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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휘 신호(臣扈)공 소고(小考)
Ⅰ. 시조 공 세계도(世系圖)
시조공은 생몰(生沒) 년도를 비롯한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미지의 인물이지만, 후손의 비문과 국조방목 등의 사료를 고찰하면 엄연한 실질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비주의적인 인물로 오해하거나, 제3자의 이명(異名)으로 추측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여러 일족이 광주정씨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시조의 연대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 도곡(陶谷) 정기호(鄭琦鎬) 박사께서 2001년 신사보(辛巳譜)에서 언급하신대로 현재 광주정씨는 정신호가의 일원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1) 시조공의 따님이 안문언(安文彦) 공에 출가했는데 1녀만 두었고 한성판윤 정의(鄭義) 공에게 시집갔다. 그 아들이 정안도(鄭安道)와 정안지(鄭安
止)인데,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의 문과방목에 검색해보면 본관이 광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의공의 경우 장모가 광주정씨인데, 본인도 과연
광주인(光州人)일까? 고려시대는 조선의 성리학의 사상세계와 너무도 판이하고 개방적이다.
주2) 정안도(鄭安道) : 고려 우왕9년(1383년) 문과, 1419년 판현사(判縣事:정3품), 1426년 진주 목사(晉州牧使), 처부(妻父) 박가흥(朴可興)
주3) 정안지(鄭安止) : 1399년 문과, 1403년 헌납, 1406년 세자시강원 문학, 1409년 한성소윤(漢城少尹), 1421년 한족출신 역관인 임군례(任君禮)의
역모사건과 연루되어 참형
주4) 박가흥의 가계내력을 찾아보니, 본관은 순천이고, 부인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진주(晉州) 정을보(鄭乙輔)로 나온다. 아마도
개성부윤공 따님이 계배(繼配)로 추정된다. 박가흥은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의 고조부 된다.
주5) 4세 사헌부장령 휘 지당공의 부인이 고모부 박가흥 공의 딸이다.
< 정안도, 정안지 문과방목 : 광주인(光州人) >
◼ 정안지(鄭安止) : ? ~ 1421 1399년(정종 1) 태묘서승(太廟署丞)으로 진사과에 합격, 1395년(태조 4) 요동에서 사람이 오므로 중랑장인 그가 압송해서 돌려보냈다.1398년 두 차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압물(押物)로서 다녀왔고, 중국에 구류중인 가솔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우습유(左右拾遺)를 지냈는데, 환자(宦者)인 승녕주부(承寧注簿) 박문실(朴文實)이 소환(小宦)으로 소사(所司)를 능욕하고 왕명을 멸시하므로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그가 탄핵 당하였다. 뒤이어 정언이 되었고, 1405년 헌납이 되어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1408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였고, 1411년 한성소윤이 되었다. 1421년 제거(提擧) 한족(漢族) 역관 출신 「임군례(任君禮)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도망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형 정안도(鄭安道)와 장모·처자를 잡아 가두자 자수하였다. 이어 옥사가 일어나 대역으로 논단(論斷)하여 임군례는 저자 거리에서 환형(轘刑)에 처하여졌다. 이에 그도 연루되어 참형 당하였으며, 가산은 적몰되고 처자는 노비가 되었다. 후일 처자는 노비에서 풀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부 문구 추가] |
Ⅱ. 시조 공 생년(1292년~1307년)
시조공의 생년을 추정해보면 1292~1307년인데, 고려 충렬왕(재위 1275~1309) 때이다. 추정방법은 후손 및 외손의 재직 및 생년, 방목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 방법 중, 비교적 시조공 으로부터 가까운 후손들의 생년 또는 방목기록 중 빠른 기록을 이용하였다. 이 분들로부터 세대차를 산출하면, 시조공의 생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 네 가지 방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시조공의 생년추정 연구를 통하여, 외손가인 도강김씨(道康金氏) 자료를 통해 5세 정이충(鄭以忠)공의 생년이 1399년임을 알게 되었다.
◼ 추정방법
① 2세 개성부윤공의 사위 박가흥(朴可興) 아들 박석명 생년 1370년으로 추정
② 5세 휘 이충(以忠) 공의 삼남 휘 질(耋)의 1426년 생년으로 추정
③ 3세 동백공의 진사 기록 1377년을 근거로 추정
④ 4세 시조공 큰사위 안문언가, 외손 광주정씨 정안도(鄭安道) 문과급제 1383년
◼ 전제조건
Ⓐ 형제남매 간 출생 터울은 3년
Ⓑ 세대 간 출생 주기는 22년, 즉 첫째자녀 출산은 22세 때이다.
Ⓒ 동백공의 생원시 입격 나이는 여러 가지로 살펴본다.
Ⓓ 정안도의 문과급제 나이를 25세(1358년생)로 본다. * 매우 빠른 나이이다.
Ⓔ 3세의 장서(長序)는 장녀 안문언, 차 장남 윤부, 차남 윤형, 차녀 신덕린이다.
이상 전제조건은 오차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여러 안을 다른 경로로 중복하여 비교하면 사실과 접근될 것으로 판단된다.
1. 박가흥의 아들 박석명(朴錫命)의 생년 1370년 기준
2세 개성부윤 윤부공은 따님이 순천박씨(順天朴氏) 박가흥(朴可興)에 출가하였는데, 박가흥의 생년은 미상이고 그 아들 박석명(朴錫命)은 1370년생이다.
박가흥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변경 시, 이에 비협조적인 경계 인물로 유배까지 갔으나, 아들 박석명의 기재(器才)와 태종(太宗)의 총애로 오히려 재등용 되어 군부판서와 우의정(右議政)까지 지냈다. 1406년 박석명이 47세 때, 전라도 제주체찰사로 나갔다가 대사헌에 임명되어 상경하던 도중 병이나 사경에 이르렀다. 태종은 의관(醫官)과 매부(妹夫) 정지당(鄭之唐)에게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나 사망하였다.
정지당공은 종6품인 주부(主簿)직으로 있다, 전 해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가 39세 정도로 추정된다. 지당공의 부인이 박가흥공의 딸이고, 박석명의 매부가 되므로, 지당공 부인 순천박씨는 박석명의 누이로서 3살 터울이라면 1367년생이고, 지당공의 나이도 1367년생이다. 3세 동백공은 세대차 22년을 적용하여 1345년생이고, 형 인진공은 1342년이다. 2세 정윤부공은 1320년, 누이 여 안문언은 1317년이 된다. 시조공의 추정생년은 1295년이다.
ㅇ 박가흥 공의 부인은 진주정씨, 장인이 찬성사 정을보(鄭乙輔)
광주정씨 족보에는 2세 개성부윤공의 따님이 박가흥에 출가했다 했는데, 역사 기록들이 박가흥 공의 부인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진주 정을보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4세 정지당공의 장모는 진주정씨가 된다. 박가흥공에 출가한 정윤부공의 따님은 당연히 계배가 되는 것이다.
■ 박석명(朴錫命) 1370년(고려 공민왕 19)~1406년(조선 태종 6) 37세 고려 말 우왕~조선 초기 태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議政府) 지사(知事)이고, 봉작(封爵)은 평양군(平陽君)이다. 호는 이헌(頤軒)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조부는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박천상(朴天祥)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가흥(朴可興)이며, 어머니 정씨(鄭氏)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을보(鄭乙輔)의 딸이다. 나이 16세 때인 1385년(우왕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그는 고려 공양왕의 아우인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사위인 까닭에 8년 동안 침폐(沈廢)해 있었다. 1399년(정종 1) 정종이 고려의 구신들을 등용하면서, 그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그 해 9월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9월에는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11일 정종이 왕세제(王世弟)인 태종에게 선위(禪位)하자 도승지 박석명은 국보(國寶)를 받들고 가서 태종을 옹립하였다. 1401년(태종 원년) 1월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뒤, 지신사(知申事)가 되었으며, 1405년(태종 5) 12월 의정부 지사가 되었다. 지신사에서 의정부 지사로 품계를 뛰어넘어서 관직에 임명된 경우는 개국(開國)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1406년(태종 6) 선위사(宣慰使)가 되고, 전라도 제주 도체찰사(全羅道濟州都體察使)가 되었다가 같은 해 의정부 지사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임명을 받고 김제역(金蹄驛)에 이르러 병으로 위독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탄식하고는, 그의 직임을 한상경(韓尙敬)으로 대신하게 하고, 의관(醫官)·내관(內官)과 아들 박거비(朴去非)·매부(妹夫) 정지당(鄭之唐)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역마(驛馬)를 타고 가게 하였다. 7월 13일 그의 부음(訃音)이 이르니, 태종은 애도하여 철조(輟朝)하고 미두(米豆) 1백 20석과 종이 2백 권을 내려주고, 내사(內史)를 보내어 빈소(殯所)에 사제(賜祭)하였다. |
2. 6세 3남 질(耋)공 생년 1426년 기준
광주정씨 기록 중 가장 생년 기록이 빠른 분은 6세 병조정랑 질(耋)공이다.
5세 운봉현위(雲峯縣尉) 휘 이충(以忠)공은 아들만 세분 두셨는데, 장남이 사재감주부 철(㬚)이고, 차남이 절(晣), 삼남이 질(耋)이다.
질(耋)공이 1426년생이므로 터울을 3년으로 하면, 각각 철(㬚) 1420년, 절(晣) 1423년생이 된다. 여기에 세대차 22년을 감하면 5세 정이충공은 1398년생이고, 4세 정존공은 1376년, 3세 정인진공은 1354년, 2세 정윤부공은 1332년, 2세 여 안문언 1329년, 시조공은 1307년이 된다.
한편, 6세 절공의 사위인 도강김씨 훈도공파 김희윤(金希尹) 집안자료(주6)에, 정이충(鄭以忠)공의 생년을 1399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추정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방법①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3세 인진(麟晉)공이나 4세 존(存)공이 아들을 늦은 나이에 보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세대차이가 22년 보다 크다는 것이다.
3. 3세 동백공(龜晉) 진사 기록(1377년) 기준
2세는 윤부(允孚)공은 2남 1녀인데, 장차(長次)는 인진(麟晉), 구진(龜晉) (여)박가흥 순서이다. 동백공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진사(進士), 1383년에 생원(生員) 장원, 1386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30세에 진사라면 생년은 1347년이고, 시조공의 생년은 1297년이다. 이 경우는 아들 정지당과 나이차이가 20세 이다. 진사 나이가 25세면, 아들과 15년 차이로 타당치 않다. 정지당공 생년 1367년은 실제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정지당공이 1370년생 박석명의 매부(妹夫)라 하므로 1367년생으로 추정되는데, 정구진공의 진사 합격년도는 나이는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정구진공의 말년 1425년 강원감사, 1426년 이조참의 재직 시 나이가 각각 79세, 80세의 고령이 된다는 점이 부담이다.
< 3세 동백공 정구진 1377년 진사 합격 시 나이에 따른 시조공 생년 추정 >
ㅇ 박석명 1370년, 정지당 1367년생
* 정지당공은 39세 되는 1405년에 문과에 급제
4. 시조공 큰사위 안문언가, 외손 정안도(鄭安道) 문과 1383년 기준
안문언(安文彦)공의 외손 정안도는 광주정씨인데, 138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나이인 25세 급제를 가정하면 생년은 1358년이고, 부친 정의공은 1336년, 장인 안문언공은 1314년, 시조공은 1292년 까지 생년이 올라간다. 급제 나이가 많아질수록 시조공 생년은 더 올라간다.
주8) 정안도 문과 : 우왕(禑王) 9년(1383) 계해방(癸亥榜) 동진사(同進士) 3위(13/33)
이상의 전제조건을 고려할 때 시조공 생년은 1292년~1307년 범위 내인데 평균값은 1298년이다. 방법①과 방법④는 4세 외손의 생년을 토대로 산출하였는데 결과가 비슷하다. 방법②와 오차가 큰 것은 3세 정인진공 또는 4세 정존공의 첫 아들 출산이 22세 보다 많이 늦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Ⅲ. 시조 공 관직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현직(現職)과 증직(贈職)의 구분은 물론 명확한 기록도 부족할뿐더러 간지(干支)도 없다. 묘소가 실전(失傳)되었으므로 후손들의 묘갈(墓碣) 또는 족보기록 등을 살펴봄으로서 미루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1. 족보 기록
족보를 살펴보면 1754~1797년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능파정공파 세차약기에서,
‘고려 충숙왕 충선왕 때 제관, 삼중대광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이다. 상호군이라고도 하며, 고려조의 봉은사진전직, 추봉 삼중대광문하찬성사이다.’ 오늘날 족보에 통용되고 있는 내용 그대로 언급되고 있다. 1845년 초간보 이전, 1700년대의 족보발간을 시도한 시기에 이미 이러한 사실이 통용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두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이유는 현직이 문하찬성사인데, 사후, 또 문하찬성사에 추봉되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문단은 제관인데, 삼중대광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하셨다고 한다. 추봉직이 아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은 1품 최고위급이다.
제관은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원에 불과한데, 어떻게 최고의 직책인 1품관의 문하찬성사와 판판도사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낮은 직급의 제관을 거쳐 승자를 거듭하여 최고 직에 올랐다면 왜 중간 주요 직책은 생략되었을까? 전래된 가권(家券)이나 행력(行歷)을 몰라 그리 되었다고 본다.
문하찬성사는 정승 다음의 정이품 관리이다.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의 판도사는 호조(戶曹)를 말하고, 판사(判事)는 판도사의 수장을 일컫는다.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한다.
충선왕, 충숙왕 재임 시의 제관이라 했는데 그 문제점을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만일, 여기서 제관이란, 단순 전문직 관리가 아닌, 고위직으로서 국가적 중요행사의 제관을 맡았다고 본다면, 문하찬성사 직책도 충숙왕 즈음에 맡았어야 한다.
두 번째 문단은, 상호군이라도 하는데, 봉은사진전직을 하셨고, 후에 삼중대광문하찬성사에 추봉되었다는 것이다.
상호군(上護軍)은 고려시대 정삼품의 최고 무관직이다. 이것은 일설(一說)이다. 또한 봉은사진전직 이라고 한다. ‘진전직(眞殿直)’ 이란 왕의 어진(御眞 영정, 초상)을 모시는 직을 맡은 관리이다. 조선시대에도 선원전(璿源殿)이라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전직(殿直)’이라 하여 왕릉 등을 관리하는 벼슬도 있다. 최고책임자는 영(令)이라는 종오품관이다.
고려시대 봉은사(奉恩寺)는 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공민왕은 이곳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봉은사가 비록 국찰(國刹)이고 진전이 있다하여도 ‘진전직(眞殿直)’은 고위급 관리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정이품 고위직인 찬성사에 추증되었다는 것일까? 아들인 개성부윤공이 봉익대부(奉翊大夫)이신데 종이품(從二品) 하(下)의 직급이다. 아들 때 종이품 급으로, 손자 동백공 때 다시 한 자급(資級) 추증되어 정2품계로 증직될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현직에 정삼품을 지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전된 문서가 없으므로 직책이 생략될 수는 있다.
이상 기록된 내용으로서 현직과 추증직간의 직급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에서 신뢰성에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 1754~1797 능파정공파 세차약기
현재의 족보 내용이 본 세차약기 사항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當高麗忠肅忠宣之祭官(주6) 三重大匡門下贊成事(주7) 判版圖司事(주8) 上護軍(주9)云 高麗奉恩寺眞殿直(주10) 追封三重大匡門下贊成事 申企齋光漢文集其夫人外姑鄭氏誌文曰 鄭大族高麗贊成諱臣扈之後也 鄭夫人卽郡守晣之女 墓光州東距十里許鷹鳴洞巽坐云 配咸陽朴氏 父祭器都監判官淳 吏部尙書臣蕤曾孫 禮部尙書善七世孫 墓 羅州西門外興龍洞云 二男二女 고려 충숙왕 충선왕 때 제관, 삼중대광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이다. 상호군이라고도 하며, 고려조의 봉은사 진전직, 추봉 삼중대광문하찬성사이다. 기재 신광한공의 문집 중 그 부인의 장모 정씨에 관한 기록문에 “정씨는 대족이며, 고려 찬성 휘 신호공의 후손이시다. 정부인은 군수 ‘절’의 따님이시다.” 하였다. 묘 광주 동쪽 십리 거리의 응명동 손좌. 배 함양박씨, 부 제기도감 판관 순, 이부상서 신유 증손, 예부상서 ‘선’ 7세손 묘 나주 서문 밖 흥룡동이라고 함 2남 2녀 |
주6) 제관(祭官) : 제사(祭祀)에 관(關)한 일을 맡아보는 관원(官員), 향관(享官).
주7) 찬성사(贊成事) : 고려(高麗) 때 첨의부(僉議府)ㆍ도첨의 사사(都僉議使司)ㆍ도첨의부(都僉議府)ㆍ문하부(門下府)에 딸린
정이품(正二品) 관직(官職)으로 시중(侍中) 또는 정승(政丞)의 다음이다. 1275년(충렬왕 1)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
事)와 중서평장사를 각각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첨의찬성사로 고치고, 1308년에는 중호(中護)로, 1356년에는
다시 평장사로 고치고, 1362년에 첨의찬성사로 고쳤다가 1369년 문하찬성사로 다시 고쳤다.
주8) 판도사(版圖司) : 고려시대, 호구(戶口)·공부(貢賦)·전곡(錢穀)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상서 호부(尙書戶部)를 고친 이름인데, 동왕 24년에 민조(民曹), 동왕 34년에 민부(民部)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판도사로
고쳤고, 공민왕 5년(1356)에 호부(戶部), 동왕 11년에 다시 판도사, 동왕 18년에 민부, 동왕 21년에 또 다시 판도사로 고쳤
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호조(戶曹)로 고쳤다. 관원으로 판사(判事)·판서(判書)·지사(知事)·총랑(摠郞)·정랑(正郞)·
좌랑(佐郞)이 있었다.
*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 판도사의 으뜸 벼슬.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判版圖. 判版圖事. 判事.
주9) 상호군(上護軍) : 정삼품 무반직)으로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개칭된 것이다. 상장군은 고려 전기 이군(二
軍) 육위(六衛)에 각각 1명씩 모두 8명이 있으면서 무반의 최고층을 구성하였다. 고려 후기 상호군으로 개칭된 시기는 불
명확하다.
주10) 진전직(眞殿直) :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 향사하는 진전을 관리하는 관원. 모두 잡과의 권무관직으로 되어
있다.
전직(殿直) : 1 전각을 지키고 감시하는 사람. 2 고려시대, 액정국(掖庭局)·내알사(內謁司)의 좌반 전직(左班殿直)과 우반 전직 (右班殿直)을 이르는 말. * 액정국(掖庭局) : 고려(高麗) 때 왕명(王命)의 전달(傳達), 왕의 붓과 벼루, 궁전(宮殿)의 정원(庭園)과 열쇠의 보관(保管) 등 (等)을 맡아보던 관청(官廳). |
□ 1845년 을사보(乙巳譜)
삼중대광찬성사(三重大匡贊成事) 증광록대부(贈光祿大夫)(주10)
삼중대광(三重大匡)은 정1품~종1품의 직급이고, 찬성사는 정2품의 직책이다. 광록대부는 공민왕 때 정2품 상계이다. 증직으로서 직급이 맞지 않다. 광록대부 기록은 여기에만 보인다.
주10) 광록대부(贈光祿大夫) : 995년(성종 14)부터 사용된 흥록대부(興祿大夫)의 후신으로서 1076년(문종 30)에 이 명칭으로 바
뀌었는데, 계품은 종3품으로 전체 29등급 가운데 제5계였다. 그 뒤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다시 흥록대부로 바꾸
면서 정2품계가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광록대부로 환원되면서 종2품 상계가 되었으나, 1369년에는 또다
시 정2품 상계로 승급되었다.
◼ 1925년 을축보 시 응교공파파보
「능파정공파세차약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 묘갈 및 묘지 기록
많은 성씨가 시작된 시기는 고려조이다. 거성벌족이 태생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구려 유민, 백제의 유민들도 알려진 성씨(주11)가 있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현재에 통용되는 성씨들에 편입되었다. 현재 각 성씨의 본관이라는 것도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듯 시작하고 있으니, 시조공 선대의 성씨와 본관이라는 것은 기록의 시작점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정씨의 오래된 묘비는 그리 많지 않다. 상대(上代)의 묘갈이 존재한다면, 시조공 이상의 기록도 가능할 텐데, 아쉽게도 동백공의 경우에도 오직 묘표(墓標)만 세워져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묘갈은 9세 전라좌수사 휘 응규(應奎)공의 비문이다.
시조공의 이력이 공식 기록된 최초의 기록은 1522년~1555년 경 수립된 ‘숙인광주정씨묘갈명’인데 직책은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이고 1577년 9세 수사공 휘 응규(應奎)공의 묘갈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다만, 두 기록에서 모두 시조공의 자(子)를 ‘개성윤(開城尹) 인진(隣振)’으로 알고 있다. 16세기에 완백공종에서 이와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얼마 가지 않아 바뀌는데, 1405년 동백공종 지당공의 문과방목에서 알고 있는 사실을 완백공종에서 몰랐다. 상호 교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조공 정도의 고위직은 고려사 등의 기록에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아 추봉(追封) 직으로 보고 있다.
주12) 백제 8대성 : 사씨(沙氏), 진씨(眞氏), 연씨(燕氏), 여씨(餘氏), 해씨(解氏), 정씨(貞氏),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왕족은 부여씨(扶餘氏)
◼ 1522~1555년간 숙인 광주정씨 묘지명 :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
鄭大族也 系出光州著於古 高麗之季有三重大匡門下贊成事臣扈生麟振仕我尹開城府麟振生存 司憲府監察存生以忠雲峯縣尉 是生 高城郡守晣 實淑人之考也 정씨는 대족이다. 광주가 본관이고 옛 부터 현저하다. 고려조 삼중대광문하찬성사로 계시던 신호공이 계신데, 인진을 낳으니 개성부윤이요, 인진은 존을 낳으니 사헌부감찰이요, 존은 이충을 낳으니 운봉현위요, 이분이 고성군수 절을 낳았으니 바로 숙인의 아버지이시다. |
완백공종 6세 고성군수(高城郡守) 절(晣)(주13) 공의 따님이 금산군수 평택 임만근(林萬根) 공에게 출가하셨는데, 그 묘비가 ‘숙인광주정씨묘지명(淑人光州鄭氏墓誌銘)’이다. 이 분은 외손봉사(外孫奉祀)로도 훌륭하시지만, 그 묘지명은 기록상 시조공이 최초로 언급되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 묘갈은 임만근 공의 사위인 대제학을 지낸 고령 신광한(申光漢)이 지었다. 이 묘비는 수립 추정년도는 시조 공 생년으로부터 210년 후이다.
ㅇ 숙인(1468~1522, 향년65세) : 생년은 부친 문과급제 년도
ㅇ 외손봉사하셨다.
ㅇ 정씨는 대족(大族) : 족보에 기재된 인물 외에도 고려, 조선초기의 또 다른 일족(一族)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ㅇ 묘비 수립년도 : 1522년(숙인 졸년) ~ 사위 기재 신광한공 졸년(1555년)
주13) 시조 신호 – 2세 개성부윤 윤부 – 3세 전라감사 인진 – 4세 사헌감찰 존 – 5세 운봉현위 이충 – 6세 고성군수 절(외손봉
사) – 7세 숙인정씨(부군 임만근)
◼ 1716년 8월 예의상서 신공 묘표(高麗禮儀尙書申公墓墓標)
봉은사 진전직 증대광문하찬성사(奉恩寺眞殿直贈大匡門下贊成事)
시조공 따님이 고려 예의상서 순은 고령 신덕린(申德麟)공에게 시집가셨는데, 이 비문은 1716년도에 수립되었다. 광주정씨의 묘는 1982년 4.24일 옥과현 개사동(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으로 이장하여 신덕린공과 합폄하였다.
이 비문에 비로소 ‘봉은사진전직(奉恩寺眞殿直)’이라는 직책이 언급된다. 또한 찬성사가 증직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상상일까? 아마도 이력 중 상당부분 생략되어 표현 되었을지 몰라도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公諱德隣字不孤號醇隱高靈人也 麗朝文科至右官 我朝贈今官 公書隷眞草俱妙人得隻字爭寶畜之曰申某三昧筆 公與李文靖檣從往于艱始終不渝棄官南歸于居光州片坊里 甁栗屢罄怡然自處 忠勤行篤名重當世 卒于家 葬于玉果南柯寺洞丑坐之原 公夫人光州鄭氏奉恩寺眞殿直贈大匡門下贊成事諱臣扈之女 墓在光州南瓮井里壬坐 공의 부인은 광주정씨(光州鄭氏) 봉은사진전직(奉恩寺眞殿直)을 지내고 대광문하찬성사(大匡門下贊成事)에 추증된 신호(臣扈)의 따님으로 묘는 광주 남쪽 옹정리(瓮井里) 임좌에 있다. |
◼ 1571년 9세 전라좌수사공 묘갈(折衝將軍 全羅左道水軍節度使 鄭公墓碣)
삼중대광문하찬성사 판판도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 判版圖司)
광주정씨의 가장 오래된 묘갈이다. 이 비문에 판판도사(判版圖司) 문안이 보인다.
公姓鄭 諱應奎 字夢得 系出光州 高麗之末 有諱臣扈者 三重大匡門下贊成事 判版圖司 有子曰 麟振入我 朝尹開成府 공의 성은 정(鄭)이요, 휘는 응규(應奎) 자는 몽득(夢得)이고 광주인이다. 고려 말 휘가 신호(臣扈)라는 분이 계신데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 판판도사(判版圖司)이고, 그 아들은 인진(麟振)인데, 조선조에 들어 개성부윤이다. |
◼ 1539 정랑공파 10세 정윤(鄭崙) 묘지(墓誌) : 언급 없음
군(君)의 휘(諱)는 윤(崙)이고, 자(字)는 중진(仲鎭)인데, 광주 정씨(光州鄭氏)이다. 8대조 정윤부(鄭允孚)는 개성윤(開城尹)이고, 정귀진(鄭龜晉)은 참의(參議)이며, 정지하(鄭之夏)는 장령(掌令)이고, 정종우(鄭宗禹)는 군수(郡守)이다. |
시조공 언급이 없지만 2세 개성윤 휘 윤부(允浮) 공을, 완백공종과 달리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 1603~1612 8세 성재(휘 이주) 공 신도비(神道碑) : 전직(殿直)
시조공의 직책을 전직(殿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추증직은 기록되지 않았다.
公諱以周字邦武一字由盛號醒齋出光州爲望族源原而波益分卽公自出可譜者 七代祖臣扈高麗殿直六代祖允浮本朝開城尹五代祖龜晉江原道觀察使所爲文章行于世高祖考諱之夏司憲府掌令~~ 공의 휘는 이주이고 자는 방무 또는 유성이며 호는 성재이다. 성씨는 광주에서 나온 명망족이다. 그 근원이 멀어져 파가 더욱 나뉘었다. 7대조는 고려 전직이고, 6대조는 휘 윤부로 조선에 들어와 개성윤이고 5대조는 강원도관찰사 구진이며 문장이 출중하여 세상에 이름났다. 고조의 휘는 지하요 사헌부장령이다. ~~ |
◼ 1630~1631 정자공(11세 휘 명호) 신도비(正子公神道碑) : 언급 없음
3. 기록비교와 관직의 재고찰
◼ 고려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시, 제관(祭官)
ㅇ 충선왕(1275~1325, 재위 1308~1313),
ㅇ 충숙왕(1294~1339, 재위 1313~1330, 1332~1339)
ㅇ 충혜왕(1315~1344, 재위 1330~1332, 1339~1344)
ㅇ 충목왕(1337~1348, 재위 1345~1348)
ㅇ 충정왕(1338~1352, 재위 1349~1351)
ㅇ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
처음에 시조공의 생년을 추정한 바 있는데, 1303~1310년간이다. 제관(祭官)은 나이와 연륜이 있어야하는데, 충선왕의 재위기간을 살펴보면 1308~1313년간이므로, 시조공 추정나이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시조공이 늦은 나이에 자식을 보았으면 그럴 수 있지만, 2남 2녀인데 가능했을까?
충숙왕은 재위기간이 1313~1339년 이므로, 1339년 기준 시조공 나이는 30세~37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은 ‘충숙왕 시 제관’은 가능하다.
◼ 충선왕 [忠宣王] 고려 제 26대 왕(재위 1308~1313). 1298년 왕위에 오르자 정방을 폐지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들의 토지를 몰수하였으며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폐위되었다가 1308년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정치에 싫증을 느껴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각염법을 제정하여 사원과 권문세가의 소금 독점에 의한 폭리를 막았다. ◼ 충숙왕 [忠肅王] 고려 제 27대 왕. 1313년 왕위에 올랐으나 심양왕 고(暠)가 왕위를 노리고 그를 헐뜯어, 5년간 연경에 체류해야 했다. 1325년 귀국하였으나 눈과 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 일당의 거짓 고발 때문에 정사에 더 염증을 느껴 1330년 태자 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에 갔다. 충혜왕이 폐위되자 1332년 복위하였으나 정사는 잘 돌보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 봉은사진전직(奉恩寺眞殿直)
1603~1612년간의 8세 성재 휘 이주(以周)공 신도비와 1716년 시조공 사위인 고려 말 예의상서 신덕린(申德麟)공 묘갈에는 비로소 시조공의 실직(實職)인 ‘봉은사진전직(奉恩寺眞殿直)’의 직명이 보이고 있다.
‘진전(眞殿)’이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선원전(璿源殿)과 같은 곳이다. 다만, 조선의 선원전에는 제향의식은 없고 별도 관리도 두지 않았으며 내시가 관리하였다. 고려시대 제능(諸陵)에도 전직(殿直)을 두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8월 8일자 고려왕조사(高麗王朝史)에 보면,
8일(戊申)에 임금이 노국공주(魯國公主)와 더불어 복령사(福靈寺)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전(眞殿)을 알현하고 이 날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의 집에 옮겨 거처하였다. |
1356년(공민왕 5년) 4월 12일에도
12일(壬戌)에 임금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전(眞殿)을 알현하였다. |
< 시조공 휘 신호(臣扈) 관직 기록 >
◼ 상호군(上護軍)(주14)
상호군은 고려시대 최고위급의 지휘관으로 정삼품관이다. 제관 또는 전직과는 완전 다른 분야이다. 능파정공파세차약기에서 처음 보인다.
응양군의 상장군은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하면 반주(班主)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무반 전체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조선시대의 혼맥(婚脈)을 살펴보면, 신분이 대등한 집안 간 맺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조공의 따님이 고령신씨, 예의상서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麟) 공에게 출가하였는데, 선고(4세)는 대호군(大護軍) 신사경(申思敬)이고, 조부(3세)는 상호군(上護軍) 신인재(申人材)이고, 증조(2세)는 상호군(上護軍) 신강승(申康升)이다. 물론 순은공을 제외하고 역사서에 나오는 인물은 없다.
주14) 상호군(上護軍) : 정삼품 무반직(武班職)으로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개칭된 것이다. 상장군은 고려 전
기 이군(二軍) 육위(六衛)에 각각 1명씩 모두 8명이 있으면서 무반의 최고층을 구성하였다. 고려 후기 상호군으로 개칭된
시기는 불명확하다. 조선 전기에는 도위사(都尉使)로 개칭되었다가 태종 초에 상호군으로 개칭되었는데, 1467년(세조
13)에는 오위(五衛)의 고급지휘관이 되었으며, 정원은 9명이었다. 조선 후기 이후 오위의 기능이 점차 유명무실화되면서
8명으로 감축되고, 보직이 없는 문무관이 담당하는 등 체아직(遞兒職)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4. 정지당(鄭之唐) 을유 5년방(乙酉五年榜)
ㅇ 시험일 1405년 4월 21일
정부기록 중, 광주정씨에서 가장 오래된 방목으로, 신광한의 숙인광주정씨 묘갈과, 전라좌수사공 묘갈에서 보이는 2세, 3세의 혼란을 정리하는 최고의 사료이다.
이 방목은 시조공의 휘(諱)가 증명되는 중요한 기록문서가 되니, 미지의 인물이라는 의심이 불식되고 실재의 인물로 드러나게 된다.
< 참고 : 4세 정지당공 방목 >
◼ 정리(鄭釐)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부는 위위내시(衛尉內侍) 인보(仁保)이고, 1367년(공민왕 16) 정언(正言)으로 재임하였다. 그해 공민왕의 신임을 받은 신돈(辛旽)이 개혁정치를 할 때 이를 비판하였다가 정언 안면(安勉),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신덕린(申德隣), 헌납 박진손(朴晉孫)·이전(李竱) 등과 함께 파면되었다. 1382년(우왕 8) 간관으로 있으면서 박의중(朴宜中) 등과 함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 왜적의 침입과 흉년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제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우왕 일행이 사냥을 하면서 민가에 자주 폐를 끼치는 것을 보고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묵살되었다.
ㅇ 외조(外祖) 예의판서 나주 정문진(鄭文振, 1317~1367) : 시조공과 같은 세대
Ⅳ. 시조공의 대사헌 이야기는 동래정씨 정양생(鄭良生)의 일화
그동안 시조공이 고려 말에 1376년에 대사헌을 하셨고, 우왕의 대가 저택 순행시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고 알고 있다. 1914년 편찬된 <광주정씨세고>에서 ‘여사(麗史)’에 언급되었다고 기술하면서 사실처럼 알려졌는데, 정기호 박사께서 도대체 여사(麗史)란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고 「신사보(辛巳譜)」에서 언급하신 바 있다.
공교롭게도 그 분이 동래정씨 분임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게재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시조공이 대사헌을 하셨다.’는 사실은 아니다.
◼ 고려사
ㅇ 병진(丙辰) 신우2년(辛禑二年, 1376년) 대명홍무구년(大明洪武九年) 12월
지연(池奫)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윤방언(尹邦彦)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정양생(鄭良生)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도(金濤)를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김승득(金承得)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우인렬(禹仁烈)을 경상도순문사(慶尙道巡問使)로, 배극렴(裵克廉)을 진주도(晉州道) 원수로 삼았다. 이 날 벼슬을 제수한 재추가 59명이나 되었다.
ㅇ 임신(壬申) 공양왕3 년(恭讓王 三年, 1392년), 대명홍무구년(明太祖 洪武二十五年) 6월 기묘일
봉원군(蓬原君) 정양생(鄭良生)이 사망하였다. 정양생은 여흥왕(驪興王) 2년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 고려사절요
ㅇ 병진(丙辰) 신우2년(辛禑二年, 1376년) 대명홍무구년(大明洪武九年) 12월
以池奫爲門下贊成事 尹邦彦爲密直提學 鄭良生爲大司憲 是日除官宰樞至五十九
지연을 문하찬성사로, 윤방언을 밀직제학으로 정양생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날 제수 받은 재추가 59명에 이르렀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 정양생(鄭良生) 미상∼1392년(공양왕 4). 본관은 동래(東萊). 증조부는 정균(鄭筠)이며, 조부는 정유의(鄭惟義)이고, 부친은 정호(鄭瑚)이다. 외조부는 진천송씨(鎭川宋氏) 송전(宋銓)이고, 처부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축(安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그 해 3월 청백리(淸白吏)에 선출되었다.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아들은 정구(鄭矩)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이르렀고, 손자는 정흠지(鄭欽之)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의하면, 신우(辛禑;禑王)는 본래 성격이 광포하고 어리석었는데, 하루는 신우가 어느 집에 가서 다듬이돌 노래를 부르며 묻기를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 하자 “정대부(鄭大夫: 鄭良生)의 집입니다.” 하니, 신우가 곧 말을 달려 달아나며 “그 사람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양생(良生)이 굳세고 곧아서 신우가 함부로 범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한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집필자] 전종헌 <참고문헌>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재총화(慵齋叢話) |
Ⅴ. 시조공과 증첨의정승 정세운(鄭世雲)공과의 연관성
시조공과 시중공이 동일인인지 관심이 많다. 시기적으로 비슷하고, 본관이 광주(光州)이고, 휘 신호(臣扈)라는 뜻도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선대기록은 없다.
□ 휘 신호(臣扈) 추증 삼중대광문하찬성사
일반적인 이름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뜻으로는 “신(神)을 모시는 사람” 또는 “왕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찌 보면 본명이 아닌 가명(假名)이나 개명(改名)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봉원사진전직(奉元寺眞殿直)’은 고려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책임자이다. 제관(祭官)의 별명(別名)이라면 동의할 만한데, 태어나서 제관이 되거나 임금의 시종이 되기를 염원하며 작명 한다는 것은 매우 해괴하다. 왕의 시종으로서 명이 없다면 개명을 이렇게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조공의 휘는 4세 지당공의 문과방목에 기록되었으니, 실제 이름이다.
□ 정세운 중서평장사 증첨의정승
1361년 총병관(摠兵官) 당시, 고려사에 의하면 중서평장사이고, 목은 이색의 ‘증시중정공화상찬’에 의하면 직책은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으로 이상(二相)(주15)과 삼재(三宰)(주16) 사이라 하였다.
상의(商議)는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등의 형태로 재추의 관직 뒤에 붙여 그 관직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재추로서 도당(都堂: 都評議使司)에 합좌하여 국정을 의논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도당의 구성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홍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총병관에 제수되어 지휘권을 상징하는 절월(節鉞)을 받고 도당에 나서 말하기를, “나는 심히 한미(寒微)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이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마땅히 어지러운 것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장택현 출신으로 선대는 뚜렷하게 현달(顯達)한 인물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생년은 언제쯤 될 것인가? 1362년 총병관이니 나이는 장년을 지나 노년일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공민왕의 원나라 연경(燕京) 숙위기간(宿衛其間)에 호종하였고, 같이 활동한 동년배 상장군들의 생년(生年)을 살펴보면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인물로는 김용,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이 있는데 삼원수(三元帥)는 홍건적 토벌 후 같은 해(1362년) 처형되었고, 김용도 이듬해(1363년) 처형되었다.
김용, 안우는 생년 미상이며, 이방실 장군 등은 1298년~1312년이다. 이로 미루어 1300~1310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ㅇ 김용(金鏞) : ? ~ 1363년, 총병관 피살, 흥왕사 변을 주동 피주(被誅)
ㅇ 안우(安祐) : ? ~ 1362년
ㅇ 이방실(李芳實) : 1298(충렬왕24) ~ 1362년
ㅇ 김득배(金得培) : 1312(충선왕4) ~ 1362년, 문과급제
ㅇ 류탁(柳濯) : 1311~1371
ㅇ 염제신(廉悌臣) : 1304~1382
ㅇ 홍언박(洪彦博) : 1309~1363, 흥왕사 변 때 피살
□ 결론 : 동시대의 다른 인물
시중공은 역사에 현존하는 분이고, 시조공은 그 이력이 기록상 미지의 인물이다.
1405년, 4세 지당공의 문과 방목에 증조부로서 시조공의 휘가 등장하고 있다. 물론 후손의 묘지와 묘갈에서도 휘(諱)가 입증되고 있다. 1520년대 외손가의 평택임씨, 그리고 고령신씨 가문에서 시조공의 휘와 직책이 누차 기록되고, 1577년 9세 수사공의 묘갈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실전된 묘소는 광주 봉명동 손좌라고 전한다.
정세운 시중공은 역사적 인물이고, 목은 이색(李穡)은 여말 당대의 사람으로 시중공을 잘 아는 사람인데, 「증시중정공화상찬병서(贈侍中鄭公畫像贊並書)」에서 공은 무후(无后)이고 예장지(禮葬地)가 송산(松山)(주17)임을 밝히고 있다. 공민왕 당대에 시중공을 살해한 부하 장수 3명과 이를 사주한 김용이 모두 처형되었으므로, 그 후대에도 나라에 충성하고 청렴한 사람, “충청(忠淸)”한 인물로 남아있다. 충신(忠臣)의 행적으로 그 평이 빛난다.
두 분의 관직은 비슷한듯하나 비교될 수가 없다. 신사보 도유사를 하신 정기호 박사께서 언급하셨듯, 광주정씨 족보도 여러 집안의 세차약기가 모아서 이루어 진 것으로, ‘숙인광주정씨묘갈’에서 말한 ‘정씨는 대족(大族)’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일족은 오로지 시조공의 자손뿐이다. 당시 대족의 일원이었던 다른 집안은 무후였거나 흩어져 버린 것이다. 그 예로, ①정세운(鄭世雲)·정세문(鄭世文) 가(家), ②정의(鄭義)·정안도(鄭安道)·정안지(鄭安止) 가(家)가 있다.
아래의 비교표에서 살펴보듯 동일인물로 볼 근거가 없다. 이론(異論)이 있어도, 기록과 당대 인물의 기록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 시조공과 총병관공 비교표 >
조선 선조 조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9년에 편집한 인문지리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목판본과 고본에는 보이지 않는데, ‘정세운-광주정씨 시조’라는 부분이 있다고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발간되지 못하였고 그 후손 권현상(權顯相)에 의하여 1836년에 간행되었다. 후일 발간 본에 그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정종환 대부의 제보에 의하면 “광주정씨는 고려 총병관 정세운의 후손이다.”라는 언급이 있다는 것이다.
10. 光州鄭氏(광주정씨) : 고려 摠兵官(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의 후손이다. |
권문해가 무슨 근거에 의해 그리 기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선조 대의 후대 사람이고 각 집안마다 고증을 얻어 기술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므로, 앞선 고려 당대의 사람들과 증손자의 문과방목, 묘갈의 증거를 번복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정세운 총병관의 자손을 주장한 인물이 없다.
광주정씨 선대 어느 누구도 총병관이 시조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다.
고려 당대에 목은 이색은 정시중공은 자식이 없고, 개성 송악산에 예장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광주정씨 후손들은 시조공을 광주정씨 시조로 기록해왔다.
시조공을 의심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문해의 저술 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묘지, 묘갈, 방목 등 역사적 기록과 금석문의 증거가 있다.
시조공과 시중공이 어떻게 동일인이 되겠는가?
앞으로, 3세, 4세 등 선세(先世)의 묘지(墓誌) 등이 발굴되어 시조공과 그 선대의 기록이 밝혀진다면 광주정씨 최고의 발견이 될 것이다.
< 목은 이색, 증시중정공화상찬병서 >
증(贈) 시중(侍中) 정공(鄭公)의 화상(畫像)에 제한 찬 병서(幷序)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李仁任)의 봉호(封號) 이공(李公)이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여러 장수와 더불어 경성(京城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하였는데, 그때 총병관(摠兵官)은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그런데 세 명의 원수(元帥)가 총병의 공이 자기들보다 위인 것을 시기한 나머지 부하 군사를 사주(使嗾)하여 불시에 습격해서 살해하게 하였다. 그 뒤에 세 명의 원수가 복주(伏誅)되기는 하였지만, 세상에서 정공(鄭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 중략 >
정씨는 광주(光州) 장택현(長澤縣) 출신으로, 현릉 11년에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아우의 이름은 세문(世文)이고, 아들은 없다.
찬은 다음과 같다.
어유정공(於維鄭公) 아 우리 정공이시여
박외확중(樸外確中) 수수한 외모에 확고한 신념
현릉공신(玄陵功臣) 현릉의 공신이 되는 그 길이
발우병신(發于丙申) 병신년으로부터 시작됐다오
적편중국(賊徧中國) 적이 중국 땅을 돌아다니다가
침아방역(侵我邦域) 우리 강토를 쳐들어왔을 때에
아피기봉(我避其鋒) 우리는 그저 칼날을 피하였으나
공내출적(公乃出敵) 공이 바로 나가서 대적을 했지
역기섬지(亦旣殲之) 이에 적들을 또 섬멸하였건만
이하해이(而下害而) 부하가 그만 해치고 말았는데
해이구망(害而俱亡) 해친 자들 역시 모두 망했나니
오호불사(嗚呼不思) 어찌 그리도 생각을 못 했던가
강공원의(姜公遠矣) 옛날 강공이 세운 큰 공적
공칙려미(公則儷美) 공이 아름다움 짝하였는데
비아광평(匪我廣平) 우리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숙도숙지(孰圖孰志) 누가 뜻 세우고 꾀하였을까
송산창창(松山蒼蒼) 푸르고 푸른 송악산 아래
장아명당(壯我明堂) 웅장하도다 우리 명당이여
정공지풍(鄭公之風) 우리 정공이 남겨 준 풍도
파우무궁(播于無窮) 후세에 끝없이 전하리로다
주15) 이상(二相) : 찬성(贊成)의 지위. 종1품
주16) 삼재(三宰) : 조선시대 의정부의 좌우참찬(左右參贊). 정이품
주17) 송산(松山) : 작자·저작 연대 미상의 고려시대 가요. 송산(松山)은 개경(開京)의 진산(鎭山)인 송악산(松岳山)인데, 고려 태
조(太祖)가 개성에 도읍한 이후 나라의 기틀이 잡혀 계승되어 오므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가사가 전하지 아니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高麗史 71, 樂志, 俗樂》
松山. 松山, 開京之鎭也, 自太祖都開京, 累世相承, 國祚延長, 歌之所由作也.
< 참고자료 > : 생략
1. 2세 개성부윤공의 사위 박가흥
2. 정안지의 처형 발단, 임군례 대역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