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물〔觀物〕사물의 이치를 관찰하다
대나무 빛은 일년 내내 절의를 굳게 간직하고
竹色春秋堅節義
흐르는 시냇물은 밤낮으로 티끌과 탐욕 씻어내네
川流日夜洗塵婪
사물을 관찰하여 세 모서리 헤아릴 줄 안다면
若能觀物知三反
천지를 쳐다보고 굽어보아도 어찌 부끄러움 있으랴
俯仰乾坤豈有慚
원문출처=浮査先生文集卷之一
[주D-001]세 …… 안다면 : 삼반(三反)은 《논어》 〈술이(述而)〉에 “한쪽 모서리를 들어보였을 때 그 나머지 세 모서리를 헤아려 대답하지 못하면 더 이상 말해 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하나를 말해 주면 그 나머지를 유추해서 안다는 뜻이다.
지은이=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해설
이하자료출처-深淵(심연)님의 블로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bs4108&logNo=220001025074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전공 고순정(高順貞)의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연구(硏究)』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1995. 12. 總79頁)를
볼 수 있었다. 부사공은 16~17세기에 87세를 일기(一期)로 살다가 가면서
『부사집』(浮査集)을 남겼으니, 『부사선생문집』 부사정(浮査亭) 1994 국역본도 있는 것이다.
성여신의 아호 부사(浮査)에서 사(査)를 찾아 보면 “떼사” (槎) 「떼―배」는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방언으로 뗏목이다. 큰 강물 위를 떠 다니는 떼배처럼 집착도
고집도 부리지 않고 살고 싶다고 하여 부사야로(浮査野老)라고 했을 것 이다.
부사는『한국인명 대사전』에 1609년 (광해군1) 64세로 사마시에 합격 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마시(司馬試)란 것은 조선조 때 과거(科擧)의 하나로서 일종의 자격시험으로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는데 초시에서 양과 각 700명, 뒤에는 각 540명을 전국에서 뽑고, 복시에서
각 100명을 뽑는다고 했으니 고순정(高順貞)은 『부사 성여신연구』에서 말한다.
광해 원년(1609)인 64세 가을에 드디어 生員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당시에 月沙 李廷龜(1546~ 1635)가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집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강산천만리가 다 보이네” 라 는 구절을 읽고, “이는 반드시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이면서 시속의 풍격을 본받지 않는자이다. 그래서 발탁하였다.
(不出 門庭三五步, 觀盡江山千萬里之句, 稱賞不已曰此必老士宿儒不效時格者也,
因擢之:浮査集卷7. 年譜)라는 것을 보면 환갑을 넘겨서라도 과시에 지망했다가
중도이폐(中途而廢)한 사연을 다음 구절로써 짐작할 수 있다. 고순정은 그의 논문 가운데
『부사집』 연보에서 다음의 구절을 들고 있다.
「옥사군이선기군」(欲事君而先欺君) 가호(可乎), 오거업지지로불폐(吾擧業之至老不廢)
이유친 명야(以有親命也) 차욕일전평생지소포(且一展平生之所抱) 금문여언(今聞汝言)
즉세도가지(則道可知) 항시사부정(況時事不靖) 삼강장륜(三綱將淪) 득과해위(得科奚爲)오가
그것 이다.
부사 성여신의 가통(家統)을 보면 오문(吾門) 13파 중 12번째 검교공파(檢校公派) 6세(世)
을신(乙臣)의 후예이다. 을신(乙臣) → 사흥(士弘) → 만용(萬庸) → 경(踁) → 자량(自諒)
→ 우(祐) → 안중(安重) → 일휴(日休) → 두년(斗年) → 여신(汝信)으로 이어진다.
부사는 고조인 우(祐) 때부터 진주에 와서 살았고, 고조는 장흥고부사(長興庫副使),
증조인 안중(安重) 은 승문원교리, 조부 일휴(日休)는 증 호조참판, 부(父) 두년(斗年)은
증 한성우윤이요, 모는 초계(草溪) 변씨(卞氏)라고 하였으며 부사의 부인(夫人)은
밀양박씨 만호(萬戶) 박사신(朴士臣)의 딸이라고 나와 있다.
부사의 스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다. 남명은 경의(敬義)를 신조로 하고,
반국(反婉) 천리(踐履)를 학문의 목표로 삼아 왔기에 1555년 단성(丹城) 현감,
1566년 상서원판관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사퇴하고 말았다.
남명은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을 존경한 나머지 늦가을에 들어 인편으로
건시(乾枾) 한 접을 천리도 넘는 거리에서 선물을 했던 일이 있을 만큼 고매(高邁)한
출처관(出處觀)으로 생을 마친 대성리학자였다.
세속왈(世俗曰) “성인능지성인” (聖人能知聖人)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청송이 유일(遺逸)이요, 남명이 유일이듯이 부사(浮査)의 선고(先考) 또한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한성부우윤(右尹)의 추증을 받았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시칠언절구 한 수를 보면
자하등고유묘리 (自下登高有妙理)
심망행속상지난 (心忙行速上之難)
종용면강행무이 (從容勉强行無已)
연후방지세계관 (然後方知世界寬)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감에 오묘한 이치가 있어
마음을 바삐하고, 빠른 것을 행하면 오르기 어렵 다네
조용히 힘쓰고 힘써 행하되 그만 둠이 없어야지.
그러한 연후에 바야흐로 세상이 넓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라네.
이다. 부사 성여신은 중용 소위 제27장의 「존덕성 이도문학」
尊德性而道問學 : 사람의 덕성을 높이고, 묻고 배우는 것으로 말미암는다)을
잘 실천해 오면서 맹자가 이루편(離婁篇) 상에서 왜 사성자인지도야(思誠者人之道也)라
했는가를 누구보다 간절히 물으면서 살아온 명현(明賢) 의 한 실천도학자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