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인간혁명 30권 제2장 雌伏(11~15)
<자복 11>
21일 저녁 야마모토 신이치는 가루이자와지부의 초대 지부장과 지부부인부장을 지낸 다모리 도라오와 아내 다미와 함께 간담했다.
일류 호텔에서 제빵기술을 배운 다모리는 심장병으로 고생하던 아내가 신심을 시작해 건강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 1955년 아이들과 함께 입회했다. 간절히 바라던 가게를 차리면서 신심을 강하게 확신하고 환희차게 홍교에 힘썼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색안경을 끼고 학회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모리가 신심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손님도 차츰 뜸해졌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다모리 부부에게 학회 선배가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지도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이 법문(法門)을 말하면 반드시 마(魔)가 출래하느니라. 마가 다투어 일어나지 않으면 정법(正法)이라고 알지 말지어다’(어서 1087쪽)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이 광선유포를 위해 감연히 일어섰기 때문에 장마(障魔)가 다투어 일어난 것입니다. 어서 말씀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금처럼 과감하게 신심을 관철하면 틀림없이 행복경애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물러서면 안 됩니다.”
당시 학회원은 크든 작든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지는 학회활동에 더욱 투혼을 불태웠다. 그리고 어서를 배독하며 서로 격려했다.
다모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성인은 “대난(大難)이 오면 강성한 신심(信心)은 더욱더 기뻐하느니라”(어서 1448쪽) 하고 말씀하셨다. 상황이 힘들어질수록 강성한 신심을 불러일으켜 더욱더 용약환희하며 나아가자.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다!
학회활동은 늘 어서와 함께였고, 생활 속에 교학이 있었다. 여기에 무너지지 않는 학회의 강함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이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을 간행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이로써 많은 사람이 니치렌불법의 올바른 법리를 삶의 규범으로 확립하는 미증유의 역사가 열렸다.
<자복 12>
다모리는 이를 악물고 신심에 힘쓰자 학교급식에 빵을 납품하게 되고 외국인 손님도 늘어났다. 또 대형 양과자 업체에도 납품하게 되어 다모리가 운영하는 가게는 가루이자와를 대표하는 전통 제과점으로 이름을 알렸다.
다모리는 장사에서 현증을 냈을 뿐 아니라 고장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지역 사람들에게 헌신했다. 그런 다모리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학회를 바라보는 오해와 편견을 버리고 이해자가 되었다.
신이치는 나가노연수원에서 다모리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내일은 가게 2층에 있는 찻집에서 지역의 대표 멤버를 불러 간담하자고 했다.
간담회에서 신이치는 1957년 여름 도다가 머무는 가루이자와에 부름을 받고 달려왔을 때 은사가 한 말을 소개했다.
“도다 선생님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을 매우 좋아하셔서 ‘언젠가 여기서 하계연수를 열고 싶구나’ 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 연수원을 짓게 되어 은사의 구상을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가노연수원은 전국 아니 전 세계 대표 동지가 모이는 이른바 광선유포의 파동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나가노현에 세계에서 모범이 되는 창가학회를 만들어주십시오. 저도 온 힘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이날 저녁 연수원에서 가루이자와지부와 나카가루이자와지부의 합동 간부회를 열었다.
회합이 끝나기 직전에 모습을 나타낸 신이치는 멤버들과 함께 근행했다. 그리고 피아노 앞으로 가서 ‘즐거운 히나마쓰리’에 이어 ‘달의 사막’ 등을 잇 따라 연주해 격려했다. 장내는 터질 듯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동지는 신이치의 모습을 뇌리에 깊이 새기고 ‘창가(創價) 사제(師弟)의 대도(大道)를 자랑스럽게 나아가자고 새롭게 결의했다.
어떠한 권위나 권력으로도 사제가 맺은 마음의 유대를 결코 끊을 수 없다.
<자복 13>
신이치는 오로지 학회원들이 강성한 신심을 관철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퇴전자와 반역자 그리고 종문(宗門)의 승려는 신이치가 회합에서 지도하거나 신이치의 기사가 세이쿄신문에 실리지 못하도록 뒤에서 음모를 꾸며 창가의 사제를 갈라놓으려 했다. 그렇게 행동을 제한당하는 상황에서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신이치는 큰 회합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면 가정방문과 개인지도를 하러 바쁘게 뛰어다녔다. 지도하지 말라고 하면 시를 읊고 피아노를 쳐서 회원들을 격려했다.
그 무엇도 광선유포를 향한 ‘불굴의 혼’을 억누를 수 없다.
나가노연수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신이치가 이렇게 제안했다.
“만약 여러분이 괜찮다면 26일 일요일이라도 여기 모인 여러분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외에도 참석하고 싶다는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함께 오십시오.”
장내에서 커다란 환성이 일었다. 나가노 동지가 늘 염원한 일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현 전체로 퍼졌다.
현 간부들은 과연 몇 명이 모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설령 2, 3000명이 한꺼번에 몰려도 혼란이 일지 않도록 청년부를 중심으로 철저히 준비했다. 촬영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계단식 단상을 세 군데로 나누어 설치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도착하는 시간도 정했다. 버스를 대절해 오겠다는 지역도 있었다.
분명 많은 사람이 자동차로 올 것이다. 주차 공간이 부족할지 몰라 연수원 앞 도로변에 있는 공터를 사용하려고 땅 주인과 교섭했다. 허락을 받았지만 잡초가 무성이 자라 그 상태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남자부가 제초작업을 하자.” 모두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지금 이때 스승과 함께 회원을 격려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사제공전(師弟共戰)의 자각과 행동이 있는 곳에 환희가 솟는다.
<자복 14>
신이치는 입회 32주년이 되는 8월 24일을 나가노연수원에서 맞았다. 새로운 결의로 출발하는 서원(誓願)을 담아 진지하게 근행했다.
오후에는 청년들과 자전거를 타고 연수원 주변을 돌았다. 도다 조세이가 마지막 여름을 보낸 땅을 밟으며 그리운 은사를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이치가 연수원에 돌아왔을 때 연수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온 교육부(나중에 교육본부)의 청년교육자 대표가 막 연수원에 도착했다.
멤버들은 버스에서 ‘야마모노 선생님이 연수원에 머물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청년들이 연수원 현관 앞에 나란히 서서 신이치를 맞았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만나서 기쁩니다. 그럼 함께 기념촬영을 합시다!”
신이치는 멤버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보시다시피 저는 건강합니다! 여러분도 창가의 긍지를 가슴에 품고 자기 사명의 길을 활기차게 나아가 승리하기 바랍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퇴전하면 안 됩니다. 이 점을 가슴에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저는 광포의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보면 가장 괴롭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날 저녁에도 신이치는 노고한 동지의 집을 방문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간담했다.
이튿날인 25일 오전에는 연수원 뜰에서 교육부 멤버와 함께 테니스를 치고 거듭 격려했다. 이 테니스코트는 현지 멤버가 연수 참가자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급히 준비했다고 한다. 이후 신이치는 모든 참석자와 함께 근행하고 연수원을 떠나는 멤버들과 악수를 나누며 배웅했다.
신이치는 아무리 제한당해도 어떻게 하면 동지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을지 기원하고 또 기원하며 지혜를 짜냈다. 성훈에는 “신심의 뜻이 온전하면 평등대혜(平等大慧)의 지수(智水)가 마르는 일이 없다.”(어서 1072쪽) 하고 씌어 있다.
광선유포를 향한 강한 일념과 기원이 있는 한 모든 장벽을 뚫고 나아가 반드시 승리의 길을 열 수 있다.
<자복 15>
점심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신이치는 사쿠시에 있는 공로자 집을 방문하려고 나가노연수원을 나섰다. 빗속에서 청년들이 이튿날 열릴 기념촬영을 위해 도로변 공터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신이치는 동행한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작업이 끝나면 연수원에서 목욕을 할 수 있게 준비해주십시오. 먼지투성이, 땀투성이가 된 몸을 깨끗이 씻고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소중한 ‘창가의 보배’다. 신이치는 청년들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작업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연수원을 출발해 50분쯤 달리자 사쿠시에 있는 이시즈카 가쓰오 집에 도착했다.
이시즈카는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으로 사쿠지역 지역장을 맡고 있었다.
이시즈카는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선생님! 저희 집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신이치의 손을 꼭 잡았다.
이시즈카의 아버지는 양복을, 어머니는 기모노 차림에 하오리(위에 입는 짧은 겉옷)를 입고 신이치 일행을 정중하게 맞았다.
신이치는 행사진행요원으로 연수원에 온 이시즈카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이시즈카가 개인회관을 제공한다는 말을 듣고 인사하러 가자고 생각했다.
개인회관은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각 지역에 큰 회관이 있어도 지부나 지구가 날마다 활동하는 거점이나 좌담회를 여는 곳은 개인회관을 비롯한 회원 집이다. 그곳이 현대의 장엄한 불법(佛法) 회좌가 된다.
이시즈카가 신이치 일행을 거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간담을 시작했다. 때마침 이날 이시츠카의 아버지가 여든 살 생신을 맞았다고 한다.
신이치는 축하하는 의미에서 시를 한 수 써 드리겠다고 말이고 벽에 걸린 일일 달력에 눈길을 주었다.
“저기에 써도 괜찮겠습니까?”
신이치는 달력을 받아 노부부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오늘 날짜 옆에 이렇게 썼다.
“아 기쁘도다/ 여든살 노인의/ 황금빛 얼굴”
雌伏(11-15).hwp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