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출 32장 1-10절
설교제목 : 우상없이 기다리기
철조망 위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지난 한 주 온 가족이 코로나 검사를 받으며 코로나가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이며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이러스와 함께 살 수 있는지 더 많은 숙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긴 성령강림절의 절기 가운데 왕국절의 시작주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정의, 평화, 사랑, 창조질서가 이 땅에서 실현되고, 우리 안에서 발현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 이후에 실현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처럼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듯,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지난 주 아프칸 카불에서 한국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아프칸인들을 수송해 오는 ‘미라클 작전’이 수행되어 수송기에 탑승하려던 이들이 무사히 탈출하여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이들의 심정은 참담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내전의 참혹함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에 촬영된 것인데 철조망 위로 자신의 아이를 넘겨주고 있습니다. 기사에 보면 이렇게 아이를 넘겨주다가 철조망 위에 떨어져 다치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더 이상 아이의 생명을 지킬 수 없어서 생면부지 군인들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인간에게 던지는 참기 힘든 잔인함인 듯 합니다. 그 혼돈의 땅 가운데 어서 평화가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조급함
오늘 본문은 일명 금송아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회막의 설계도와 기명의 식양, 제사장 위임식, 기명을 만들 기술자를 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일일이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하나님이 손수(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산 위에서의 엄중함과 경이로움과는 달리, 산 아래에서 백성들은 사뭇 다른 정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개역개정에 보면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1)”, 모세의 형, 아론에게 몰려갔습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2).”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셔서 마시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요?
백성들에게 스멀스멀 자라난 불안 때문입니다. 삶이 한 곳에 정체될 때 불안해집니다. 기다리는 것이 내 시간표에 맞게 오지 않을 때 불안해집니다.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가상의 대체물을 찾아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기다림은 조급함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물론 어린 아이가 불안을 또 다른 대체물로 투사하여 그것으로 안정과 안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불안의 대체물을 찾는 투사는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그 투사된 대상에 사로잡혀 의식은 방향을 잃고 점점 노예 상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조급함이 끼어들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찾고 그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고대 현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악마는 모든 조급함의 근원입니다.omnis festinatio ex parte diaboli est” 모든 조급함은 악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으신가요?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신가요? 더디 온다 할지라도 조바심내고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급함을 넘어 신뢰함으로 기다림을 잘해나갔으면 합니다.
우상없이 기다림
그러나 기다리는 것이 더디 올 때 누구든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아론 또한 백성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동조하게 됩니다. 그는 귀에 단 금붙이를 다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백성들은 금 고리를 빼서 아론에게 가져왔고,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여러분, 25장부터 31장까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들어라입니다. 하나님의 보여주시고, 명하신 대로 만들어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들은 자신들이 창조자가 되어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한 신은 인간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신이 된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신이 된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신처럼 추앙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것을 붙잡고 추종하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일종의 바벨의 신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교회가 가장 앞장서서 하나님 대신 인간의 욕망을 실현할 신을 만들라고 부추기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상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신으로 모시고 나를 축복된 길로, 성공의 길로 인도해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나를 성공과 번영의 길로 안내할 금송아지를 두고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물음과 의심을 던질 때 우리는 인간의 욕망에 종속된 신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송아지인가?
그런데 왜 아론은 금송아지 모양을 만들었을까요? 고대 근동지방에서 황소가 신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신인 아피스나 므네비스를 황소로 형상화했습니다. 이것은 다산과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황소는 바알의 신으로 힘과 활력, 비를 관장하며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금송아지 만들기는 옛 신을 다시 만들어 섬기려는 시도입니다. 옛 방식과 낡은 태도로 회귀하여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을 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결심하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불안과 두려움, 갈등이 증폭되면서 자꾸만 익숙했던 낡은 방식으로 뒷걸음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새 구두를 샀는데 약간 딱딱한 느낌이 있어서 찢어진 옛 구두를 신고 다니는 형국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제작한 것은 황소가 아니라 송아지입니다. 송아지는 히브리어로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활력이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이지만, ‘애송이’ 혹은 ‘저속한 정열’이라는 경멸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김기석,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p.374] 송아지 앞에서 치를 백성들의 제의와 축제에서 이런 의미가 숨겨진 뜻이 드러납니다. 아론이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고 선포하자, 이튿날 백성들은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5-6).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다”는 표현은 잔치의 흥겨움이라는 묘사라기보다는 방종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성적인 방종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송아지는 그들 내면에서 사그러지지 않는 본능적 충동의 구체화하는 신상으로 고려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야훼의 부성적 특성과 송아지의 모성적 특성이 상충되는 지점이다.) 법과 질서를 표방하는 야훼 하나님이 아닌 성적 본능과 활력을 제공하는 금송아지를 신봉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현대인들이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상쇄하기 위해 술과 성, 마약의 금송아지 신을 탐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늘 우리 안에 도사리는 원초적 충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송아지가 밖으로 형상화되어 주조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주조되어 구현되기 시작하면 인간은 금송아지에 사로잡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을 만드는가?
주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가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하고 외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제 마음이 머무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빨리 벗어나서”입니다. 여러분, 쌓아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고되지만, 떨어지는 것은 신속하고 쉽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고, 광야의 여러 고단한 시험을 거쳐 하나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을 만큼 자랐지만 타락의 길은 일순간입니다. 쉽게 빠른 것에 표류하는 우리 마음의 간사함은 실제로는 우리 삶의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너의 백성이 타락했다”는 하나님의 이런 한탄 섞인 어조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을까요? 그 이유를 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9)”
개역개정에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목이 곧다는 표현은 교만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집센, 자아중심성, 이기심으로 가득찬 상태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자는 자신의 욕망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만들며 살고 계신가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내면의 성전인가요? 아니면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신인가요? 우상없이 기다리고,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없이도 신뢰함으로 우리의 길을 곡진하게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