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79〉부처님 25년간 시봉한 아난이 왜?
불교계 최초의 아웃사이더
가섭과 대립, 발전적 측면이면 수긍
현세이익 위한 분열은 심판받을 일
소납은 초기불교 전공자는 아니지만, 강의에서나 법문 때 부처님 재세 시 제자들을 자주 거론한다.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난(Ananda) 존자를 특별히 좋아한다. 북방불교에서는 아난이 부처님 성불하는 해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과 동갑으로 본다. 그만큼 불교사에서는 아난이 부처님과 각별한 인연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모셨던 시자이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머물 때,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 늙어 몸은 갈수록 쇠하고 매우 힘들다. 나를 보필할 시자가 필요하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 시자 한 사람을 추천해 보아라.”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지만 그때마다 부처님께서 거절하셨다. 이에 목련이 부처님의 뜻을 간파하고, 아난에게 찾아가 시자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때 아난은 목련에게 세 가지 약조를 내걸었다.
“부처님 시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세존께서 세 가지 약조를 들어 주신다면, 부처님 시자가 되겠습니다. 먼저, 저는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새 옷이나 헌 옷을 입지 않고, 다음은 장자들이나 왕족들의 초청이 있어 공양 받는 경우 부처님을 따라가 함께 공양 받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때가 아니면 부처님을 뵙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 가지 청을 들어주신다면 시자가 되겠습니다.”
목련이 부처님께 찾아가 아난의 세 가지 요구를 전하자, 부처님께서 아난을 총명하고 지혜로운 비구라고 칭찬하셨다. 이렇게 하여 아난은 부처님께서 55세부터 열반할 때까지 시자를 살았던 것이다(중아함 33권, <시자경>).
그런데 아난존자를 거론할 때는 마음속에 뭔지 모를 안쓰러운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아난이 부처님 열반 후에는 가섭과 순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멸 후 처음 결집을 하기 위해 마가다국에서 가섭존자를 상수로 수백여 아라한이 모였다.
그런데 아난은 결집에 꼭 필요한 존재였는데도 제외되었다. 아난은 수다원과까지 증득한 상태였고, 아라한과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가섭의 질책과 권유로 아난은 열심히 정진하여 결집하는 그날 새벽녘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고, 1차 결집에 겨우 참여할 수 있었다.
아난은 부처님을 오랫동안 모시며 수많은 법문을 들어 ‘다문(多聞) 제일’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결집에서 존자는 경을 송출하였다. 여기서 발단해 북방불교 법당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실 경우에 좌측에는 선(禪)을 상징하는 가섭을 모시고, 우측에는 교(敎)를 상징하는 아난을 모신다.
또한 후대에 아난은 여인 출가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불교를 500년 단축시켰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하나를 더 들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아난과 형제인 제바달다(Tevadatta)가 악인의 대명사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은 4형제인데, 백반왕ㆍ곡반왕ㆍ감로반왕이다. 제바달다와 아난은 백반왕의 아들로 부처님과는 사촌간이다. 학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제바달다는 결코 악인이 아니라 철저한 두타행자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불멸 후 가섭을 위주로 한 주류파에서 아난은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점을 경전의 행간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두 존자의 대립이 단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승가의 1차 대립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법(法)이 발전하는 측면에서 승가의 분열이라면 수긍할만하다. 그러나 요 근래 여러 선거를 치루면서 진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들의 이익 집단을 위해 승가를 분열한다면 법경(法鏡)의 심판대에서 지탄받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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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중아함경] 33. 시자경 http://cafe.daum.net/daman1203/RugC/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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