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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시인)-
1. 안의 괄호와 밖의 괄호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괄호를 품고 살아간다. 괄호는 비어있음이면서 미지이면서 불확실성이면서 동시에 억압과 불안과 욕망의 상징이다. 억압과 결핍이 불안과 욕망을 낳는다. 욕망의 관점에서 괄호를 보면 채워야할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비워야할 어떤 것이다. 괄호를 채우고 비우는 일은 전적으로 욕망하는 주체의 몫이다. 그런데 괄호는 주체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안의 괄호와 밖의 괄호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일은 안의 괄호와 밖의 괄호를 동시에 들여다보고 그것을 채우거나 비워나가는 일이다. 밖의 괄호를 채우는 일이 안의 괄호를 채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안과 밖의 괄호가 불균형을 이룰 때 상처와 괴로움과 슬픔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때로는 쉼표와 마침표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 땅에는 무수한 괄호가 있고 무수한 쉼표와 마침표가 있다.
이희섭의 첫 시집『스타카토』에는 여러 가지 풍경을 그 이면에 숨겨둔 괄호가 보인다. 그의 괄호 속에는 상처가 보이기도 하고 그리움이나 그늘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괄호 속에는 꽃이나 새가 보이기도 하고 달이나 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괄호 속 풍경들을 스타카토 한다. 스타카토는 이희섭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동시에 시를 쓰거나 사랑을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시인에 의하면 인생이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왜 가야하는지”도 모른 채 “누구나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며/ 달려가는 길 위”(「마지막 주유소」)의 삶이다. 그렇게 시인의 인생이라는 괄호는 채워졌다가 비워지고,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는 삶의 반복임을 보여준다.
이희섭의 시에는 길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그것은 시인의 인생에 대한 사유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희섭 시인의 길 이미지는 안의 괄호와 밖의 괄호를 이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괄호를 열고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의 외출은 행복한 결말을 향해 있지 못하고 불안이나 결핍을 만나거나 추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집 안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는 내 양말 온종일 나를 넣고 다니다가 누가 볼까 몰래 토해낸 것 나보다 먼저 땅을 딛고 늦은 밤까지 나를 신고 다니며 풀리지 않는 암호를 뱉어낸다 잘못 태어난 밤이 어김없이 나를 맨발로 버린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끊임없이 버림받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밤 현관 앞이나 화장실 앞, 침대 밑에다 기꺼이 나를 버리고 발견을 기다리는 유물 어느 곳에서 빠져나왔는지 나조차도 찾을 수 없는, 나를 뒤집어버리고 돌돌 말아버린 생의 굳은살
고치에서 빠져나온 누에처럼 느릿느릿 귀찮아지는 여정 아내는 제발 세탁기에 갖다 넣으라고 성화다 체념한 듯 끊어진 길을 잡아넣고 세탁기를 돌려댄다 발자국이 따라 돌아간다 지나온 길이 어지럽다
―「발자국 껍질」전문
이 시는 ‘발자국 껍질’로 은유된 ‘양말’ 이야기이지만, 그 이면에는 길로 표상된 그의 삶 속에서 ‘풀리지 않는 암호’, 즉 괄호를 대면하게 되는 시인의 여정이 선명하게 부조되어 있다. 여기서 ‘양말’은 나를 넣고 다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적 화자의 존재성을 나타내는 제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양말은 저녁에는 벗어야 할 물건이라서 화자는 결국 맨발이 된다. 그런데 시인은 “잘 못 태어난 밤이 어김없이 나를 맨발로 버린다”고 하여 ‘맨발’, 즉 결핍이 그의 삶에서 운명적인 것임을 암시해준다. 이 시에 의하면 그가 태어난 밤은 잘못 태어난 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버림받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밤”이다. 그런데 ‘양말’은 “침대 밑에다 기꺼이 나를 버리고 발견을 기다리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나’의 또 다른 존재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화자가 양말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성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흡사 이상의 「날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주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의 삶이 무료함과 단절로 귀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이 “고치에서 빠져나온 누에처럼 느릿느릿 귀찮아지는 여정”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불확실한 정체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시에서 화자의 존재성을 상징하는 양말은 “집안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거나 “침대 밑에다 기꺼이 나를 버리고 발견을 기다리는 유물”이고 “어느 곳에서 빠져나왔는지 나조차도 찾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화자의 존재론적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는 흡사 이상이「날개」에서 외출을 하고 돌아와 아내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과도 비슷하다. 이상의 소설에서 화자인 ‘나’와 ‘아내’와의 관계가 끊임없이 어긋나는 것처럼, 이희섭의 시에도 화자와 아내와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의 또 다른 시「가득과 가족 사이」에 보면 “가족이라는 것도/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그와 아내 사이에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금세 빠져나가는/사소한 빈틈”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동안 우리 사이에 소진된 것은 무엇인가”를 반문하면서 “바닥난 가족을 가득 채우러/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빈틈은 다른 말로 하면 괄호이다. 자동차가 기름을 넣어야 굴러가듯이, 인간 역시 괄호를 채우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귀를 닫아걸고
괄호를 열어놓았다
그건 간극(間隙)의 시간
거스르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는
강물의 함정
스스로에게 갇히려
끝없이 흐르는 문장들
사람이 가진 기호에
내가 가진 괄호를 채워보느라
조용히 소란하였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괄호가 만나서
비밀스런 틈을 완성하는 일
같은 강에 발 담그고
그 흐름에 깃든 문장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일
외로움으로 여는 저 달도
물에 비친 제 모습으로 괄호를 닫으니
이제 나는 문을 열고
닫힌 귀를 풀어놓는다
―「그믐달이 열어놓은 괄호를 초승달이 닫을 때까지」전문
시인에 의하면 인생은 “그믐달이 열어놓은 괄호를 초승달이 닫”는 과정의 연속이다. 여기서 그믐달이 죽음 쪽에 가까이 가 있다면 초승달은 탄생과 가까운 이미지라는 점에서 불교의 순환적 시간과 맞닿아 있다. 물론 이 시에서 그믐달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달이고 초승달은 물에 비친 그믐달이 초승달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러한 절묘한 풍경의 발견을 통해서 삶을 괄호라는 상징으로 요약해낸다. 인용 시에서 화자는 “귀를 닫아걸고/괄호를 열어놓”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잡한 세상사에서 멀어져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는 이러한 명상을 통해서 “간극의 시간”을 발견하고 “거스르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는/ 강물의 함정”을 깨닫게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사람이 가진 기호에/내가 가진 괄호를 채워보”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 쓰기가 결핍의 산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사랑이나 만남 역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다른 괄호”의 “비밀스런 틈을 완성하는 일”인 것이다. 이희섭의 시 중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시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사랑과 상처를 보듬어주는 괄호
장미 는 그 안에 아름다운 향기와 사랑을 담고 있지만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가 있다. 사랑도 장미와 같아서 매혹과 상처를 모두 가지고 있다. 네잎클로버가 “씨앗에 난 상처를 감추기 위해/잎 하나 더 만든다는”(「지독한 행운」)말이 있는 것은, 아무리 지독한 행운이나 사랑이 따라온다 해도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상처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빛과 어둠, 매혹과 상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희섭의 시에는 꽃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데, 그의 시에서 ‘꽃’ 이미지는 주로 사랑과 관계된다. 시인에 의하면 “바람도 구름도 전화기 속으로 들어서면/꽃 한송이로 피어난다”(「ㄲㅗㅊ ㅎㅏㄴ ㅅㅗㅇ ㅇㅣ」).여기서 전화기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도구로 사랑을 연결시켜주는 매체이다. 이처럼 사랑은 소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너의 눈빛이 내게로 와서 뿌리를 내린다
마음밭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너는 내 안에서 자라난다
너를 경작하는 동안 나의 몸은 너를 향해 열려간다
나는 불면이 깊어가고
너는 연민이 늘어간다
오랫동안 발아를 꿈꿔
불온해진 마음 속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너의 생각 뿐
너의 숨결마저 뿌리가 되어 나를 더듬는다
너를 온전히 심고 나서야
어둠을 견디는 방식을 알게 될 것이다
2.
너의 말이 내게로 와서 상처가 되었다
네 안에 서식하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나는 가슴이 조여들고
너는 연정이 줄어간다
너의 말을 해독 解毒하기엔 너무 늦었을까
나의 슬픈 눈망울에 비친 너의 눈빛이 흔들린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
―「어떤 파종법」전문
시인에 의하면 사랑은 자신이 흙이 되어 자신의 몸에 사랑의 씨앗을 파종을 하고 그것을 정성껏 가꾸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흙인 자신의 몸은 사랑하는 뿌리를 향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일은 이처럼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불면이 깊어가고/너는 연민이 늘어간다”는 것은 사랑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지난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사랑은 중독성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너의 생각뿐”이게 된다. 시인이 다른 시「파르마콘」에서 사랑을 중독에 비유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은 중독이다 너라는 독을 받아들인 후 눈이 멀었다 치사량에 가까운 너를 들이마신 후 너라는 섬광으로 눈이 멀었다 온몸으로 퍼져버린 너는 나의 혈관을 뜨겁게 하고 눈먼 동공 속에서 너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 고백을 통해서도 사랑의 중독성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위의 시에서 “너를 온전히 심고 나서야/어둠을 견디는 방식을 알게 될 것이다”고 한 것은 사랑의 중독을 넘어서 온전한 사랑에 이르렀을 때에야 사랑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어둠을 견디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너의 말이 내게로 와서 상처가 되었다”로 시작되는 두 번째 단락은 말의 상처로 인해서 서로의 사랑에 금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던지는 말 한 마디가 달콤한 사랑의 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의 상처로 인해 “나는 가슴이 조여들고/너는 연정이 줄어간다”. 하지만 상대방이 던진 말을 스스로 해독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얼음 속에 갇히기 위해
투명한 너에게 걸어 들어간다
로빙화 魯冰花
너는 거름이 되기 위해 피어난 꽃이다
차밭에서 무수히 피었다가
그대로 삭아내리는
지기 위해 서둘러 피는 꽃
속절없이 찾아오는 불멸의 봄
너에게 세상은 봄밖에 없으므로
계절 바깥의 삶을 알지 못한다
폭설 같은 봄
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사라져갈 수 있을까
죽어서 그윽해진 향
진하게 우러나는 꽃의 말
너에게 걸어 들어간다
순교의 꽃에서 심장을 거두어
계절의 뿌리로 삼으려
―「어리석은 얼음꽃」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어리석은 얼음꽃’이다. 얼음꽃은 추울 때 생겨났다가 온도가 올라가면 금방 녹아버리는 ‘유한의 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유한하고 덧없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얼음 속에 갇히기 위해/투명한 너에게 걸어 들어간다”. 사랑의 역설적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이 구절은 사랑이 ‘희생’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연관된다. 화자가 사랑을 ‘얼음꽃’이나 ‘잠깐 피었다 지는 로빙화’, 즉 “지기 위해 서둘러 피는 꽃”으로 정의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죽어서도 향기가 나는 ‘로빙화’처럼 “진하게 우러나는 꽃의 말” 즉 “죽어서 그윽해진 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사랑의 봄이 비록 “폭설 같은 봄”일지라도 기꺼이 사랑의 순교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사랑의 끝으로 이별은 쉽게 찾아온다. 이별은 사랑의 일막을 닫는 일이다. 그의 다른 시「일막 一幕」은 저녁에 상점의 셔터를 내리는 남자의 행위를 통해서 사랑이 끝난 후의 쓸쓸한 풍경을 보여준다. 시인에 의하면 사랑의 일막을 내리는 일은 조명을 끄고 “가게 안에 진열된 숙녀의 시선을 외면하며//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분냄새와/아무렇게나 내뱉어진 말들을 닫아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사랑의 종말은 필연적으로 미련과 상처를 남긴다. “제대로 문을 열고 들어간 적 없는/남자의 밖은/ 늘 열려있다”는 시인의 진술은,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해본 적 없는 남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랑에 대한 미련을 암시해 준다.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문을 닫는 일은 “스스로 어두워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사랑의 괄호를 항상 열어놓고 싶어한다.
3. 기억 속의 괄호, 혹은 스타카토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괄호 쳐두고 수시로 과거로 되돌아가 그것을 살펴보는 일이다. 특히 그 기억이 트라우마와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더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지게 마련이고 끝내 한 점 차가운 풍경으로 남기도 한다. “새살이 돋지 않는 상처가 더 아프다/지나온 발자국들을 모두 덮어버리고/겨울은 몸에 새겼던 길로 찾아왔으나/정지된 화면처럼 시냇물은 얼어있고/시간도 얼어있다”로 시작되는「소한도 小寒圖」는 사랑이 끝난 후 남아있는 상처와 쓸쓸한 마음을 차가운 겨울풍경에 비유해서 보여준다. 이 시에서 시인은 “텅 빈 버스정류장에선/바람이 버스를 기다리고/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풍경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텅 빈 버스 정류장’은 사랑을 끝낸 자의 쓸쓸한 내면을 상징한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풍경이 된다”는 시인의 진술은 과거로 흘러가버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의 한 풍경으로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전언이다.
그런데 기억은 과거에 경험했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당시에는 아무리 긴 시간의 분량을 가진 기억일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짧은 순간이거나 한 점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아 버지의 갈비뼈를 뽑아 만든 기타로 연주를 한다 허공에 만든 객석 온통 목단이 피어있다 갈비뼈를 따라 왼손이 코드를 잡아나간다 리듬에 따라 향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몸속으로 울림이 퍼져 들어간다 기타줄을 튕겨 아무리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기억들 허공으로 튕겨진 선홍색 피가 기타소리에 따라 정신없이 돈다 탁탁 시간을 연주할 때마다 내 몸도 함께 튀어오른다 악보에 쉼표가 있어도 쉬지 않고 마침표가 있어도 마치지 않는다 때론 돌아가기도 한다 팽팽하게 튜닝한 生 느슨해진 시간을 조이고 또 조여도 늘어나는 꽃 아버지의 연주곡도 나의 그것도 되감을 수 없다 목단은 돌아갈 수 없는 북쪽만 바라보고 혈육의 피는 자꾸 묽어져간다 한 생을 마치기 전 한 번, 짧게 연주되는 아버지의 스타카토 아버지는 그곳에 마침표를 찍었고 난 그 옆에 쉼표를 찍는다
―「스타카토」전문
이 시에서 화자가 “아버지의 갈비뼈를 뽑아 만든 기타로 연주를”하는 일은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화자는 목단이 피어있는 나무 아래에서 기타를 치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두고 온 북쪽을 생각한다. 여기서 기타를 치는 화자가 연주의 주체라면 목단은 청중이 된다. 연주의 주체와 청중은 서로 소통할 때 그 음악은 한 층 더 아름다워진다. “허공으로 튕겨진 선홍색 피가 기타소리에 따라 정신없이 돈다”는 표현은 화자의 기타연주와 선홍색 꽃잎을 떨구는 목단의 상호조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가 기타를 연주하는 것에는 지나간 기억들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 하지만 “기타줄을 튕겨 아무리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기억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악보에 쉼표가 있어도 쉬지 않고 마침표가 있어도 마치지 않는다”는 진술은 기억의 영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기억으로 인해서 우리의 생은 “팽팽하게 튜닝한 生”이 되고, 우리의 기억은 수시로 추억의 기타줄을 퉁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억은 “느슨해진 시간을 조이고 조여도 늘어나는 꽃”처럼 점점 많아지게 된다.
시인은 “아버지의 연주곡도 나의 그것도 되감을 수 없다”고 하여 과거의 기억이 함부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스타카토’는 과거의 삶이 짧은 기억으로 요약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긴 삶도 돌아가시고 나면 짧게 연주되는 스타카토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하얀 날개 퍼덕이는 새떼 가득 밀려와
하늘을 삼킨다
해가 떨어지며 출렁인다
너울을 타고 날아온 새, 주름진 뻘을 지운다
수평선을 끌어당겨 시위를 만든다
겨울을 싣고 오는 파도가 고깃배보다 먼저 들어온다
물이 채워질수록 먹잇감들은 줄어들고
녹슨 하늘을 등진 부리는
다가오는 어둠만 쪼아먹는다
물위에 둥지를 틀고
만월을 베어먹는 밤
깃털 하나 뽑아 당겼던 시위에 걸어
서서히 놓아버린다
물의 생각이 얇아지고
품고 있던 기억이 뻘에 드리워진다
왔던 길 묻지 않고
화살처럼 날아간 만조
그 새의 눈은 먼 바다를 닮아있었다
―「만조 滿鳥」전문
이 시에서 ‘만조滿鳥’는 하늘을 가득 메운 새떼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다에 물이 차는 현상인 ‘만조滿潮’를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여기서 ‘만조滿鳥’는 동시에 기억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조滿潮’는 물질로 가득찬 현실을 상징한다. 이러한 사유는 “물이 채워질수록 먹잇감들은 줄어”든다는 함수관계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현실이 복잡다단할수록 과거의 기억은 줄어들게 마련인 것이다. 즉 “녹슨 하늘을 등진” 추억의 부리는 “다가오는 어둠만 쪼아”먹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두 번째 연 “물위에 둥지를 틀고/만월을 베어먹는 밤”은 물 위에 떠다니며 기억을 반추하고 있는 새들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 시의 3연은 물이 서서히 빠지고 ‘기억의 뭍’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억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왔던 길 묻지 않고/ 화살처럼 날아”갈 뿐인 것이다. 늘 기억이라는 새의 눈은 먼 바다를 향해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다른 시「낙인 烙印」을 보면 ‘새겨진다는 것’ 즉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그믐달이 만월로 부풀어 오르는 동안” “세상의 기슭으로 깊게 스며드는 일”이다.
그런데 시인이 기억을 반추하는 일은 현실의 부조리나 불만족스러움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다.
음식 속으로 수많은 칼자국이 박힌다
칼자국은 혈관을 돌며 몸 속에서
골격과 근육을 키워낸다
손과 얼굴, 사상도 만든다
나는 무수한 칼자국을 삼키며 자라왔다
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
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나는 그녀의 도마 위에 오른 칼맛에 길들여졌다
오래도록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를 사육해왔다
혀끝에 비릿한 칼내음
칼맛에 나는 오장육부를 베인다
잘리는 살점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없다면
단면으로 배어 들어가는 칼의 손맛을
어찌 알겠는가
상처가 맛을 내는 것이다
―「칼의 맛」전문
음식 속에 수많은 칼자국이 박히는 일은 한편으로는 끔찍하게도 생각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음식의 맛이 좋아진다. 시인은 이러한 이치를 통해서 상처가 좋은 시를 낳는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칼자국은 혈관을 돌며 몸 속에서/골격과 근육을 키워낸다/손과 얼굴, 사상도 만든다”는 표현만 보아도 이 시가 시 쓰기의 은유로 쓰여진 메타시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누나의 칼질이 사춘기의 격정을 도려냈다”는 표현은 이러한 가족사들도 시인의 시 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은 “잘리는 살점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없다면/단면으로 배어 들어가는 칼의 손맛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처가 맛을 내는”이치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경험했던 시인의 쓰라린 상처도 시의 맛을 내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좁은
골목길
할머니가
앞서
걷는다
느리게
느리게
땅만 보고
걷는다
경적도 누르지 못하고 그 뒤를 따라간다
머리가 점점 땅에 가까워지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어디로 가시는가
배꼽이 할머니를 끌고 간다
중심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배꼽을 움켜쥐고,
둥근 방의 기억을 따라 점점 제 몸을 말아간다
이따금 멈춰 서서 등 들썩이며 숨을 몰아쉰다
배꼽이 내 차를 끌고간다
지루한 오후를 끌고간다
대로변에 이르자 뒤돌아보며
어여 가라고 비켜준다
잡고 있던 길을 놓아주자
한 生이 성급히 지나간다
―「방생」전문
필자에게는 이 시도 흡사 메타시처럼 읽힌다. 이 시에서 할머니는 좁은 골목길을 느리게 땅만 보고 걷고 있다. 그 뒤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화자가 경적도 누르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노파는 머리가 점점 땅에 가까워지고 있는 노파라는 점에서 시각적으로 괄호의 한 쪽을 떠올리게 한다. 노파는 “중심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배꼽을 움켜쥐고,/둥근 방의 기억을 따라 점점 제 몸을 말아간다”. 여기서 ‘배꼽’은 생명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모친과 분리될 때 생긴 상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둥근 방의 기억’은 엄마 뱃속의 기억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억의 원형성을 상징한다. 배꼽이 할머니를 끌고 가고 내 차도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원형적 기억의 힘 때문이다. 허리 굽은 괄호가 된 할머니는 그 괄 호 속에 배꼽이 있기 때문에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잡고 있던 길을 놓아주는 행위를 통해서 암시되는데, 그것은 할머니의 괄호를 닫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 괄호를 버리는 일이다. 이 시의 제목이 ‘방생’인 것도 인생이라는 괄호를 풀어서 할머니를 세상 밖으로 놓아주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란 괄호 넣기와 괄호를 풀어주는 과정의 연속인 셈이다. 시인의 시 쓰기 역시 괄호를 활자로 채우기도 하고 비워내기도 하는 작업이다. 생각해보면 괄호처럼 구부러진 허리 안에 존재의 원형인 배꼽을 품고 느리게 길을 걸어가는 노파야말로 한편의 시이다. 이희섭의 시는 괄호 속에 배꼽을 품고 있어서 스스로의 시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의 시의 배꼽을 따라가 보면 그의 시의 뿌리가 만져진다. 배꼽은 결핍이면서 동시에 상처이지만 그 안에 사랑이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시의 생명성과도 만난다. 결핍과 상처와 사랑은 이희섭의 시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