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한국불교사
가마타 시게오 / 신현숙 옮김/민족사
2565. 10. 4
제3장 고려의 불교
3. 고려대장경
고려시대의 문화사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있다면 대장경의 간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3종이 있다. 제1은 고려 현종대에 간행한 대장경, 제2는 대각국사 義天이 간행한 속장경, 제3의 간행한 현재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이다.
初彫대장경
宋 태종 태평흥국 8년(983), 北宋勅版大藏經(益州版)이 완성되었다. 다음해 일본승 奝然은 송으로 가서 勅版대장경을 가져 왔다. 고려에서는 성종 10년(991) 4월, 韓彦恭이 송에서 돌아오면서 대장경을 가져와 왕에게 헌상했다. 이미 契丹에서는 대장경이 간행되어 있어서 고려는 契丹대장경도 수입하고 있었다.
初彫大藏經의 판각년대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 먼저 판각 시작의 해를 현종 2년(1011) 설과 현종 10년(1019)설이 있다. 현종 2년 설은 이규보의 〈大藏刻板君臣祈告文〉 (《東國李相國集》卷25)으로, 이는 거란군이 침공해 옴으로 현종이 군신과 더불어 무상대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목을 각해서 부처님의 힘에 의해 거란병을 격퇴시키기 위해서였다. 현종 10년 설은 〈玄化寺碑陰記) (《總覽》 上)에 따르면 현종이 양친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大般若經》 6백권, 《화엄경》·《금광명경》·《묘법연화경》을 인출하였지만, 이것은 初彫대장경의 판각은 아니므로, 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하여 국가적 사업으로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사업은 대구 부인사에 도감을 두고 만들었다.
이 初彫대장경이 완성된 연도에 관해서도 文宗 5년과 宣宗 4년의 양설이 있다. 전자는 문종 5년(1051) 정월, “眞觀寺에 행차하여 새로 만든 《화엄경》 및 《반야경》을 전독했다”(《고려사》권7)고 하는 기록에 따르는 것으로 이것이 初彫대장경의 완성인지 그 여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음 선종 4년(1087) 2월, “開國寺에 행차하였고 또 4월에는 歸法寺에 행차하여 대장경 완성을 경축했다”(《고려사》 권10)고 하는 기사가 있지만, 이것이 初彫대장경의 경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각 사찰에 봉납되어 있는 대장경이 완비됨을 경축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선종 4년 설을 따른다면, 1011년에서 1087년까지 판각한 것이 되므로 국가적 사업으로서 현종의 발원에 따라 판각하기 시작한 것이 이처럼 장기간을 지나 완성을 보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마도 현종대에서 문종대에 완성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의천의 〈諸宗敎藏彫印疏〉 (《大覺國師文集》 권15)에 따르면, “顯祖는 5千축의 비장을 다듬었고, 文孝는 이에 千萬頌의 契經을 새겼다”라고 있다. 이를 근거로 顯宗과 文宗이 각각 별개의 대장경을 판각하였다고 해석하고, 현종대를 제1회, 문종대를 제2회로 하여 대장경이 조인되었다고 보는 설도 있고, 현종대에 시작한 初彫대장경의 조인이 부자 2대에 걸쳐 계속해서 조인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이것을 확정 짓기에는 현재 단계로서는 곤란하다.
初彫대장경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종 19년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소각되어 그 이후 국내의 동란으로 판목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현재 한국내에는 59종의 판목이 발견되었고, 또 初대장경의 현존본으로서는 일본 南禪寺正因庵에 《佛說佛名經》 등 7종이 있고 이 이외 최근 학술조사단에 의해 대마도와 壱岐島에 初彫本 520권이 있음을 새로이 발견했다(《日本對馬·壱岐島總合學術報告書》 서울新聞社).
종진 옮겨 적고 두 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