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해달별사랑
 
 
 
카페 게시글
두들마을[1] 스크랩 만지송(萬枝松) 같은 겨레의 어머니
바람산 추천 0 조회 50 14.07.18 13: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지송(萬枝松) 같은 겨레의 어머니  

 

 

영양 광려산 두들마을

 

 

[사진] 문화인물 정부인 안동장씨상. 61×91.5cm.

 

 

나의 작업실에는 조선시대 한 여성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들고날 때마다 경모하며 인사를 드리는 여인은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1598-1680)로 1999년 11월 문화인물로 선정된 여성이다.


세상 인연과 만남이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부인과의 만남은 각별하다. 결국 지금은 필연이 되었지만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정부인 영정을 의뢰해 왔을 때 나는 몹시 망설였다. 내 여린 붓끝으로는 위대한 겨레의 어머니를 그려낼 수 없다는 생각과, 마땅한 적임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미 문화인물로 선정된 안동장씨 기념사업회에서는 한시바삐 상징적인 인물초상이 필요했고, 마땅한 작가를 구하지 못하자 내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것도 정부인 시가(媤家) 재령이씨석계선생종친회(載寧李氏石溪先生宗親會) 회원들이 날을 잡아 각지에서 올라와 인사동 어느 식당으로 나를 부른 것이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의 13대 종손 이돈(李燉)님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자손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즉 할머니의 덕행과 예술가로서의 자질, 그리고 현부인(賢夫人)의 모습을 화가에게 주문하며 할머니의 자손들을 참고하라고 모두 얼굴을 내밀었다.


당시엔 정부인의 후손인 소설가 이문열씨가 안동장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선택’이 <세계의 문학>에 연재되어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다. 또 책이 출판되자 더욱 장씨 부인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나는 일차적으로 정부인의 생애와 삶을 추스르기 위해 우선 400년을 거슬러 그분의 체취가 어린 생애의 현장을 순례하게 해줄 것과 유품을 배관할 수 있도록 종손에게 청했다.


먼저 이천 북암문원의 이문열 작가를 찾아가 영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날(1998.10.15) 안동에 내려가 종손 이돈 선생의 차에 합류, 정부인이 나신 서후면 금계리로 향했다. 때는 가을바람이 들판을 휘젓는 소슬한 기운 속에 맞이한 경당고택(敬堂古宅). 경당은 정부인의 친정아버지 장흥효(張興孝)로, 성리학의 대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덕망이 깊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자식을 두었는데 무남독녀가 정부인 장씨다.


정부인의 어린 체취가 서린 곳. 아버지의 시중을 들며 글씨를 쓰고 시를 짓던 총명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창밖에 소록소록 비 내리는 소리

소록소록 저 소리는 자연의 소리일진데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는구나

 

 

 

[사진] 재령이씨 석계 선생 13대 종손 이돈씨와 종부 조귀분씨. 57×38cm.

 

 

청담선사(淸潭禪師)가 애송했다는 위의 ‘소소음(蕭蕭吟’은 불과 10여 세 때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투시한 선시(禪詩)의 깊이로 느껴진다. 또 소녀는 일찍이 성현에 대한 흠모와 실천의지가 있었기에 이런 시도 남겼나 보다.


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서

성인의 모습 뵈옵지 못하나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으니

성인의 마음과 모습 뵙는 듯 하구나


-‘성인음(聖人吟)’


이 경당고택에서 경당이 가르친 문도 중에 이시명이란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훗날 정부인의 남편이다. 이시명은 당시 27세로 남매를 둔 홀아비였는데, 경당은 이 제자에게 19살의 외동딸을 그것도 재취부인(再娶夫人)으로 시집보냈다. 얼마나 제자를 아꼈으면 금쪽같은 딸을 한 사내의 배필로 이어주게 했을까.

 

고택을 지키는 권순씨(權順·59)와 인사를 나누고 정부인이 시집간 곳으로 차가 내달리니 ‘MBC 방송대상 정부인 안동장씨 그 생애’ 태이프를 들으며 가는 길이다. 그런데 길목이 심상치 않기로 내 고향 영해로 들어서더니 어릴 때 늘 건너다보던 인량리(仁良里), 소위 나랏골 충효당(忠孝堂)에 차가 멈추지 않는가. 놀란 가슴은 이시명이 영해부(寧海府) 나랏골 재령이씨 집안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이곳에서 정부인이 시집살이와 자식을 낳아 기른 곳이라는 점이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가물가물한 내 유년의 추억을 더듬어 주는데, 영해국민학교 시절 외할아버지댁 원구로 갈 때 항시 지나쳤던 호주말과 나랏골의 풍광이 아슴푸레 흑백 영상처럼 스쳐간다.


정갈한 정부인의 모습이 어린 충효당의 마루를 어루만져 보고 넉넉한 마당을 서성이다가 이웃한 갈암종택(曷菴宗宅)에 이르니 정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태실(胎室)이다.

 

 

장씨부인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첫부인의 아들을 합해 모두 학문 높은 선비로 길러낸 칠현자(七賢子)의 어머니가 되었다. 특히 그 중 갈암은 이조판서에 올랐고,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적통을 이은 바 후일 어머니 장씨가 정부인으로 추증되게 한 인물이다. 또 장씨 부인의 행실기(行實記)를 남겨 어머니의 삶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하였다.


나의 흥분과 벅찬 감회는 400년 전 정부인이 밟았을 길을 걸어보며 집 떠나 올 때 어머니의 말씀, “호주말에서 한 할머니를 보았는데 둥근 모습에 짙은 옷을 입고서 집밖에서 누굴 마중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 기억이 스쳐간다. 뜻하지 않은 모처럼의 고향길, 영해시장에서 참기름을 짜고 사시는 외삼촌에게 들러 서울 식구 안부를 전하고 참기름 두 병을 받아 이돈 선생께 한 병 전하니 종손께서도 감회가 각별한 인상이다.


이제는 영양 석보로 차가 달린다. 정부인의 남편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 이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산촌에서 20년간 은거한 터전이다. 광려산(358m)을 주산으로 화매천 건너 병암산(267m)을 바라보며 둥지를 튼 석계고택 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이 마을은 현재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문화체육부 1994)되어 한창 공사 중인 원리 두들 마을이다.

 

 

[사진] 석보 두들 마을(191×134cm).

 


두들이란 언덕이 높은 마을이란 지명으로, 기이한 바위언덕위에 은거의 터전을 마련한 이시명은 인조 18년(1640년)에 석계(石溪) 위에 집을 짓고 석계라 자호(自號)하였다.

 

 


석계 선생 안목이 돋보이는 석천서당

 


언덕 위에는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마을의 원림(園林)으로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즉 마을숲 경관과 함께 외부 노출을 피하는 방편의 숲 조성으로 느껴진다.


먼저 근자(1990)에 세워진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에 참배하고, 석계고택과 종택을 찾으니 선생과 장씨부인이 만년까지 살던 곳이다. 일자형 사랑채와 안채를 둘러보고 석천서당(石川書堂)을 찾으니 선생이 강론하던 터전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전망이 시원하기로 앞산과 들녘, 그리고 두 개의 물길이 달려오다가 합해진 후 들판을 가로질러 병암산 아래로 빠지는 풍광을 조망하는 터로, 단연 석계 선생의 안목이 돋보인다.


한편 두들 마을의 문화유적으로 항일시인 이병각(李秉珏)의 집이었던 유우당(惟于堂)과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그 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정부인 장씨의 ‘선택’이 쓰인 모태였다. 발길을 이어 언덕 너머의 주곡고택(做谷古宅)과 만석꾼 집을 둘러보는데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온다.

 

문화마을(두들 마을) 사업은 10년 계획 하에 다양한 문화센터가 건립될 예정이라는 말을 들으며 늦은 밤 대구에 도착, 종손 이돈 선생댁에 들어섰다. 그런데 반가이 맞아주는 종부(宗婦) 조귀분씨(趙貴粉)의 첫 인상이 맑고 다정하다. 역시 종부는 하늘이 내리는 법인가, 정부인의 후예다운 기품과 자태가 곱다. 이제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은 집안의 보물을 배관하는 시간. 이 무서운 인연의 광영이라니.


정부인께서 소녀시절 이웃에서 군대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내의 슬픔을 노래한 학발시(鶴髮詩) 3장의 ‘학발첩(鶴髮帖)’, 자수와 호랑이 그림의 ‘전가보첩(傳家寶帖)’, 그리고 동양 최초의 요리서로 꼽히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음식디미방)’, 목판집으로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貞夫人 安東張氏 實紀)’, 또 석계 선생의 유묵과 정부인의 유품으로 동경(銅鏡)을 보여주었다.


자연염색 한지에서 뿜어 나오는 400년 전 유묵은 눈부시게 빛을 발했고, 정부인의 필체에선 경의와 찬탄 속에 숙연해져야했다. 도저히 10대 소녀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학발첩의 초서는 당시 초서의 대가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1571-1629)의 상찬처럼 중국의 대가 글씨에 버금간다는 말이 실감난다.


어린 소녀가 천재 소리를 듣기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습작이 따랐을까. 해(楷) 행서(行書)를 익히지 않고서야 어림없는 과정인 만큼 굳센 필치와 유연한 흐름은 어린 소녀의 강도 높은 절차탁마로 느껴진다.


이 같은 재능도 시집가서는 당시 아녀자의 본분을 넘어서는 것이라 여겨 정부인이 노년 때까지 재능을 숨겼다는 점에서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빌미가 되고 있다. 어찌 시대와 사회상을 나누어 분석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정부인의 유적을 잘 살펴보면 만년에 이르러 다시 붓을 든 흔적에서 필의와 기상이 생동함을 재발견할 수 있다. 즉 어버이가 주신 몸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경신음(敬身吟)’과 일흔셋에 장수와 자식 많이 두었음을 자찬하는 ‘기아손(寄兒孫)’이 그것이며, 만년에 또박또박 고문 한글궁체로 내려쓴 음식디미방 글씨의 단아함과 내용 끝부분이 심금을 울린다.

 

 

‘이 책은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 자식들은 각각 벗겨(배껴) 가오되 이 책 가져갈 생각을 말며 부디 상치 말게(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수이(쉽게) 떨어 버리지 말라.’


정부인은 손수 음식을 만들고 요리 과정을 자신의 글로써 실증하였으니 선구적인 음식문화의 저술가요, 이웃을 사랑하며 아녀자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예술 재능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여인으로 여겨진다.


이제 종손으로부터 정부인의 생애를 담은 한 꾸러미의 책과 유적순례, 그리고 유물을 배관하고 돌아온 나는 마음이 무거웠으나 며칠 뒤 궁중음식연구원으로 황혜성(黃慧性) 선생을 찾아갔다.


1965년 여름, 석보로 정부인의 ‘음식디미방’ 책을 찾아갔다가 때마침 장 할머니의 기제사에 참석한 후 책 연구와 함께 평생 조상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황 선생은 정부인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했다.


그 모습을 화첩에 담고 돌아와 옛 복식 고증의 원로인 유희경 선생을 뵙고 자문을 구한 후 이튿날 이화여대의 홍나영 교수(복식사)를 찾았다. 홍 교수와 박물관의 협조로 재현한 조선 선조 때의 사대부 집안 여인옷을 꺼내 여학생에게 입혀보고 사진을 찍었다.


대체로 당대의 옷은 저고리가 길고 치마폭은 넓으며 쪽머리가 아닌 얹은머리였다는 고증에 입각해 이번엔 KBS 제작2부(최민식 계장) 소개로 사극 인물의 머리 모양을 의뢰하는 김연순미용학원(대방동)을 찾았다. 김 원장은 정성껏 세 가지 헤어스타일로 마네킹에 머리 모양을 제시했고, 나의 간청에 통째로 두상을 화실로 빌려갈 수 있게 배려해 주었으니 이제 나의 몫은 정성을 다해 영정을 그려내는 것이다.


상상의 인물을 위해 아내의 도움이 절실했고, 수십 일간의 밑그림을 통해 83세의 생애 중 영정은 60대 중반의 모습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후덕하면서도 매사에 빈틈없는 총기가 서린 얼굴. 즉 예인(藝人)의 기질이 배어나는 인물을 흠모했다. 바탕재료는 예전에 구해 아끼던 조선한지(도침장지)에 필묵하고, 노란 저고리는 치자로 염색했다.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상(安東張氏像)’ 글씨는 월정(月汀) 정주상(鄭周相) 선생의 필의를 받아 옮겨 쓰고 붓을 뗀 후 낙관했다.


마침내 정부인의 영정은 이듬해(1999년 11월) 문화인물로 쓰였다. 포스터와 리플렛, 정부인의 전기와 실기 편찬에 모두 초상이 쓰였으므로 나는 뜻깊은 인연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진] 두들 마을에서 바라본 병암산. 96×58cm.


 

그 후 생전의 정부인이 남편 석계 선생을 모시고 생애를 마치신 곳. 석보 두들 마을을 그리고자 기다려온 지 어언 7년. 처음 답사 때의 감동을 되살려 금년 여름 다시 찾았으나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다만  변한 것은 이문열 선생이 영양군과 협조하여 광산문학연구소를 크게 짓고 문호를 개방해 놓은 것이다. 마을에서 만난 이병균(李秉鈞·78), 이병태(李秉泰·71) 선생은 올 가을(10.29)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이 완공될 때쯤이면 경관이 좋을 듯하다 하여 할 수 없이 정부인 유적비에 절만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가을이 깊은 날(10.28) 벼르고 기다리던 마을 사생으로 이돈 선생의 차에 다시 동승했다. 합승한 이현정(李鉉政·68) 선생은 이돈 선생과 동갑내기로 석보초등학교 동창생이고, 대구집 방문 이후 다시 뵙는 종부는 불천위(不遷位) 제사에 대해 묻자 십수 년 손수 장만해온 제사떡 10가지를 바로 화첩에 옮겨준다.


“본편, 백편, 청절편, 경단, 깨굴이, 부편, 송기송편, 잡과편, 전, 조약…” 역시 몸에 배고 익힌 솜씨는 정성과 함께 조상을 기리는 진실한 삶의 자세에 다름 아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마침 이문열 선생이 광산문학연구소에 머물고 있다. 며칠 전에 끝난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다녀온지라 휴식을 취하고 예절관 준공식에 참석차 내려왔다고 한다. 익히 나를 알아봄으로 어둡기 전에 함께 마을을 돌며 하나하나 가옥의 위치와 골목, 빈터를 작가는 도표로 그려준다.

 

 

또 옛 추억이 서린 일로 광려산 아래 복개된 개울이 예전 겨울엔 자연 썰매장으로 주곡고택에서 엉덩이를 붙이면 자동적으로 언덕 아래 화매천까지 달려 내려갔다고 한다. 외떨어진 만석꾼 집을 손짓하고서는 “하늘의 구름똥 서 말, 잠자리 눈꼽 서 말만큼이나 밥풀 하나 얻기 힘들게 재산을 아끼며 모은 집”으로 소문났던 곳이라고 들려준다. 한편 마을언덕 아래로 내려가 바위에 새겨진 옛 풍류의 흔적으로 낙기대(樂飢臺)와 세심대(洗心臺)를 찾기도 했다.


이튿날 영양군이 주최한 예절관 개관식은 청아한 가을하늘 아래에서 열렸다. 실습실, 사무실, 기념관 3동으로 지어진 한옥은 크고 아름다웠는데, 기념관에는 정부인의 영정을 중심으로 영인본 유물이 전시되었다.


행사장에서는 예전 영정 제작에 각별한 애정을 주셨고, 현재 정부인기념사업회 부회장이신 이병서(李秉瑞) 선생과 안동장씨 경당 장흥효의 종손인 장성진(張晟鎭) 선생도 뵈었다.


사실로 전하는 바 정부인의 아버지 장흥효가 당시에 대를 이을 자손이 없자 부인은 친정의 후사를 위해 자신보다 10살이나 적은 작은 친정어머니를 모셔 환갑이 넘은 아버지에게 4남매를 낳게 했으니 그 후손이 현재 전국에 수천을 헤아린다. 이에 경당선생 후손들은 “석보(石保) 할매(정부인)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없었다”고 그 부덕을 기린다고 한다.


이리하여 정부인이 돌아가실 때의 자손은 일곱 아들과 친손으로만 21명의 손자, 23명의 손녀를 두었고, 남편 석계 선생 또한 84세의 장수를 누리게 하였으니 실로 천수와 만덕을 누렸다고 하겠다.


이 400년 덕화의 마을 전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 건너편 산으로 올라 화첩을 펼치고 마을로 돌아와 이틀에 걸쳐 가옥들을 사생했다. 덕택에 광산문학연구소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이문열 선생과 대화를 나누었다.


광려산으로 오르는 언덕은 너른 빈터로 큰 행사를 치를 수 있게 자연공간이 형성되었는데, 개망초와 마른 강아지풀, 억새가 바람에 날린다. 그 틈새로 보랏빛 꽃이 앙증스러우니 용담 군락이다.

 


[사진] 만지송(萬枝松). 96×58cm.

 


구릉에서 돌아본 시야엔 마을 앞으로 강물과 들판, 그리고 병암산이 펼쳐져 다시 화첩을 매만지는데, 마침 사진을 찍는 이장희(李長熙) 원장(신경외과 전문의)을 만나니 이문열 선생의 사촌으로 현재 그의 생가를 지키고 있다 한다.


이제 해가 저물기 전 꼭 가야할 곳이 있음은 집 떠나오기 전 메모해 두었던 인근 답곡리(沓谷里)의 만지송(萬枝松)을 만나는 일이다. 그런데 차편이 아쉬운데 이병태 선생께서 손수 차를 몰아 주시겠단다.  지난 여름에도 청송 진보까지 신세를 졌건만 길손을 위해 또 배려해 주시는 것이다.


덕분에 숨가쁘게 산길을 올라 마주한 만지송은 천하의 명송이었다. 천 개의 팔과 눈을 단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이 연상된다는 전영우 박사의 말을 빌어서 만 가지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소나무는 외줄기에서 네 가닥으로 갈라진 가지가 무수히 뻗어내리고 있다.


순간 나는 ‘만 가지를 지닌 어머니의 품속’처럼 느껴졌고 정부인 장씨가 연상되었다. 그렇다. 정 부인을 떠올리는데 이만한 상징이 또 있을까. ‘만지송 같은 겨레의 어머니’로 칭송 받고 만대로 이어질 현부인의 삶이 소나무와 마냥 닮게 느껴졌다. 만지송의 나이가 400년으로 추증되니 이 또한 정부인의 삶과 영혼이 함께 해온 세월이다.


나는 엎드려 거룩한 만남과 인연에 합장했다. 그리고 실제 동터 오르는 새벽녘의 산을 배경으로 한 만지송을 화실로 돌아와 그렸다. 겨레의 새날을 열어주는 만지송의 기운이 정부인의 덕화와 함께 영원하기를 기원하면서.


출처: 월간 산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target=_blank>lhs1957@lycos.co.kr      http://kr.blog.yahoo.com/jongseop1/99.html


 

 내가 읽은 漢詩...해석과 감상 

 

조선조 유일의 ‘여성君子’ 貞夫人 안동 張씨 /성인을 노래함(聖人吟) 

 

 

성인을 노래함(聖人吟)


성인이 계시던 때 나지 못하고(不生聖人時)

성인의 얼굴 뵙지 못하지만(不見聖人面)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으니(聖人言可聞)

성인의 마음 볼 수 있네(聖人心可見)

******************************************


창밖에 쓸쓸히 비가 내리니(窓外雨蕭蕭)

그 소리가 그대로 자연이라(蕭蕭自然聲).

내 자연의 소리를 들으니(我聞自然聲)

내 마음 또한 자연이로다(我心亦自然).

 

 

 

안동 장씨와 학발시 삼장(鶴髮詩 三章)


새하얀 머리 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鶴髮臥病)

자식은 만리 밖에 있구나(行子萬里)

자식이 만리 밖에 있으니(行子萬里)

어느 달에 돌아올꼬(曷月歸矣)


새하얀 머리 되어 병을 껴안고 누웠으나(鶴髮抱病)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西山日迫)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祝手于天)

어찌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할까(天何漠漠)


머리 하얀 어미는 병을 부추겨(鶴髮扶病)

일어서고 또 넘어진다(或起或陪)

지금이 이와 같은데(今尙如斯)

찢어진 속옷 자락이 어찌하랴(絶据何若)



**장씨 부인의 시는 아주 이채롭다. 다른 여성들의 글과는 달리 철학적 사색과 학문에 대한 감회를 표현하는 시가 많아서다. 또 그는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계층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고단한 삶을 노래했다. 학자들은 이른바 ‘민중시’로 분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서 당시 다른 남성의 시들과도 차별점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 당시 양반집 출신의 많은 여류 시인들의 시적 주제는 자연, 효심, 님에 대한 그리움, 옛날의 회한 등. 주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에 비춰 볼 때 인류애를 희구하는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학발시 ‘3장’(鶴髮詩 三章)’이 이같은 장씨의 인류애를 느끼게 해 준다. 제목 ‘학발시 3장’은 학의 털과 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읊은 3장의 시라는 의미다. 열다섯살에 아들과 남편을 변방에 보낸, 이웃 동네의 어느 가난한 집을 다녀온 후 지은 이 시는 사언(四言)의 고시(古詩)로 “장부인 실기”(實紀) 마지막 부분에 초서로 쓰여 있다. 글체는 호쾌하다는 평. 내용만 보면 그 나이에 지은 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초들의 처절함이 알알이 배어 있다. 시를 지은 동기부터 갸륵하기 그지없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겨 시어머니를 모시지만 만리 먼 변방에 군역 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이 없다.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깜박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80이 넘은 애절한 시어머니를 보고 나도 슬퍼 이 시를 짓는다.”

그 내용은 지금도 보는 이의 애를 끊는다.

기다림에 지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삶. 불쌍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환영을 찾아 병든 몸을 이끌고 찢어진 속옷을 펄럭이며 아들의 환영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쫓아 뛰어나가 붙잡고 함께 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여성君子, 후대인들은 貞夫人 안동 張氏를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 이름 석자로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조선 중기의 한 여인에게 ‘군자’라는 호칭을 부여했다는 것은 여간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君子란 그 시대 남성들, 그것도 사회 지도층인 사대부들의 지향점이었으며 이상형이었다. 누구나 듣고 싶고 불리고 싶었던 최고의 호칭이었던 것이다

‘장씨는 이퇴계의 손자뻘 제자(再傳弟子) 되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딸이요,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의 아내이며,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과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형제의 어머니가 되는 분이다. …경당 장흥효는 퇴계 선생의 학문을 이어 영남학파를 있게 한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세 분의 스승에게 한국 성리학의 가장 요긴한 사상을 마음과 몸으로 익히어 그 외손자인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전한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다. 정부인 장씨는 동아시아 최초의 요리서로 평가되는 “규곤시의방”(閨곤是議方)을 후손들에게 남겨 줬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