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화 사상
박 순 태
고헌산 중허리가 눈앞이다. 계곡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숲속은 천녀화 향기로 은은하다. 끈적하게 샘솟던 땀방울이 이내 멎는다. 꽃송이의 함박웃음에 7월 더위가 한발 물러서는가 보다.
번잡한 도회를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 피어난 꽃, 천녀화. 인적 드문 곳이라 사람 냄새 풍겨서 그런가. 인간을 대면하면 색다른 세계를 접할까 싶어서일까. 바람이 불어오자 가리고 있던 나뭇잎 살랑 헤집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조우遭遇 뒤의 여지를 남길 심상인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리지 않고 훈훈한 정으로 맞이해준다. 불자는 보살을 만났다 하고, 크리스천은 천사를 대면했다 하겠다.
사람들은 이 꽃을 두고 산목련이라 부른다. 목련과 천녀화, 두 꽃은 형체는 닮았다만 속내는 천양지차다. 목련은 목련대로 천녀화는 천녀화대로 나름의 특성을 살려 피어나기에 감상의 묘미가 색다르다.
목련은 이른 봄에 꽃송이가 따닥따닥 붙어 여섯 화엽을 화르르 펼치다가 이내 시들어 꽃잎 떨군다.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걸까, 동료끼리 시샘하느라 용심을 부리며 각박하게 부산을 떤다. 무리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고 한시라도 빨리 피어나려 서둘다가 꽃샘추위의 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밀도 높은 산만한 개화에 희소 가치성마저 지워버린다. 앳되게 피어났기에 어설프고 아리다. 완연한 봄이 되기 전에 꽃망울 터뜨림은 고통이자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억지로 여겨진다. 더 빨리, 더 많은 만발에는 인간의 이기심도 한몫 작용했으리라.
천녀화는 녹음방초 속에서 자리다툼 없이 드문드문 꽃잎을 펼친다. 실바람만 불어도 옷깃을 여미는 여인같이 쉽사리 너풀거리지 않는다. 쉼 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 들으며 하심을 싹틔웠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박자 맞추어 세상사 무거운 마음 가벼이 하고, 바람에 몸을 띄우면서 천국 같은 세월을 지낸다. 달이 뜬 밤에는 비단 빛을 발하는 화신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산속에서 다지고 숙성하여 푼더분하고 너그럽기만 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원칙을 고수하면서 위장된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천녀화의 미모는 이렇다. 꽃잎은 방금 다림질한 새하얀 모시 치맛자락이다. 백옥 같은 꽃받침 위의 시붉은 수술, 옥구슬같이 영롱한 암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꽃의 진수를 한층 띄운다. 꽃송이 중심, 최상위 자리를 차지한 암술에서는 과년瓜年의 자태가 아롱거린다. 이팔청춘 처녀의 어여쁨이 바로 이런 게로구나.
꽃송이 속에서 가례가 이어진다. 꽃잎을 용광로 삼아 이글거리는 수술, 암술은 그 위에서 하얀 불꽃을 발한다. 얼음덩이라도 녹일 듯한 수술의 열 기둥, 그 기세를 남김없이 흡수하는 암술을 탐미眈美하니 방년芳年에 족두리 쓴 양갓집 규수와 다름없다. 암술이 수술의 뜨거운 전류를 받아들임은 종족 유지의 발화점이자 세상의 기원을 알리는 점지이다. 암술의 유백乳白과 수술의 기혈氣血이 이루는 합작은 물과 불을 조정하여 화해시키는 천지조화이리라.
늙수그레한 산객이 함박꽃이 참 좋다며 옆에 앉는다. 또 한 사람은 꽃이 보름달 같다며 입을 활짝 벌린다. 꽃송이는 이쪽에서 보아도 저쪽에서 보아도 함박웃음이다. 햇빛을 달빛 삼아 빙빙 돌아가면서 강강술래를 한다.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메시지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불러들여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다는 깨침을 준다.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도를 지키는 꽃송이의 의연함에 빨려드니, 구부릴 줄 모르는 완고함은 부러지기 쉽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상대를 무시하지 말지어다. 거부하기보다는 매사를 포용하는 자세로 차별과 편협을 초월하는 게 천녀화의 정기精氣다.
목련을 비롯한 봄꽃들은 잎이 돋아나기 전이거나 잎과 더불어 피어난다. 산속 함박꽃은 손바닥 크기의 잎들에 가려졌다가 여름날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행복은 타에 의해 안기거나 주고받음 없이 자신 속에서 이루어짐을 알린다. 어려운 과제나 일에 부딪히더라도 곤혹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문제 해결에 정열을 쏟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이기에 신뢰와 공감대가 형성된다.
벚꽃과 아카시꽃은 집단적이며 조랑조랑하다. 싸리나무꽃과 배롱나무꽃은 빽빽하며 자잘하다. 이러한 꽃들은 지독한 감상주의에 불과한 사랑 같아 마음이 오래오래 젖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숨겨놓았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사랑은 용서와 배려이기에 삶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로 흡수하는 게 아닐까. 조건 없는 사랑과 관대함까지 갖춘 천녀화, 깊은 숲속에서 자애롭게 지정至情을 피워올렸다.
한여름에 한가득 꽃잎을 펼친 천녀天女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은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으로 남는다는 삶의 진정성을 곡진하게 풀어냈다. 근면과 검소, 희생과 봉사, 공과 사의 분별력, 해맑고 당당함, 그리고 친화력 등, 자신에게는 냉정하면서도 밖으론 온화하다. 다목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기에 만남의 시간에 비례하여 정을 쌓는다. 산을 떠나오는 내내 꽃송이 여물 즈음을 그리며 상상에 몰입한다. 산전수전 겪은 우뚝한 여인의 풍모가 머릿속을 채운다.
천녀화 서기瑞氣에 끌려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낡은 생활 습관에서 떨치고 나오려는가 보다. 삶의 찌꺼기가 정화되어 맑아지니 늘어졌던 근육이 탄력을 되찾는다. 마음이 가벼우니 몸도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