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 경주시내에있는 황룡사지와 주변모습
종 목 : 사적 제6호 명 칭 : 황룡사지(皇龍寺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수량/면적 : 380,087㎡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 대 : 신라
글 하나
황룡사 금당터와 목탑지의 주춧돌를 통한 황룡사지의 규모와 <황룡사>란 이름의 의미를 통해 신라인 가졌던 꿈의 의미를 캐내어 보면... 황룡사(黃龍寺) 황룡(黃龍)이 출현하다 -黃龍則皇帝也 (黃龍寺를 皇龍寺라고도 하니 황룡은 곧 황제를 말함이다.) - 발주처 : 신라국 조정 - 발주인 : 진흥왕 - 공사시작 : 553년 - 도목수 : 200명 동원 - 사찰넓이 : 25,000평 - 공사기간 : 82년(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 신라 수도 금성의 중심을 포근히 감싸 안고 왕경을 지키는 네 산이 있다.
동쪽-명활산(명활산성), 서쪽-선도산(선도산성), 남쪽-남산(남산신성), 북쪽-금강산 이 산들 안쪽으로 남천(南川), 서천(西川), 북천(北川)이 흐르고, 그 안에 신라의 정궁인 월성(지금의 반월성), 월지(지금의 안압지), 첨성대, 대형고분들, 분황사, 황룡사 등 신라사의 중요 역사가 모두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황룡사이다.
황룡사터 금당과 목탑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위의 네 산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게 된다.
황룡은 중심을 의미하는데, 황룡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의 건설이라 할 수 있다.
제24대 진흥왕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짖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왔으므로 절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황룡사모형도 황룡사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까지 4대에 걸쳐 83년간의 대역사로 신라의 최대의 국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국제 사회의 질서였던 불교의 수용은, 신라가 지역성을 벗어나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였으며, 화백 귀족들이 하늘에 대한 제사권을 극복할 수 있으며, 고등종교의 수용은 왕권 강화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게 한 23대 법흥왕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공인된 신라의 불교, 황룡의 출현과 황룡사의 창건은 불교를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의지였다. [장육존상(丈六尊像) - 이상세계 건설] 황룡사 장육존상 대석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의 발원으로 금동불을 조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인연이 없음을 알고 금동과 불상의 그림을 배에다 실어 띄워 보내며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 불상이 완성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배가 500여 년 바다 위를 떠 다니다가 신라에 와 닿고, 신라에서 불상이 완성이 된다.
그 불상이 바로 신라 삼보 중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이다. 장육이란 16자 높이로 약 5m 정도 높이를 말한다.
불상의 높이가 장육이 넘으면 대불(大佛)이라고 한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그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이 실패한 불상이 삼국 중 열세에 있던 신라에 의해 완성이 된다.
이는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토 사상과 삼국일통의 꿈을 나타낸 것이다. 불교 수용과 발전의 극단적인 방법은 신라 사회가 처한 대내외적인 어려움과 극복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진흥왕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이나 삼국간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장육존상과 구층목탑은, 진평왕 천사옥대(天使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三寶)이며, 신라 최고의 화가인 솔거가 금당에 늙은 소나무를 그려 놓았는데, 새들이 날아가다가 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고 하는 노송도가 있었다.
황룡사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에 의해 완성이 된 삼국시대 신라 정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9층목탑-삼국일통의 꿈] 황룡사9층목탑의 모형도 - 발주처 : 신라국 조정 - 발주인 : 선덕여왕 - 총책임자 : 이간 김용춘(伊干 金龍春), 제25대 진지왕의 아들 - 도목수 : 아비지(阿非知), 백제 기술자 - 공사기간 : 643∼645년 - 층수 : 9층 - 높이 : 225척 진흥왕 때 삼국간의 우위를 차지했던 신라가 제27대 선덕여왕 때 들어서, 백제 군사가 신라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오는 등 백제와의 전쟁에서 열세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자장법사의 청에 의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9층 목탑을 세운다.
신라 주위의 아홉 나라를 모두 항복시키겠다는 강력한 호국의지가 담긴 탑이었다. 목탑 조성의 총책임자는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이간 김용춘 이었으며, 기술 공사의 책임자는 백제 기술자 아비지였다.
9층목탑의 건립 의도를 알아차린 아비지는 공사를 중단하려고 했으나, 꿈속에서 신인이 내려와 탑을 완성하는 것을 보고,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226척(尺)으로 80m에 이르는 큰 탑이었으나, 고려시대 몽고의 4차 침입(1238)으로 당시 민족의 종교적 지주였던 황룡사가 불탈 때 구층목탑도 함께 불타버렸다. 거대한 탑을 말해 주듯 심초석과 넓은 목탑지
이후 다시 복원을 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옛날의 기상을 짐작하게 한다. [목탑의 모습은] 북한에 있는 목탑형식의 불일사 금동 9층탑(황룡사 9층 탑과 유사형으로 봄) 경주 남산(南山) 탑곡 마애조상군 바위 북면에 7·9층 마애탑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완전한 모습이며, 탑신부 지붕에는 층마다 풍경이 달려 있다.
마애탑의 모습에서 당시 황룡사 구층목탑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애탑 중 9층탑을 황룡사 9층목탑이라고 소개하는 책자가 있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른쪽 7층 마애탑의 모델이 된 탑도 언급이 되야 할 것인데, 신라의 탑 중에 7층탑은 기록에 없다. 고구려 탑 중에는 7층탑이 있다. [목탑은 왜 9층이었을까?] 80m 높이를 지금의 일반적인 건물로 환산하면 약 25층의 높이가 되는데, 목탑의 9층 지붕 용마루까지 높이는 63m 정도가 된다.
경주지역의 문화재 보호구역인 대릉원 주변에는 건축규제가 심한 곳이다.
이곳에 허가가 나는 건축은 '높이 7m 단층 기와집'이라는 조건이 있다. 7m 단층 기와집에 9를 곱하면 황룡사의 9층 지붕까지의 높이인 63m가 나온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조 에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조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천하가 와서 조공하며 나라의 복이 길이 편하리라.'해동 명현 안홍의 저서 [동도성립기]에는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임금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니 만일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재난을 막으리라.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제주도), 5층은 응유(鷹遊 중국 강소성 동해현 둥북쪽 섬),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契丹), 8층은 여진(女眞), 9층은 예맥(穢貊)이다.'
아홉 나라 중 일본과 중화, 탁라는 신라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나라였다.
선덕여왕 재위 시 신라에 가장 큰 위협은 백제국이었고, 아비지의 얘기에서도 그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데 목탑 9층에 해당하는 적국에는 백제가 빠져 있다. 구한(九韓)의 항복을 받는 다는 것은 실제 아홉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라 주변의 모든 나라로부터 항복을 받는 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목탑의 층수인 9 또한 가장 많다는 뜻이 될 것이다. [구층목탑 찬] 육신이 보호하여 서울을 진압하니 나는 듯한 처마에 단청도 휘황하다. 올라가 굽어보면 구한(九韓)만이 항복하랴 건곤(乾坤)이 모두 평정됨을 깨닫게 된다. <일연> 글 두울 달빛 기둥, 별빛 지붕, 은하수 찻물 터뿐이건만 이곳에 오면 옛 황룡사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세워보곤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앉은 채 보다 자연스레 주춧돌을 투박하게 쪼아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부처를 모시고 종을 울렸다.
서양 같았으면 부처나 신을 억지로라도 모셔오기 위해 돌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고 갖가지 장식을 덕지덕지 붙였을 것이지만, 부처와 신과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알았던 신라인들은 보다 자연에 가까운 건축물을 생각했던 것이리라. 돌을 쪼개다만 흔적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침돌로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돌도 그대로 모양으로 승화시켜 웅장함이 땅과 괴리되지 않았음이니, 과연 세상 누가 그런 과감하고도 자연친화적인 기법을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청마선생께서 맨 처음 공중에 매달 줄 아는 이를 사모하셨듯이 '아 - 누구일까? 이렇듯 과감하고도 파격적이며 이미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땅에서 황룡사를 솟아오르게 한 이는?' 바위덩어리 초석과 불상대좌에 굳이 천년 전의 건축물이 그대로 서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대한 달빛기둥을 세우고 별빛 지붕을 얹어 은하수를 끌어다가 차를 다릴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느끼는 각자의 감흥은 아마도 천차만별 일게다. 비슷한 감흥이야 있겠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황룡사지의 오묘함만큼 변화 무상한 느낌이란, 언어의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만다.
황룡사지의 진정한 정취는 영감과 상상력을 두루 지닌 각자에게 맡겨 두고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황룡사를 잠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황룡사의 창건과 소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하고 14년 후인 553년에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黃龍寺)라 하고, 이 후 17년만인 569년에 이 절을 완공했다.
황룡사 가람 배치도
또한 황(黃)은 황(皇)과 같고 또 이 절의 주지나 출입자 또한 황족이요, 당시 사정을 보더라도 왕의 권위가 필요했으니, 자연스레 황룡사(皇龍寺)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황룡사에는 신라 당시 삼보 가운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장육존상, 황룡사9층목탑)가 이곳에 있었으니 황룡사를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며 신라를 부처님의 인연이 깃든 땅 위의 불국토로 인식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 거찰 황룡사는 고려 고종 몽고군의 6차 침입 때(서기 1238년) 모두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 장육(丈六)] 장육이란 1장 6척의 높이를 말함이니, 일장은 10척이고 한 척은 약 30cm이므로 이 곳 불상의 높이는 대략 4m 80cm 이다.
석굴암 본존 높이가 3.42m(연화대를 포함하면 5.05m)이고 보면 이 곳 불상의 위용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황룡사 장육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의 조성에 관한 기록 또한 눈길을 끈다. 황룡사를 완성하고 얼마되지 않아 지금의 울주군 곡포 앞 바다에 큰 배 한 척이 닿았다. 이 배에는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阿育王]이 보낸 공문과 함께 황금 3만 푼과 구리 5만 7천근이 실려 있었다.
공문에는 '이 금과 구리로 석가삼존상을 모시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보내니 부디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고하면서 1체의 불상과 2체의 보살상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신라에서는 배가 닿은 근처 좋은 자리에 동축사(東竺寺)를 짓고 모형으로 보낸 3존을 봉안하였으며, 금과 구리는 서울로 가져와 장육존상을 만들었는데 불과 6개월도 걸리지 않아 금새 완성(진흥왕 35년, 서기 574)을 보아 황룡사에 모셨다 한다.
이듬해 이 불상에서는 눈물이 흘러 땅이 한자나 젖어, 임금의 승하를 미리 알았다고도 한다. 불상이 이루어진 뒤 동축사에 봉안했던 삼존불도 황룡사로 옮겨왔다 한다. 장륙존상에 관한 내용 가운데 단연 일연스님의 讚揭가 눈길을 끈다. 속세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 일세. [황룡사 9층목탑] 이 탑은 황룡사가 지어진 74년 후인 신라 제27대 선덕왕 12년(서기 636년)에 백제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건립에 착수한 10년 후인 645년에 완성되었고, 높이는 약 80m(상륜부 약15m, 탑신부 약 65m)의 대탑이였다.
이 후 고려 고종 25년(서기 1238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탑이 소실되기까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여섯차례 중수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 왕도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신라를 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당나라, 왜구,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이웃 아홉나라의 침략을 불력으로 막기 위함도 함께 한 탑이기도 하다.
이렇듯 웅장하고 중후하며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홀대받지 않았던 황룡사 9층목탑은 현재 64개의 초석과 1개의 심초석만 남겨둔 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자리할 뿐이다. 1974년 故 박정희 대통령이 황룡사 발굴현장을 방문하고 콘크리트로 황룡사 9층목탑을 복원하라는 지시가 있은지 몇 해 간이나 복원과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 대치하다 결국은 제반 문제로 후손에게 넘기기로 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된다.
행여 콘크리트로 80m(아파트 25층 높이 이상)의 탑을 복원했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단부는 모두 파헤쳐지고 지하 3층쯤 파서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이는 천부당 만부당 한 일 일뿐 아니라 신라의 한 부분을 상식 없이 지워버리는 것이었으리라.
지금 콘크리트 건물의 폐해를 보라!
석굴암을.
신라 북악 금강산을 막아 버티고 있는 여러 고층 아파트를.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가 오더라도 목조건물로 그 자리에서 5층 이상 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니, 이는 80m나 되는 건축물을 지하 없이 바로 지상에서 쌓아올린 당시 선조들의 기술과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따라가지 못함이다.
훗날 자랑스런 후손들이 해내주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황룡사 탑의 환란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근래에 와서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분개할 일이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이 곳 목탑터도 세밀하게 발굴되었다.
발굴이 있기 전인 1964년 이 곳 심초석 위로 민가의 담장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민가를 철거하면서 담장까지 철거를 해 도굴꾼들에게 먹이를 노출 시켜준 셈이 되었다. 도굴꾼들은 심초석 속에 마련된 사리장엄구를 보존하기 위해 올려놓은 10여톤이나 되는 방형대석을 자키를 이용해 틈을 내고 사리공 안에 간직되어 있던 사리장 엄구를 몽땅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2년이 지나서야 기적적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사리장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간략한 발굴 내용이 기록된 전돌과 동전 몇 개를 넣고 다시 심초석(무게 약 30톤)을 얹고 그 위에 방형대석을 얹어 놓았다.
도굴꾼은 윤사만(尹四萬)이란 사람을 비롯한 일당인데, 과거 국립경주박물관 수위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에 더욱 가증스럽다. [황룡사대종(皇龍寺大鐘)] 삼국유사에 '신라 경덕대왕 때(서기 754년) 황룡사 종을 만드니 길이가 1장 3촌이고 두께가 9촌이며 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이었다.'고 전한다.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이라 전하고 있고 보면 무려 4배가 넘는 큰 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몽고군이 동해를 이용해 가져가려다 동해바다 어디엔가 빠뜨렸다.', 감은사근처 마을사람들은 '큰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적에는 간혹 종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하고, 추령재를 넘어 감포 앞바다까지 흐르는 강 이름 또한 대종을 옮겨갔다 하여 '대종천'이라 부르고 있는 등 일관된 기록과 신빙성 있는 자료를 토대로, 얼마 전 황룡사대종을 탐사하기 위해 해군에서 감포 앞 바다 일대를 수색한 적이 있으나 종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어쨌거나 바람 많은 날이나 비가 내리는 날은 한번쯤 동해를 찾아 신라인이 남겼던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역사의 소리에 가슴을 힘껏 열어 젖혀둘 일이다.찾아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15분정도 소요.
보문방향으로 직진하여 두 번째 사거리에서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고, 국립경주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양쪽으로 논이 펼쳐진다. 다시 우회전하여 300m정도 가면 분황사가 나오고 분황사 주차장에 주차한다.
황룡사지는 주차장 뒤편으로 걸어들어가면 된다. 주변 유적지 박물관, 안압지, 반월성, 첨성대, 계림, 대릉원(천마총) 추가정보 경주 동남산 탑골마애조상군(부처바위) 의 동쪽면을 보면 큰 규모의 목탑 형태가 바위에 새겨져 있어 소실된 황룡사지 9층목탑을 상상할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미술공예 전시실에 가면 황룡사지 복원 모형도를 볼 수 있다. |
출처: 석굴암 원문보기 글쓴이: 조선통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