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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제 5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
<善德王>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 <金>氏<摩□{摩耶}>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圖花無蜂蝶}, □□{故知}之.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花有香氣}, □□□□{蜂蝶隨之}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趙炳舜. 『三國遺事』李丙燾는 「三國遺事」와 「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而必無香氣.’로 보았고, 今西龍은 ‘此花( )( )( )( ), 必定無香氣’로 보았고,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로 보았다.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은 이 부분을 ‘畵花而無蝶’으로 보았다. 李丙燾.
今西龍.李丙燾.李丙燾.
「북한본」.李丙燾.
「북한본」.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 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夏五月, 旱, 至六月, 乃雨. 冬十月, 遣使撫問國內鰥寡孤獨, 不能自存者, 賑恤之. 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원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다.
겨울 10월, 특사를 보내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二月, 京都地震.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八月, <百濟>侵西邊.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하였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三月, 雹大如栗.
3년 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 크기가 밤알 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다.
○四年, <唐>遣使持節, 冊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以襲父封. <靈廟寺>成. 冬十月, 遣伊湌<水品>․<龍樹>[一云<龍春>.], 巡撫州縣.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五年, 春正月, 拜伊湌<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蟆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蟆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其或有隣國兵}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率兵搜之},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慈藏>法師入<唐>求法.
今西龍은 ‘必有敵兵( )( )’으로 되어 있다.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意或有隣國兵’으로 교감하였다.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今西龍은 ‘弼呑等往搜之( )’로 보았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왕에게 병환이 났으나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의하고, 중 1백 명에게 도첩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六年, 春正月, 拜伊湌<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6년 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七年, 春三月, <七重城>南大石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 冬十月, <高句麗>侵北邊<七重城>, 百姓驚擾入山谷. 王命大將軍<閼川>安集之. 十一月, <閼川>與<高句麗>兵, 戰於<七重城>外, 克之, 殺虜甚衆.
7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하였다.
가을 9월, 노랑 색의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였다.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안심시켜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八年, 春二{正}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湌<眞珠>鎭之. 秋七月, 東海水赤且熱, 魚鼈死.
8년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다.
○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學生能明一大經已上, 皆得補官. 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滿三千二百六十員. 於是, 四方學者雲集京師. 於是, <高句麗>․<百濟>․<高□{高昌}>․<&□蕃{□吐蕃}>, 亦遣子弟入學.
9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 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 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党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 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湌<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 冬, 王將伐<百濟>, 以報<大耶>之役, 乃遣伊湌<金春秋>於<高句麗>, 以請師. 初, <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隣, 但威劫行人, 以□□{要歸}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囚}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 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三月, 入<唐>求法高僧<慈藏>還.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百濟>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臣}國杜 {社稷}必不獲全, 謹遣陪臣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而{帝}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和爾三國. <高句麗>․<百濟>旋踵翻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以免顚越?” 使人曰: “吾{臣}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靺鞨>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以爲我□{兵}, 必皆奔走, 此爲二策. <百濟>國恃{負}海之嶮{險}, 不修機械, 男女紛{分}雜, 互{好}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隣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枝}, 與{以}李丙燾. 「冊府元龜」. 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往}李丙燾. 「冊府元龜」.,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使人但唯而無對. 帝嘆{難}其庸鄙, 非乞師告急之才也.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 당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 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 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十三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齎璽書, 賜<高句麗>, 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卽戢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擊爾國矣.” <蓋蘇文>謂<玄獎>曰: “<高句麗>․<新羅>, 怨隙已久. 往者<隋>室相侵, <新羅>乘釁奪<高句麗>五百里之地, 城邑皆據有之, 非返地還城, 此兵恐未能已.” <玄獎>曰: “已往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秋九月, 王命<庾信>爲大將軍{上將軍},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1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너희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또 다시 신라를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는 틀림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과거 수 나라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개소문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庾信>/拒之},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於王, 未得歸家, 又□{急}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冬十一月, 拜伊湌<毗曇>爲上大等.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 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唐書』云: “<貞觀>二十一年卒.” 『通鑑』云: “二十五{二}年卒.” 以本史考之, 『通鑑』, 誤也.]
○論曰: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犧>理<九州>耳, 至若<呂雉>․<武曌>,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皇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姥嫗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羸豕孚}蹢躅.” 其可不爲之戒哉?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당서」에는 ‘정관 21년에 죽었다’고 하였고, 「통감」에는 ‘25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증한다면 통감이 잘못이다.]
저자의 견해 :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으나, 그녀는 천자가 아니라 복희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와 무조 같은 경우에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나와 정사를 보았으므로,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로만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원리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의 원리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게 하였다. 이는 실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에 운다”고 하였고, 주역에는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