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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다우베 드라이스마 Douwe Draaisma (1953~ )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의 심리학사 교수. 1995년 <기억의 은유 De metaforenmachine>를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심리학 협회가 주는 헤이만스 상을 수상하였다. 최근작인 이 책<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waarom her leven sneller gaat als je ouder wordt>(2001)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J.흐레스호프상, 2003 유레카 상, 양 한로 문학 논문상, 심리학협회상 등 과학과 문학 분야의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01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
기억은 자기만의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건 반드시 기억해야 돼, 지금 이 순간을 잊으면 안 돼. 이 모습, 이 느낌, 이 손길,”하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아니 겨우 이틀만 지나도 우리는 그 순간의 색깔, 냄새, 향기를 우리가 원했던 것만큼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없다. 체스 노테봄 Cees Nooteboom 은 <의식 Rituals>에서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억은 무언가를 보존해두지 말라는 우리의 명령도 잘 듣지 않는다. 내가 그걸 보지만 않았더라면, 경험하지만 않았더라면, 듣지만 않았더라면, 그걸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소용없다. 밤에 잠이 안 올 때 그 기억은 우리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떠오른다. 이 점에서도 기억은 개와 같다. 우리가 방금 던져버린 것을 주워들고 꼬리를 흔들며 돌아오니까.
1980년대부터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기억 중에서 개인적인 기억이 저장 되는 부분을 ‘자전적 기억 ’이라 부르고 있다.
자전적 기억은 어떤 일을 기억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마치 내 말을 도통 듣지 않는 비서가 내 삶을 메모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비서는 내가 차라리 잊고 싶어 하는 것들을 꼼꼼하게 메모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는 메모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괜히 부지런히 일하는 척한다.
자전적 기억은 수수께끼 같은 자기만의 법칙을 따른다. 서너 살이 되기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로운 일들은 왜 하나같이 도무지 잊히질 않는 걸까? 수치스러운 일들은 왜 몇 년이 지나도록 경찰의 범죄자 명부처럼 정확하게 기억 속에 기록되어 있는 걸까? 우울증과 불면증은 우리의 자전적 기억을 고뇌 덩어리로 바꿔놓는다. 모든 불쾌한 기억은 숨이 막힐 듯 한 기억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다른 불쾌한 기억들과 연결되어 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기억 때문에 깜짝 놀라곤 한다. 어떤 냄새 때문에 30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 생각나는 것, 일곱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거리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든 것처럼 보이는 것, 노인이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마흔 살 때보다 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도 아주 흔해 빠진 일들이 떠오르는 것.
심리학자들은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전적 기억’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개인적인 기억 속에 ‘개인적인 경험 말고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의문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심리학 교과서는 수십 가지 형태의 기억들을 분류해 놓고 있다. 그 중에는 단기 기억, 장기기억처럼 기억이 저장되는 기간을 기준으로 삼은 것도 있고, 서로 다른 형태의 기억들이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있다. 청각기억이나 영상기억이 그 예다. 그런가하면 어의적 기억, 운동 기억, 시각 기억 등 저장되는 정보의 종류가 기준이 된 것도 있다 이 모든 형태의 기억들은 자체적인 법칙과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의 발놀림을 기억하는 방식과 단어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처음으로 학교에 갔을 때의 일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기억하는 방식도 각각 다르다. 따라서 좀 더 생각해 보면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모든 종류의 기억 중에서 개인적인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에 대해 특별한 학술용어가 도입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상당히 다른 의문이 하나 더 있다. 왜 바로 그 시기에 자전적 기억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을까? 왜 그렇게 늦게야 시작된 걸까?
■런던과 베를린에서
자전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최초의 실험이 실시된 것은 1879년경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경(1822 ~ 1911)에 의해서였다. 골턴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연상 작용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펠멜가를 산책하면서 눈에 보이는 물체들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거기서 연상되는 것들을 동시에 적어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매우 다양한 연상 작용이 일어나며, 그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해보지 않은 일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골턴은 자신의 정신 작용을 관찰하다가 우연히 정신 행위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지켜보기가 힘들다는 사실과 맞닥뜨렸다. 골턴은 자신의 정신이 한동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그 속에서 두어 가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 생각들로 주의를 돌려 그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정확한 모양새를 기록했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레 멈춰 서서 뭔가를 찾는 것과 같았다. 이 산책을 마친 후 골턴은 좀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실험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그는 마차, 대수도원, 오후 등 자신에게 적합해 보이는 단어 75개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는 그 단어들을 종이에 적은 다음 그 종이들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책을 놓았다. 자신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야만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읽을 수 있도록. 이 실험에는 정해진 절차가 있었다. 골턴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단어를 읽고 자그마한 시간기록기 즉 스톱워치를 누른 다음 몇 가지 연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톱워치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연상한 것들과 그 연상이 떠오를 때까지 걸린 시간을 기록했다. 골턴은 곧 나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체계적이고 기계적으로 하게 되었다면서 정신을 완전히 차분하고 중립적인 상태로 유지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했다. 말하자면 정신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충분히 주의를 갖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단어를 읽었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사실은 같은 연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과거와 관련된 연상들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어린 시절과 연관된 연상 중 4분의 1이 네 번 떠올랐다. 다시 말해서 처음 연상이 떠오른 후 세 번이나 다시 반복되었다는 뜻이다.
그가 받은 교육과 훈련은 어른이 된 후의 일들과 관련된 영상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골턴은 자신이 여러 지역을 여행했고 탐험가로서 명성을 떨쳤는데도 자신의 연상이 대부분 영국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목록을 조사해보니, 자신이 태어나서 자랄 때의 사회적 배경이 그런 연상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랜시스 골턴은 이 연구로 자전적 기억이라는 심리학의 유망한 분야를 창시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회상 효과reminiscence effect를 최초로 증명했다. 사람들이 예순 살에 가까워지면 연상 작용이 젊은 시절을 향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바로 회상 효과다.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철학자였다. ~~~~골턴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러나 완전히 독자적으로, 그는 자기 기억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조사해보았다. 그는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들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는 두 개의 자음 사이에 모음 하나를 끼워 넣어 'nol' 'bif' 'par' 같은 음절들을 2300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음절들을 카드에 적었다. 그의 실험은 대개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에빙하우스는 자신의 시계를 탁자 위에 놓고 카드 몇 장을 임의로 골라낸 다음, 카드에 적힌 음절들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무 구술을 꿴 줄(구술 10개마다 검은 구술이 꿰어져 있었다)을 손가락 사이로 통과 시켰다. 그리고 음절들을 엄청난 속도로 (1초에 2~3개) 여러 번 암기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시간 간격은 20분, 엿새, 또는 한 달 등으로 다양했다)그는 똑같은 음절들을 이용해서 실험을 반복했다. 그는 처음 음절을 외울 때 필요한 반복 횟수에서 두 번째 외울 때 필요한 반복 횟수를 빼서 저축saving 이라는 지표를 만들었다. 단어를 다시 외울 때는 처음 외울 때보다 반복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얼마나 줄어들지는 중간의 시간 간격에 따라 달라졌다. 이빙하우스는 이 방법으로 기억의 정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에빙하우스는 처음 음절을 외웠을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더 많은 음절을 잊어버린다는 자신의 발견을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었다. 이 그래프는 처음 20분 동안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1시간 후에는 기울기가 약간 완만해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후에는 평평해졌다. 이것이 에빙하우스의 유명한 ‘망각곡선’이다. 그가 발견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음절의 숫자가 늘어나면 음절을 외우는데 필요한 반복횟수가 증가하지만, 그것을 비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빙하우스는 음절들을 7개까지는 단 한 번에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음절이 12개가 되자 무려 열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음절이 16개일 때에는 반복횟수가 30회까지 치솟았다. 반복 횟수가 이처럼 불규칙하게 증가하는 현상은 현재 ‘ 에빙하우스의 법칙’으로 불리고 있다.
■ 잃어버린 영광
■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02 어둠 속의 섬광 : 최초의 기억들
우리 인생이 기억의 상실과 함께 끝나게 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기억의 상실과 함께 시작되었음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초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 두 살에서 네 살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기억은 서로 동떨어진 짧은 이미지들이다. 그 전에 있었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무 기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과거는 아직 날짜에 따라 분화되지 않은, 아주 긴 ‘어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몇 년 만 지나면 이때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어둠 속의 섬광만이 남는다.
프로이트는 이런 기억상실을 ‘유아기 기억상실’이라고 불렀다. 그의 시기구분에서 유아기는 출생에서 예닐곱 살 때까지의 기간이었다.
사람의 발달과정에서 출생 후 최초의 몇 년이 중요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중에 그때의 기억을 거의 더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이 의문을 분명하게 제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 얼음 한 그릇
1895년에 프랑스의 심리학자 빅토르 앙리와 그의 아내 카트린은 최초의 기억에 대한 설문지를 유력한 국제적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것은 비교연구를 위해 제대로 된 자료를 모으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앙리 부부는 먼저 최초의 기억이 발생한 나이를 표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 응답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최초의 기억이 한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고 답변했다. 도표를 보니 생후 18개월 때부터 숫자가 급속히 증가했다. 정점은 두 번째 생일 이후였다. 최초의 기억 중 약 80%가 두 살에서 네 살 사이에 발생했지만,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심지어 일곱 살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기억을 갖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또한 최초의 기억과 두 번째나 세 번째 기억 사이에 상당히 긴 공백 기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 공백 기간이 1년이나 되기도 했다. 기억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순서와 방향이 분명한 이야기로 구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일곱 살 이후부터였다. 대대 최초의 기억은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건, 즉 우리가 X로 이사 갔을 때나 내가 Y에 이르렀을 때로 시작되었다.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거론한 감정은 행복감이나 의기양양한 기분이었고, 그 다음은 고통스러움과 통증이었다. 놀라움도 최초의 기억과 함께 언급되었으며, 혼자 남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마찬가지였다. 수치심, 후회, 호기심, 분노는 각각 한두 번씩 언급되었다. 기억의 대상이 된 사건의 종류를 중심으로 최초의 기억들을 분류한 결과, 동생의 출생이 커다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답자의 숫자가 두 번째로 많았던 항목은 죽음이었다. 또한 누군가의 방문도 최초의 기억에 질병이나 화재만큼 많이 기여하는 것 같다. 불을 환하게 밝히고 뭔가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던 기억도 언급되었다. 학교에 처음 간 날을 언급한 사람은 이보다 적었다.
앙리 부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초의 기억을 냄새나 소리가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외모를 기억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했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파티 장에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은 기억하지만 음악은 기억하지 못했다. 사고 후의 공포는 기억하면서도 비명소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모든 기억 중에서 소리와 관련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답변을 한 응답자는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여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이 소식은 원래 편지로 전달되었는데, 아버지가 그 편지를 아주 큰 소리로 읽어주면서 동생의 이름이 오르탕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때 일을 회상할 때마다 그녀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그 이름을 말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F.W 콜그로브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100명에 대해 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초의 기억이 주로 시각적 이미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중에 나이가 든 후에도 냄새와 관련된 기억이 드물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첫째, 많은 응답자들이 기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 “나는 바다 가장자리에 서 있고,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신다. 나는 마치 이 장면의 밖에 서 있는 사람처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병에 걸렸을 때 내 모습은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어렸을 때 내 모습이 보인다.” 앙리 부부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그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둘째, 최초의 기억이 모두 강렬한 감정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따라서 두 사람은 같은 시기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은 기억이 나는데, 어린아이에게 시각적으로 훨씬 더 충격적인 다른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설문에 응한 한 철학교수는 음식과 함께 얼음 한 그릇이 놓여 있는 식탁 앞에 서 있던 기억이 최초의 기억 중 하나라고 답변했다.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무렵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그가 감정적으로 매우 격한 상태였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장례식도, 부모님의 슬픔도, 오로지 얼음 그릇만 기억날 뿐이었다.
■ M과 N의 차이
스물네 살의 남자가 다음의 장면이 최초의 기억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여름 별장의 정원에서 숙모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숙모는 그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려 애쓰고 있다. 그는 M 과 N을 잘 구별하지 못해 숙모에게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묻는다. 숙모는 M에는 N보다 뭔가가 하나 더 있다는 것, 즉 세 번째 선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다. 네 살 때의 천진난만한 기억.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왜 이렇게 사소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 평범한 기억은 뭔가 중요한 일이 숨겨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장면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진 것은 이 기억이 “그가 어렸을 때 느꼈던 호기심 중 하나”를 상징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후였다. 그는 나중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알아보려고 애쓸 때, M 과 N의 차이를 알아보려고 애쓸 때처럼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도 비슷하다. 남자는 여자보다 뭔가를 하나 더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린 시절에 호기심을 느꼈던 비슷한 일이 기억났다.
너무나 평범하고 무의미해서 왜 그 기억이 굳이 살아남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정신분석을 받아보면, 이런 기억들이 다른 기억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단막 기억’인 것이다. 이런 기억들은 꿈과 마찬가지로 주로 시각적이다. 이들은 연상과정에 의해 억압된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프로이트가 자신이 갖고 있던<일상생활의 정신병리> 책갈피 사이사이에 끼워놓은 메모들 중에는 이런 연상의 기원에 관한 메모도 있다. 그는 “따라서 얼음은 사실 발기의 안티테제를 상징한다. 음경처럼 열기(흥분)속에서 딱딱해지는 대신 차가운 곳에서 딱딱해지는 물건, 성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정반대되는 개념들은 죽음이 사물을 뻣뻣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통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앙리 부부의 설문에 응답한 그 사람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차단막 기억으로 얼음을 제시한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외상을 남긴 기억들을 의식 바깥으로 밀어낸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프로이트 덕분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 이런 억압 메카니즘이 유아기 기억상실의 기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는 최초의 기억들 중에 부상, 사고, 상처, 화상, 물린 상처 등과 관련된 것이 아주 많다.
■최초의 기억의 언어
언어의 발달과 함께, 그리고 언어의 발달에 어느 정도 힘입어서, 다른 추상적인 능력들도 성숙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종류별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데 묶은 기억이 된다. 이런 발달과정은 자전적 기억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많은 기억들과 특정한 사건들이 정해진 틀에 맞게 변형되는 것이다. 세 살 생일에 처음으로 동물원에 놀러간 아이는 그때의 일을 한동안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몇 달 후에 조부모와 함께 다시 동물원에 놀러가고, 또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학교 소풍으로 동울원을 찾는다면, 이 세 기억이 하나로 융합되어 ‘동물원 놀러가기’에 관한 일반적인 인상으로 변할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틀이 형성되면서 기억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낸다. 이런 의미에서 자전적 기억은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후에나 똑같이 행동한다. 예를 들어, 브르타뉴에서 휴가를 보낸 기억이 어느새 작은 항수, 만, 절벽 위의 산책, 줄무늬 셔츠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속에 통합되어버리는 식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는 상황과 정해진 일상의 틀이 배경으로 자리 잡아야만 최초의 기억이 형성될 수 잇다는 점이다. 아이가 약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이런 여건이 갖춰지지 않는다.
아동기 기억상실은 흔히 신경학적인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취급되어왔다. 인간의 뇌, 특히 수많은 연구에서 기억과 관련해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증명된 해마는 유아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한 상태라서 아이의 경험을 도저히 기록해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이 실제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넬슨이 내놓은 이론의 전조가 되었다. 넬슨의 주장에 따르면, 기억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나중에 추상적인 구조 속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에 각각의 기억을 따로따로 떠올리기가 불가능해진다. 아동기 기억상실은 1980년대 심리학자들의 말처럼 뇌의 하드웨어 문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 베일과 입맞춤
어린 시절의 기억상실에 대한 이론들은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유아기 동안 기억이 전혀 저장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뇌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하지 못한다는 가설이 좋은 예다. 기억을 저장하려면 언어능력이 필요하다는 가설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그룹은 기억이 저장되기는 하는데 나중에 그 기억을 꺼내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기억을 꺼내볼 수 없게 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 들이 나와 있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억압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일정한 틀이 잇는 일반적인 개념들과 융합되거나 어른이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의 방식과 너무 달라서 나중에 그 어떤 연상 작용으로도 그 시절의 기억을 끌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주장했다. 아이가 어른의 무릎 높이에서 본 세상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신이 어렸을 때와 똑같이 보존되어 있는 방에 가 봐도 그 방은 이미 예전의 그 방이 아니다. 바로 눈앞에 의자 다리가 있고 탁자를 보면 상판 아래쪽만 보였던 방은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후 처음 몇 년 동안 겪었던 일들에 베일이 씌워지는 이유를 설명한 가장 최근의 이론은 아이의 자기의식 부족을 그 이유로 지목한다. 나 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을 개인적 기억으로 저장할 수 없다. 심리학자인 마크 호우와 메리 커리지는 어린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나로서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통찰력을 쌓아야만 자전적 기억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가 없는 기억이란 주인공이 없는 자서전처럼 터무니없다. 자기의식은 아이의 첫돌이 한참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이가 아주 어린 아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응을 보인다. 손을 뻗어 만져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뭐라고 재잘거리기도 한다. 첫돌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이들은 거울의 속성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고울 속의 존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18개월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거울 속에 비친 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알아차린다. 아이의 코에다 립스틱을 발라두었을 때 아이들이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의 코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아이들은 나를 배운지 몇 달 후에 너를 배우게 된다.
경험과 한 사람의 기억을 결합시켜주는 나가 존재해야만 자전적 기억이 생길 수 있다. 일단 이 기록이 시작되면, 이 기록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사람의 이야기가 계속 쌓일 것이다.
03 냄새와 기억
냄새와 기억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마르셀 프루스트와 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다. 냄새의 심리학에 관한 모든 논문에는 반드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차를 마시며 케이크 한 조각을 차에 적셔 먹다가 갑자기 그 냄새로 인해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화자가 그 맛을 알아보는 순간 다른 기억들도 떠오른다. 숙모의 집 뒤에 세워졌던 작은 집, 그 도시, 광장이 다시 그의 눈앞에 떠오른다. 그는 자신이 심부름을 하느라 달려갔던 거리, 날씨가 좋은 날 산책하던 길을 기억해낸다.
■신선한 톱밥
찰스 디킨스는 병에 상표를 붙이는데 사용된 풀의 냄새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몰려온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그를 지옥 같은 창고에 버려두었고, 가족들은 그곳에서 병을 만들었다.
신선한 톱밥 냄새를 맡으면 나는 항상 아버지가 제재소에서 일하던 시절로 되돌아 간다. 톱밥을 그냥 보았을 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신선한 톱밥 냄새는 언제나 그때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준다.
한 응답자는 어렸을 때 자신이 마구간에서 말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썼다. “스무 살 때 어느 날 시골길을 걷는데, 말똥을 실은 수레가 애 앞 약 100미터쯤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너무 감격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떠오른 기억들 중 일부는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한 여성은 라일락 냄새 때문에 열두 살 때부터 열여덟 살 때까지의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썼다. 가끔 불쾌한 일이 연상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상을 통해 기분 좋은 느낌을 받는다. 중립적인 연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상을 통해 과거의 감정을 즐겁게 다시 경험하기도 한다.
■냄새와 기억에 대한 실험
■후각의 구조
■끈질기게 남는 맛과 냄새
04 어제의 기록
누군가에게 수치스러웠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아주 제세하고 생생한 대답을 들을 수 잇을 것이다. 마치 그의 기억이 그 일을 특별히 기록해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욕은 우리 머릿속에 한번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마치 그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06 기억은 왜 거꾸로 돌리기가 안 되는가
처음에 X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Y라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사람들도 그 사건을 순서대로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은 왜 항상 앞으로만 진행되는 것일까?
브래들리는 기억이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뇌의 생물학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미래에 할 행동을 내다보면서 자신이 인지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들을 머릿속에 기록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잇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의 초점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의 회상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정신이 찍은 현실의 스냅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도 머릿속의 영상은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 수수께끼다.
07 푸네스와 셰라셰프스키의 절대적인 기억력
아르헨티나 단편작가이자 수필가이며 시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한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이레네오 푸네스라는 사람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을 번역하면 ‘어둠 밖으로’라는 뜻이 된다. 1884년 어느 날, 이 작품의 화자는 사촌과 함께 우루과이에서 폭풍에 휘말린다. 남풍이 회색의 거대한 폭풍 구름을 몰고 와 그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한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고, 화자의 사촌이 그를 향해 소리친다. “지금 몇 시지, 이레네오?”이레네오는 시계를 보거나 하늘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8시 4분전이에요, 베르나르도 후안 프란시스코 형.” 시계처럼 푸네스는 절대적인 시간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몇 년 후 다시 우르과이를 찾은 화자는 푸네스가 길들여지지 않은 말에서 떨어져 영원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말에서 떨어진 후 그는 놀라운 재능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주 작은 것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는 엄청난 관찰력과 절대적인 기억력, 푸네스는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그의 기억을 완벽한 기록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화자는 푸네스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가 푸네스의 방으로 가기 위해 타일이 깔린 안뜰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라틴어 문헌을 암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레네오 푸네스다. 불구가 된 그 소년은 라틴어를 전혀 모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그 문헌을 외워버렸다.
이 소년의 기억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1882년 4월 30일 오전에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딱 한 번 본 책의 대리석 무늬 장정과 그 구름을 기억 속에서 비교할 수 있었다. 그는 망아지의 헝클어진 갈기와 끊임없이 변하는 불꽃의 모양을 한 번 보고 기억할 수 있었으며, 상가에서 ㅂ마을 지새우는 동안 고인이 생전에 지었던 여러 가지 표정들을 기억해 내기도 했다. 그는 모든 숲에 있는 모든 나무의 모든 이파리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이파리를 인식하거나 상상했던 모든 순간까지도 기억했다.
그의 절대적인 기억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그는 사물과 풍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무른다. 그래서 밤이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침대를 창가로 옮기게 한다. 기억력 때문에 그는 한 순간도 편히 쉴 수 없다. 잠들기도 어렵다. 어둠침침한 방의 침대에 누워서 벽에 나있는 모든 금, 주위 모든 집들의 장식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잠을 자기 위해서 그는 낯선 검은 집을 상상하면서 어딜 봐도 어둡기만 한 그 집에 정신을 집중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던 그의 삶은 1889년에 끝을 맞았다.
푸네스의 이야기는 1942년에 <라 나시온>에 처음 발표되었다. 보르헤스는 1944년에 <픽션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을 내면서 이 작품을 포함시켰다.
■S.,기억의 예술가
셰라셰프스키의 이야기는 보르헤스가 쓴 문학적 이야기의 실험 판이다.
루리야의 실험은 셰라셰프스키가 자기 기억을 시험해달라며 루리야 앞에 나타난 날 시작되었다. 셰라셰프스키가 아무리 복잡한 브리핑에서도 필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본 그의 직장 상사가 그를 루리야에게 보낸 것이다. 셰라셰프스키 본인은 자신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브리핑 내용을 암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당시 루리야는 20대 초반이었다. 루리야는 나중에 자신의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주제, 즉 인간의 행동에서 감정이 수행하는 역할과 정신 분석학을 연결시켜 정신분석에 대한 논문을 썼으며 프로이트와 편지를 여러 통 주고 받았다. 소련이 정신분석학을 격하시키고<프라우다> 지가 정신분석학을 가리켜 생물학적이며 이념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을 때, 루리야도 바뀐 환경에 재빨리 적응했다.
며칠 후 새로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셰라셰프스키의 기억력이 정상적인 기억술의 법칙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기억범위(시험 대상자가 목록을 한 번 보고 실수없이 기억해 낼 수 있는 구성요소의 숫자)는 대부분의 경우 구성요소 일곱 개 정도다. 그런데 셰라셰프스키는 수 백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목록을 외울 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음절의 집합보다 의미가 있는 단어를 훨씬 더 쉽게 기억하지만, 셰라셰프스키는 아무 의미 없는 음절들을 거의 비슷한 그룹으로 나누어 모아놓은 긴 목록도 외울 수 있었다. 테스트를 하기 전이나 후에 비슷한 자료를 보면 대대 기억력이 떨어지지만, 셰라셰프스키는 그런 자료도 기억 속에서 정확하게 끄집어냈다. 마치 그가 절대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 속에 남은 흔적들이 금방 사라지거나 파편화되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완벽하게 보존되는 기억력 말이다.
루리야는 이 테스트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번 실시했다. 루리야가 단어나 숫자목록을 천천히 읽어보면 셰라셰프스키는 눈을 감거나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면서 목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몇 분 동안 정신을 집중한 다음에 루리야가 원하는 순서대로 그 목록을 암송했다. 루리야가 칠판에 50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표를 그리면, 셰라셰프스키는 표를 2~3분 동안 천천히 훑어본 후,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 표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것을 내면의 그림 이라고 불렀다. 그가 표의 내용을 위에서 아래로 암송할 때나, 아래에서 위로 암송할 때나, 대각선으로 암송할 때나 기억을 불러내는 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몇 달이나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별 어려움 없이 그 표를 기억해 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실험 당신의 상황, 즉 방 안의 모습, 루리야의 목소리, 칠판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 등을 기억해 내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린다는 것뿐이었다.
연구가 시작되고 처음 몇 년 동안 셰라셰프스키의 기억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테스트 결과를 보면 그의 기억에 시각적 편향성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모든 단어가 그의 기억 속에 확고하게 새겨진 영상을 자동적으로 끄집어냈다. 1936년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초록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초록색 꽃병이 나타난다.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빨간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파란색이라는 단어는 누군가가 창가에서 착은 파란색 깃발을 흔드는 모습을 의미한다. 심지어 숫자를 보았을 때도 그는 이미지를 떠올랐다. 숫자 1을 예로 들면, 자존심 강하고 체격 좋은 남자가 생각났다. 2는 괄괄한 여자, 3은 우울한 사람(이유는 나도 모른다), 6은 발이 부어 오른 남자, 7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 8은 아주 뚱뚱한 여자다. 자루 안에 자루가 들어 있는 꼴이니까, 87을 봤을 때는 뚱뚱한 여자와 콧수염을 빙빙 돌리는 남자가 생각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조사결과에서 발췌해온 글은 셰라셰프스키가 자신의 기억 위에 과학적인 공식(경우에는 가짜 방정식)을 덮어씌우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루리야가 셰라셰프스키에게 보여준 가짜 방정식>> 「나이만(N)이 나와서 지팡이로 땅바닥을 찔렀다(⁕). 그는 시선을 들어 루트 기호(√)를 닮은 키 큰 나무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나무가 시들어서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 내가 이 집 두채(d²[dom=집])를 지을 때도 저 나무가 저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는 다시 지팡이로 바닥을 찔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집들은 낡았어. 없애버려야겠다(X)[가위표를 쳐서 없애다], 집을 팔면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 올거야. 그가 원래 이 집에 투자한 돈은 85,000(85)이었다. 그때 내 눈에 집의 지붕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래쪽 거리에서는 어떤 남자가 테레민(러시아에서 발명된 전자악기, 이 책에는 원래 이름인 Termenvox)로 표기되어 있다-옮긴이)(vx)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런 이미지들은 그의 머릿속에 쉽게 떠올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통합된다. 루리야는 셰라셰프스키가 15년이 지난 1949년에도 이 공식을 고스란히 외우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루리야를 만난 지 몇 년 후에셰라셰프스키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문적인 기억술사가 되기로 했다. 그는 짬짬이 틈을 내어 루리야가 그의 기억술 변화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자발적인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전문적인 기억술, 즉 장소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장소 법은 그리스인들이 긴 연설문을 외울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 연설자는 머릿속에 어떤 집이나 거리를 그린 다음 그 장소를 걷는 상상을 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할 쩨들을 군데군데 상징적인 형태로 배치한다. 그리고 연설을 할 때 다시 그 거리를 걷는 상상을 함으로써 적절한 순간에 자신이 이야기할 주제를 기억해내는 것이다. 셰라셰프스키는 대개 모스코바의 마야코프스키 광장에서 출발해 고리키 가를 걷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거리에 있는 건물의 문간, 불이 환하게 밝혀진 상점 진열장, 창턱, 나지막한 담, 정원, 계단 등에 자신이 기억해야 할 주제를 놓았다. 지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소도시 토르쇼크에서 이 상상 속의 산책을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셰라셰프스키가 드물게 실수를 하는 경우 그 원인이 기억력의 잘못이 아니라 좔못된 관찰이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지만 기억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기억 속의 표를 읽을 때, 직접 표가 그려진 종이를 보고 읽는 사람이 저질렀을 법한 실수를 저질렀다. 3을 8로 보는 식의 실수 말이다. 장소법을 사용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셰라셰프스키는 어떤 이미지를 어두운 곳이나 부적절한 곳(예를 들면 하얀 벽에 달걀을 놓는 것)에 놓았다면 상상 속의 산책을 회상하면서 그 이미지를 못 보고 지나칠 수 잇다.
■공감각
그는 단어의 발음을 통해서도 맛과 색채를 떠올렸다.
식당에 갔을 때 그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맛을 기준으로 요리를 선택하곤 했다. 한 아이스크림 장수가 거친 목소리로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겠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그녀의 입에서 석탄과 검은 재가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가 떠올라서 식욕을 잃어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이 공감각 때문에 셰라셰프스키의 기억력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루리야는 셰라셰프스키의 경우 공감각이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의 기억력을 설명해주는 필수요소임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것을 기억하려고 할 때 그것이 처해 있던 맥락이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뭔가를 상기시키고 싶을 때 이런 특징을 이용한다. 우리가 그때 이러이러한 곳에 있었고, 거기 이러이러한 것도 있었잖아 기억나? 이때 주변 정황은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신호가 된다. 세라셰프스키는 무대에서 자신의 기억술을 선보일 때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와 단어들의 발음을 자동적으로 구체적인 이미지와 연결시켜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숫자와 물체들의 소리를 색채와 맛으로 변화시켜 기억 속에 저장했다. 이런 공감각적 연상 덕분에 그는 남들에게는 없는 연상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가 10~15년 전에 보았던 자료를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맛을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림을 이용해서 외운 단어 목록을 떠올릴 때 가끔 원래 단어의 동의어를 떠올리곤 한다. 원래 기억해야 하는 단어가 보트였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보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가 나중에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배라는 단어를 말한다. 그러나 셰라셰프스키는 절대 그런 실수를 ㅂ머할 염려가 없었다. 그에게 보트라는 단어는 시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배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감각적 연상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감각이 제어장치 기능을 한 것이다. 그의 놀라운 기억력 속에서 정상적인 심리학 법칙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는 몰라도, 그의 기억력이 무질서하게 헝클어져 있지는 않았다.
■완벽성의 병리학
그의 방향감각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가 한 번이라도 가본 길이라면 그의 머릿속에서 그 길의 지도가 펼쳐졌다.
셰라셰프스키는 시각적 연상능력 때문에 심지어 사람들의 정상적인 말조차 잘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는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른 소리와 생생한 이미지들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놓쳐버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결국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만 남았다.
어느 날 루리야와 나눈 대화가 좋은 예다. “신중하게 말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말의 무게를 잴까요? ‘무게를 잰다는 단어를 들으면 저울이 보입니다. 옛날 우리 가게에 있었던 것 같은 저울. 사람들이 한쪽에 빵을 올려놓고 다른쪽에 추를 올려놓은 저울. 화살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중간에서 멈춥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뭡니까? 말의 무게를 잰다니요!”
셰라셰프스키의 정신은 정신병의 경게에 서 잇었다. 그의 정신은 우리가 잠들 때 가끔 경험하는 의식상태와 비슷했을 것이다. 연상 속의 이미지들이 줄지어 빠르게 지나가고, 혼란스럽게 편집된 영화가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가는 것 같은 느낌.
셰라셰프스키와 푸네스는 모두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하고 멍한 사람으로 보였다. 기력을 소진시키는 기억력이라는 짐에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옆에서 보았던 개와 1분 후에 앞에서 본 개를 똑같은 단어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낸다. 셰라셰프스키의 경우에도 삶은 독립된 이미지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는 배열된 숫자들 속에서 아주 간단한 논리적 순서도 찾아내지 못했으며, 어떤 ㅂ머주에 들어맞는 단어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사상가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08 결함의 이점 : 사방 증후군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랭던 다운john langdon Down은 1887년 런던 의학협회에서 몇 번에 걸쳐 강연을 했다.
다운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그런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정신장애가 잇는 한 소년은 한 번밖에 읽지 않은 긴 구절을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 문장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음악을 기억하는 능력이 이상할 정도로 발달한 다운 증후군 환자들도 있었다.
달력 계산을 잘하는 사방들은 거의 모두 자폐아다.
■계산 천재와 달력 계산 능력자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인 카를 가우스는 어렸을 때 계산 천재였다.
그러나 뛰어난 계산능력이 항상 천재의 징표인 것은 아니다.
계산 천재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단어와 문장을 인식하듯이 숫자를 인식한다는 비유는 아주 유용하다.
■스티븐 월트셔의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
스티븐은 자폐증과 정신적 장애 외에 사방의 특징도 갖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재능 있는 화가가 몇 년이나 수련을 쌓은 뒤에나 보여줄 수 있는 솜씨로 도시와 건물들을 그릴 수 있었다. 특히 원근법을 표현하는 솜씨는 놀라울 정도다. BBC가 1987년에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 한 후 그의 그림을 모은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스티븐은 비례에 대한 선천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서 빠르고 정확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구도를 잡기위해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자도 없이, 소실점도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음악 사방
음악 사방들의 남녀비율은 5대 1로 남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음악사방들은 예외없이 절대음각을 갖고 있다. 그들의 재능은 아주 일찍 드러난다. 심지어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재능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 재능에 유전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음악 사방들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기타나 바이올린이나 오보에를 연주하는 경우는 없다. 오로지 피아노뿐이다. 거의 모든 음악 사방들은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의 원인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어머니가 임신중에 풍진에 걸리는 바람에 시력을 완전히 잃거나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산아로 태어나 산소 호흡기로 산소를 너무 많이 공급밭은 탓에 망막과 이어진 혈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시각장애가 생긴 사람도 있다. 모든 음악 사방들은 심한 언어 장애를 갖고 있으며, 말을 할 수 있더라도 언어능력의 발달이 늦다. 그들의 어휘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긴 문서나 대화 내용을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거의 모든 사방들은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라 한다.
그들은 추상적인 것, 비유 속담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적인 속도로 발달하는 유일한 능력은 형상 기억능력이다.
사방들은 한번 들은 음악을 음표 하나 틀리지 않고, 심지어 연주자의 실수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낸 일화들은 이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실패한 천재
음악사방들 중에는 시각장애인이 많지만 , 그렇지 않은 음악사방도 있다. 달력 계산능력자들 중 대다수는 자폐증 환자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잇다. 사방들의 능력은 거의 모두 선천적이지만 뇌막염 등 질병으로 인해 뇌가 손상돼서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현재로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방과 자폐증이 있는 달력 계산 능력자 사이의 숨겨진 접점을 설명해주는 이론이 없다.
모든 사방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방들은 트랙이 하나밖에 없는 자신들의 정신을 단 하나의 능력을 발달시키는데 쏟는다.
■ 뇌 한쪽의 지배
하버드 대학에서 신경학을 가르치는 갈라버다와 제쉰드는 여러 연구결과들 중 일부를 모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가설을 내놓았다. 임신 10주에서 18주 사이에 뇌의 형성이 가속화 된다. 이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뇌의 성장 속도는 폭발적이다. 2초마다 약 1만 개의 뉴런이 생겨나니까 말이다. 이 뉴런들은 모두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인다. 이때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지 못한 뉴런들 중 대부분은 태아가 태어나기 직전에 죽어버린다.
갈라버다와 제쉰드는 동물과 인간의 뇌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뇌의 좌반구가 우반구보다 약간 느리게 발달하기 때문에 태내에서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가정했다. 태내에서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요인중 하나로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이 호르몬은 태아의 고환이 형성되는 동안 몸속을 순환한다. 그런데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테스토스테론은 양이 많을 경우 대뇌피질의 성장을 방해한다. 뇌의 좌우반구 성장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좌반구가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을 더 심하게 받을 수 있다. 갈라버다와 제쉰드는 이런 경우 아직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지 않은 뉴런들이 좌반구에서 우반구로 옮겨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반구가 뇌를 지배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정신적 기능의 분포라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사방들과 똑같이 주로 좌반구가 관장하는 기능들에 장애가 나타날 것이다.
이 가설은 사방들 중에 여자보다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흥미로운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거의 모든 음악 사방들은 심한 언어장애를 갖고 있으며, 대게 의사소통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능이 손상되어 있다. 이는 다른 기관들의 발달을 차단하는 잠재적 수단들이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09 그랜드 마스터의 기억 : 톤 세이브란드스와의 대화
가장 어려운 것은 견실하게 게임을 하던 상대가 갑자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수를 놓을 때입니다. 그런 경우 뻔한 수로 응수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수를 놓았다가 잘못되는 게 아닐까, 이럴 리가 없어. 이런 생각이 계속 들죠. 자기가 실수를 저지를까봐 무척 겁을 내는 겁니다. 상대가 그런 수를 놓는 데에는 틀림없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상대방의 수가 실수라는 걸 확인하려고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보죠.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말을 움직이는 최고의 실력자와 시합을 하는 편이 내게도 가장 이로운 겁니다.
10. 외상과 기억 : 템야뉴크의 사례
■ 트레블링카
11. 리하르트 바그너와 안나 바그너 : 45년의 결혼생활
12. 우리가 몰고 다니는 달걀형 거울 속에서 : 데자뷰 현상에 대해
데자뷰 현상은 거의 언제나 순간적으로 스치듯 지나가버린다.
■전에도 이랬었오?
영국의 의사 A.L. 위건은 1844년에 데자뷰 현상을 ‘선재의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첫 번째 가설은 데자뷰 현상을 전생의 경험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 간 도시에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길모퉁이를 돌았더니 갑자기 낯익은 집이 나타난다. 그 집의 내부를 그 사람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생에 이 집에서 살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식의 설명이 맞는다면, 우리 기억 속에는 전생의 기억이 잠재되어 있는 셈이다.
■꿈속의 이미지
월터 스콧이 암시한 것처럼, 우리 머릿속에는 꿈에 대한 기억들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우리 의식이 접근할 수 없지만, 우리가 꿈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 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 우리 머릿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들이 매일 밤 꿈을 꾼다면,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설 리가 <환상>(1881)에서 쓴 것처럼 그 꿈들 중 일부가 조만간 표면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꿈과 상당히 흡사한 경험을 하는 순간, 꿈속의 모습들이 활성화되어 왠지 낮 익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꿈속의 이미지와 현실이 한동안 함께 존재하게 된다.
■ 이중 이미지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잇는 것은 사실 두 개의 뇌이다.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독립적인 두 개의 기관인 것이다. 비록 두 개의 뇌 중 한쪽이 전체를 지배하고 나머지 한쪽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이 두 개의 뇌는 각각 독자적인 의식, 독자적인 생각, 인식, 감정을 갖고 있다. 뇌의 아래쪽에서 두 반구를 이어주는 뇌량은 다리라기보다는 장벽에 가깝다. 신경학 문헌에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뇌의 반쪽을 모두 잃어버렸는데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사례가 수십 건이나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두 개의 반구중 하나만 있어도 정신능력이 유지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데자뷰와 탈 개인화
■데자뷰, 정신분열, 간질
특정한 형태의 정신분열증에서는 데자뷰 현상이 만성적인 특징으로 여겨질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환자의 망상 ㅅ고에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에 환자는 자신이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거나 같은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참으로 기묘한 현상이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도플갱어가 되어 자신이 경험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을 어딘가 다른 곳이나 과거에 살았던 또 다른 인생의 복제품으로 해석해버리니 말이다. 평범한 데자뷰 현상과 달리 이 정신병적인 변형은 천천히 시작되지만, 일단 시작되면 쫓아버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정신분열증의 증상으로서 데자뷰는 환자의 시간감각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평범한 데자뷰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끼지만 곧 정상을 되찾는다. 전에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 마치 전에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현실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데자뷰 현상이 존재한다.
이런 데자뷰 현상은 간질과 관련되어 있는데, 19세기 말에 영국의 신경학자인 존 휼링스 잭슨이 이현상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간혹 간질 발작의 전조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환자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입에 이상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거나 친숙한 물건들이 기괴한 모양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잇다.
13. 회상
■회상 효과
■지금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시 한 번 : 회상 효과
매코맥은 골턴의 방법을 이용해 노인들의 자전적 기억을 연구했다. 그는 평균 연령이 여든 살인 피 실험자들에게 ‘말’ ‘강’ ‘왕’ 등의 단어를 제시하고, 그 단어들로 인해 떠오르는 기억의 날짜를 기록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억이 삶의 첫 번째 4분기에 속했으며, 그보다 약간 적은 수의 기억이 두 번째 4분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4분기(대부분의 피 실험자들에게 이 시기는 마흔 살에서 예순 살 사이였다)에는 떠오르는 기억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했다. 수십 건의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발견되었다.
회상 효과는 매우 강렬한 현상이라서 극단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노인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인생이 소설 같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 소설 속에 깜짝 놀랄 만한 일과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포함 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침착한 주인공이 항상 그다운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그 소설의 일관성이 유지되었다고 말이다. 이 특징 다음에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일단 패턴이 확립된 다음에는 새로운 일들을 기억할 필요가 점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새로워 보이는 일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옛날에 몇 번이나 겪은 일이므로, 자신의 인생을 훌륭한 소설로 만들려면 이런 일들을 생략해버리는 편이 낫다.
남자 노인 30명에게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반드시 그 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 다섯 가지를 해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여러 가지 기억들을 수집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회상 효과가 뚜렷이 나타났다. 회상 혹이 마치 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들이 들려준 기억들 중에는 열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기억이 쉰 살에서 여든 살 사이의 기억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
■나는 고향에 있었지만, 길 잃은 영혼이었다.
반 텐 휠의 삶은 날이 갈수록 조용해졌다. 그에게 날아오는 소식이라고는 누가 죽었다는 얘기뿐이었다.
14.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모래시계가 오래된 것일수록, 모래가 빨리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지만, 모래시계의 시간은 계속 빨라진다. 이처럼 시계로서 부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모래시계 속에는 은유가 숨어 있다. 사람의 경우에도 해가 갈수록 시간이 점점 빨리 흘러서, 마침내 모래시계 아래쪽이 가득 차는 날이 온다. 사람에게도 점점 더 그 흔적이 남는다.
<모래시계의 책>은 1954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에른스트 윙거는 예순이 다 된 나이였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점점 빨리 흐르기 때문에 한 해 한 해가 자꾸 줄어든다. 마흔 살, 쉰 살이 생일이 지나면, 열 다섯 살이나 스무 살 때에 비해 1년의 길이가 훌쩍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빨라진느 것처럼 보이는 이 신비한 현상 속에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에<심리학의 원칙>에서 언급했던 두 번째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한 시간과 하루의 길이가 옛날과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1년이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시간이 빨라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보다는 이 현상을 표현한 은유가 더 많다. 헤리트 크롤은<프리슬란트 사람은 울지 않는다>에서 시간은 손가락에 감기는 작은 사슬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 사슬이 감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숫자로만 제시된 해답들도 그리 만족스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자네는 1877년에 사람의 인생 중 어떤 기간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 인생의 길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열 살짜리 아니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쉰 살의 남자는 50분의 1로 느낀다는 얘기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법칙이 시간이 빨라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 현상 자체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 했다. 그의 생각이 옳았다. 그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단조로운 기억,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회상의 단순화. 어렸을 때 사람들은 항상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불안감은 생생하고, 기억은 강렬하다. 그때에 대한 우리의 기억 속에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아주 재미있는 여행을 했을 때의 기억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여러 가지 일들이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런 경험들 중 일부가 자동적인 일상으로 변해 사람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하루 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알맹이 없이 기억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서 한 해의 기억이 점점 공허해져서 붕괴해버린다.”
윌리엄 제임스는 기억이 시간감각의 핵심을 차지한다고 보았다. 심리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우리의 기억을 반주 삼아 우리 내부의 시게에 맞춰 똑딱거리며 사라져간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 시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시간에 대한 온갖 환상들 중 일부다. 어떤 환상들은 몇 초나 몇 분만 차지하기도 하지만, 며칠이나 몇 년 또는 그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차지하는 환상도 있다. 그러나 시계나 달력 속에 표시된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이 환상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감각을 우리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연결시켜준다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장 마리 귀요(1854~1888)는 1885년에 이미 시간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심리적 요인들을 ㅅ러명한 바 있다. 결핵으로 고통 받으며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았던 그는 시간감각을 설명하는 훌륭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
■거리 밑에 거리가 또 묻혀 있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의 강도, 이 두 가지가 교체되는 속도, 느낌과 생각의 횟수, 우리가 거기에 쏟는 관심. 기억 속에 그것들을 저장하는데 드는 노력, 그것들이 불러내는 감정과 연상 등에 의해 좌우 된다. 그러나 시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인들이 거꾸로 시간을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는 망원경 같은 효과를 낸다. 망원경을 이용하면 사물을 자세히 볼 수 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귀요는 영국의 심리학자인 셜리에게서 이 비유를 빌려왔다. 셜리는 <환상>에서 납치나 살인처럼 충격적인 사건들이 실제보다 더 최근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고 말 한 바 있다. 범인이 형기를 다 마칠 때쯤이면, 그 사건이 그토록 오래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시간의 길이를 짐작할 때 사건의 강렬함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그 사건이 실제보다 더 최근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환상은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되면서 기억이 심리적인 현재 속으로 뚫고 들어와 사람이 마음대로 지워버릴 수 없게 된다. 귀요는 이런 기억이 시간과 함께 움직이면서 끝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썼다.
명료한 기억 때문에 그 사건이 가까운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반대방향으로도 작동한다. 다시 보고 싶은 뭔가를 기다릴 때, 우리는 그 물체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볼 수 잇기 때문에 그 물체를 다시 보게 될 때까지의 시간을 실제보다 짧게 인식한다. 잔뜩 긴장해서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보고 싶은 물건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가 그토록 고대했던 그 순간이 날 듯이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릴 때와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의 상황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를 평가할 때 기억이 이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현재의 경험 속에서 과거를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베수비오의 재 속에 묻힌 도시 아래에서 훨씬 더 오래된 도시들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훨씬 더 오래 전에 그곳에 묻힌 도시들의 유적이다. 그 도시의 주민들은 그 전의 도시를 뒤덮은 재위에 도시를 건설했다. 따라서 여러 층으로 쌓인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거리 밑에 거리가 또 묻혀 있다. 교차로 밑에는 또 다른 교차로가 뭍혀 있다. 잠자고 있는 도시 위에 살아 있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우리 뇌 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현재의 삶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삶을 덮어버리지만, 과거의 삶은 현재의 삶을 지탱해주는 숨은 기초 역할을 한다. 만약 우리가 내면의 자아 속으로 내려가 본다면, 유적들 사이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체가 시작점과 종점 사이에 있으면 거리가 더 길어 보이듯이, 놀랍고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단조로운 해보다 더 길어 보일 것이다. 귀요는 우리가 기억하는 사건들 속에서 선명하고 강렬하게 감지되는 차이점이 몇 개인가에 따라 어떤 시기의 길이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한 해가 그토록 길게 느껴지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한 해가 그토록 짧게 여겨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많은 일들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그 인상들이 생생하고 신선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그 시절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따라서 젊은이는 지난해를 회상할 때, 마치 여러 가지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노년은 고전적인 연극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배경과 같다. 한 장소에서 때로는 시간마저 변하지 않은 채, 극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움직임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나머지는 지워져 버린다. 때로는 아예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연극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번 주도 다음 주도, 이번 달도 다음 달도 모두 비슷해 봉니다. 단조로운 삶이 계속 이어진다.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융합된다. 상상 속에서 시간은 축약된다. 욕망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삶의 끝이 점점 다가오면 우리는 매년 이렇게 말한다. “한 해가 또 갔구나! 내가 지난 1년 동안 뭘했지? 뭘 느끼고, 뭘 보고, 뭘 이룩했지? 어떻게 365일이 겨우 두어 달처럼 느껴지는 거지?” 시간을 길게 늘이고 싶다면, 기회가 있을 때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채워야 한다. 신나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 한층 젊어지거나, 되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상상 속에 쌓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부인 이 모든 조각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설 것이고, 그것이 길게 이어진 시간을 보여줄 것이다.
■ 내적인 광학
귀요가 시간에 대해 자기만의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실험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였다.
“새로운 곳에 처음 갔을 때는 시간이 젊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런 현상은 6~8일 동안 계속된다. 그 후 사람이 그곳에 익숙해짐에 따라 시간이 점점 쪼그라드는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삶에 매달리는 사람, 아니 삶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 시간이 낙엽처럼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며 몸을 떨 것이다. 그러다가 4주째가 되면 아마 시간이 무서울 정도로 덧없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따라 시간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쪼그라들기도 하고 길게 늘어나기도 한다. 귀요에 따르면, 시간을 파악하려면 경험과 그 경험을 저장해두는 기억이 모두 필요하다. 시간은 모래시계 속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 생각은 모래시계의 좁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모래알에 해당한다. 우리의 인식과 생각은 바로 그 모래알들처럼 서로 융합 되는 대신 서로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렇게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모래,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 인식
우리의 상상력은 시간을 그림으로 인식할 때에만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공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앞과 뒤, 사이, 짧다, 길다 등은 모두 가상의 시간 축에 그려진 표식들이다.
미래를 나타내는 화살표는 항상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시간 왜곡현상이 여러 면에서 시각적인 환상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자극들 사이의 간격을 한 번 길게 늘였다가 다시 원래 간격으로 돌아오면, 원래 간격이 짧게 느껴지는 것이 좋은 예다.
윌리엄 제임스는 커다란 의문들을 품었다. 그는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집에 온 사람이 지난 일주일을 더 길게 느끼는 이유, 병석에 누워 잇던 한 달을 나중에 돌이켜보면 겨우 일주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망원경 효과
헤리트 얀 헤인을 납치해서 살해한 페르디 E. 가 가석방 됐을 때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 사람 형기가 벌써 끝났단 말이야? 그럼 그 납치 사건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야?”였다. 헤인의 납치 사건은 1987년 9월 9일에 일어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훨씬 더 최근의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대개 자기가 겪은 일들을 실제보다 더 최근의 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현상은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설리의 쌍안경 비유를 인용해 이 현상을 망원경 효과라고 부른다.
■회상효과
프랑스의 의사 테오딜 리보는 1881년에 이제는 고전이 된 책<기억의 질병>에서 사람들이 기억 속의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알아내려 할 때 발생 시기가 잘 알려져 있는 사건들을 표식으로 이용한다고 썼다. 하지만 우리가 이 표식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표식이 될 만한 사건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대개는 순전히 개인적인 사건들이 표식으로 이용되지만, 가족이나 국가 전체가 함께 경험한 사건이 이용되기도 한다.
리보는 “다채로운 삶을 산 사람일수록” 이런 사건들이 더 많다. 이 표식들은 우리가 지나온 길의 이정표나 푯말 역할을 하며,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해 여러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 우리가 이 사건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슘도 삶이 다채로울수록 기억의 표식이 많다는 리보의 무심한 말에서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스무살 때 일을 더 쉽게 기억해내는 현상, 즉 회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그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시간의 표식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슘도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현상과 이 이론을 연결시키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어떤 시기를 회고하면서 많은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기억을 별로 떠올릴수 없는 시기보다 그 시기가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중년 이후에는 시간의 표식이 줄어들기 때문에 기억 속에 빈틈이 생기면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 설명이 얼핏 보기에는 젊은 시절의 기억이 생생한 반면 나이를 먹은 후에는 매일 똑같이 되풀이 되는 단조로운 기억밖에 없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윌리엄 제임스의 설명과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슘은 기억의 시간적인 관계가 아주 중요한 요인일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삶의 다채로움이 사라지면 시간 표식들의 네트워크도 사라지고, 그 시기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생리적 시계 시간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생리적 요인들이 1930년대부터 밝혀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호글런드는 체온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빠르게 느껴질 수도 있고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병에 걸린 아내가 약을 가져온 그에게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타박을 한 것이 계기였다. 사실 그가 방을 비운 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호글런드는 아내에게 짐작으로 1분의 길이를 맞혀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1분으로 인식한 시간은 실제로는 37초에 불과했다. 아내는 열이 높을수록 1분을 더 길게 느끼는 것 같았다. 기억을 연구한 심리학자 매들리는 이와 반대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가 피 실험자들을 섭씨 4도의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게 했더니, 피 실험자들은 예상대로 물속에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인식했다.
아무런 조작도 가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체내의 생리적 작용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시계 역할을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미생물학자인 카렐은 1930년대에 세포 속에서 시계나 달력처럼 정확한 생리현상들을 여러 가지 찾아냈다. 예를 들어, 세포 표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속도는 세포의 연령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변화를 방정식으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방정식을 토대로 스무 살 청년의 상처가 마흔 살 중년의 상처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치유될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우리 몸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생리적 시계들이 똑딱거리고 있다. 호흡, 혈압, 맥박, 호르몬 방출, 세포분열, 수면, 신진대사, 체온, 이들은 모두 고유한 주기를 갖고 있으며, 우리 삶에 리듬과 박자를 부여해 준다. 그러나 이 현상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리 현상들을 ‘시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은유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 은유가 흥미로운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생체시계의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을까? 고장 난 생체시계를 다시 조정할 수 있을까? 모든 생리현상을 통제하며 주인 역할을 하는 시계가 있어서 그 시계의 표준시가 우리 몸을 다스리는 걸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생체시계의 속도는 빨라지는 걸까, 느려지는 걸까?
인체 내부의 주기들을 다스리는 시계장치를 잠깐 살펴보면, 신경계의 리듬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뉴런들은 초당 1000개의 속도로 신호를 발사한다. 뇌파 검사지에 기록된 뇌 활동주기는 초당 8~12주기로 이보다 덜 바쁘다. 체온과 혈압은 24시간 주기로 변하기 때문에 아주 느린 편이다. 1주기의 길이가 하루보다 더 긴 생리현상들 중에서는 월경주기가 가장 중요하다. 월경주기의 평균은 음력으로 한 달에 해당하는 29일이다. 1년 단위의 주기들은 체중증가와 면역체계 변화 등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빠른 주기적 변화와 가장 느린 주기적 변화 중간쯤에서 우리가 실제로 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인체 시계는 심장박동밖에 없다. 세심하게 조정된 여러 가지 체내 시계들이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통해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심장의 활동을 다스린다. 이런 천연시계들의 리듬을 이해한 덕분에[ 우리는 전기자극을 이용해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을 조절해주는 심장박동 조절장치를 설계할 수 있었다.
밤낮의 활동리듬은 사람을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고, 올빼미 족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침 형 인간의 체온은 아침 일찍 상승하기 시작해서 오후 4시쯤 절정에 이르렀다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의 체내 시계는 해가 진 뒤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올빼미 족들보다 몇 시간이나 앞 서 있다. 올빼미족의 체온은 아침 형 인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절정에 이른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체내 시계가 점점 아침을 향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침 형 인간과 올빼미족의 차이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행동도 굼뜨게 변한다. 그래서 기차역이나 우체국 창구에서 십대들이 굼뜬 노인들 때문에 안달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노인들의 수면주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시상하부 교차상핵의 세포가 줄어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래 크기가 1세제곱 밀리미터 에 불과한 SCN 은 약 8000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신경이 교차하는 지점 바로 위에 있다. SCN 은 체내의 모든 시계를 통제하는 주인 역할을 한다. 만약 SCN 에 문제가 생기면 체내의 모든 시게가 고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SCN은 빛의 통제를 받는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도파민 생산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SCN의 세포 감소와 도파민 부족으로 인해 시간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맹건은 이러한 문제들을 이용해서 노인들에게 3분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추정해보라고 한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실험 결과들을 보면, 아이들의 경우 시간을 정확하게 추정하는 능력이 나이와 함께 발달하며, 이 능력이 스무 살 때 절정에 이르렀다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이 되면 이 능력이 아주 어린아이들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맨건은 노인들이 항상 시간의 길이를 과대평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피실험자들을 연령별로 세 집단으로 나눠(19~24세, 45~50세, 60~70세)초를 세는 방식으로 3분의 길이를 추정해보라고 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집단은 3분의 길이를 매우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평균적으로 그들의 추정치는 실제 3분을 겨우 3초 초과할 뿐이었다. 중년 집단은 3분 16초를 3분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노인 집단에서는 이 오차가 40초까지 벌어졌다. 사람이 아주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시간이 더 빨리 흐른다는 사실은 두 번째 실험에서 드러났다. 맹건은 피 실험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뭔가를 분류하는 일을 맡긴 후 다시 3분의 길이를 추정해보라고 했다. 가장 어린 집단은 3분 46초를 3분으로 추정했다, 중년집단의 오차는 63초, 노인집단의 오차는 무려 106초였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은 거의 2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비로소 3분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들이 느리게 가는 시계로 변해버리는 것 같다. 시계바늘의 속도가 갑자기 들쭉날쭉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속도가 그냥 느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믿을 수 잇ㄴ느 것은 회상효과와 생리적 시계가 느려지는 현상이다. 지난 5년이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빨리 흘러갔다는 느낌이 드는지 알아보려 애쓰는 일흔살 노인들은 대개 마흔세 살에서 마흔 여덟 살 때까지의 5년, 또는 쉰여섯 살에서 예순한 살 때까지의 5년과 지난 5년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나 사춘기 때의 5년과 지난 5년을 비교하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극단과 극담을 비교하는 것이다. 갖가지 기억이 가득 차 있는 시절과 같은 일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시설을 비교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노인이 되면 생리적 시계들이 대부분 느려지기 때문에, 세상의 속도가 빨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절은 시절은 길고, 노년기는 짧다
15. 망각
모든 형태의 기억 중에서 가장 쉽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자전적 기억이다. 기억을 망가뜨리는 두 가지 형태의 기억상실의 경우 손상을 입기 전의 기억에 장애가 발생한다. 가장 심한 경우에는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도 한다. 자기가 방금 어디서 나왔는지, 무엇을 하던 중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자전적 기억이 정말로 일기 같은 것이라면, 전향적 기억상실은 아직 백지인 부분을 찢어내는 것이고, 퇴행성 기억상실은 일기장에 백지만 남겨놓는 것이다. 환자가 앓고 있는 기억상실증이 어떤 종류이든 차이는 없다. 두 가지 기억상실증 모두 환자의 시간에서 한쪽 방향을 차단해버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비유를 이용하자면 , 전에는 말에 올라타듯이 시간 위에 앉아 앞과 뒤를 모두 쉽게 바라볼 수 있던 사람이 이제는 과거나 미래를 향해 영원히 등을 돌리고 앉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치매의 경우처럼 두 가지 기억상실증을 모두 앓고 있는 불행한 환자는 양쪽 방향이 모두 막혀버린 시간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현재라는 한순간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과거를 회상할 수도, 미래를 전망할 수도 없다.
■기억과 망각
우리는 기억과 망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잊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잊은 것은 기억해 낼 수 없다.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망각이 시작되고, 망각이 끝나는 곳에서 기억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이분법의 어디쯤에 우리가 잊어버린 기억을 끼워넣을 수 있을까? 과거의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기억(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잊어버렸다)이 아니라 옛날에는 그 사건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인식 말이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뭔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벽에 걸어두었던 물건을 떼어 내어낸 뒤에 벽지의 색깔이 달라진 부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기억과 망각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히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때로 우리는 어떤 사실이 분명히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어떤 단어가 혀끝에 맴돌기만 하면서 끝내 생각나지 않을 때의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단어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암시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잊어버린 이름 하나를 떠올리려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우리의 의식 생태는 매우 독특하다. 의식 속에 분명히 빈틈이 잇는데, 그것은 단순한 빈틈이 아니다.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는 빈틈이다. 그 이름의 유령 같은 것이 그 빈틈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손짓해 부르기 때문에 금방 그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잇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그 단어를 기억해내지 못한 채 그냥 주저앉고 만다. 만약 틀린 이름이 떠오르는 경우, 이 독특한 빈틈은 즉시 그 이름을 부정하고 나선다. 틀린 이름은 그 빈틈과 맞지 않는다. 모든 빈틈에는 ㅂ나드시 거기에 딱 맞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빈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의 틈에는 알맹이가 없다. 내가 스폴딩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쓸 때, 내 의식은 보올스라는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쓸 때와 몹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빈틈은 아주 끈질기게 남아 집요하게 우리의 관심을 요구한다.
■잊어버린 망각
영국의 기억 연구자인 앨런 배들리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만든 ‘일일 기억 설문지Everyday Memory Questionnaire’를 한 번 작성해보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설문지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억력 때문에 문제를 겪는 상황 스물일곱 가지가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응답자는 9ㄷ나계의 척도중 하나를 골라 답해야 한다. 설문지에 묘사된 상황을 ‘지난 6개월 동안 전혀 겪은 적이 없다면 1을 선택하고 하루에 한 번 이상 겪는다면 9를 선택해하는 식이다. 특별한 기억장애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표본으로 해서 표준화한 이 설문지의 답변들을 살펴보면
⁕ 자신이 하려던 일을 실제로 했는지 기억해내야 하는 상황, ⁕ 어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는 상황, ⁕ 혀끝에 맴도는 단어를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 상황, ⁕ 방금 한 발을 잊어버리는 상황(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 어떤 일이 어제 일어났는지 지난주에 일어났는지 잊어버리는 상황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한 달에 한 두번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자기가 하겠다고 말한 일을 잊어버리고 하지 않는 상황, ⁕ 중요한 메시지를 깜빡 잊고 전해주지 않는 상황, ⁕ 평소에 물건을 보관해두던 장소를 잊어버리는 상황, ⁕ 자주 가 본적이 있는 건물 안에서 길을 잊어 버리는 상황, ⁕ 방금 한 일을 다시 하는 상황(칫솔이 왜 젖어 있지?)은 반년에 한 번 정도로 그보다 드물게 발생한다, ⁕ 전에 자주 갔던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 신문에서 전에 읽은 기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다시 읽기 시작하는 사람, 전날 자신이 한 일들 중 중요한 부분을 잊어버린 사람, ⁕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신문기사를 읽은 후 그 기사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 ⁕ 어떤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두 번 던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 사람들의 기억력에 대한 통계 결과에서 위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지난 6개월 동안 그런 일을 겪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정상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평균치는 오랫동안 위안을 제공해주지만, 나중에는 평균치와의 차이가 더욱 더 커다란 걱정거리가 된다.
배들리의 연구팀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들이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들은 대개 교통사고로 인해 뇌가 손상돼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조사들과 상관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기억력이 너무나 나빠진 나머지 자기 기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 새겨진 글
지금까지 밝혀진 현상들 중에서 기억과 망각 사이의 가장 이상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이라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의식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더라도 이 기억 속으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암묵적 기억이 우리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이 기억의 존재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 기억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아무리 심한 기억상실증에 걸리더라도 암묵적 기억은 고스란히 보존된다.
암묵적 기억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처음으로 눈치챈 것은 전향적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통해서였다. 그들에게 거울에 비친 글자처럼 좌우가 뒤바뀐 문서를 읽는 기술이 건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들은 매일 아침 학자들과 만나 그런 문서를 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터득한 기술은 기억했지만, 그 기술을 터득한 경위는 잊어버렸다. 원래 학자들은 암묵적 기억이 단순한 운동기능과 인지기능에만 한정되어 잇다고 생각했지만, 다니엘 색터의 연구팀은 문장을 이해하는 것처럼 더 고등한 정신적 기능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다.
한 실험에서 그들은 기억력이 심하게 손상된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갓이 찢어졌기 때문에 건초 더미가 중요했다’ 같은 문장들이었다. 이 문장 앞에 ‘낙하산의’라는 구절을 덧붙이기 전에는 이 문장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이 문장의 뜻은 낙하산이 찢어졌지만 그 낙하산에 타고 있던 사람이 다행히도 건초더미 위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색터의 연구팀은 기억장애를 앓고 잇는 환자들에게 이런 문장들과 해답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해답 없이 같은 문장들을 보여주었더니 그들은 이런 문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기억장애를 앓고 잇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장의 뜻을 아무 문제 없이 파악해 냈다. 이렇게 암호 같은 문장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미가 아주 논리적이고 분명하지 않나요? 몇 분 만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의식의 층 밑에 뭔가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의식적으로 기억을 끌어낼 수는 없지만 문장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무엇인가가.
■공허에 대한 공포
전향적 기억상실증 환자는 새로 경험하는 일들을 나중에 회상할 수 잇도록 머릿속에 저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데도 그의 미래는 사라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퇴행성 기억상실증 환자의 경우에는 과거가 완전히 지워져 버리거나, 과거의 기억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환자는 자신의 과거 중 일부가 사라져버렸음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환자가 의식을 회복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므로, 그러나 환자가 입은 손상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따라 회복 시간에 차이가 발생하므로, 환자가 언제 기억을 회복하게 될지는 불분명하다.
리보는 <기억의 질병>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먼저 돌아온다고 썼다. 오래된 기억부터 차차 회복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가 노인성 치매라고 명명한 현상으로 인해 환자가 기억을 잃어버릴 때는, 가장 최근의 기억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그러나 리보는 이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현재의 이론들 중에는 오래된 기억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버틸 수 잇는 것은 연상의 힘 덕분이라고 보는 이론들이 많다. 오래된 기억들이 우리 뇌에서 쉽게 교란되지 않는 부분에 저장된다는 가설도 나온 적이 있다. 환자가 손상을 입기 직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손상으로 인한 충격이 기억의 흔적들을 견고히 해주는 화학적 과정을 방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기억장애는 기억에 구멍과 빈틈을 만들어 놓는다.
기억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기억의 빈틈에 실제 기억이 아니라 자기가 꾸며낸 이야기들을 채워 넣는다.
문제가 생겼다는 첫 번째 징조는 대개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기억이 퇴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가 무엇을 할 생각이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때로는 망각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암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증세가 좀더 심각해지면 자신의 계획과 의도를 잊어버리고 꼭 해야 할 일을 제때에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흐트러질 뿐만 아니라, 뭔가가 퇴화하고 있음이 미세하게 드러난다. 환자들은 특히 증세가 나타나는 초기에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이제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처음에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다가 점점 완전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조리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을 아쉬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환자들에게는 결코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인격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환자와 가까운 사람들도 기억상실로 인한 공허감을 견디지 못한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가족과의 접촉이 특히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환자와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점점 사라져 가는데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단, 어휘력과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은 오랫동안 고스란히 보존되기 때문이다. 옛날에 함께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봐도 환자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환자는 상대의 말을 예전과 다름없이 잘 이해하지만, 그 대화를 통해 상대방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 대화에 공명하는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잇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공명통 위에 느슨하게 매어져 있는 기타 줄을 뜯는 것과 비슷하다.
기억 상실이 심하게 진행되어서 환자의 과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거의 사라져버렸을 때에도 환자의 의식은 자신이 가장 다급하게 해결하여야 하는 의문, 즉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이고 주위의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발버둥 친다. 남편이 죽은 후 계속 양로원에서 살았던 여든 세 살의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잇기 때문에 남편이 8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가 나거나 흥분할 일이 생기면 그녀의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16. 내 눈앞으로 인생이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구스타프 페히너Gustav Fechner(1801~1887)가 1836년에 죽음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이론을 발표했다. <내세에 관한 작은 책> 이라는 저서를 통해서였다. 이 책의 중간쯤 되는 부분에서 페히너는 사람이 지상에 사는 동안 느끼는 지성의 한계를 언급했다. 대개 우리의 의식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기억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정보에 한꺼번에 접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무언가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 우리가 기억의 창고 속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등물은 희미한 등불밖에 없다. 우리는 빛이 약해서 바로 우리 앞밖에 밝혀주지 못하는 그 등불을 들고 어두운 창고 속을 이방인처럼 헤매야 한다.
그러나 페히너는 우리가 죽고 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고 주장한다. 우리 눈이 감기면서 외부 세계와 차단되는 순간 우리에게 영원한 밤이 내릴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밝은 빛이 우리의 내면세계를 환히 비추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번 흘깃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모든 것, 우리가 기억 속에 저장해 둔 모든 것을 찾아낼 수 잇다. 페히너는 죽음 직전의 순간에 사람들이 이미 이런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 챈다고 말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 완전히 잃어 버린줄 알았던 기억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어둠 속으로 빠져들 사람들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들을 갑자기 발게 비춰주는 빛”을 만난다.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여러 가지 영상들이 마음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산에서 추락한 알베르트 하임
■천국으로 떨어진 사람들
하임 자신을 포함해서 그가 조사한 사람들의 증언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사고를 당한 순간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것 이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추락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무덤 위에 화환을 올려 놓아주어야 한다.
■의식을 잃는 순간
1929년에 하임과 같은 도시에 살던 오스카 피스터가 하임에게 추락 사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시 하임은 여든 살이었지만, 지질학 관련 서적들을 출판하느라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 추락사고가 일어난 것은 60년 전이었지만, 하임은 피스터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그 사고를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피스터(1873~1956)는 신학자였다. 그는 프로이트의 오랜 친구였으며, 목회활동에 정신분석학을 응용했다. 그 자신도 등산을 하다가 두 번이나 죽을 뻔 한 적이 잇었다. 두 번 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첫 번 째 사고 때는 마지막 순간에 나뭇가지를 붙들어 목숨을 건졌고, 두 번째 사고 때는 등산용 지팡이를 재빨리 얼음 속에 박아 넣었다. 그 역시 수많은 생각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은유
■파노라마 기억과 관련된 통계들
■이론들
윈슬로는 1860년대에 이미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죽음을 앞에 둔 노인들은 때로 자신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친구들과 하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17. 기억 속에서 : 정물이 있는 초상화 내 아버지를 위하여
[Review]
성서에 나오는 성군 다윗은 전장에 나가 싸우는 부하의 아내를 몰래 취하고 부하를 전장에서 죽게 했다. 그때 선지자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와서 가난한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염소 한 마리를 이리가 물어갔다는 비유로 다윗을 책망했다. 권력을 가진 왕이 소유한 수백 마리의 염소 중 한 마리와 가난한 자의 집에서 기르는 염소 한 마리의 가치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저자가 말하는 시간의 의미와 흡사하다. 저자는 사람마다 지니게 되는 기억에 대한 차이가 곧 시간에 대한 느낌을 달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기억에 대한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 유아기의 기억과 노년의 기억, 기억이 우리의 뇌에서 어떻게 자리 잡게 되는지 등 다양한 내용, 특히 노년기의 치매를 포함한 뇌의 질병, 손상 등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특이현상이라든가, 어떤 분야에 대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가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여러 연구 사례도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수많은 자료와 그것들 하나하나에 시간과 연관된 의미를 부여하고 작가가 의도하는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설득력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억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을 다룬 종래의 책들과는 구별된다.
저자는 시간을 모래시계의 병에 담긴 정해진 양의 모래로 비유하기도 했다. 오래된 시계일수록 모래가 흘러내리는 작은 구멍도 확장되고 또 모래 자체도 변질하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흐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간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젊은이와 노년의 기억은 분명 다르다. 기억 자체의 양보다는 기억을 느끼는 태도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기억에 대한 감정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늘 상 같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과 그것을 새롭게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비유로 본다면 낯선 길을 가는 것보다, 한번 경험이 있는 길은 쉽고 빠르게 느껴진다는 심리적 요인과 같다.
이처럼 시간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여유롭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급박하게 작용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이러한 독특함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간을 이루는 우리의 기억이 우리의 의지나 희망대로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시간은 자기만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표현했다.
잊고 싶은 기억 때문에 긴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있고 또 내일 일어날 기대감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 속에서 보내는 하루가 있고, 정신을 잃고 무의식 상황에서, 또, 이제는 모든 지난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또 방금 일어난 일조 차조 회상해낼 수 없는 치매에 걸린 사람에게 시간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노후가 되면 누구나 시간에 대해 아쉬움과 그 정체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에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조급하면 시간은 빠르게 느껴진다. 우리의 초점을 과거와 미래의 전 생애, 긴 시간에 맞추지 말고 오로지 현재의 시간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의 느낌은 비교에서 나타나는 차이다. 아이와 어른의 키가 다른 것처럼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할 상대가 없으면 오로지 현재뿐이고 비교하지 않으니 조급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이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Why life speeds up as you get older“라는 제목으로 2001년도에 출판되어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여러 상을 받았다.■ Go My BookReview[본문]
“기억은 자기만의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의 기억은 무언가를 보존해두지 말라는 우리의 명령도 잘 듣지 않는다. 내가 그걸 보지만 않았더라면, 경험하지만 않았더라면, 듣지만 않았더라면, 그걸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소용없다. 밤에 잠이 안 올 때 그 기억은 우리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떠오른다. 이 점에서도 기억은 개와 같다. 우리가 방금 던져버린 것을 주워들고 꼬리를 흔들며 돌아오니까.”
“누군가에게 수치스러웠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아주 제세하고 생생한 대답을 들을 수 잇을 것이다. 마치 그의 기억이 그 일을 특별히 기록해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욕은 우리 머릿속에 한번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마치 그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우리가 미래에 할 행동을 내다보면서 자신이 인지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들을 머릿속에 기록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잇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의 초점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의 회상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정신이 찍은 현실의 스냅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도 머릿속의 영상은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 수수께끼다. ”
“음악 사방들의 남녀비율은 5대 1로 남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음악사방들은 예외없이 절대음각을 갖고 있다. 그들의 재능은 아주 일찍 드러난다. 심지어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재능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 재능에 유전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음악사방들 중에는 시각장애인이 많지만 , 그렇지 않은 음악사방도 있다. 달력 계산능력자들 중 대다수는 자폐증 환자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방들의 능력은 거의 모두 선천적이지만 뇌막염 등 질병으로 인해 뇌가 손상돼서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거의 모든 음악 사방들은 심한 언어장애를 갖고 있으며, 대게 의사소통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능이 손상되어 있다. 이는 다른 기관들의 발달을 차단하는 잠재적 수단들이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노인들이 들려준 기억들 중에는 열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기억이 쉰 살에서 여든 살 사이의 기억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
“모래시계가 오래된 것일수록, 모래가 빨리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지만, 모래시계의 시간은 계속 빨라진다. 이처럼 시계로서 부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모래시계 속에는 은유가 숨어 있다. 사람의 경우에도 해가 갈수록 시간이 점점 빨리 흘러서, 마침내 모래시계 아래쪽이 가득 차는 날이 온다. 사람에게도 점점 더 그 흔적이 남는다.”
“열 살짜리 아니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쉰 살의 남자는 50분의 1로 느낀다는 얘기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법칙이 시간이 빨라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 현상 자체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 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시간의 길이를 짐작할 때 사건의 강렬함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그 사건이 실제보다 더 최근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 시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시간에 대한 온갖 환상들 중 일부다. 어떤 환상들은 몇 초나 몇 분만 차지하기도 하지만, 며칠이나 몇 년 또는 그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차지하는 환상도 있다.”
“우리의 상상력은 시간을 그림으로 인식할 때에만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공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앞과 뒤, 사이, 짧다, 길다 등은 모두 가상의 시간 축에 그려진 표식들이다.”
“미래를 나타내는 화살표는 항상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료한 기억 때문에 그 사건이 가까운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반대방향으로도 작동한다. 다시 보고 싶은 뭔가를 기다릴 때, 우리는 그 물체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물체를 다시 보게 될 때까지의 시간을 실제보다 짧게 인식한다. 잔뜩 긴장해서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보고 싶은 물건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가 그토록 고대했던 그 순간이 날 듯이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릴 때와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의 상황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시간을 길게 늘이고 싶다면, 기회가 있을 때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채워야 한다. 신나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 한층 젊어지거나, 되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상상 속에 쌓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부인 이 모든 조각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설 것이고, 그것이 길게 이어진 시간을 보여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