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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당혹스러움의 훈련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6SE3UWpS5o?si=iN3hcz9MLimYTdYw
3월 15일
당혹스러움의 훈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 마가복음 10장 32절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팔아 모든 삶을 주를 향한 사랑을 위해 던지는 것이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가시는데 매우 낯설게 보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앞서 가시는데 그들은 이상히 여기더라."
예수님께는 제자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서늘하게 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영적인 삶의 호흡을 가쁘도록 만드십니다.
단호한 얼굴로 준엄한 결단을 하시는 그분의 낯선 모습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때 그분은 더 이상 상담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러한 표정으로 서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주님과 친근감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은 저만치 앞서 가십니다.
그리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도 없고 목적지는 이상하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죄악과 슬픔을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이해하셔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보이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뵐 때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전방에 계신 아주 이상한 모습의 지도자이신 그분에게서 전혀 친밀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제자의 길에서 당혹스러움의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제자의 길 가운데 위험은 자신의 작은 열정에 묻혀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0장 10-11절)
당혹스러운 상황이 오면 그 어두운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잘 견디십시오.
때가 되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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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순종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8doV8IHfSm8?si=kqW1fwGMjuoVWoe6
3월 14일
순종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로마서 6장 16절
나를 지배하는 세력을 점검하려면 가장 먼저 그 세력에게 스스로 기꺼이 순복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종이라면 언젠가 나 자신에게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오직 내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이는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이기심에 순복했다면, 이제는 그 이기심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굴레를 씌우는 폭군이 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순복을 통해 형성된 기질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제거될 수 없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한 번만이라도 정욕에 마음을 주면 (정욕이란 마음의 정욕이든 육체의 정욕이든 "나는 지금 당장 이것을 가져야 해"라고 말합니다) 정욕에 항복한 자신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당신은 그 정욕의 종이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에게는 그 종의 상태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을 주관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나오려면, 그 세력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분께 철저한 겸손의 자세로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누가복음 4장 18절)
우습게도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정욕의 종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그 버릇을 버릴 수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 속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정욕에 기꺼이 순복했기 때문에 그 버릇은 당신을 완벽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결박을 푸셨도다"라고 찬양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욕에 철저하게 종 된 삶을 사는 것은 쉽습니다.
오직 주님께 순복할 때만이 인생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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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하나님의 내어주심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Ifpscu-ofh8?si=-q1NgTEKV31jQq-m
3월 13일
하나님의 내어주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3장 16절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개인의 거룩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주님과 연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구원과 함께 얻게 되는 경험적 지식은 죄로부터의 구원 및 개인적인 거룩과 같은 선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과 접촉하는 것이요,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하시는 무한하고 위대한 그분께 매료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음을 깨닫고 주님께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거룩 및 성화를 선포하라고 부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나 곁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놀라운 사건에서 비롯되는 부수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면 자신의 노력마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온전히 내어준 후에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린 그분께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내어드림 없이 헌신에 대해 논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실상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구절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다 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우리도 아낌없이 헌신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질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주님께만 완전히 사로잡힌 바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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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헌신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SscpQgr5Yt0?si=lM8qlaykT1VyK7Wx
3월 12일
헌신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 마가복음 10장 28절
주님께서 실제로 대답하신 내용은, 제자로서의 헌신이란 주님을 위한 것이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흥정하려는 장사꾼의 심정을 가진 헌신을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저는 죄로부터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만 맺어지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보상 심리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도, 참된 헌신도 아닙니다.
상업주의 속에서 사는 우리는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이 있을 때 헌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기보다 저 자신을 더 위합니다. 저는 자신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전시장에 놓여져서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들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참된 헌신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뭔가를 더 얻으려고 헌신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는 헌신이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비굴한 장삿속 마음일 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 주님께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 등은 진정한 헌신을 할 때 고려되지 않습니다.
참된 헌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모든 인격 속에서 최고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대부분 우리는 주님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요, 주님.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과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어요."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단다."
주를 향한 진정한 헌신은 언제나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해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극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온전하게 헌신하면 그분은 우리의 헌신 가운데 상처 입은 주변 사람들의 아픔까지 완벽하게 책임지십니다.
주님께 헌신하다 중도에 멈추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실제로는 헌신하지 못하고 비전만 찾아가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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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하늘 비전에 순종하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G74NbJfPYY8?si=Qncbdj5Mal0HUwjA
3월 11일
하늘 비전에 순종하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 사도행전 26장 19절
만일 비전을 잃으면 이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비전을 잃는 이유는 영적으로 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실생활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늘의 비전에 순종하는 유일한 길은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단호한 결심 가운데 계속적으로 비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 시간뿐 아니라 매 시간 매 순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비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하박국 2장 3절).
우리의 힘만으로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전이 비전을 이룹니다.
따라서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비전이 주는 영감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너무 실질적인 사람이 되다보면 비전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비전을 보았지만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실질적인 일에 급히 달려들면 비전을 잃게 됩니다.
또한 비전이 이루어지고 나면 더 이상 비전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체되는 비전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는 것을 망각하고 실질적인 일에 붙들리는 것은 우리 영혼의 부요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돌풍을 잘 주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도들에게 뭔가를 심는 유일한 방법은 돌풍이기 때문입니다.
돌풍이 일 때 당신은 속 빈 강정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이는 당신이 본 그 비전의 빛 가운데 실제로 사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풍을 보내시면 가만히 계십시오.
주님보다 앞서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만일 당신이 돌풍 가운데 스스로 안전한 자리를 찾아 안주하면 당신은 아주 쓸모없는 속 빈 강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께 뭔가를 심으시면 당신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는 비전의 빛 가운데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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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말씀과 하나가 되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juSt1j-0yqo?si=MLCErixd90eb0u0D
3월 10일
말씀과 하나가 되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 디모데후서 4장 2절
우리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중개자가 아니라 영적 메시지 자체로 변화된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메시지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분의 제자로서 '메시지를 담은 성찬'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어느 정도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메시지를 담은 성찬'이 되려면 죄에 대한 책망으로 상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서져야 합니다.
증인된 삶과 설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 후의 제자들처럼 자신이 원하던 삶에서 벗어나 주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 다듬어지고 빚어진 사람들입니다.
성령 강림은 제자들에게 뭔가를 더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외쳤던 메시지가 그들 자신에게 성육신하게 된 사건입니다.
곧 증거자가 되는 것이기에, 주님은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장 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말할 때 하나님께서 마음껏 당신을 통해 말씀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메시지가 다른 영혼을 자유케 하기 전에 그 자유함이 먼저 당신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당신이 선포한 말이 당신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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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물러가는 시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4zDQg2Et2pE?si=4Ko0JEQCQul3OZF4
3월 9일
물러가는 시간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요한복음 6장 67절
가장 깊은 곳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간단할수록 그 말씀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주를 놓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한복음 6장 66절)
그들은 주님과의 동행을 멈춘 것이지 죄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으로부터 물러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지만 주님과 동행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꾸준하게 원하시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주와 함께 언제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거룩하게 된 이후 애써야 할 영적인 훈련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그 관계를 스스로 유지하려 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하게 의지하는 가운데 자연스러운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만 철저하게 헌신하십시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비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구원을 주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그분'을 예수님 안에서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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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제거된 생명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voxfchdpXcc?si=F3HHQWzd0SbIwwqL
3월 8일
제거된 생명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갈라디아서 2장 20절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보는 전반적인 견해가 바뀔 때까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위에서 난다"는 뜻은 전에 붙잡던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거듭남의 처음 단계는 모든 위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어놓기를 원하시는 것은 선행이나 정직, 노력이 아니라 참으로 지독한 우리의 죄성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서 가져가시려는 것은 바로 그 죄성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주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완전한 '의'입니다.
우리는 뭔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과 하나님께 쓸모 있는 존재라는 착각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후 성령께서 우리에게 더 제거해야 할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나 자신에 대한 주장과 권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할 의사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오직 주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기 위해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제거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의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아주 뼈아프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보시는 관점으로 나 자신을 보게 될 때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내 육체의 징그러운 죄악들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하는 무서운 교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볼 때 부끄러움과 공포와 처절한 비참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에 처해 있다면 그 위기를 꿇고 지나가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당신이 합당하게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당신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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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쇠하지 않는 광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Y4lLeNq5gjQ?si=Ir1OVEOqg0V11U5a
3월 7일
쇠하지 않는 광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로마서 8장 37절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 사이에 균열을 만들고 분리시키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어느 것도 성도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균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잠시 각 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경건 생활에 방해가 될 수는 있어도 성도의 영혼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균열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밑바닥에는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보여진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어떤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이 바로 우리가 모든 것에서 승리하는 원인이요 우리를 영원한 승리자로 만드는 열쇠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집어삼키는 상황들 가운데서 결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파도가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파도를 가르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이 사실을 우리 환경에 적용해 보십시오.
환난, 고난, 압박은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엄청난 기쁨을 주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환난을 통과하며 승리자가 됩니다.
성도는 환난 없이는 주님의 희락을 알 수 없습니다.
환난 때문에 주님의 희락을 이해합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모든 연약함 가운데 기뻐하노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7장 14절)
쇠하지 않는 광채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유한한 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변함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그 어떠한 경험도, 무섭든 단조롭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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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끝없이 지루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2JCZEcHiw-g?si=-_pZNuvvweFj7cMS
3월 6일
끝없이 지루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고린도후서 6장 4절
더 이상 비전이나 소망이 없는 가운데 그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비전도 없고 그에 따라 열정이나 전망도 없을 때, 헌신, 연구, 독서, 집안일, 책임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선포할 때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의 근본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육신의 근본이 그들의 살과 피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손길을 통해 성육신의 근본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비전이나 활기가 없고 매일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들만 있을 때 우리는 백기를 흔들어 항복을 표합니다.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근본을 삶 속에 적용하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보이지 ㅇ낳는 곳에서도 꾸준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짓눌리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언제나 고정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일들이라도 결코 당신을 지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조잡하고 소심한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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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사명에 충성하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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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사명에 충성하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행전 20장 24절
희락이란 내가 창조되고 거듭난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지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누리셨던 희락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신 뜻을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20장 21절)고 말슴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는 것만을 위해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으며 기뻐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보낸 뜻을 당신이 다 이룬 것을 아시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태복음25장21절)
우리는 모두 인생 속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우리가 주께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 그것을 찾게 됩니다.
이때 주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만 아는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바울에 관해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사도행전9장16절)고 하신 말씀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나의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장17절)
우리에게는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택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을 때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십시오.
만일 주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면 당신은 더 이상의 소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오직 사명을 이룰 기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후로 당신에게는 주님과 진정한 친분이 있었을 때 받은 그 사역에 충성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말은 당신만을 위해 구별된 섬김이 따로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인한 이후에는 그 사명과 무관한 다른 섬김의 요구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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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유용성을 고려하지 마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LDVf2lLYUW4?si=diyzI51DzIchOICa
3월 4일
유용성을 고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행전 20장 24절
비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소명 없이 주를 위해 일하는 것도 쉽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기독교적인 감상으로 포장된 상식이 그들의 인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더욱 창성하여 성공할 수 있고 여유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있으면서 우리를 찌르는 막대기가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주님을 위해 상식을 기반으로 일할 수 없게 됩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지 않았다면 봉사와 하나님께 드린 시간, 그리고 자신에게 속한 생명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도 그의 역량을 사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신경 쓰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하찮게 여깁니다.
그는 받은 사명을 이루는 것 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인 사역 자체가 주를 향한 진정한 헌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일을 앞세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이 특별한 사역에 나는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이러한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인도자로 모시고 그분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가장 유용한가를 스스로 판단하려는 삶일 뿐입니다.
당신이 유용한가 아닌가를 절대로 고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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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소모될 수 없는 사랑(끊임없는 요구)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wMgfYhrc-Co?si=tPFiBb3SOa9Ji7bl
3월 3일
소모될 수 없는 사랑
내 양을 먹이라
- 요한복음 21장 17절
"내 양을 먹이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고 주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되는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최종 목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어떠한 하나됨을 누리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도록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주님을 보내실 만큼의 하나됨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장 21절)
지금 베드로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뼈아픈 질문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 소모하거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고백하지 말고, 얼마나 많은 놀라운 계시를 받았는지도 말하지 말고, 그저 '나의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 중에서는 지독하게 웃긴 양도 있고, 그저 질기도록 말 안 듣는 양도 있고 더러운 양, 이상한 양, 대항하며 들이받는 양, 그리고 다른 길로 헤매는 양들이 있는데, 이들을 다 사랑하며 자신을 다 소모하기까지 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 소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내 안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소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각 개인의 자연적인 독자성(개별성)이나 특이성에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나는 더 이상 자연적인 기질에 이끌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을 먹여야 합니다.
누구도 이 사명을 감당하는 데 안심할 수 없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자연적인 특성에 호감을 갖는 그러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속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으로 끝마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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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주님의 아픔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sdjEOCNeKig?si=3f0XU4FAiM66djeT
3월 2일
주님의 아픔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한복음 21장 17절
당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까지 주님의 아픔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마귀도 결코 그곳까지는 아픔을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죄나 사람 사이의 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곳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요한복음 21장 17절)
베드로는 이 때 비로소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자신이 예수님께 헌신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인내하며 반복해 물으시는 질문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실오라기 만한 거짓도 남아있지 않았고 다시는 자신에게 속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으로 말하거나 감상이나 과장을 드러낼 여유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던 놀라운 계시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것 보세요, 저것 보세요." 라고 떠들썩하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깊이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저 하늘에나 깊은 땅 속에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통찰하시는 뼈아픈 질문을 받기까지,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질문만이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를 참으로 알게 해줍니다.
베드로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끈기와 직선적인 태도와 기술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적절한 때가 오기 전까지 절대로 이 질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드물게, 아마도 한 번, 주님은 우리를 피할 수 없는 곳에 데리고 가셔서 꿰뚫는 직선적인 질문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떠한 고백보다 훨씬 더 깊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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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핵심을 찌르는 질문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T66hRST0cvg?si=hqdX0NOo7ModfPM4
3월 1일
핵심을 찌르는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한복음 21장 17절
지금 베드로는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3~35절)
자연적 개별성(타고난 개인의 특이성)으로는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인격성(인간의 근본적 속성)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뼈아픈 질문에 의해 발견됩니다.
베드로는 일반인들이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기질적인 사랑으로써 개별성까지 깊게 닿을 수는 있지만 인격의 중심부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큰소리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말로만 사랑을 고백하지 말고 모든 행위로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간교함에 대해 아파한 적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주는 그 어떤 아픔보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오히려 죄는 감각을 무디게 하기 때문에 점점 아픔이 줄어듭니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의 감정을 더욱 예민하게 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양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인격적 차원까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 말씀은 심지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므로 거짓이란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을 감상적으로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는 그 아픔이 너무나 커서 당신은 멋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주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고통이 임하는 것은 결코 실수나 우연일 수 없습니다.
아픔의 그 순간이 사실은 위대한 계시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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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 주께서 무엇을 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mgevJXGE1kI?si=4amOljt2MoQlSK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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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의무나 판단에 따른 사역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4CnEqhAUf8E?si=ctXQFDbolTL1ELkL
2월 28일
의무나 판단에 따른 사역
이로써....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요한복음 16장 30~31절
이제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느냐? 너희가 나를 홀로 두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홀로 내버려두고 의무감이나 자신의 특별한 판단에 따라 일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자신의 종교적 이해를 의지하면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죄악이나 이에 딸린 형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깨닫지 못함으로써 혼돈과 슬픔과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나중에 그는 이를 깨닫고 부끄러움과 후회에 빠집니다.
우리는 훨씬 더 깊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만사를 주님과 연결짓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상식적인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께서 그 결정들을 축복하실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상식적인 결정은 주님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영적 실체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무감으로 사역을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경쟁이 되는 또 다른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쭐한 사람'이 되어 말합니다.
"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봐야지."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 대신에 우리의 의무감을 보좌에 앉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의 빛이나 의무감으로 살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걸으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뭔가를 할 때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 순종하기 위해 무엇을 할 때는 논쟁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도들은 쉽게 조롱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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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예수님의 빈곤한 사역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ClIXUFoa4w8?si=g5ret2V6OaZqdFYj
2월 27일
예수님의 빈곤한 사역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요한복음 4장 11절
우물이 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안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의 깊이, 당신 안에 있는 '우물'의 깊이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예수님의 사역을 빈곤하게 했기 때문에 주께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우물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 1절)
이 때 당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우물은 깊습니다. 주님이라도 이 고통의 우물에서는 평강과 위로를 길어낼 수 없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본성의 우물에서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생수를 길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탁할 영역을 제한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여전히 전능하고 거룩하신 분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필요로 하는 그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 전능한 분이심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빈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역이 빈곤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불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동정을 원할 뿐, 그 분을 전능자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형편없는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는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겉모습과 경험은 있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자신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이 오면 주의 사역을 빈곤하게 합니다.
"그렇지. 이것보라구. 주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시잖아."
그리고 깊은 우물에 내려가 자신의 힘으로 물을 길어보려고 애씁니다.
결국 "이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라고 체념한 후 안주합니다.
이러한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면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분명히 당신의 미완성의 우물은 깊습니다.
그러나 우물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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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예수님에 대한 의심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z5dkmylz0bU?si=N2SMBzlEYbotY5Jl
2월 26일
예수님에 대한 의심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 요한복음 4장 11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지만, 설마 주께서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렇게 살라고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난 면들을 대하게 되면 우리의 자세는 경건 우월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의 이상은 높고 인상적이지만 실제 삶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이지."
우리 각자는 특별한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기대하시지는 않겠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의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빗나간 질문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어디서 돈을 구할 수 있지? 어떻게 주님이 나를 돌보실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심은, 우리의 상황이 주님마저도 해결하실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요.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지요. 주님께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주님이라 하실지라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대책을 마련해주실 수는 없으시지요."
"나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지만 나 자신에 대해 의심스럽다"는 경건한 속임수를 주의하십시오.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생각에 상처를 받습니다.
의심은 주께서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지를 스스로 고민하게 되면서 생겨납니다.
의심은 내 속의 깊은 곳에 있는 열등의식에서 솟아오릅니다.
만일 내 속에서 이러한 의심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의심을 빛으로 끄집어내고 고백하십시오.
"주님, 당신에 대해 제가 의심했습니다. 주님의 지혜를 믿지 않고 제 능력만 믿었습니다. 제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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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섬김을 위한 궁핍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ZdtF-JKyOoI?si=G_a2n3bLY0FXeC-0
2월 25일
섬김을 위한 궁핍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 고린도후서 12장 15절
인간적인 사랑은 대가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기꺼이 나 자신을 여러분을 위하고 또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궁핍하게 될지라도 완전하게 내어주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섬김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고린도후서 8장 9절)
곧 바울의 봉사관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분에 넘치도록 내어주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 일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섬김은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의 종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사회주의를 초월하는 사회주의자이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나라에서는 가장 위대한 자가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진가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이 어떠한 것이든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에 호응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주의 일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기로 보내시면 사례는 얼마나 할까? 날씨는 어떻지? 나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해줄까? 나도 사람인데 주변 환경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지."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조건을 따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떠한 조건도 붙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성도의 개념을 그의 삶 속에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단지 복음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어 다른 영혼들을 위해 '찢겨진 빵'이 되고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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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희생의 즐거움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pa94EeXZKEA?si=DeadRISKS0upZV7W
2월 24일
희생의 즐거움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해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나 자신까지도 내어주리니
- 고린도후서 12장 15절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으실 때 우리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일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애착에 따라 사역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시험하는 최대의 시험입니다.
희생의 즐거움이란 나의 '친구'(예수님)를 위해 나의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단번에 목숨을 내던진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주님 및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로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린도전서 9장 22절)
하나님과 홀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멀리 떠나 있으면 그는 동료들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에 멋진 동상으로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 에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을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쓰실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께 헌신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삶은 예수님만을 위해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분을 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발털이개'가 되는 비결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헌신하기보다 우리를 영적으로 자유하게 해준다는 여러 견해들에 헌신하기 쉽습니다.
바울이 헌신하는 동기는 예수님과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바로라" (로마서 9장 3절)
너무 과장된 표현입니까?
사랑에 빠진 자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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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섬김의 결단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6Cu2TWXdbpc?si=coIIqnvHSjwLiVj7
2월 23일
섬김의 결단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 마태복음 20장 28절
섬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주님의 것과 동일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누가복음 22장 27절)
"예수를 위해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고린도후서 4장 5절)
우리는 사역자로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주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의 '신발털이개'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영적 지도자로의 부르심은 결코 높은 지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 (빌립보서 4장 12절)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봉사관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마지막 힘까지 다 사용할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칭찬을 하든 비방을 하든 상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나는 그가 예수님을 믿을 떄까지 그를 섬겨야 하는 빚진 자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의 섬김의 주된 동기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면 배은망덕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가슴은 곧 멍이 들고 찢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면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경험하게 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셨는지를 깨닫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로 결심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디모데전서 1장 13절)
즉,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미움과 악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했던 미움과 악의와 전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무례함과 이기심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를 끝까지 섬기셨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결코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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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영적 불굴의 자세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OYDUVhO6oRY?si=MVSi_Q5JGEI50ySI
2월 22일
영적 불굴의 자세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편 46편 10절
불굴은 인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란느 절대적인 확신과 그 소망을 바라며 인내하는 것이 합쳐질 때, 이를 불굴이라고 합니다.
불굴은 실패할까 두려워 매달려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의 영웅이 패배하지 않을 것을 강하게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최대의 두려움은 자신들이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곧 주께서 보장하셨던 사랑, 공의, 용서, 자비가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때 영적 불굴을 촉구하는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라는 음성입니다.
만일 당신의 소망이 지금 난관을 겪고 있다면, 이는 그 소망이 정결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결한 꿈과 소망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인생에서 힘든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요한계시록 3장 10절)
그러므로 영적으로 불굴의 자세를 지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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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4T7j6zeFg10?si=dN1CvvCtOVnEPYH0
2월 21일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마가복음 14장 6절
인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로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신중하고 현명하여 계산만 하고 있다면 이는 전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애착이거나 따스한 감정일수는 있어도 사랑의 본질은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의무감이나 유익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지금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당신은 그저 주님의 구속의 위대함만 묵상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 증거는, 성스럽고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단순한 인간적인 일들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바가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주님의 마음에 남겨놓은 그러한 감동을 주께 드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자신을 다 포기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르 보시고자 때때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내어드리는 것이 나의 개인적 거룩함보다 더 귀합니다.
개인적인 거룩은 우리의 관심을 자신의 정결함에 모으게 합니다.
걷기와 말하기, 심지어 우리의 외모까지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언제나 조바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져 우리의 모든 것을 주께 내어맡기면 이러한 모든 염려들이 사라집니다.
"나는 유용한 존재인가" 라는 의식을 제거하십시오.
이러한 의식을 제거하기로 작정하면 그때 비로소 진리에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하게 드려질 때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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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몽상에서 벗어나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9KK2xr2buIE?si=VJ50t3MMls44Tyw7
2월 20일
몽상에서 벗어나십시오!
일어나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요한복음 14장 31절
무슨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않고 계속 꿈만 꾸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들은 후 주께서 "이제 들었으니 가서 그 모든 말씀을 다시 묵상하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몽상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꿈'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꿈만 꾸고 있다면 이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한 몽상가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절대로 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몽상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찌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거나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리 와서 따로 앉으라"(마가복음 6장 31절)고 말씀하시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는 몽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 그분을 당신의 꿈과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게 하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가 순종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사랑에 빠져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그 사람과 사랑하는 꿈만 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람을 위해 뭐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후에도 계속 몽상만 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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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지겨움에 대항하는 첫걸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EcWHN052Nx8?si=42kFThEytFQeyCTy
2월 19일지겨움에 대항하는 첫걸음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이사야 60장 1절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첫 발걸음을 떼야 합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돕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께서도 돕지 않으십니다.
물론 일어나는 즉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시발점은 우리의 도덕적(전인격적, 자발적) 선택입니다. 따라서 죽은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지 말고 뭔가 해야 합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면 지겨운 일들이 거룩하게 승화됩니다.
지겨운 일은 어떤 사람의 인격의 고상함을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상과 가장 거리가 먼 일로써 그 사람에게는 가장 천하고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바로 우리가 참으로 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서 우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소위 '가장 보잘것없고 지겨운 일'을 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어부들의 발을 씻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만일 너의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면 너희도 또한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야 하느니라"(요한복음 13장 14절)고 말씀하십니다.
지겨운 일 가운데 주의 빛을 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그 일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보잘것없고 지겨운 일을 하면 신기하게도 그 일들이 거룩해집니다.
가장 진부하고 평범한 일이었는데, 그들이 하면 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잘것없고 지겨운 일들을 하시면 그 모든 일들이 승화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그 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즉, 모든 믿는 자의 몸을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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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절망에 대항하는 첫걸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UGbbZaec_Pk?si=JLvXddxulA9-BJvz
2월 18일
절망에 대항하는 첫걸음
일어나라 함께 가자
- 마태복음 26장 46절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할 때 깊은 잠이 들었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미 저질러진 일로 인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다 끝났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소용 없어."
우리는 자신의 절망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실 절망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쉽게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자느냐.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구나. 네가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나 일어나라. 함께 다음 단계로 가자."
과거로 하여금 잠이 들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 과거가 예수님의 품 안에서 잠들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가오는 미래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절망의 경험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쉽게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할 그 때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친히 찾아오셔서 영적인 시발점을 허락하십니다.
"일어나라. 다음 단계로 가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힘을 얻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의 구속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실패의식이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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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우울증에 대항하는 첫걸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mgvAhyuh_JU?si=NIbl_LKJzwZ-E4Uv
2월 17일
우울증에 대항하는 첫걸음
일어나서 먹으라
- 열왕기상 19장 5절
천사는 엘리야에게 비전을 준 것도 아니고 성경을 그에게 설명한 것도 아니며 어떤 놀랄 만한 일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엘리야에게 가장 일상적인 일, 곧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우울한 적이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돌덩어리 같은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은 우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나는 기쁨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십시오.
성령이 오시면 비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일들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평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가장 간단하고 평범한 일을 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계시는가'하고 의아해하던 그러한 평범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때 임하게 되는 영감은 우리의 우울증을 제거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평범한 일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서 그 일을 하십시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뭔가를 하면 이는 우울증을 더 심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직관적인 느낌을 줄 때 그것을 하면 우울증은 사라집니다.
성령에 따라 당장 일어나 순종하면 우리는 다시 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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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영적 회복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olOXn_Ulmik?si=lJsep0IDoEL6tPGS
2월 16일
영적 회복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 에베소서 5장 14절
모든 시발점마다 성령의 영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당신에게
"일어나라. 의기소침한 마음을 잡아서 밖으로 집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발점은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때는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때의 시발점에는 영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에게는 많은 꿈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러한 꿈과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꿈과 소망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이때 주께서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하나님의 영감은 기적 같은 능력과 함께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 시발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가 '일어난' 후에 생명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작정 승리하는 삶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극복할 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영감이 임합니다.
주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막3:5)
이 때 그 사람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은 온전케 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당장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의 영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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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주님의 증인과 일꾼 되기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FNRlHQ119Js?si=ov33ZGrzSYtFb7Qr
2월 15일
주님의 증인과 일꾼 되기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 로마서 14장 7절
하나님 앞에서 다른 영혼들에 대해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멀어지면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함께 앉은 자들"(에베소서2장6절)이며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고린도전서12장26절) 받습니다.
당신이 이기적인 존재가 될 때, 짜증과 섭섭함으로 가득 찰 때, 도덕적으로 무디고 영적으로 어두워질 때,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 당신은 질문합니다.
"다른 사람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이러한 기준은 누가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될지라"(사도행전1장8절)
우리 중에 몇이나 자신이 가진 모든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에너지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쓰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증인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셨습니까?
구원받고 거룩해지기 위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뜻대로 마음껏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진심으로 주를 위해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온갖 천시와 멸시를 받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일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폐기된 은그릇처럼 밖으로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9장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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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집중하는 훈련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mRkBjvi7jRE?si=cl5w9SsGy9Gc7QIO
2월 14일
집중하는 훈련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 마태복음 10장 27절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가르치시기 위해 어둠을 지나게 하십니다.
종달새는 어둠 속에서 노래를 배웁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손길의 그림자에 머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곳에 두시면 주의해서 입을 다무십시오.
지금 어두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둡습니까?
그렇다면 잠잠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둠 속에서 입을 열면 잘못된 기분 속에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때는 우리가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어둠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어둠의 이유를 알기 위해 책을 읽지 마십시오.
단지 주의하여 듣기를 힘쓰십시오.
만일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둠 가운데 있을 때 들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아주 귀한 메시지를 주실 것입니다.
모든 어둠 후에는 기쁨과 부끄러움이 혼합되어 따라옵니다.
만일 기쁨만 남아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정말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기쁘지만 동시에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주의 음성을 들었는데 어찌 그렇게 우둔하여 아무것도 깨닫지 못햇던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날 동안 계속 내게 말씀하고 계셨구나!"
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언제나 '지금' 하나님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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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hWrnxPaOq10?si=9HRSBu5d_SmBsJ9K
2월 13일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사무엘상 3장 10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한 가지 음성을 확실하게 들었다고 해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알아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향해 내 마음과 생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이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내가 나의 친구를 사랑하면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의 친구라"(요한복음15장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했습니까?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인 줄 깨달았다면 나는 의식적으로 그 명령을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신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의 영적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간구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11장41절)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언제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꽃과 나무와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내게 전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뭔가에 사로잡혀서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나의 마음이 다른 곳에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를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세상의 일들과 봉사 활동 및 자기 확신 등에 사로잡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의 자세는 언제나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늘 주님의 음성을 듣는 헌신된 마음을 개발하지 못하면 우리는 특별한 때에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보통 때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전혀 하나님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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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2일 청라호수공원에서 전도
2월 12일]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rshTILASZEc?si=0wZKXOzy7Vuf8-jI
2월 12일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십시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 출애굽기 20장 19절
우리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분께 신경을 쓰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을 주셨고 그 명령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명령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려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14장15절)
하나님을 업신여겨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을 외면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는 주의 종의 음성은 듣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거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을 통해 들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기보다 "아, 그것은 비록 하나님의 진리처럼 들리기는 해도 아마 당신의 생각이겠지요"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자녀로 대하시는데 당신은 항상 주님을 무시함으로써 모독해온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주님을 모독했던 자신의 자세에 대해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 왜 저는 그렇게 무디고 고집이 세었던 것입니까?"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향해 비참과 비통을 느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진정한 기쁨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분을 듣지 않았던 부끄러움과 섞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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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마음이 기갈될 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taWgxvDZlPQ?si=kZ2at3UzeO3-wevJ
2월 11일
마음이 기갈될 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 이사야 26장 3절
당신의 마음은 주님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기갈되어 있습니까?
마음의 기갈은 사역자의 삶을 지치게 하고 힘을 빠지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을 주 앞에서 세우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세우십시오.
주님께서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우상으로부터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써 주님께 완전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당신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믿음과 함께 성령이 함께 역사할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와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자연 질서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십시오.
해가 뜨고 지는 것, 하늘의 별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감상에만 젖지 말고 언제나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였고.... 우리는 잊어버렸다"(시편106편6-7절)
그렇다면 잠이 들었던 그 장소에 당신을 찌를 수 있는 송곳을 두십시오.
"주님께서 이제는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섬기는지 기억하십시오.
기억을 되살려서 당신 자신을 일으키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애정이 열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더 이상 기갈되지 않을 것이며 힘과 열정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소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비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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