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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and the Real World
불교와 실재세계
For most of its history, the dharma has had little to offer in the domain of social action. But that’s OK.
실재 역사의 대부분에서 다르마는 사회적 활동의 영역에서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그래도 괜찮다.
By Donald S. Lopez Jr. | Illustrations Jonathon Rosen
SUMMER 2021 Tricycle
저자 도널드 로페즈 주니어: 일러스트 조너던 로젠:
트라이시클(미국 불교잡지)2021년 여름호
Over forty years ago, I set out for India to conduct my dissertation research at a Tibetan refugee monastery. Shortly after arriving, I was taken to meet the abbot. In my few days there, I had become concerned that many of the young monks—boys who seemed to be between 8 and 16—had large scabs on their shaved heads, something that I assumed was a treatable skin condition. I was on a Fulbright fellowship, which in those days provided a generous stipend, so I told the abbot that I would be happy to pay for a doctor from a nearby town to treat the young monks. The abbot told me that it would not be necessary. He asked whether I might instead like to contribute to a fund for a new statue of Maitreya, who according to Buddhist cosmology will achieve buddhahood in approximately 5.67 billion years. Our conversation made me wonder whether Buddhism really does teach us to “live in the moment.”
40년 전에 나는 티베트 난민의 사찰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한 조사 차 인도를 향했다. 도착하고 나서 곧 나는 주지스님을 만나러 갔다. 거기서 지낸 며칠 간 나는 많은 어린 스님들에 관심을 가졌는데-그들은 8살에서 16살 사이로 삭발한 머리에 큰 딱지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건 내가 생각하기엔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피부 트러블 같았다. 나는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고, 그 장학금은 당시로는 상당한 많은 돈이었기에, 주지스님에게 내가 진료비를 부담하여 어린 스님들을 근교의 마을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하면 기쁘겠다고 했다. 주지스님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그 대신 새로 조성하는 미륵불상에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미륵불은 대략 56억7천만 년 뒤에 성불한다고 한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불교가 실재 현실을 사는 것(live in the moment)을 가르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Like all religions, Buddhism has changed over time. One of the most important changes in recent decades has been the evolution of engaged Buddhism, a movement whose participants apply dharma teachings and meditation practice to social justice, environmental activism, and other causes. This raises a question: As calls for social action resound throughout the land, what resources are provided by the dharma?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도 시간이 감에 따라 변화해 왔다. 최근 몇 십년 사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참여불교로의 진화한 것이다. 참여불교란 불교도가 다르마의 가르침과 명상 수행을 사회정의, 환경운동 및 다른 이슈에 대해 적용하는 운동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가 나라 전체에 울려 퍼질 때 다르마는 어떤 자원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
I would like to offer two responses to this question. The first is that a survey of Buddhist doctrine and history suggests that, for a variety of reasons, Buddhism has relatively little to offer in the domain of social action, at least as that term is understood today. For most of its existence, Buddhism has in many ways been more concerned with the future than the present, more about the next world than this one. The second response is that that’s OK.
이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나는 두 가지를 들고 싶다. 하나는 불교 교리와 역사를 개괄해봤을 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는 사회정의-요즘에 이해되는 개념으로 볼 때-에 관해 상대적으로 보아 거의 기여한 것이 없다. 불교는 많은 면에서 현재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미래로 주의가 더 많이 가 있으며, 현재 세계보다는 다음 생의 세계에 더 관심을 갖는다. 두 번째의 반응은 괜찮다고 치자.
Acentral element of Buddhist claims to legitimation in ancient India was the assertion that Shakyamuni was not unique, that there had been many buddhas in the past, whose names he knew and whom he had encountered in his previous lives on the bodhisattva path. Their teachings had been entirely forgotten, however, making it necessary for a new buddha—in our age, Shakyamuni Buddha—to restore the salvific dharma to the world. Yet like those of all buddhas, the teaching of Shakyamuni will suffer the fate of impermanent things, fading away over time until it is entirely forgotten. How long this will take and how it will happen have been matters of great interest to Buddhist thinkers in the centuries after his passing, and a variety of chronologies have been set forth. One of the earliest predictions of this demise of the dharma appears in the traditional account of the Buddha’s grudging decision to admit women into the monastic order. He says that had he not admitted women, his teaching would last for a thousand years but because he has done so, it will only last for five hundred.
불교의 중심요소는 석가모니가 유일한 부처님이 아 아니고, 과거에도 많은 부처님이 계셨으며, 그 부처님들의 이름 또한 이미 알려져 있었고 석가모니가 보살의 길을 가는 전생 가운데 다른 부처님들을 만났다는 게 고대 인도 역사에서 정당화되는 주장이다. 과거불의 가르침이 완전히 잊힐 때 새로운 부처님이 등장할 필요가 있어, 우리 시대에 석가모니불이 구세의 가르침을 세상에 복원하셨다. 다른 부처님처럼 석가모니불의 가르침도 무상한 현상처럼 시간에 감에 따라 희미 해 지다가 결국 완전히 망각될 것이다. 이 과정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실재로 어떻게 되어 갈 지가 부처님 가시고 난 다음 불교 사상가들에게는 수 세기 동안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으며, 여러가지 연대기가 등장했다. 불법의 쇠퇴에 대한 최초의 예측은 여성이 승가에 들어오게 되는 걸 부처님이 마지 못해 결정한 사건이라는 게 전통적인 설명이다. 그분은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자기의 가르침이 천 년(정법시대1000년)을 더 지속할 수 있었겠지만, 여성의 출가를 허용함으로 말미암아 500년 밖에 지속하지 못하게 되리라 말씀했다.
A more detailed description, one that was important especially in East Asia, posited three periods: the true dharma, the semblance of the true dharma, and the demise of the true dharma. The first is the period following the passage of the Buddha into nirvana, when his teachings are properly maintained and it is possible to follow the path to liberation. During the second, the teachings remain extant but progress on the path is more difficult. In the final period, the practice of the path eventually becomes impossible.
더 자세하게 묘사되기를, 이건 동아시아에서 특히 중요한데, 세 시기가 있으나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가 그것이다. 첫 번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다음의 시대인데, 그분의 가르침이 잘 유지되어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는 게 가능한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에는 가르침이 널리 남아 있지만 도에 이르는 길에서 나아가기가 더욱 어렵게 되는 시대이다. 마지막의 시대는 해탈도의 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이다.
In Buddhism, the world, a world that is the product of our collective karma, passes through various cosmic stages. The current stage, called the stage of abiding, also passes through cycles, in which both the lifespan and the qualities of humans rise and fall. At present, we are on a downward slope, with the human lifespan decreasing and eventually dropping to ten years, after which it will rise again until it reaches 80,000 years. It is then that Maitreya will come. During this period of decline, not only will the conditions of the world deteriorate but the dharma will disappear.
불교에서 세계란 우리의 집단적인 업(共業공업)의 산물로서 다양한 우주적 단계를 지난다. 현 단계는 머무는 겁(住劫주겁)이다. 인간의 수명과 성질은 향상과 타락을 반복하는 사이클을 만들면서 지나간다. 현재는 아래로 내려가는 추세에 있어,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다가 결국 10세로 떨어진다. 그런 다음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여 8만 세에 다다른다. 이때 미륵불이 오신다. 쇠퇴하는 시대에 세계의 조건들은 악화될뿐더러 다르마도 사라질 것이다.
This decline is attributed to what are called the “five degradations”: (1) the degradation of the life span, because the human life span decreases; (2) the degradation of views, because wrong views become rampant; (3) the degradation of afflictions, because negative emotions become stronger; (4) the degradation of sentient beings, because both their physical and mental powers weaken; and (5) the degradation of the eon, because the physical environment deteriorates. (We might pause to consider whether all five are present in our world in the year 2021.) It was, of course, essential to be able to calculate exactly when each of the periods began and ended. Most importantly, has the final period already begun— are we already in it? As one might expect, all manner of calculations have been made. In medieval Japan it was concluded that the final period had begun in 1052.
쇠락하는 이 시대에는 소위 ‘五濁5탁, 다섯 가지 타락’이 일어난다. ①수명탁,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다 ②견해탁, 사견이 난무한다 ③번뇌탁, 부정적인 감정이 강해진다 ④중생탁, 중생의 몸과 마음의 힘이 약해진다 ⑤겁탁, 물질적 환경(생태계)이 악화된다. (우리는 여기서 2023년 현재 이 다섯 가지 모두를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각 시대가 정확히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나는 지 계산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제일 중요한 게 마지막 시대(말법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벌써 이미 말법시대에 있는가? 누구가 기대하듯이 모든 계산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 일본에서는 말법시대가 1052년에 시작되었다고 결론 났다.
During this period of decline, chances for redemption, whether for ourselves or for our world, are futile. Such a belief inspires practices that allow us to await better times or take us elsewhere. Thus in Myanmar there are those who seek to become weizza, often translated as “wizards,” by engaging in longevity practices to extend their lifespan until the coming of Maitreya. In China and Japan, the doctrine of decline led to the rise of the Pure Land schools, which teach that through the grace of Amitabha, the buddha of infinite light, we are reborn in his buddha field of Sukhavati and from there achieve buddhahood. And in late Indian Buddhism we find millenarianism in the Kalachakra Tantra, composed sometime between 1025 and 1040 in the wake of Muslim raids into north India. The text predicts an apocalyptic war in which the army of the good will sweep out of the kingdom of Shambhala, deep in the Himalayas, to defeat the barbarians and restore the dharma, a war that will not occur until the year 2425.
쇠토하는 시대에 우리를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 만회할 기회는 부질 없다. 그런 믿음은 우리가 더 좋은 시대를 기다린다든지, 우리를 어디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수행한다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마법사’라 번역되는 웨이짜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륵불이 올 때까지 수명을 늘이는 장수를 위한 수행을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말법시대의 교리가 정토종을 일어나게 했는데, 무량한 빛의 부처님인 아미타불의 은혜를 받아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 거기서 성불한다고 가르친다. 무슬림이 북 인도를 침략한 인도불교 말기에 1025년과 1040년 사이쯤 저술된 칼라차크라에서 천년왕국설을 보게 된다. 텍스트는 히말라야 깊은 곳에 있는 샴발라 왕국이 선한 군대를 몰고 야만인들을 쳐부수어 다르마를 회복하는 전쟁을 벌일 것인데, 그 전쟁은 2425년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계시를 했다.
In Buddhism, therefore, we live in a world of samsara, a world that is by its very nature marked with suffering, impermanence, and no self, a world that is in irreversible decline, a world that is irredeemable. Tibetans translate the Sanskrit term loka, “world,” as “disintegrating foundation.” And so, in any of the texts known as lamrim (“stages of the path”) or ngondro (“preliminary practices”), we find some version of the “four things to turn the mind away from the world”: contemplations of the rarity of human birth, the inevitability of death, the faults of the six realms of samsara, and the inexorability of karma. We should come to think of life as like a prison from which we must escape, with all the urgency of a person whose hair is on fire. These texts say little about trying to repair the disintegrating foundation.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고통과 무상, 그리고 무아로 특징 지워지며, 돌이킬 수 없이 하락하는 세계이고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세계라 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산쓰끄리트 어 ‘로카’를 ‘바탕이 붕괴한다’는 말로 번역했다. 그리고 ‘람림(보리도 차제)’이나 ‘뉜도(예비수행)’라는 텍스트에서는 ‘세계로부터 마음을 돌리는 네 가지’에 대한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 네 가지는 ①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희유하다 ②죽음은 피할 수 없다 ③육도윤회의 고통 ④ 업의 피할 수 없음이다. 우리는 현생의 삶을 머리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급한 상황과도 같은 감옥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텍스트에서 붕괴하는 토대를 수리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Buddhism has in many ways been more concerned with the future than the present, more about the next world than this one.
불교는 여러 면에서 현재보다는 미래에, 현생보다는 내생에 더 관심을 가진다.
But what about the brahma-viharas? When people speak of the social commitment of Buddhism, they often mention these “divine abodes”: love, compassion, joy, and equanimity. As four of the forty topics set forth by the Buddha to develop concentration, they are meant to be cultivated on the meditation cushion and not in the marketplace. And in their original articulation, equanimity is the highest of the four, present in the fourth level of concentration, the level most highly praised, and the state from which the Buddha himself entered nirvana. When we read what the 5th-century Indian scholar Buddhaghosa says about equanimity in his important work The Path of Purification, we see that it is essentially the concession that each of us is subject to our own karma and there is no particular benefit in being troubled by the fate of others. As he writes, “Beings are owners of their deeds. Whose [if not theirs] is the choice by which they will become happy, or will get free from suffering, or will not fall away from the success they have reached?” In other words, we’re on our own.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in Tibetan lamrim texts the order is reversed, with equanimity coming first, described as a prerequisite for compassion. Which brings us to the Mahayana.
그러나 梵住범주(神들의 거주처, 4범주는 자비희사의 네가지 무량심을 닦으면 살아서 신들의 경지에 머문다)는 어떠 한가? 사람들이 불교의 사회참여를 이야기할 때 가끔 이 ‘신들의 거주처’가 되는 자비희사를 이야기한다. 부처님이 집중을 개발하기 위한 40가지 주제를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네 가지로서 명상하는 방석위에서 실행하는 것이지 시장바닥에서 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 분명하게 설명될 때는 평정심(捨心)이 네 가지 가운데 최상이며, 색계4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그 선정에 들었다가 입적하셨던 최고의 경지라 찬양했던 것이다. 5세기 인도 학자 붓다고샤(5c, 佛音존자, 불교 논사, 청정도론의 저자, 테라바다의 고승)가 쓴 중요한 저서 <청정도론Visuddhimagga>에서 평정심을 언급했는데,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업에 종속되기 마련이며 타인의 운명에 의해 어려움을 겪음으로써 특별히 얻는 은총 같은 건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인정이다. 그분이 쓰기를 “존재는 자기 행동의 소유자이다.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 건 누구의 선택이란 말인가? 누가 고통으로부터 놓여 나며, 누가 그들이 당성한 성공에서 떨어지게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티베트 ‘람림’ 텍스트에서 순서가 뒤바뀌면서 평정심이 제일 처음에 오는데, 이는 연민심(悲心)의 전제조건이라 했다. 연민심이 우리를 대승으로 인도한다.
So what about compassion? What about the bodhisattva? What about dana, giving, the highest Buddhist virtue, the first of the six perfections? The most famous stories of giving in the Buddhist canon occur in the Jataka stories, the accounts of the Buddha’s past lives as a bodhisattva. We notice here that cases of giving are often of a spectacular, and sometimes gruesome, nature. A prince commits suicide by jumping off a cliff to feed a starving tigress and her cubs; a king methodically carves off his own flesh to save a dove from a hawk. In one of the rare cases in which the bodhisattva is a woman, she cuts off her breasts to feed a starving woman so that the woman can nurse her starving child. In perhaps the most heartbreaking scene in Buddhist literature, Prince Vessantara gives his darling children to an evil brahmin to serve as slaves. Thankfully, none of these cases of giving are real-world examples.
그렇다면 연민심은 어떠 한가? 보살에 대해서는 어떤 한가? 다나, 줌, 보시, 6바라밀이라는 불교의 최상의 덕목은 어떠 한가? 보시에 대해 이야기로 불교 경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건 본생담(자타카) 이야기인데,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서 살았던 전생 이야기이다. 우리는 여기서 보시하는 경우가 가끔은 극적으로 놀랄만한 사건이며, 가끔은 무시무시한 특징이 있음을 목격한다. 왕자가 굶어 죽어가는 암 호랑이와 새끼를 살리려고 절벽 끝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을 감행한다 거나, 왕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살리려고 자기 살을 정교하게 뜨는 예가 있다. 보살이 여자였을 적에 굶주린 어미에게 자기의 젖가슴을 잘라주어 먹임으로써 그 어미의 굶은 애기에 젖을 먹일 수 있게 했다는 아주 드문 예도 있다. 불교문학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장면은 아마도 베싼타라 왕자가 사악한 브라만을 섬기는 종으로 쓰라고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이런 보시의 사례들은 실재 세계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And perhaps they are not supposed to be. For we read in Shantideva’s Engaging in the Bodhisattva Deeds (8th century) that the perfection of giving actually has nothing to do with the alleviation of poverty. As he writes: “If the perfection of giving meant the dispelling of the world’s poverty, then how did the previous buddhas perfect it, since beggars still abound?” In other words, the Buddha perfected giving and yet there is still poverty in the world. The perfection of giving therefore cannot mean the alleviation of poverty. As he goes on to explain, the perfection of giving is instead the intention, the willingness to give everything to everyone. Therefore, the perfection of giving is an attitude. In Sanskrit it is described as cittam eva, “just a thought.”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일들은 있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샨티데바(8c, 寂天존자, 인도 나란다 대학의 중관학자)의 입보리행론(8세기 저술)에서는 보시의 완성은 가난함을 해결해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 저술에서 보시의 완성이 세계의 빈곤을 퇴치하는 걸 의미한다면 이전의 부처님들이 모두 해결했을 텐 데, 아직 우리 주위에는 거지들이 있지 않는가? 라 써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은 보시를 완성했으며, 그럼에도 세상에는 여전히 빈곤이 있다는 말이다. 보시의 완성이란 그러므로 빈곤의 퇴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책에서 계속 말하길 보시의 완성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걸 기꺼이 줄려는 의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의 완성은 태도나 자세를 말한다. 산쓰끄리트 어에 ‘cittam eva 찌땀 에바’ 는 ‘다만 생각일 뿐’이란 뜻이다.
~~~계속
첫댓글 스님 티벳 예비수행 ngondro는 제 기억에 'ㅇ왼도'가 더 가까운 발음 같은데요 ㅎ 영어나 한글로 표현하기 힘든 발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