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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스크랩 [한길사]칼라일, 함석헌, 그리고 우치무라
김형희산야초 추천 0 조회 46 08.11.18 2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판사(한길사) 제공 <의상철학> 책 소개
 
빅토리아 시대 최고 문필가 칼라일의 회심
“낡은 그리스도교의 의상을 벗고, 새로운 신앙의 옷을 입겠다.”

 

 


 
칼라일을 빼고는 영국 문학사와 사회사를 말할 수 없다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영국의 역사가이자 문인으로 독실한 칼뱅주의자인 부모에게 종교적인 감화를 받으며 성장했다. 에든버러 대학에 다니면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심각한 종교적 회의에 빠졌으나 칸트, 피히테 등의 독일 선험철학을 통해 정신적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뒷날 이 체험을 [의상철학 ―토이펠스드뢰크 씨의 생애와 견해](Sartor Resrtus: The Life and Opnions of Herr Teufelsdrockh in Three Books, 衣裳哲學)이라는 작품에서 형상화했다. 신랄함과 익살이 뒤섞인 [의상철학]은 1836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고, 에머슨을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칼라일은 모든 종교 형식을 거부하면서도 칼뱅주의의 확고한 도덕성을 견지했다. 그는 괴테를 숭배했으며, 1824년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영어로 옮겼고, 이후 [영웅숭배론]의 출판과 더불어 힘, 특히 종교적인 사명에 대한 확신과 결합한 힘(도덕적인 힘)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칼라일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지성계에서 배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동시대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칼라일을 가리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역사가 브린턴도 “빅토리아 시대의 전기나 서간집 치고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칼라일이 명성을 누렸으며, 그의 시대의 대립하는 두 세력으로 칼라일와 존 스튜어트 밀을 맞세우는 것이 결코 부당하지 않다”고 평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라일을 배제하고는 영국 문학사도, 19세기 영국 사회사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카자미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한 칼라일은 “인도를 내줄 순 있어도 셰익스피어하고는 바꿀 수 없다”는 말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늘날 이 명언은 문학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반드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신앙 위기를 다룬 고전적 저작, [의상철학]

칼라일의 내면은 전통 기독교 신앙을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칼뱅주의의 교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아니, 칼뱅주의는 거부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수정되어야 했다. ‘낡은 옷’ 대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야만 했다.

자신의 종교관을 표현하기 위해 칼라일은 ‘의상철학’이라는 비유를 택했다. 벌거벗은 사람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찾는 법이다. 동시대의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가 제시한 해결책은 볼테르와 흄의 회의주의로부터 단절하고 ‘전통적 그리스도 교회의 아늑한 신앙과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라일에게 그런 귀의는 무의미했고 불가능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의상 ― 그는 그것을 ‘히브리의 낡은 의상’이라고 부른다 ― 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신조?성사 등 모든 종교 형식을 낡은 의상으로 간주하고 거부했다. 이 책의 제2부 제9장 [영원한 긍정](277쪽~294쪽)에 제시된 칼라일의 해결책은 스코틀랜드 칼뱅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여기에 독일 철학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신앙의 옷’ 한 벌을 짓는 것이었다. 그가 [영원한 긍정]에서 제시한 새로운 옷은 ‘자아를 절멸하는 것’ 그리고 ‘쾌락이 아닌 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칼라일이 가지는 의미

칼라일의 종교적인 번민은 부모가 속했던 ‘종교 문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계몽주의의 ‘세속 문화’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뒤 18세기 계몽주의가 선도한 세속 문화의 바다에 빠지면서 극심한 회의 속에 건강까지 해칠 정도가 되었다. ‘정신적 습관’으로서 신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세속 문화에서 신앙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힘겨운 고투 끝에 독일 낭만주의 철학과 문학에 접하면서 비로소 탈출구를 얻게 되었다. 독일 철학이 지닌 18세기에 대한 반란성은 칼라일에게 세속 문화 속에서 강한 의식적 신앙을 갖게 도와주었다. ‘종교 문화’의 단계에서 ‘종교 신앙’의 단계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영원의 부정’(기계론적 세계관)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 비로소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긍정’에 안착하게 되었다.

칼라일은 종교적 성향을 지녔으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 사이에 “칼라일은 나의 종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칼라일이 영향력은 대단했다. 모든 종교 형식을 히브리의 낡은 의상으로 간주한 칼라일의 영향으로 교회 출석을 중단하는 사례로 적지 않았다. 물론 교회 출석 거부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칼라일은 외적 형식을 거부하면서, ‘살아 있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종교가 급격한 쇠락 현상을 보인 서양 세계와는 달리 오히려 그리스도교 인구가 급격히 팽창한 현대 한국사회가 과연 칼라일에 대한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는 먼저 칼라일이 직면했던 19세기 영국의 종교 현실과 21세기 초 한국의 사회 상황이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칼라일 시대에 이미 천 년이 훨씬 넘는 그리스도교 전토을 지녔던 영국 사회와, 이제 겨우 전교 백 년을 넘긴 한국 사회는, 전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울러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종교 신앙’보다는 ‘종교 문화’에 가깝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직 대통령 이명박 씨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공언했던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발언은 아직도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종교와 세속의 영역이 분화되지 않은 유아기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 칼라일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에 영향을 준 최초의 스승은 우치무라 간조이다. 이에 앞서 우치무라 간조가 무교회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칼라일의 책을 탐독한 데 있다. 따라서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함석헌도 칼라일에게서 영향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중에서도 종교의 형식, 겉모습(의상)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칼라일의 [의상철학]에 대한 언급은 [함석헌전집](전20권)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몇 구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치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치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치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슈바이처를 알고 읽게 됐는데 슈바이처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이단자가 되기까지], [함석헌선집 5.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람이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자 첫째로 받는 문화유산은 옷이라는 것이다. 인간문화는 우선 옷이라는 형상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어 인간세상에 나오자마자 저를 둘러싸고, 그때부터 저를 떠나는 일 없이, 죽는 순간까지, 아니 3척 흙 밑에서 썩을 때까지 같이 썩는다. 옷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 착안을 하여 하나의 철학을 말한 칼라일은 그 당대의 일인자 철인이었던만큼 위대하였다 할 수밖에 없다. 저의 말과 같이 과연 인간사회는 의상 위에 서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의복의 기원은 어디 있느냐 하면 놀랄 만큼 재미있는 일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옷의 효용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우선은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요, 다음은 의용(儀容)을 갖추는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본래 벗은 몸으로 살던 인류가 옷을 입게 된 것은 한서(寒暑)를 피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함이 가장 자연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복의 사용은 그러한 실용적 가치의 자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의복은 여자로부터 입기 시작하였는데, 그 여자의 의복은 당초에 요부(腕部)에다가 패각(貝殼)을 꿰매어 두르던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종교], [함석헌전집 9.역사와 민족])

나는 '요한복음'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고, 사람이란 또 각각 다른 점이 있지 않나요? 그렇지만 이거 좋아하게 된 시작이 좀 재미있어요. 어째 그랬나 하면, 지금은 뭐 [파우스트] 같은 책을 젊은 사람들이 별로 읽지는 않을 거예요. 허나 옛날에는 서양에서 젊은이가 사회로 나가려고 할 때는 그 포켓에다가 한켠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넣어주고 한켠에는 칼라일의 [의상철학]을 넣어주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렇게 좋은 뭣으로 많이 읽히고 그랬어요. 나는 공부가 늦어서, 고사(高師)에 입학을 한 뒤에 그러니까 아마 스물넷일 거요, 그때 ??파우스트??를 첨으로 읽게 됐는데, 일본 번역을 읽은 거지요. 그땐 뭐 독일어를 모르던 때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 풀이 2], [함석헌전집 19?영원의 뱃길])

1백 년 전 칼라일은 신문이 오늘의 성경이라고 했다. 성경을 내버리라는 게 아니라 성경의 해석 문제이다. 요즘의 신문을 읽지 않고 2천 년 전 성경만 그대로 읽어서 옳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가. 현실은 자꾸만 변하다. 골방에서 책도 안 읽고, 남의 이야기도 귀담아듣지 않고 생각만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누구 믿을 때 아니다], [함석헌전집 12.육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씀])

사람이 왜 옷을 입게 되었을까? 칼라일이 이미 거기 대하여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래도 또 묻고 또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성경의 말하는 대로 그것은 모순이다. 옷을 입어야 할 것이거든 털이 났거나, 털이 아니 나려거든 옷도 입지 말거나, 털로 못 가릴 것이라면 옷으로도 마찬가지로 못 가릴 것 아닐까? 옷은 식물의 털, 동물의 털을 엮어놓은 것뿐이지 다른 것 없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함석헌전집 3.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옷을 팔라니 옷이 무엇인가? 실로 짜고 가위로 잘라 꿰맨 것만이 옷이 아니다. 내 몸을 가리우고 보호하는 것은 다 옷이다. 칼라일의 [옷의 철학]을 좀 들을 필요가 있지 않나? 우리 옷은 한 벌만이 아니다. 헝겊으로 한 옷 밖에 집이란 옷, 그 밖에 사회란 옷, 또 그 밖에 나라라는 옷, 또 세계란 옷, 그와 같이 겹겹이 입었다. 교회란 옷은 아마 옷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겉옷일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속의 더러움을 가리고 점잖은 체하며, 아무 실력이 없는 자가 지위를 가졌노라 뽐내는 겉옷, “겉옷을 팔라” 한 겉옷은 아마 이 겉옷일 것이다. 곧 내가 가장 소중히 아는 ‘거짓 나’ 말이다. (칠월 그믐밤, [함석헌전집 5.서풍의 노래])

즉 칼라일은 단순히 저 멀고 먼 옛날의 박제된 서양 사상가가 아니다.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의 사회현실과 종교문화에 영향을 미쳐,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탁월한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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