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정문골, 토굴의 밤은 깊어가고 난로에 장작 타는 소리 침묵의 공간을 날으며 토닥 토다닥 정겹다 오늘은 귀한 손님 한분을 모셔왔다
헌출한 키에 미남인 시인 박인환(1926~1956) 선생, 선생님이 들어 서자 토굴안에 훤해진다 난로가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운다
선생님 고향은 강원도 인제시죠
그렇다네 강원도 심심산골 인제가 고향이지
옥시기막걸리를 준비했습니다 한잔 하시지요 잔을 채워드리며 가족관계를 묻는다
고맙네 초대해 주셔서 내 본관은 밀양(密陽)이지 아버지 함자는 광자선자(朴光善)고 어머님은 함숙형(咸淑亨),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 났다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했으나 1941년 자퇴,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지
선생은 나의 술잔을 채워주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 했지 그때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했다네 1948년 서점을 그만 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했지
아내가 참 고왔어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지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네
난로를 빠져 나온 불빛이 양은주전자에 부딛쳐 어둠을 바랜다 선생은 지난 과거사를 이야기 하면서 감회가 깊으신지 한참을 침묵하다 들고 있는 잔을 내려 놓고 다시 입을 연다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았다네 생활이 무척 어려웠지 그렇지만 그중에도 시를 쓰는 일은 내삶의 전부였고
유일한 희망이였다네 지금 생각해보니 가족에겐 할말이 없었어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이 나왔다네 그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나는 짧은 생을 마쳤지
선생은 숨을 고르고 술을 한잔 드리키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지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 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 되었다네
특히, 1949년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지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여 주목을 끌었지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나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어 특히 '목마와 숙녀'는 나의 대표작으로 회자되어 지금까지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 하고 있지 않는가
녜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인 생애와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안과 허무의 시대가 목마로 표출 되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보십니까
잘보셨네 불안의 시대에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울프의 출세작 '제이컵의 집(Jaycob'hous,1922)' 대표작 델러워이 부인 (Mrs Dalloway,1925)의영향을 받았지
그랬셨군요
그렇게 해서 선생님의 명작 '목마와 숙녀'가 세상에 태어 났군요
그렇다네
1956년 내가 죽기 1주일 전에 쓴 시 '세월이 가면' 이 세상에 알려졌지
선생님 저는 지금도 기분이 울적하면 그 노래를 부르곤 한답니다
노래가 만들어 진 그때도 널리 불러졌지 내가 세상을 떠난 20년이 된 1976년 내 아들 박세형(朴世馨)이가 목마와 숙녀를 간행 했다네
선생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난로의 불빛에 취기가 더해지고 분위기는 고조 되어 갔다 이야기의 소나타가 흐르고... 내가 노래를 부르자 선생님은 눈을 지긋이 감고 손가락 장단을 마추 셨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 / 사랑(세월)은 가도 옛날(과거)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무잎은 떨어지고/나무잎은 흙이 되고 나무잎이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눈동자 입술은 내안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선생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 였지
명동 목로주점에서 나의 시‘세월이 가면’ 이 노래로 만들어 졌다네
그랬셨군요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채워 드리자 선생은 잔을 비우시고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충무로 목로주점!
“주모, 술 좀 가져와.”
“또 외상?”
“갚으면 되잖아.”
“꽃 피기 전 죽으면 어떡하노?”
마담은 눈을 흘기면서 내 앞에 술 주전자를 새로 채워 식탁에 탁 놓는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명동 동방 살롱 문 앞을 내다보고 있었지
1956년 이른 봄, 서울 명동 한 복판 동방 살롱 맞는 편에 허름한 빈대떡 집, 깨진 유리창 너머로 ‘세월이 가면’ 노래가 애잔하게 흘러 나갔다네 상고머리의 나는 작사를, 이진섭이 작곡을 하고 임민섭이 노래를 불렀지
그때가 , 자네들이 즐겨 부르고 있는 명동의 샹송 ‘,세월이 가면’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네 그 곳은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빈대떡 집이였지 텁텁한 막걸리 잔이 식탁 위에 악보와 함께 어지러이 널려져 있고.....
애처로운 노래에 감흥을 이기지 못한 나는 막걸리를 들이 켰고 우렁찬 성량의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었지 길 가던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힐끗힐끗 우리를 보며 지나갔어요
나는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나서 한동안 흥분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지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살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어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는 임궁재 등과 함께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거리를 거닐며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었다네
이야기의 소나타는 이어져 가고
졸고 있는 난로불도 귀를 세우고 듣고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세월이 가면’이 완성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 생각은 다 나지 않지만 아마 당시 단성사에서 상영 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캐서리 헵번 주연'의 ‘여정’을 보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못 가고 술집에 앉아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이 돼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한테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나는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청했지 그날밤 나는 31세의 한많은 내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네
내가 흐흑거리며 눈물을 흠치자
선생님은 '울지마 사는게 다그런거야'하시고
나에게 술을 권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돈이 없어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눈을 감았다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 온 친구 송지영이가 내눈을 감겨 주었지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사주지 못 했다면서 김은성은 조니워커 한 병을 내 입에 주르륵 부어대며 울고 있었어
고맙게도 나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 후배들이 따라왔어 묘지까지 따라 온 친구 정영교가 담배를 태워주고 나의 관 위에 조니워카를 부어 주었지 모윤숙 시인이 나의 시를 낭송 하였고 친구인 조병화 시인이 조시를 읽었다네
인환이 너 가는 구나 / 대답이 없이 가는 구나 /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 멋있는 시를 썼었지....
그때 그친구들과 만나신가요
아믄 그렇고 말고 자주만나지
눈내리는 밤의 소나타는 이렇게 끝이나고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인묵, 고마워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걸세
그렇고 말고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의 움막을 방문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12.5일 정문골 토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