를 겨냥해 강력히 밀고 나간 법리입니다. 환경규제, 백신 의무화, 학자금 대출 탕감 등에 대한 대법원의 반대 논리로 확고히 자리 잡은 원칙이었죠. 더욱이 트럼프가 임명한 3명의 보수 대법관들이 들이댄 최강의 논리인 점에서 그것이 이번에는 트럼프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전망입니다.
대법원의 무효 판결이 있더라도 트럼프는 초법적인 행동을 통해 무모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큽니다. 궁지에 몰리면 어떤 일을 할지 아무도 모르죠. 그가 그토록 싫어한다던 전쟁도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 불법 선거와 마약조직 제거를 명분으로 막대한 해상 전력과 4,500명의 해병대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본 목적은 반미 성향의 마두로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정권을 세워 안정적 석유를 확보하려는 속셈입니다. 안보실장을 겸임하고 있는 네오콘의 핵심인 루비오 국무장관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국제 정세와 내란 세력의 저항이 계속되는 시점에 우리가 가져야 할 원칙과 자세는 무엇일까요? 국민주권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과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적인 전략입니다. 트럼프의 도발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내란 세력의 준동도 쉽게 끝내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적폐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해 나갈 힘은 우리 국민의식에 달려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달콤한 속삭임을 단호히 뿌리치고 이 땅의 민중 문제를 중시하는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기득권, 엘리트 세력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으로는 자주적이고 국익 중심의 외교 틀을 확고히 하고 안으로는 국민 중심의 국가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지금껏 예수 정신에서 벗어나 있었던 교회는 더욱 각성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권력자와 손잡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민중과 함께해야 합니다. 신앙은 명예와 체면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갚을 수 있는 사람들과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낮은 자리, 소외된 자들의 옆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주권 정부와 하느님 나라를 함께 세워 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