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이 자리한 청량산 바로 아래쪽에 나는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가장 바깥쪽 길로 올라가도 산을 만나고 아파트 가운데 길을 가로질러 가도 산을 만난다. 옆쪽 공원을 끼고 빙 돌아가도 산을 만난다. 대원사 절로 향하는 넓은 도로도 결국은 산으로 통한다. 개천을 건너 학교 뒷길을 따라 걸어가도 산을 만난다. 산이 곁에 산다.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오거나 손님이 올 때는 거실에서 산과 눈을 맞춘다. 베란다에 낮은 의자를 놓고 앉았거나 거실 소파에 앉았거나 산을 바라본다. 고요해진다. 매일 놀러 와서 한 시간쯤 수다를 떨다 가던 일광에 살았을 때 애논이 엄마처럼 친하다.
청량산은 놀라우리만치 거미줄처럼 섬세한 길을 지녔다. 30분 정도 오르막을 오르면 세로 방향으로 오르고 내림이 적은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아랫길, 조금 윗길, 가운데 길, 조금 더 윗길, 능선길 등이 있다. 천천히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산책길이다. 진달래가 지천이고 특별하게 눈에 띄는 둥치가 큰 나무들이 많다.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참 잘 자랐구나 나무를 만지면서 말해주게 된다. 계곡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산에 오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잎사귀와 나무 둥치와 숲 전체가 무대처럼 주인공처럼 빛이 난다. 함성이 절로 나온다.
내가 민감해서인지 숲에 들어가면 내 몸을 옥죄고 있던 질긴 끈들이 스르르 풀어지는 느낌이다.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가슴도 눈도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아아 좋아요 좋아요 숲속이 너무 좋아요. 저 푸른 빛깔 좀 봐요 어찌 저리 이쁠까? 산에 오를 때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반복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다. 아내의 기쁜 목소리를 들어서다. 남편도 시간이 날 때마다 동행해준다. 혼자 걷는 산길도 좋지만 울창한 청량산은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어 혼자서는 나서기가 어렵다. 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주니 마음에 덧칠이 없는 평화로 가득해진다.
오늘은 창곡천을 건너 학교 뒷길을 지나 빌라 마을을 지나 철쭉이 한창인 산길을 오른다. 처음에는 가팔라서 숨을 헐떡이지만 철쭉꽃이 있고 다음 주면 다투며 피어날 아카시아나무가 줄을 서서 반겨준다. 주변에 나무들이 없어 공간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무가 있다. 첫눈에 들어온다. 풍성한 가지를 맘껏 펼쳐 든 팥배나무다. 흰 꽃을 소담스럽게 피워내고 있다. 청춘이다. 너 참 잘 생겼구나. 사진을 찍어준다. 올려다보는 동안 나도 젊은이 기분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연한 초록빛을 자랑하는 참나무들이 즐비하다. 푸른빛 궁전이다. 얼굴을 들어 바라보면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초록이다. 아아! 좋아요 좋아. 먹을 거 챙겨와서 여기에서 한참 놀다 가면 좋겠네요. 돗자리를 가져와서 잠시 산림욕을 해도 좋겠네요. 참나무를 올려다보느라 내가 걸음이 늦어져도 그는 옆에 서서 기다려준다.
청량산 중간중간에는 의자들이 있다. 오늘은 큰 너럭바위가 앞쪽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 앞쪽이 제법 넓고 깨끗하다. 누군가 빗자루질을 해서 청소를 하는 모양이다. 바위 한쪽에 대빗자루가 기대어 있다. 산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치우는 사람도 있다. 산 뿐이랴. 세상은 그래서 청정하고 살만하다.
그가 주머니를 뒤져 초콜렛을 내게 준다. 산에 오를 때마다 그는 간식을 챙기고 나는 물을 챙긴다. 경사진 언덕을 오르고 편안한 숲길을 천천히 걷다가 먹는 초콜렛 맛은 초콜렛 맛 그 이상이다. 주변은 온통 나무와 초록 잎사귀들이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팔랑거리는 소리는 속삭임이다. 공기는 더없이 달다. 새들 노랫소리는 정갈하다. 이만한 카페를 본 적이 없다. 눈은 희미해지고 귀는 답답해지고 관절은 뻑뻑해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느릿느릿 욕심부리지 않고 오래오래 이 카페에 손님이 되고 싶다. 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