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으로 가기 전, 철원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고 싶었다.
도피안사. 작고 아담한 절이다. 은빛순례단 이름으로 기와불사. 이곳에서 강원애국단(철원애국단) 결성지 표지판을 보게되어 반갑기도 했다. 어제 철원지역의 독립운동을 들으며 궁금했던 차였는데 바로 이곳이었구나. 영령들이 인도해주셨나보다.
그리고 백마고지전적비지도 방문참배했다. 참배 후 전적지비 앞에서 박소산 선생이 평화의 날개짓을 추었는데, 안보관광버스에서 내린 분들(말씀하시는 내용이 보수적 견해를 가진 분들이었다.)도 멈춰서서 감상했다. 은빛순례단에 대해서 소개도 해드렸다. 엄청 여유롭게 시작한 아침이었는데, 연천으로 헐레벌떡 가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DMZ 인근지역 순례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오전에 지역을 이동하고 오후에 걷기순례, 밤에 연찬모임을 하고 나면 하루가 훌쩍 간다. 오늘은 DMZ 중서부지역인 연천순례. 말하자면,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건너온 것이다.
오늘 순례길은 숭의전에서 당포성을 거쳐 유엔군화장장시설까지다. 평화누리길 11코스(임진적벽길)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점심식사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순례단 본대와 안상수 선생님을 식당에 두고 헐레벌떡 숭의전으로 갔다. 연천지역 순례자들이 숭의전 입구에 있는 어수정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규봉신부님, 전곡성당 신부님, 박용석 선생님, 생태화가 이태수 선생님, 참게도서관 김나현 관장님. 숭의전 안내를 위해 최병수 선생님도 오셨다. 어제 철원순례 안내를 해주신 이우형 선생님도 오시고, 멀리 삼척에서 이선녀님이 조카와 함께 오셨다. 삼척순례 때 일이 있어 참여하지 못하여 한번이라도 함께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에 너무 고맙고 힘이 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마음 모아 외쳤다. "한반도 평화, 피어라!"
왕이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御水井).
안내문에 따르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물을 마신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당시 송악)과 철원(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쉬어가면 물을 마셨다고 한다.
숭의전 바로 앞에 있는 느티나무.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수령 550년.
뒤는 바로 낭떠러지.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숭의전(崇義殿). 처음에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 태조 왕건을 기리는 전각으로 세웠던 것인데(1397),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 일곱 왕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종 때(1452?)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의 네 왕과 열여섯 충신들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본래의 숭의전은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고, 현재 숭의전은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처음 태조 이성계는 왜 굳이 이곳을 택했을까. 먼저 집권초기에 개성에 있던 고려종묘를 없애고 조선종묘를 세우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수도인 개성에서 고려왕조의 흔적지우기와 같은 것. 고려왕조의 정신적 구심을 없앰으로서 고려부활세력의 규합을 막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고려태조 왕건이 기도하던 사찰인 앙암사가 있었고, 궁예를 만나러 오가던 개성과 철원의 중간지점으로 왕건이 자주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숭의전은 처음에 나라에서 관리를 했다. 고려왕가의 후예들은 핍박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았다. 세월이 흘러 문종때에 숨어살던 고려왕가의 후예(현종의 후손)를 찾아내 집과 땅과 노비, 그리고 숭의전부사의 직위를 주어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바로 그 숭의전부사 왕순례의 묘가 근처에 있다. 현재도 이 일대 마을에는 왕씨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말하자면, 조선왕조에서 고려왕조의 후예들을 달래고 민심을 안정화하고자 한 일종의 유화정책이자 포용정책인 것이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이곳에 모셔진 고려7왕(나중에는 4왕으로 축소됨)도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선발된 왕이었다.
이곳에는 숭의전 외에도 배신청(고려충신 16인의 위패를 모신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용품 보관소, 제관대기실), 전사청(典祀廳, 제기보관소, 이곳에서 제수(제물)를 준비한다.), 이안청(숭의전 보수나 청소시 위패 임시보관소) 등이 있다.
아래 사진은 앙암재(仰巖齋)다.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향촉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 준비을 하며 머무는 곳이다. 그래서 왼쪽 방문 위쪽으로 헌관실(獻官室)이란 목패가 붙어있다.
앙암재 방안의 벽에 놓여있는 개성 현릉의 사진. 관람객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고자 임시로 놓아둔 듯.
이 개성 현릉은 고려태조 왕건과 첫번째 부인 신혜왕후가 함께 묻인 묘이다.
바로 옆에 있는 불상을 닮은 동상 사진은 1993년 개성 현릉 외곽에서 출토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왕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개성,하면 개성공단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한반도의 수도였지.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 다가온다. 경기도에서 개성을 남북교류협력의 중심지로 주목하고 있다니 이런 활동이 한반도 평화를 가꾸어가는 길에도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고려태조어필. 앙암재의 바깥벽에 걸려있던 왕건의 글씨(물론 사본이다.)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 원나라 장수였던 유덕양에게 써준 이태백의 시. 고려말 정몽주가 원나라에 갔다가 유덕양의 후손에게 받아온 것인데, 정몽주는 태조의 친필을 모아 감상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소사(所思), 그리워한다는 것.
東林送客處 月出白遠啼 笑別廬山遠 何煩過虎溪
무사 두 사람이 주고 받았다는 시. 그들의 정서, 하필 왜 이 시였을까도 궁금해진다..
칼을 가지고 허공을 희롱하듯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글씨.
생각해보면 고려가 세워진 지 1100년이다. 전쟁이 낳는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침략자의 후예들이자 피난민의 후예들이다. 이제 그런 피들이 하나로 흘러야 할 때인가 보다.
장대한 포부를 갖고 한 나라를 호령하던 두 태조임금이여!
세월 지나고 나니, 너니 내니 다 부질없지요?
이제 이 후손들의 평화를 두 분의 업으로 삼아주세요!
숭의전 관람하고 나오면서 들었던 마음. 그런 영욕의 세월은 너희들의 일일 뿐이라는 듯, 숭의전 앞의 550살 느티나무는 말이없고, 그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도 말이 없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숭의전을 나와 당포성으로 가기 위해 잠두봉으로 오르는 길. 산세가 마치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란다. 쌀쌀하지만 산책하기 좋은 맑은 날씨. 가을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 앉았다.
당포성에서는 이우형 선생님께서 해설을 해주셨다.
어제 철원에서도 함께 했던 이우형 선생님은 사실 이 당포성 발굴을 했던 분으로 DMZ지역 역사연구자이다.
선생님의 상세한 설명이 있어서 당포성과 이 지역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우형 선생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때만 해도 일부는 경작지로, 나머지 부분은 마을에서 터부시하여 들어오지도 않던 숲이었다고 한다. 노자의 글귀에서 보던 '전쟁터에는 가시나무만 무성하다'는 그말과 똑같았다고.
발굴 시작할 때만 해도 백제가 처음 축조한 성으로 생각했는데, 발굴하고 보니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났다고 한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는 북쪽, 신라는 남쪽에 있었는데, 놀랍게도 남쪽에서 고구려성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고구려 땅이었다가 나중에 신라가 이곳으로 밀고 올라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 성의 축조양식을 그대로 놔두고 리모델링하여 신라양식이 바깥쪽에 보이고, 고려시대에 손을 본 흔적도 있다.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사용되었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100미터도 안되는 이 성벽(동벽)을 막음으로써 임진강을 건너는 세력을 여기서 다 통제할 수 있었다는 것.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당포나루도 여기서 다 조종하고, 유사시엔 마전현의 행정이나 주민들이 모두 당포성으로 들어와 방어를 했다고 한다. 이곳은 또한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그외에도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당인 성원사가 이 성벽 정상에 있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당포성 동벽에 올라 외치는 "한반도 평화, 피어라!"
침략과 방어의 전쟁터였지만, 누구나 화보가 되는 멋진 풍경이다. 이대로 남아주기를.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었다.
6·25 전쟁 때 서부전선 전투에서 사망한 유엔군 전사자들의 시신을 화장하려고 건립된 화장장 시설로 돌과 시멘트로 쌓은 10여m 높이의 굴뚝과 화장 구덩이로 구성된 유적지이다.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휴전에 대비하여 협상에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기 위해 휴전선 일대의 모든 곳이 피로 물들었다. 1952년 백마고지 전투 등이 그것이다. 이곳 연천도 베티고지전투 금굴산 전투 등 유엔군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 유엔군 화장장 시설은 1952년에 만들어졌고, 정전협정 직후까지 사용되었는데, 영국군이 관리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벽과 지붕은 훼손되었지만 화장장 굴뚝은 그대로 남아있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에서 박소산 선생의 <평화의 날개짓>.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와서 한줌의 재로 산화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한다.
대자유 대평화가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