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先弘慶寺 碣記 (봉선홍경사 갈기)
譯文 翰林學士 柳奭佑(前曉星大敎授) 宣議郞 內史舍人知 制誥兼史舘修撰官賜祡金魚袋臣崔沖奉 敎撰 奉議郞國子丞臣白玄禮奉敎書,
●한림학자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고 겸 사관수찬관 사 자금어대 신 최충은 명령을 받아자 지었음, 와자 봉이랑 국자승 신 백현례는 명령을 받자와 썼음,
●臣謹按內云, 招提者招引提편十方英俊, 洪蘭 佛法居止之所焉, 又莊子說薳盧而視仁義, 晉書論逆旅以濟公私, 今之於稷山縣成歡驛北路一牛鳴地, 新置寺舍者,卽其類也,
●신은 삼가 고찰하옵건대 내전에 이르기를 초제란 것은 십방의 영춘한 이를 부르고 이끌어 불법을 널리 밝히면서 거주하는 곳이라 그리고 또 장자가 거려를 말하면서 인과 의에 겨누고 진서에 역려로 써 공과 사를 돕는다고 논하였으니 이제 직산현 성환역의 북쪽길 한 소 울음 들릴 자리에 새로 절집을 두게 한 것은 곧 그런 종류라,
●可終丕,屬於 盛時, 惟 我聖上, 守位以仁, 兼文之德, 于戈戚楊皆偃之矣, 禮樂刑政畢修之矣, 若乃喜捨之綠, 遹追之業, 求諸注代, 無得而踰
●처음 이 곳에는 장단의 정자가 없어 사람의 연기가 동떨어져 끊겻고 환포의 못이 있어 검탈하는 도적은 많아 비록 갈림길의 요지이로되 실로 왕래하기 어려운터라 끝내비색하지는 않을지라 문명한 시대를 만났도다, 오직 우리 성상께옵서 인으로서 지키시고문교의 덕을 잡으시와 방패와 창과 도끼들을 다 쓰지 않게 되었고 예와 악과형법과 정치는 다 수정되어서 희사하는 인연과 휼추하는 사업은 지나간 시대에 더듬어도 얻어 넘어서지 못하였을지라,
●嘗 詔左右兩街都僧通眞光敎圓濟弘道大師臣逈兢, 而曰昔者 皇考安宗憲 景孝懿英文大王, 初九潜身, 大千 歸命, 每覽法華之妙設, 深嘉中道之化城, 方欲 效行 ,未能 勳集, 朕卽善繼其 志, 永觀厥宇, 副我書貞之 命, 主其慮事之權,
●일찌기 좌우양가도승통 통진광교원제흥도대사 신 형궁에게 명령해 이르시되 옛적 황고 안종 헌경호의영문 대왕께옵서 초구에 몸을 간직 하시매 대천세계에서 명령에 따르려 하였는데 매양 변화의 묘한 말씀을 살피시고 깊이 중도의 화성을 아름다이 여기시어 바야흐로 본받아 행하려하다가 아직 능히 큰 공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짐은 곧 그뜻을 잘 이어 길이 그 성공을보려 하노니 한가지로는 행려를 구제하여 험로에 걱정없게 하고 한가지로는 중의무리를 부르고 이끌어 법륜에 나아가게 하려니 법사는 마땅히힘써 찬양의 일을 보살펴 몸소 친히 자리를보아 나의 물어 정하게 하는 명령에 맞추어 그 일을 계획하는 권을 주장하라 하시었다,
●兢纔受 綸言, 便圖經始, 縱九廻而無倦, 須百足以不僵, 所貴同心, 用將龥俊, 爰有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臣得聽, 靜慮修眞悟理大德賜紫沙門臣蘠琳等, 兢扶願穀, 枚卜要途, 蒸然來斯, 實興我役, 上續差推誠致理翊載功臣金紫興大夫兵部尙書知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臣姜民瞻, 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 太子寶客柱國宜春懸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臣金猛等,爲別監使
●형궁이 겨우 명령을 받자 곧 경영을 도모하여 비록 하루 아홉 번 돌아도 권태함이 없이 모름지기 백족의 벌레처럼 엎어지지 않게하려고 소중한 것은 마음이 맞는 이로서 장차 준수한 이를 불러 들였다 이에 광리중현대사 사자한 사문 신 득총과 정려수진 오리대덕 사자한 사문 신 장림등이 있어 기원하는 수레바퀴 중심을 다루어 붙들고 긴요한 길목에 자리를 잠으메 수두룩이 역군이 밀려와 실로 우리 역사를 일으켰다, 임금께서 잇달아 추성치리익대공신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국개국남 식읍삼백호 신 강민첨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 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 신 김맹동을 보내어 별감사로하였다,
●於是事諧共理, 謗絶宣驕, 疕徒勿奪於農時, 程物免煩於 公帑, 陶人施瓦, 木客供材, 雪鋸風斤蜂聚蕩心之匠, 雲鍬電鍤駿遊手 之 群起自丙辰春, 迄千辛酉歲, 凡造得堂殷門廊等共二百餘間, 所置塑晝諸功德像及鍾磐幡差, 具如見在其數寔繁, 乃勅賜額爲奉先弘慶寺, 莫不功由鳩, 値若飛來, 像殿經樓麗異而宛 疑兜率, 鳧種鴈塔莊嚴而遙認爛阿, 旣 常三寶勃興, 實可千燈相續, 又於寺西, 對立客館一區計八十間, 號曰廣綠通化院, 斯亦溫盧冬密, 凉屋夏寬, 積以银糧, 貯之芻秣, 施賙窮急, 設雍伯之義漿防備盜奷, 列陳留之樓鼓, 夫如是則不獨方袍之衆虛往實歸,亦令之足之徒宵盤野晝憩, 終見證眞之境, 蔑聞焚次之虞, 向若非酌古今讼, 寒先皇之弘願, 隨機設敎, 崇 彼佛之妙門, 則兼濟之, 仁幾乎而息,
●이에 일은 함께 다스림에 화합해지고 교만을 부린다는 헐뜯음이 끊어저 쇠찬한 백성에게 농사철을 빼앗기지않고 물건들은 국고에 귀찮게 하지않아 도공이 개와를 베풀고 목수가 재목을 바치어 눈빛 같은 톱, 바람일으킨 도끼로 마음 흔들린 장인이벌떼 처럼모이고 구름같은 가래들과 번개같은 삽들을 유식하는 무리들이 빨리 달려 병진년(현종7년- 단기3349-서기1,016) 봄에일으켜신유년(현종 12년- 단기3,353- 서기1,021)에 마치었다, 무릇지어진 마루, 궁전, 문행랑들 모두 이백여간이오 둔 바의조각한 소상과 그려 낸 모든 공덕상 및 쇠북, 경석, 깃발, 일산은 모두 현재와 같아 그 수효 실로 많은지라,이에 칙명으로 액을 내려주시어 봉선홍경사로 하였음니다 공은사람들을 모으고 어울린 데 말미암았고 형세는 날아오는 듯하여 불상을 둔궁전 불경을 둔 누각은 아름답고 이상하여 완연히 두솔인가 의심되고 부씨의 만든 종, 기러기의 탑은 장엄하기 멀리 난타인가 인정되어 이미 항상 삼보가 울컥 일어나정말 가히천등이 서로 잇겠다, 또 절의 서편에 객관 한갈피 모두 팔십간을 마주세워 이름해 부르기를 광언 통화연이라 이 또한 따스한 집은 겨울에 아늑하고 서늘한 지붕은 여름에 너그러워 양식을 쌓고 말꼴도 두어 군급한 이에게 베풀어 옹백의 의상을 설시하고 도적의 간흉을 방비하여 진류의 누고를 벌렸다, 대저 이같이 한 즉 홀로 중의 무리가 비어서 갔다가 채워서(지식을 많이 얻어) 돌아갈뿐 아니라 또한 피로한 나그네 무리로 하여금 밤에 즐기고 낮에 쉬게 한다, 마침내 증진의 지경을 보냈고 숙소를 불태운 근심을 듣지 못하겠다, 접때 만약 옛일을 참작하고 지금 시세에 따라 돌아가신 임금님의 큰소원에 바치고 기틀에 따라 교화를 베풀어 저 불교의 묘문을 높이지 않았다면 고루 구제하려는 어진 일로 거의 식었을 뻔 하였다,
●於戱, 權興有旨, 祖述無虧, 肯構之功旣存矣, 奉行之道亦廣矣, 盡善盡美,念玆在玆, 今則申命儒生, 俾書盛事, 臣恩遲燥吻,淺嚼筋, 雖長卿形似之文, 無能爲也, 而小子斐然之作竊敢効焉, 略述端倪, 聊裨實錄, 時 聖上御國之十八歲, 太平記曆之弟六年, 夏四月 日, 謹 記
●아아-시작 하는데 뜻이 있었고 선대의 일을 닦는데 빠짐이 없다, 긍구하는 공이 이이 있었고 봉행하는 도리도 또한 넓도다, 선을다하였고 미를 다하였으며 이를 생각 하이에 마음 두어 이제는 거듭 유생에게 명령하시어 장한 일을 쓰게 하시니 신은 생각이 드디어 입술을 태우고학식이 열어 갈빗대 힘줄 씹 듯 비록 장경의 본뜻 글일지라도능히 못 할 지나 소자의 알롱한 작품으로 슬그머니 감히 바치노니 대략 전말을 딱아 애오라지 실록에 도움되게 함, 때는 성상의 나라를 다스린지 십팔년이오 태평으로 역서를 기록한 제육년 여름사월 일에 삼가 기 함,
●奉 宣權知寺主圓慧智廣普辯通濟得理三重大師賜紫沙文臣彦 崇都監, 解行無垢大師賜紫沙門臣朗崇副都監, 副寺主抄門臣成普, 抄門臣蕙廷 儈殷抄, 暹遠, 義玄, 奉謙等奉 敎立
●선명을 받자와 권주사주인 원혜지광보광선변통제득리삼중대사 사자한 사문 신언승이 도감으로,해행무구대사 사문 신낭숭이 부도감으로, 부사주인 사문신 성보, 사문 신혜연,중은묘,성원,의현,봉겸 등 은 명령을 받자와 세웟음, 譯文 翰林學士 柳奭佑(前曉星大敎授) 宣議郞 內史舍人知 制誥兼史舘修撰官賜祡金魚袋臣崔沖奉 敎撰 奉議郞國子丞臣 白玄禮奉敎書,
글쓴이 ;晋州市 大谷面 雪梅里 臨溪亭 姜 元 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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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한자명칭 :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 지정일 1962.12.20
- 테마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시대 고려시대
- 주소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3길 77-48 (대홍리)
奉先弘慶寺碣(봉선홍경사갈)
이곳은 稷山顯(직산현) 成歡驛(성환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처음 이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교통상 중요한 지점이면서도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
웠다. 고려 顯宗(현종)이 左右兩街都僧統(좌우양가도승통) '逈兢(형긍)'을 불러서 '나의 아버지인 安宗(안종)께서 왕자의 신분으로 불
법을 독실히 받들었으며, 대중을 위한 사업을 성취하려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지어서 한편으로 여행자의 고통을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 불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바이니 대사는
내뜻을 이루어 달라'라고 하셨다. 형긍은 명을 받고 곧 大師(대사) 得聰(득총) 大德(대덕) 藏林(장림)과 함께 금품을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였고 임금은 다시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강민첨과 중추부사 김맹등을 別監使(별감사)에 임명하여 함께 일을 보게 하였다.
관가의 물자를 소비하지도 않았고 농민들의 바쁜 일손을 빼앗은 일도 없이 이 모든 역군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현종7년(1016) 가을
에 시작하여 현종12년(1021)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법당의 본건물과 행랑대문등 모두 200여간에 달하여 불상과 여러보살의 탱화鍾(종)과 磬(경)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완비되었다.
나라에서는 절 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고 내려주셨다. 또 절 서쪽에다가 여관 한채를 세웠는데 크기가 80간이다.
이것은 명칭을 廣緣通化院(광연통화원)이라 하였다. 겨울에 사용 할 온돌방과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을 갖추었고 여기에 식량 마초등
이 충분히 비축되어 일반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들에게 도중의 휴식처가 되게 하였다.
이는 安宗(안종)대왕께서 생존시의 염원을 실현시킨것이며 금상폐하의 자비로우신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문신 인나에게 이 사실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이상과 같이 그 시말을 적어 역사의 자료에 이바지 하려 한다.
원비 고려 현종 18년 글 翰林學士(한림학사) 內士舍人(내사사인) 崔沖(최충) 글씨 國子丞(국자승) 白玄禮(백현례)
1981년 10월 임창순 역술 남계 조중국 쓰다.
문화재청 설명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
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
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碣碑)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
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
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
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
를 썼다.
弘慶寺(홍경사)
(碑에 적힌바에 따르면) 이곳 성환일대는 삼남으로부터 한양이나 고려때 서울인 개경까지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교통상 매우
중요한 곳이면서도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고려 顯宗(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가 추후 安宗(안종)으로 추대되었는데 왕자의 신분
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면서 대중들을 위하 불사를 펼치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아들 顯宗(현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
들어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불법을 널리 펼치도록 하였으며, 또한 여관을 함께 세워 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다.
절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 함은 奉先(봉선 : 선친의 뜻을 받들어) 지은 弘慶寺(홍경사)라는 뜻이다.
지금 절은 남아있지 않고 절을 지은 내력을 적어놓은 碑(비)만 남아 있다.
碣記碑(갈기비)
碣(갈)이라 하면 비석의 끝이 네모지지 않고 둥근것을 말하며 네모난 것은 그냥 碑(비)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양에 따라 구분하여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더구나 이 비는 둥글지도 않은데 碣(갈)이라고 하니 이상하다.
아마도 전액에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새겨있어 그냥 [奉先弘慶寺碣記碑(봉선홍경사 갈기비]라고 부르는듯 하다.
그러니까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씌어진 碑(비)라고 해석하면 될듯하다.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변에 국보 제7호가 있다. 보호비각을 세워 놓았다.>
<갈기비 모습... 거북이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보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다. 실제로 앞에 서면 포스가 느껴진다.>
<물고기 지느러미같은 갈기를 조각하여 漁龍(어룡)을 표현한 듯 하다. 현존하는 사적비중 특이한 모양이다.>
<시선을 마주치면 조금 무섭다.>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꺾은 목덜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거북 등위에는 커다란 연꽃이 비신을 받치고 또한 거북 등을 덮어 감싸고 있다.>
<거북 꼬리도 두번을 꺾어 애교스럽게 처리하였다.>
<碑는 높이 2.8m로 매우 크며 당대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썼다.>
<碑의 옆면은 당초무늬를 조각하여 섬세하다. 비 머리인 이수는 네모진 모습이다.>
<비신의 첫머리에는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씌어 있다.>
이런 비석이나 돌에 새겨진 글씨들을 모두 읽거나 이해하기가 어려워 늘 아쉬웠는데
이곳에는 그 해석을 적어놓은 동판이 있어 도움이 된다. 참고로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