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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묵상글 들 (부활 5주 토요일-나도 성령의 허락을 받고 싶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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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5주 토요일-나도 성령의 허락을 받고 싶다.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늘 사도행전을 읽다가 비티니아로 가고자 했던 바오로가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셔서 가고자 하던 곳을 포기하고
트로아스로 방향을 돌렸다는 얘기가 새삼스러웠습니다.
성령의 허락을 받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성령의 허락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읽고 보니 '그렇지, 성령의 허락을 받아야지!
그까짓 사람의 허락을 받거나 하물며 악령의 허락을 받아야지 되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든 생각은 '그런데 나는 어찌 이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을까?' 또 '어떻게 해야지 성령의 허락과 반대를
알아채고 따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연달아 들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성령충만이나 성령의 이끄심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하기도 하였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시고
반대하신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고, 그저 뭉뚱그려서 하느님이 반대하시고,
허락하신다고 느낀 적이 있을 뿐입니다.
저의 열등감 중의 하나가 영적인 민감성 부족입니다.
악령이든 성령이든 영적으로 무디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 신기神氣라는 말이 있고,
어떤 사람을 보고 신기가 있다고도 하는데
보통 신 또는 신의 세계와 내통을 잘하고 그래서
결국 접신을 하고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철학자 최한기에 의하면 이 신기가 선천적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견문염습見聞染習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곧 후천적으로
우리가 습득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역시 프란치스칸으로서 이 점을 보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악령과 성령과 같이 외부의 영이 있기도 하지만
육의 영이나 기도와 헌신의 영처럼 우리 내부의 영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의 영을 지니게 되면 이 세상에서의 자기 성취와
사람들의 평가와 칭찬과 사랑 등을 얻으려고 들지만 우리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고 지니게 되면 우리의 영이이 세상에서는
갖가지 좌절과 고통을 당하고 인간들로부터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천상적인 것을 얻고자 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육의 영(靈)은 말마디만을 소유하기를 무척 원하고 애를 쓰지만, 실천을 하는 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영의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 두려움과 신성한 지혜와 신성한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성령의 허락과 반대에 무딘 것은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기보다
육의 영을 지니고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도와 헌신의 영이 제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치 않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성령의 허락이라는 말을 안 이상 저도 성령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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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세상의 원리와 성령의 원리를 숙고하도록 초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으면 우선은 서럽고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그 이유라도 속시원히 알면 좀 나을 것 같지요.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신 뒤 남겨질 제자들에게 미리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 제자들이 육으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육의 질서가 아닌 영의 질서를 살아가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뽐내는 재물과 명예와 안락을 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과 희생, 비움을 추구하니 세상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고통과는 연대할지언정 세상의 유혹에는 야합하지 않으니까요.
둘째,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뽑아 따로 세우셨기에, 예수님을 적대하던 이들의 악심이 그 제자들을 피해가지 않을 겁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이미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지요.
"내 이름 때문에"(요한 15,21).
누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선을 행하고 사랑을 나누며 구원 상태를 누리지만, 누구는 그 이름 때문에 악을 휘두르며 스스로 구원을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감추어진 속마음을 환히 드러내는 위력을 지녔습니다(루카 2,35 참조).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계속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어제까지의 대목과는 달리 바오로의 이름만 언급되네요. 바로 전 대목에서 바오로가 마르코의 일로 바르나바와 갈라졌기 때문입니다(사도 15,37-39).
"성령께서 ...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사도 16,7).
바오로 일행은 철저히 성령께 의지해 길을 갑니다. 어느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지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성령이십니다. 물론 막으시는 이유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막으셨으므로"의 어미나 "그리하여"라는 접속어가 보여주듯, 그들은 "그래도" 순종하지요.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사도 16,10).
그렇다면 이번의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이 역시 성령께 활짝 열린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깨어 있다면, 그리고 사심과 탐욕에 빠져 있지 않다면,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열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심을 어렵잖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장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에게 성령의 뜻은 나침반 이상의 안내자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친구인 우리들이 살아가는 기준이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되 세상 원리가 아닌 영의 원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으스대고 무시하고 억압하고 짓밟기보다, 사랑하고 나누고 희생하고 비우고 자신을 낮춥니다. 겉을 치장하기보다 마음을 닦고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데 열성을 다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때론 세상이 그런 우리를 반기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얼핏 악이 만연하고 허영과 권모술수가 득세하는 듯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하느님 모상인 우리, 저마다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씨앗을 품고 사는 우리가,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더 많고 더 강력하고 더 끈기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악은 선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머물러, 나를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인지, 무엇에 더 가까운지 살피는 시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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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미움과 박해의 참의미!'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모든 면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미움과 박해 앞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미움과 박해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미움과 박해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고, 세상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미움과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사도16,1-10)는 미움과 박해가 역설적이게도 다른 곳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 의미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사도16,6)
곧 미움과 박해로 인해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마케도니아(유럽)로 전해지게 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떠한 고통과 시련보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시련이 더 크고,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겨내고 부활하라고.
우리의 앞서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하도록 합시다!
이 기억이 오늘 나를 넘어짐에서 일으켜 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요한16,2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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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새벽을 열며.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빠다킹 신부님.
인터넷에서 ‘빠다킹 신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중에는 부정적인 말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그만일 것 같은데, 부정적인 말로 싸움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요.
처음에는 저도 화가 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상처로 너덜너덜해질 뿐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누가 비판하든 시비를 걸든 상관없도록 아예 보지 않습니다. 물론 제 글에 대한 칭찬도 볼 수 없다는 단점도 있지만, 부정적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정도의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아예 보지 않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상실의 시대’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댓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인상 깊은 대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 문화면에 내 소설이나 인격을 까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면에 성폭행범이나 뭐 그런 범죄자로 실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자신을 다듬어야 할까 싶었습니다. 남으로부터의 부정적인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방향을 바라보는 힘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적합합니다.
지금이야 피의 순교가 없습니다. 누가 성당에 나간다고 목 자르겠다고 덤비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유혹에 넘어가, 주님의 뜻을 어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자기 위안을 하면서 말이지요. 남들처럼 살지 않으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삶이 현대의 배교자 모습은 아닐까요?
하느님과 하느님의 원수들 마음에 다 드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 둘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서, 세상 안에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이들이 하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지만, 이 지혜가 별것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 아닌 하느님을 따르는 것,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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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에브라함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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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도 희망을...
정신의학에서는 프로이트에서 비롯했다고 말하는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anatos)’의 이론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삶에 대한 본능, 즉 살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타나토스는 자기를 파괴해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 즉 죽음을 향한 본능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는 이 두 가지 욕망이 혼재하면서 살아가게 하지요.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에게는 살려는 의지도 아주 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과 같은 절망 안에서도 삶이라는 희망을 찾을 수가 있는 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더 크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나온 고통과 시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순간이 영원할 것 같지만 절대로 영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안에 내재한 희망이라는 삶에 대한 본능이 절망에서 벗어나 살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이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그래서 그 희망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나아감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을 바라보는 것, 연약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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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이영근 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양주 올리베따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아니, 제자들은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 당하는 또 다른 이유를 “당신 이름 때문”(15,21)임과 “세상이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모든 미움과 박해가 반드시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마치, 배들이 항구에 안전하고 평화롭게 매어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험한 바다로 나아가 모진 풍파와 싸워가며 항해하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제자들은 교회 안에 안주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고기잡이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과 미움은 제거해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신앙을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을 없애달라고, 악을 제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 의탁하고 믿음의 순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혹과 악이 우리의 영적 싸움의 공간이듯, 세상의 미움과 박해는 오히려 우리 사명의 실현을 위한 어장이 됩니다. 사실, 고난이 닥친 가장 위기의 순간이 바로 가장 적절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기만 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께로 향하기만 하면, 그 어떤 고난의 순간도 바로 은총의 순간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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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부활 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큰 사랑으로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극복해야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움과 영원함을 줄 것입니다. 세상을 회피할 수 없기에 끝까지 노력해야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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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부활 제5주간 토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우리 신앙인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자리를 미움과 박해로 소개합니다. 미움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 하나이고, 박해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일깨웁니다.
대개 세상은 고통이나 미움, 또는 환난과 다툼을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신앙인 가운데 더러는 웃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지요. 슬프지 않고 기쁘게 살아야겠지요.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 뒤에는 그만큼 슬프고 힘든 삶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박해를 즐기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고통과 박해를 기꺼이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할 줄 아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바꾸어 버립니다.
특히 고통의 문제와 배고픔의 문제 등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고통과 박해의 자리에 하나가 되는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사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배부름이 누군가에게는 배고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의 웃음이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눈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 가난과 불행 등의 부정적 상황은 서로서로 챙겨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 행태의 결과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루를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비난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이루시는 친교와 신앙인의 일치로 세상의 비난을 이겨 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어느 자리에서 하나이고 싶습니까?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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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부활 제5주간 토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이웃 본당 신부님이 ‘이태원 클래스’라는 드라마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16부작 드라마였습니다. 처음 보다가 신부님께 결말을 물어보니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결말을 알고 보면 긴장감도 떨어지고, 흥미가 떨어져서 재미없을 거라고 합니다. 신부님 말이 맞았습니다. 결과를 모르고 보니 긴장감이 생기고,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돈을 목적으로 사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원칙과 신념을 가지고, 비록 넘어질지라도, 손해를 볼지라도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사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말을 어떨까요? 원칙과 소신을 지킨 사람,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영어 표현 중에 “Business as usual"이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지구화, 도시화, 금용 자본주의, 생태계 파괴’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질과 자본은 영원히 우리를 풍요롭게 해 줄 것 같았습니다. 마스크와 휴지가 모자라는 것은 지구화된 시스템에서 물류의 이동이 멈췄기 때문입니다. 세계인구의 절반이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교육, 문화, 예술, 의료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삶은 편안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어렵게 합니다. 금융 자본주의는 혈관이 되어 경제가 돌아가게 했지만, 지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는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드라마가 아니라서 결과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법시간에 단순미래와 의지미래를 배웠습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올 겁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코로나19로 봄에는 집에 머물렀는데 코로나19가 끝난 여름에는 피정을 간다면 나의 의지가 담긴 미래입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에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이익과 성장의 패러다임도 좋겠지만 연대와 나눔의 패러다임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의 삶도 좋지만 농촌과 산촌 그리고 어촌에서의 삶으로의 전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격과 성능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좋겠지만 의미와 사랑으로 가치가 정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구에 잠시 거주하는 손님이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도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계명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뜻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랐습니다. 오늘의 입당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네.” 바오로 일행은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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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참 아름다운 삶의 캘리그래퍼, 예술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아침은/늘 새롭다
나도 늘 새롭다”-
어제 수없이 되뇌이며 기뻐했던 아주 짧은 자작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침은 늘 새롭습니다. 믿는 우리도 늘 새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가슴 설레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이래야 늘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어제 본 기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깊은 생각과 더불어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손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시대다. 그러나 거꾸로 손글씨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캘리그래피’ 열풍이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 예술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져져 있다.
아름답다는 그리스어 ‘칼로스(callos)’와 그리다는 의미의 ‘그라페(graphe)’가 합쳐진 말이다. 아름답게 쓰고 그린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글씨도 시만큼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인의 바람이 빚어낸 경지랄까. 영어로는 서예를 아예 캘리그래피라고 번역한다. 따지고 보면 옛사람들은 캘리그래퍼(calligrapher)가 아니었던가.”
여기서 연상된 말마디가 ‘삶의 캘리그래피’, ‘삶의 캘리그래퍼’입니다. ‘내 삶을 시처럼, 글씨처럼, 그림처럼, 아름답게 쓰고 그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또는 조각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인생 마치는 날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글씨를, 그림을, 조각을 주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평생 과정의 과제가 내 삶의 캘리그래피입니다.
제 주변에는 ‘삶의 캘리그래퍼’가 되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제 스승의 날에 고운 꽃 사진과 더불어 편지글을 보내준 분도 바로 여기에 속하는 분입니다. 주고 받은 편지글입니다.
-“신부님! 스승의 은혜를 혼자 조용히 불러 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Thank you, It’s your day!”
“감사합니다! 자매님! 사진의 꽃이 너무 고와 자매님을 보는 듯 반갑고 기쁩니다! 자매님의 고운 목소리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들을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은 갚는다 했습니다. 사랑 담긴 유머와 덕담德談이 삶의 캐리그래피 작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피에 성서 말씀 공부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한편의 편지글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분 또한 치열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퍼입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스승의 날을 축하드립니다. 평생을 살면서 스승 신부님 생각하며 모든 시간들이 사랑으로 피어납니다. 아침을 열며 감사와 사랑을 담아 문안 올립니다. 늘! 많이많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참 순수하고 아름다운 편지글이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의 시詩’라는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삶의 캐리그래퍼라 할 수 있고 예수님을 참 많이도 닮았던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과 오늘날의 많은 신자분들이 또한 그러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저절로 안락한 환경에서 이뤄지는 깊고 아름다운 삶의 캘리그래피가 아닙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다시 우리의 신원을 새로이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았다는 소명召命의식입니다. 세상에 대한 무시나 경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집착함이 없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초연한 이탈을 뜻합니다. 참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퍼, 예술가의 삶입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Life is beautiful).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퍼, 예술가가 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의무요 과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온갖 곤경 속에서 자신의 신원을,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의 사람’이 아닌 주님이 뽑은 ‘주님의 사람’임을 부단히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바로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퍼가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의 참으로 치열한 삶이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캐리그래퍼 바오로 사도인지요! 성령이 선교의 방향을 직접 인도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침내 성령은 인간 주도로 결정된 온갖 방향을 차단하고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가는 길만을 남겨 놓습니다. 참으로 성령따라 살 때 주님을 닮아 아름답게 완성되는 삶의 캐리그래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삶의 예술가, 캐리그래퍼가 되게 하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끝으로 성령께 바치는 기도 전반부를 나눕니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안의 긴장을 거룩한 쉼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소란을 성스러운 고요함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불안을 조용한 확신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두려움을 강한 믿음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쓰라림을 은총의 감미로움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냉담함을 사랑어인 온화함으로 바꾸소서
우리 안의 밤을 당신의 빛으로 바꾸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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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6,1-10
요한 15,18-21
교회! 세상의 박해와 미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멋진 정의를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박해와 미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요한 복음 15장 18~20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발끝만 바라보지 말고 멀리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며 큰 호흡을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고통과 시련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구태와 오랜 악습에 도전하는 선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본질이나 핵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낱낱이 고발하셨습니다.
그결과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사랑의 중심이 되신 반면 유다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박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와 미움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지닌 결핍과 과오, 수치스런 오점으로 인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유다왕 여호사팟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열렬한 기도를 하느님께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를 치러 온 저 큰 무리를 대적할 힘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신만 바라볼 뿐입니다.”(2역대기 20장 12절)
그러자 예언자 야하지엘이 일어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큰 무리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님이 너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기만 하여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내일 그들에게 맞서러 나가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2역대기 20장 15~17절)
오늘 교회에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투쟁을 하느님의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생각하지 않고 나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기를 쓸때, 그 투쟁은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시킬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교만이나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할 때, 그 투쟁은 나의 투쟁이 아니라 하느님의 투쟁이며 백전백승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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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6,1-10
요한 15,18-21
“지시를 거부하겠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지시는 무엇일까요?
경쟁하여 이겨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취직해야 하며, 넓은 아파트에 살고 높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신없이 사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은 곧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였듯이 당신의 제자들 또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했던 그 세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그 반대입니다.
움직이고 새로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이렇듯 세상에게 박해를 당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일입니다.
세상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저항세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저항에서 오는 고통을 받기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서 그 물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물살을 거슬러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이 남아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보시고 올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의 끝은 항상 되돌아 올 수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폭포를 지나면 바다로 나아가 미아가 되어버려
더 이상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음도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종국에 가게 될 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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