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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터넷 화제 시리즈-1 :: 장개석과 모택동의 후손들 이야기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와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손중산과 함께 이들 셋은 중국 근, 현대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들 입니다. 손중산은 구시대적인 전제왕권으로 부터 중국을 해방시켰고, 모택동은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고, 장개석은 대만에 국민당 정권을 세웠지요.
장개석과 모택동은 중국 대륙을 놓고 기나긴 싸움을 했습니다.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은 처음에는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을 가볍게 생각하다가 나중에 뒷통수를 냅다 맞고는 대만으로 쫓겨가게 됩니다. 장개석은 대만에서 기틀을 잡고 대륙을 다시 되찾겠다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대만에서 숨을 거두고 말죠.
몇달 전 부터 중국 인터넷계(界) 에서 심상치 않은 웹페이지가 돌아다녔습니다.
바로 장개석과 모택동의 후손들은 그후 어찌되었을까? 라는 내용입니다.
1946년 모택동과 장제스의 모습입니다.
1925년 장개석의 사진
장개석의 장남 장경국입니다.
이분은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 모택동 슬하에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전쟁중에 대부분은 실종, 사망하고 3명의 자녀만이 생존했다고 합니다. 모안영도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장개석 큰아들 장경국 가족사진- 장경국 큰아들 장효문(뒷줄 중앙) 장경국 큰딸 장효장(뒷줄 우측)
장경국 둘째아들 장효무(앞줄 맨 왼쪽) 장경국 부부, 장경국 막내아들 장효용(앞줄 맨 오른쪽)
장씨 집단 4대손 -장개석의 증손자 장우백 입니다. 미국 유학후 대만으로 돌아와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네요..
준수한 외모로 대만 여성들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다 합니다.
왼쪽부터 장우백의 둘째 동생인 장우청, 장우백의 어머니,
즉 장우백 아버지(장효용-장개석 손자)의 부인, 임형익(장우백 부인), 장우백( 품에 있는 아기는 첫째아이 장득효),
그리고 마지막 장우상, 뒤에 인물화는 장개석입니다.
장우청- 장우백의 둘째 동생
장우백의 첫째 동생, 장우상, 대학졸업후 대만에 돌아와서 형을 도와 회사를 경영하고 있답니다.
장개석의 첫째아들 장경국와 둘째 아들 장위국이 모두 외국인(러시아인, 중국와독일 혼혈인)과 결혼했다고 하니,
장개석의 손자부터는 모두 러시아, 독일 혼혈인 셈입니다.
모신우, 모택동의 적손이지요, 모택동의 작은 아들 모안청의 아들로, 군사과학원 박사이고,
현재 모택동과 그의 큰 아버지(모안영)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택동과 장개석의 후손들은 그후 어찌되었을까?' 시리즈는 지난 몇 달 전부터 꾸준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네티즌들은 외모 가지고 갖가지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 장개석 후손이 혼혈이라는 점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 네티즌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호기심 반, 재미 반이 섞인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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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蔣介石)은 왜 패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카이로 3상 회담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 메나 빌라
좌로부터-중국 총통 蔣介石,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 총리 처칠, 장개석 부인 宋美齡(쑹메이링)
1) 출발부터 대의(大義)가 없었던 인물, 蔣介石
2차 대전(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1944년 초부터 루스벨트는 장개석에게 소위 “딕시 사절단”을 연안에 파견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래 했다. 그것은 미국이 임이 파악하기로 중국에 침입해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해서는 국부군 보다 모택동이 지휘하는 홍군을 지원 하는 편이 2차 대전을 하루 속히 끝내는 수단의 하나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딕시 사절단”은 연안에 파견되어 시찰과 정보 수집을 한다지만 실재로는 어떠한 방법으로 홍군을 지원하느냐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7월 1일자 뉴욕 타임스는 “중국에서는 홍군이 제일 강력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5, 6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힘을 길러온 홍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빨치산처럼 적절히 이용한다면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여러 언론 매체들은 중국공산당의 적극성과 성취욕을 칭송하는 내용들이었다. 10월 6일에는 “연안-중국의 굉장한 도시”라는 제목의 보도가 실렸다. 모택동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외신들의 보도로 인해 장개석은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장개석은 일본이 패망하자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때문이었다. 이들은 미국 등 서구 언론에 매우 좋은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군이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싸우고 있을 때 홍군에서는 서구 언론을 상대로 치열한 홍보전을 펼친 결과였다. 오카무라 야스지가 중국 전구에 제출하는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던 9월 9일 장개석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일본의 항복의식이 남경에서 열렸다. 오늘은 우리당에게 승리와 개선의 날이다. 그러나 동북의 영토는 아직 소련 육군의 점령되어 있다. 신강의 중요 지역도 소련의 종노릇하는 자들 대문에 잃었다. 아! 항일 전쟁의 승리도 우리의 혁명에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코민태른의 정책은 여전히 성공을 거두고, 공비(共匪)는 진압되지 않았다.”
당시 국민당 정부군은 주로 도시 주변에 배치돼 있었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 지탱하는 수준이 높아지는 정부군에 비해, 홍군은 대다수 농민이 밀집한 농촌에 뿌리를 내려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이들은 기존의 틀을 뒤바꿨다. 가장 가난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유롭게 된 이유다. 그들은 빈농동맹을 형성하고, 농민협회의 중핵이 되었다. 대부분의 공산당 및 홍군의 요원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일본이 패퇴한지 약 2주가 지난 8월28일 "헐리"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중경을 방문했다. 스타린과 중국내 제3당들이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0월 11일까지 44일간을 중경에 머물면서 장개석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9차래나 회담을 했다. 9월 26일 중재에 나섰던 헐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는 중국에 돌아오지 않고 세상을 떴다. 회담은 결렬되고 아편전쟁 이래 100년 만에 최대의 국, 공 내전이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것이다.
이튿날 장개석은 순시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당시 모택동은 정치협상회의와 국민회의 연기를 요청했다. 장개석의 복안은 공산당이 헌정질서 하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얻는 대가로 무장반란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헌법제정이 시급한 게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장차 일대 결전이 불가피하다는 뜻이었다.
당시 장개석은 전국의 군대를 80-100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이중에 12개 사단을 홍군을 흡수하여 재편한다는 생각이었으나 모택동은 20개 사단을 요구했고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요구를 받아드릴 의향을 보이자 다시 그 수치를 올리고 정부조직에도 북부 5개성의 성정부 주석과 다른 6개성의 부주석자리를 요구했다. 중경에서 돌아온 모택동은 연안 당원들에게 이 같이 보고했다.
“현실세계에서 혁명가들에게 곧게 뻗은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1945년 말 장개석은 수도를 중경에서 다시 남경으로 옮겼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8년 만에 환도였다. 그는 12월 18일자 일기에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적었다.
“남경에 도착할 때 비행기는 도시를 한 바퀴 선회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에게 영광된 승리와 이 나라 수도로의 무사귀환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다. 모든 것은 그분의 몫이다.”
국공내전 중에 장개석의 일기에는 군사적인 역량보다 자신의 도덕적우월감과 국민당 정부의 정통성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며, 그가 모택동에게 패한 원인도 이러한 장개석의 정신세계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천하대사를 놓고 현실과 동떨어진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국민당 정부군과 홍군은 만주에서 4차례 크게 격돌했다 처음 3차례는 국민당 정부군이 승리했으나, 신기하게도 홍군은 패할 때마다 더욱 강해져 네 번째 전투에서는 국부군의 대패로 치명타를 입으므로, 만주 전역을 내어주고 화북, 화중지역까지 홍군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국공내전 초기에는 국부군이 절대 유리했다. 홍군이 120만인데 비해 국부군은 43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소련은 모택동이 중국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홍군은 국민당 정부군이 방심하는 사이 만주에서 부터는 공세로 전환 1948년 이후에 벌어진 3대전투를 모두 승리로 끝을 냈다. 요녕성과 선양을 중심으로 한 동북부의 결전인 요심(遼瀋) 결전, 서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결전인 회해(淮海)결전, 북경과 천진의 결전인 평진(平津)결전이 그것이다.
원인은 장개석의 전략적 실수에 있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국민당 정부를 중앙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공 내전이 벌어지면 필승하리라 자신했다. 철저한 비전과 대비가 없는 자신감은 화를 자초했다. 당시 8년간의 중일전쟁으로 장병들은 지칠 대로 지친 형편에 천정부지의 인푸레이션으로 민심마저 국민당 정부에 절망하고 있었다. 특히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무상으로 나눠주는 공산당의 지지가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이를 애써 무시했다. 그는 국제정치에도 어두웠다. 중국공산당의 운동을 소련에서 공작한 음모의 일종으로 치부한 게 그것이다. 스타린은 연부역강한 모택동보다는 허약해진 장개석 쪽을 선호했다. 스탈린은 결코 중국이 하나로 통일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 공이 무력으로 충돌이 격화되는 와중에 스탈린이 장개석을 모스크바로 초청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장강을 기준으로 중국을 두 개로 쪼갤 생각이었다.
장개석은 이를 거부했다. 당시 그는 마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개석은 마셜이 머무는 동안 3차례에 걸쳐 휴전을 선언했다. 이 기간이 1년이 좀 넘었는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6년 8월 19일 장개석은 트루먼의 서신에 대한 답신에서 모든 분란에 대한 원인이 공산당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하들의 실수에 대하여 인정하고 법에 의하여 엄격하게 처리할 것을 약속했다. 이듬해인 1947년 1월 8일 마셜이 남경을 떠났다. 이로써 미국의 중재노력도 끝이 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16일 국민당 정부군 제74사단 사단장 장령보는 홍군에 포위되어 탈출로가 없자 부사단장을 포함해 20여명의 참모들과 함께 집단 자살을 감행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초까지 지속된 회해전투에서도 국부군은 홍군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60만 명의 홍군이 13만 명의 전사자를 낸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국공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부군 장군 중에는 제2집단군 사령관 구청천, 제5집단군 사령관 황백도 등도 있었다. 항일전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장개석은 ‘회해전투’에서 등소평이 이끄는 홍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여론에 밀려 1949년 1월 21일 세 번째의 하야성명을 내야만 했다. 부총통 이종인을 내세워 평화협상을 제의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이는 청조가 무너진 후 40여년 만에 전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모택동의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당시 부총통 이종인은 광서군벌로 존재했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깊이 고려중에 있었다. 장개석의 패배가 목전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1949년 8월 필리핀의 퀴리노와 한국의 이승만을 방문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었다. 이후 절강 근해 섬들을 순회한 뒤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광주와 중경, 성도, 곤명 등을 순시하고,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1개월 가까이 중경과 성도에 머물렀다. 성도가 화염에 휩싸이고 홍군이 접근해 오자 그는 비로소 비행기에 몸을 실어 성도를 탈출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장개석은 다시는 중국대륙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의 순시여행 기간에도 국민당 정부군 장성과 휘하 장병들은 최후의 결전를 전개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대만으로 건너간 장개석은 1950년 3월 1일 총통의 직무에 복귀한다고 선언 했다. 나름대로 항일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그는 4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에서 끝내 패하고는 중국대륙 복건성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대만섬으로 쫓겨 가 1975년 사망할 때까지 26년간을 대만을 떠나지 못했다. 공비로 폄하하던 모택동에게 패해 대륙에서 쫓겨난 자격지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는 두 개의 중국 정책에 관해 그 어떠한 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은 그에게 현실적인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한국전이 일어나자 트루먼 대통령이 제7함대에 대만해협의 봉쇄를 명하자 장개석 정부 외교부가 즉각 대만의 지위와 관련한 카이로회담의 선언을 수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의 보호’를 수용하겠다고 언급한 게 그 증거다.
2) 대만의 중화민국
대만의 면적: 35.980키로평방미터(남한의 약 3분의1면적)
인구: 약 2300만명
G.D.P : 4804억 달러 (세계 51위)
대만은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로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함으로 다시 중국의 영토로 회복되기까지 51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다. 대만인의 격렬한 저항과 일본의 잔인한 진압과 가혹한 착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무장 항일봉기, 5, 4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민회 등 의회설치 운동이 있었고, 국민혁명 시기에는 대만 공산당, 대만 농민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항일운동은 철저히 탄압 당했으며 일본은 황민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20여만 명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일본이 물러나고 국민당 치하에는 부패한 국민당 정부의 파견 장관의 행패로 시민들의 불만은 더욱 팽배했고 1947년 2, 28사건이라 불리는 참담한 사건이 일어났다. 반발이 거세지자 1949년 5월 20일 국민당 정부는 대만 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무려 38년이란 세계에서 최장기 계엄령을 선포 대만을 통치했다.
1949년12월 10일 장개석은 50만의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쪼겨와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체의 정당 및 단체의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대륙 수복을 위한 마지막 근거지로서 ‘철혈 정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국민당 개조운동을 통해 일당 독제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해 장개석의 권력은 대만에서도 절대적이었다.
냉전체제의 세게 질서 속에서 대만은 미국의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1950년 6월 대만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하여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원조를 하였다. 미국은 1970년대 중국과 화해하고 중국의 유엔가입 및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대만과 장개석정부를 중국으로 인정했다. 대만은 세계적으로 반공투쟁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실재로 중국과 대만은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1979년 이전까지 여러 번에 걸쳐 무력충돌이 있어왔다. 대만은 경제성장에 집중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흥 공업국으로 도약하였다.
1975년 4월 장개석 총통이 사망하였을 때 붕조(崩殂-황제가 죽었다는 뜻)하였다고 발표했다. 이 표현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장개석이 생전에 어떠한 권력을 누렸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개석 사망 후 잔여 임기를 부총통이 마친 후 권력은 장개석의 장남 장경국에게 계승되어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송미령(宋美齡)-(1897,3,5,-2003,10,23,) 장개석 사후 미국 뉴욕에서 10여년 살다, 1988년 장개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에 참석차 대만에 와서 10여년을 살다, 다시 장기요 양을 위해 1991년 미국 뉴욕으로 가서 2003년 106 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