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뜰에서

2010년 9월 19일(일) ~ 9월 20일(월)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고향 가는 길에 남도를 유람합니다.
미리 1박 2일을 앞당깁니다. 전주 한옥마을, 구례 화엄사, 하동 평사리,
낙안읍성, 강진 김영랑 생가, 다산초당을 들리기로 합니다.
정체될 줄 알았던 중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뻥 둘렸습니다.
전주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한옥의 날렵한 대문 건물에 ‘전주’라 쓴 현판 글씨
가 내 눈에는 아주 어색합니다. 못 쓴 글씨여서 그렇습니다.
원광대 교수인 효봉 여태명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서울 봉은사의 ‘版殿’이라는 현판 글씨는 못 생겼지만 추사 김정희 선생이 돌아가시기 3일 전
에 쓰셨다는 유명세와 역사성, 희귀성 등등과 더불어 유홍준 교수의 ‘고졸하다’(기교는 없으
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는 평가에 힘입어 귀품으로 여깁니다.
전주 톨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진안 가는 길로 들어 화심 한지마을에 있다는 김치닭도리탕
을 먹으러 갑니다. 음식점에는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손님이 꽤 많습니다. 소문대로 묵은
김치 맛이 일품입니다. 종종 생각나게 하는 맛입니다.
화심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가깝습니다.
경기전(慶基殿)에 들립니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입니다.
이성계의 어진 말고도 조선 여러 임금의 어진이 있습니다.
세종의 어진은 광화문 앞의 동상과 매우 다릅니다. 광화문 앞의 동상은 실제와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의 어진은 용안의 윤곽과 분위기 등이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 역을 맡은 배우 이서진의
그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아마 이서진이도 이 어진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1. 경기전 정원

경기전 옆이 한옥마을입니다. 한옥들은 대부분 음식점들입니다.
‘혼불’의 작가인 최명희의 문학관에 들립니다. 아담한 한옥입니다. 최명희의 육필 원고 일부
를 쌓아놓았는데 그 단정한 글씨와 방대한 원고에 놀랍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한 장 한 장 작가의 말 그대로 쓴 원고입니다.
향년 51세. 이른 죽음을 예감한 듯합니다. 어둠이 두려웠나봅니다.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滿月)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2. 한옥마을

3. 한옥마을에서

하룻밤 숙소는 구례 산동 산수유마을 입구의 지리산온천지구 콘도로 정했습니다. 주변의 호
텔, 모텔, 음식점 등이 즐비하지만 비수기라서 그런지 대부분 불이 꺼져있어 을씨년스럽습니
다. 부산 동래의 허심청 온천탕만큼 클까? 즐거웠던 옛 기억으로 ‘지리산온천’을 찾았는데 휴
업한 지 몇 년째입니다. 영화는 한때입니다.
이른 아침에 근처에 있는 수락폭포를 찾았습니다. 한산합니다. 우리가족뿐입니다.
수락폭포는 물맞이 폭포로 유명합니다. 인근 주민들이 모내기나 김매기를 마친 후 허리통증
과 신경통을 다스리기 위하여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낙차 15m. 수량이 비교적 많아 보기 좋습니다.
4. 수락폭포

5. 수락폭포

구례 화엄사에 들립니다.
불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돌 깎는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불사가 끝날 때가 있을까 의문입니다.
화엄사는 석전 황욱 선생이 쓴 일주문 편액과 각황전 건물, 그 앞 석등이 볼만합니다.
6. 화엄사 각황전

7. 화엄사 경내

운조루(雲鳥樓)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 참판 댁 가는 길에 있습니다.
이 운조루가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 참판 댁 모델이라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 시절 건축했다고 합니다.
대문 위 양쪽에 웬 뼈를 매달아놓았는데 무관인 유이주가 호랑이를 잡아서 가죽은 영조께 바
치고 그 뼈는 저렇게 달아놓았다고 합니다. 입장료 1인 1천원.
8. 상사화(꽃무릇), 운조루에서

9. 백일홍, 운조루에서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 참판 댁과 그 주위는 시멘트를 너무 발라서 자연스럽지 못하
고 작위적입니다. 다만 최 참판 댁 담장 너머로 멀리 내다보는 섬진강과 너른 들판이
참 평화롭습니다.
‘토지’를 읽던 벅찬 감동은 지금도 새롭습니다. 매 장을 아껴 읽었습니다.
옥에 티랄까 막판에 연속극 ‘여로’의 그것처럼 너무 안이하게(?) 처리한 것이 아닌가
아쉽습니다.
박경리 문학관은 우아한 건물과는 달리 그 내용은 매우 빈약합니다.
여기저기 다 돌아보려니 다리 아픕니다.
10. ‘토지’의 무대

11. 옥수수, 최 참판 댁

12. 자주달개비, 최 참판 댁에서

12-1. 최 참판 댁 대문과 그 밖 풍경

화개장터는 대목이라 북적입니다. 섬진청류 지나며 건너 억불봉을 바라봅니다.
어느 해 가을, 억불봉 슬랩을 내리던 산행을 추억합니다.
낙안읍성 가는 길에 하동에 들려 재첩국을 맛봅니다. 서울의 재첩국은 흉내에 불과합니다.
낙안읍성에서는 워낙 더워 그늘에만 들어갑니다.
그네가 비어있어 타보았더니 구르기가 엄청 힘듭니다.
돌아다니기보다 음식점에서 더 오래 머뭅니다.
한 접시에 1만원인 꼬막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의 맛 그대로입니다.
동동주 주문합니다.
미취 은은하니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이 알맞습니다.
“窮愁千萬端(근심걱정은 천만가지요)
美酒三百杯(아름다운 술은 삼백 잔)
愁多酒雖少(근심은 많고 술은 적지만)
酒傾愁不來(마신 뒤엔 근심이 사라지네)”
13. 낙안읍성

13-1. 낙안읍성에서

14. 콩꽃, 낙안읍성에서

이제 강진으로 갑니다. 서울은 큰비 내린다는데 이곳은 오뉴월 땡볕이 무색하게 연일
무더운 날씨입니다.
김영랑 생가는 강진읍 내에 있습니다. 예전에 화단에 있던 상사화(꽃무릇)는 파냈는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군데군데 바위에 표준 맞춤법과는 다르게 새긴 시를 읽자니 적잖이 힘듭니다.
15. 김영랑 생가에서

강진만을 왼쪽에 두고 산기슭 돌아 백련사 입구 지나면 다산초당이 나옵니다.
가족과 함께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돌길 500m 정도 올라야합니다.
다산초당 가는 길은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 그대로입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
다산은 이곳에서 18년을 머무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집필
하였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 같은 이는 다산의 이 유배 덕분(?)에 500년 조선은 비로소 학문
으로 체면을 차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초당 앞 ‘다조’와 그 옆 ‘정석’과 ‘연지석가산’에서 시대의 분노를 느낍니다.
16. 다산초당

첫댓글 저는 지난 봄에 남도를 기행하였지요. 그 때는 변산-고창-담양-진도-해남-완도-강진-보성-순천-광양-화개-구례-압록-곡성-순창-임실-옥정호-전주-서울로 올라왔지요.
형님의 남도기행을 보며, 영랑, 다산, 박경리, 이병주, 최명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네요.
그런데 악양벌의 소나무 두 그루는 안 찍으셨나요? 이 시절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네요.
황금 물결 중에서 유난한 푸르룸일지?
유배생활 18년에 집필한 책이 600권이라니 그 초인적인 각고면려에 숙연해집니다.
저서들의 내용은 모두 공자와 주자를 재해석하여 어떻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도모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다산이지만
유교경전이외의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사상을 수용하기는 무리한 일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