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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인으로 성별(1-8)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주셔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구별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합니다. 이러한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세상의 빛이 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결국, 구별된 삶은 우리의 변화를 가져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3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5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8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1-8)
본문에서는 나실인이 하나님께 서원하여 특별히 구별된 삶을 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은 포도주와 포도주로 만든 것,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금지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기간 동안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서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며, 나실인의 삶은 경건과 헌신의 본보기가 됩니다.
(1) 금주와 포도주 독주 금지 규정(1-4)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할 때의 규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나실인의 서약은 먼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제사장과 같이 구별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맹세하며 헌신하고자 하면 그가 누구든지 나실인의 서약을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나실인의 서약을 지키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 비용을 감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 바울은 나실인 서원 종료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합니다(행 21:24). 누구든지 서약을 하고 나실인의 삶을 살 수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 구별된 백성 즉 나실인의 규례는 철저하게 제사장의 관할 하에 있습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거나, 어기는 경우, 나실인의 서약 기간을 마무리하는 경우 등에서 제사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실인이 되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비록 본문은 일정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나실인의 서원하는 경우를 다루지만, 사무엘이나 삼손 같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나실인으로 평생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태어나면서부터 드려진 존재이지 구체적으로 나실인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삼손의 경우는 지속적으로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예로 나타납니다. 전 생애를 나실인으로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셉도 창세기 49:26에서 형제들 중 뛰어난 자 즉 구별된 나실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실인이 되면 일상생활 중 세 가지를 엄격히 금해야 합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 포도 소산의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보통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독주가 기타 과일이나 곡식으로 만든 술임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나실인은 술 자체를 마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포도나무에서 난 모든 것은 금지됩니다. 포도주로 된 초, 독주로 된 초, 포도즙, 생포도, 건포도 등 포도나무와 관련된 것은 씨부터 껍질까지 전적으로 금지됩니다. 철저하게 절제된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삭발 규례와 사체 접촉 금지 규정(5-8)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으로 지내는 동안 머리를 깎지 않음으로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동안 나실인의 서약을 시행하고 있음을 쉽게 구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실인의 머리는 그가 나실인의 서약을 행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표입니다. 마치 왕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은 ‘자기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머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바로 나실인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네제르’인데 이 단어는 또한 왕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셋째,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과의 접촉은 생명 되신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으로 자신의 몸을 심각한 부정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심지어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에도 주검에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검에 의한 부정은 단순히 직접적인 접촉에 의한 것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명령은 시체와 함께 한 지붕에 있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체와 접촉하는 것만 아닙니라, 시체와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도 금지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있는 공간도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에 대한 아주 엄격한 금지 규례는 제사장에 대한 금지 규례보다 더 엄격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주검에 접촉해서는 안 되지만, 부모와 형제, 자녀 등 직계 가족의 장례는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레 21:1-4). 그렇다면 나실인으로 자신을 성별하는 과정은 대제사장에게 주어진 규례만큼이나 엄격하게 구별됨을 유지해야 함을 뜻합니다. 금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은 직무를 행할 때만 금주가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레 10:9-10).
규례를 어긴 나실인의 재성별 규정(9-1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실패와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필요할 때마다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이를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9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면 그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일곱째 날에 밀 것이며 10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11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말미암아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그 날에 그의 머리를 성결하게 할 것이며 12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물로 드릴지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때에 그의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기간은 무효니라(9-12)
나실인으로 구별되기 위해서 아주 엄격한 제한 규정을 다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의도했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나실인의 규정을 어기고 부정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실인의 서약이 깨어지고 나면, 그 서약을 다시 시작하는 규정들을 따라 다시 성결케 되어야 합니다. 서약이 깨어지는 경우를 한 가지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의도치 않게 주검에 노출되는 상황입니다. 갑작스럽게 곁에 있던 사람이 죽게 되어 한 공간에서 주검과 함께 있게 되면 그는 한 공간에서 머물렀고, 또 주검을 보았기 때문에 부정하게 되며, 나실인의 규례를 어긴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실인 규례를 어기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지 않거나 부주의함으로 부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다시 나실인의 정결을 회복하는 길은 이러합니다. 부정하게 되면 칠 일을 기다렸다가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으로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를 번제물로 드립니다. 이 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서원했던 사람은 다시 정결하게 되기 위해 이미 부정하게 되었던 머리털과 수염을 모두 밀어야 합니다(민 19:11-12). 그리고 다시 나실인이 되는 기간을 정하여 그날에 1년 된 숫양으로 속건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덟째 날 속건제물까지 모두 드리고 나면 그의 머리가 성결하게 되며, 나실인으로서의 날이 다시 시작됩니다. 부정하게 되기 전에 지켰던 날들은 모두 무효입니다. 다시 성결케 되기 위해 왜 마지막 순간에 속건제물을 드려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보통 속건제물은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손해를 끼쳤기나, 타인의 재산에 피해를 주었을 경우에 드립니다. 나실인의 금기를 어긴 것이 속건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은 어쩌면 나실인이 행한 서원이나 혹은 나실인의 머리카락을 성물로 이해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깨뜨림으로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에 속건제물을 드리도록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마리 비둘기의 속죄제와 번제는 한 묶음이 되어 송장 접촉의 죄를 범한 나실인을 속죄했습니다. 특별히 이때 제단에 뿌려진 속죄제 비둘기의 피는 그 죄로 인해 오염된 제단을 닦아냈습니다. 속건제는 보통 하나님의 성물이나 타인의 재산에 피해를 입힌 죄에 대해 배상의 제사로 드리나 완치된 나병 환자의 복귀 의례와 현재의 나실인의 재서약 의례에서도 바쳐집니다. 나병 환자의 경우 그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성물을 훼손해서 그런 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속건제를 바쳤을 수 있습니다(Hartley; Milgrom). 반면에 나실인의 경우에는 그가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인데 사체 접촉으로 더럽혀져 훼손되었기 때문에(특히 그의 성별된 머리칼이) 그것을 배상하는 의미에서 속건제가 요구되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속건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위반’을 한 죄(마일)에 대해 바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실인은 믿음의 서약을 한 사람인데 심각한 오염과 더불어 서약이 깨트려져 마알 죄를 범한 셈이 되므로 속건제가 요구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구별된 나실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구약의 나실인은 신약의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실인의 서원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구별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위한 결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헌신은 우리에게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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