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47: 1-6
요셉이
모세는 요셉이 그 부친과 형제들의 애굽에 온 사실을 바로에게 고하고 그 형제들 중 다섯 사람을 뽑아 바로를 만나게 하여 고센 땅을 그들의 거주지로 허락 받은 사실을 기록합니다(1-6).
1. 본문 1-2절은
"①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 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② 형들 중 오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입니다.
1)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고센 땅을 거처로 확보하게 되는 것이 자기 뜻이라는 사실을 왕에게 간접적으로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중한 태도는 결코 교활한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즉각 요셉의 소원을 들어주고 기꺼이 허락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고센 땅은 가장 좋은 지역이라고 미리 단언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허락은 그의 판단에 입각해서 나온 것이지 고센 땅이 비옥한 줄 모르고 내린 결정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히 제일 좋은 것을 요청하지는 아니했던 요셉의 소망을 바로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 대부분이 그 지역에 남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를 쉽사리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일행이 왕을 알현(謁見)하기 위해서 가축을 데리고 함께 온다거나 또 버려두고 사람만 온다는 것은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어떤 정착지가 마련되면 거기다 먼저 천막을 치고 난 뒤에 다른 볼 일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지역이 자기들에게 할애된 것인 양 생각하고 그냥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왕에게 대한 존경의 예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아직 왕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왕의 허락을 받기까지는 그 지역에 초조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빨리 그곳이 거주 지역으로 지정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2) 요셉이 '자기 형제들 중의 극단적인 한정으로 다섯을 택했다' 는 말을 흔히 형제들 중 키가 제일 작은 다섯 사람을 데리고 왕을 알현했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건장한 자들을 데리고 가면 바로가 그들을 자기 부하 군인으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말 (카쌔-)는 두 극단, 곧 처음과 나중을 모두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각으로는 제일 작은 형제들과 제일 큰 형제들 중에서 다섯을 뽑아 그들을 본 바로 왕이 스스로 그 형제들 전체의 나이 정도를 판단할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2. 본문 3-4절은
"③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④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때를 칠 곳이 없기로 종 들이 이것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입니다.
1) 이 같은 고백은 야곱 자손들에게는 치욕이었습니다.
특히 왕이나 다를 바 없는 높은 자리에 있는 요셉 자신에게는 더 큰 수치였습니다.
앞에서 본대로 애굽인들은 그런 직업을 가진 자들을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농업에, 또는 그밖의 어떤 신용할 만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자고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농업을 전혀 모를 만큼 목축에만 몰두했거나 다른 생계법을 전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축이 생산성이 좋다는 것을 즉시 발견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왕의 관대한 처분은 곧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바로 왕가의 조신이 되기에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피하려고 애쓰는 짓은 전혀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왜 자신은 치욕을 당하게 되는 그런 수치를 형제들이 당하게 했겠습니까?
애굽인들 속에서 잘 살려면 처음부터 기분 좋게 나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의 가족은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저들의 비천하고 초라한 생계방식은 그들과 애굽인들을 갈라놓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취득한 고위 신분을 일부러 떨쳐버리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후손들이 애굽 사람 속에 동화되고 말 처지에서 구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독자적인 집안을 형성하기를 염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이 그들 마음 속에 미치지 못하였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혀를 제어하사 불필요한 혼합을 막아주시고 교회 집단을 순수하게 구별되도록 보존하셨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 밖에도 또 있습니다.
즉, 교회 영내를 벗어나서 왕궁 속에 거하는 것보다는 차리라 여호와의 전 한 귀퉁이에 사는 것이 얼마나 더 좋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을 받으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신성한 유대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을 괴롭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온갖 호화 생활보다는 이 유대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세상을 혐오하는 길 외에는 하나님을 순수히 섬기는 길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야곱 자손들이 다시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기까지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됐습니다.
약속된 구원이 도래하기까지는 그들이 통일을 지속하고 있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목자라는 사실을 숨겨서는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헛된 명예심에 우쭐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련을 시키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방도를 보여주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동안 명예가 없더라도 기꺼이 지내야 합니다.
이후에는 천사들이 자기들의 영원한 영광 속으로 우리를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실예에서 또 한가지 교훈을 찾아보십시다.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자기들 신분을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생계 방식이 합법적인 것이고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2) 본문 4절에 나와 있는 그 형제들의 다른 고백도 역시 수치심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을 보면 굶주림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거기에 체류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이 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무리로 내려왔고 수치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좀처럼 그들과 말을 해 주려는 자들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이 어두움을 헤치고 더욱 찬란히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제3세기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놀라운 민족이 되게 하여 이끌어 내셨습니다.
3. 본문 5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입니다.
1) 형제들이 따로 살 수 있는 거처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바로가 조금도 노여워 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청이 거절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왕이 분개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영구적인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에게서 떠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시민권을 청구하여 본토인과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같은 처사는 겸양 때문이라고 할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생각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손님이나 나그네로서 인정해 주기를 바람으로써 그들이 바로가 자기들을 종살이로 붙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미리 선수를 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부조리한 생각입니다.
스포클레스(Sophocles)의 싯귀에 "독재자의 문간 안에서 도피처를 구하는 자, 일단 그리로 들어가고 나면 더 이상 자유를 누리지 못하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Langhorne's Plutarch
2) 따라서 처음에(in limine), 어떤 조건에서 애굽에 살려했던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후에 그들에게 가해진 잔학성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계약을 어기고 그들은 아주 비참한 학대를 받았으며 떠날 기회마저 거부당했습니다 이사야는 애굽 왕이 그렇게 처신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즉 야곱의 자손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휘하에 복종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사52:4).
그러나 이 말은 이사야가 앗수르인들을 혹독히 고발하기 위하여 비교법으로 말한 것입니다. 앗수르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 땅에 평안히 살고 있는데도 쳐들어와서 부당하게 그들을 추방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이 상당한 학대를 받자 대접의 풍습은 악랄하게 파괴되었고 그들이 묵계로 약속해왔던 고국 귀향도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그곳에 나그네로서 장시간 체류해 왔다고 밝혔었습니다.
일단 그들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왕이 그들에게 신실과 인간성을 다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은 스스로 경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애굽을 고발하여 정당한 탄원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들에게 한 서약이 육체적으로 보면 그들에게 아무 이득이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예로 성도들은 인내심을 훈련해야겠다는 것을 배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독재자의 궁정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그 문간에서 자기 자유를 포기해야 되는 사례가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4. 본문 6절은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당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것은 야곱이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요, 또한 요셉은 왕이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야곱에게 더해 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셉은 권세를 크게 잡은 만큼, 그만큼 더 철저했습니다.
그가 바로 왕국 모든 재산을 손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왕과 그 백성을 탈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주의를 기울인 것이었습니다.
또 이 같은 절제가 온 세상의 모든 고관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민들과 다름없이 처신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갖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요즘 고관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을 만큼 방종하지 못하면 결국 권세를 잡지 못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요셉은 바로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서 자기 가족을 가장 좋은 지역에 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밖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 바로 왕권의 혜택을 누리지 아니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형제들로 왕의 가축을 돌보는 자들로 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굽인들에게서 그들이 질투를 사게 될 뿐만 아니라 요셉 자신도 그 같은 함정에 걸려 들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창 47: 7-12
요셉이
모세는 ① 요셉이 자기 부친을 바로에게 소개한 사실과(7-10)
② 요셉이 그 부친과 및 그 형제들의 가족을 바로의 명령대로 고센(라암셋)에 거주하도록 하고 식물을 공급하여 준 사실을 기록합니다(11-12).
1. 본문 7절은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입니다.
계속해서 모세는 야곱이 왕에게 인도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어간에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야곱이 기거할 장소를 확보하기까지 시간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야 야곱이 자기 식구들을 안정하게 있게 하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있어야 오랜 여행으로 피곤한 몸에 새로운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을 베풀었다고 했는데 모세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인사말을 했다는 뜻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야곱이 하나님이 쓰시는 종으로서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세상 자녀들은 명예를 위하여 왕에게 인사를 하지만 하나님께는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일반적인 존경에다가 왕의 안전을 하나님께 비는 경건한 애정을 더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급한 차원이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규칙을 정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사는 동안에는 바벨론 왕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평화로와야만 그들 자신도 평화로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렘29:7).
그 당시에 그들은 '비참한 포로들'이었습니다. 또 '강제로 자유를 박탈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고국에서 추방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이런 의무가 있다면 그렇게 친절하고 인정 많은 왕에 대한 야곱의 의무야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성격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공중기도를 드려야 합니다(딤전2:1).
그러므로 권위 당국자에 대한 똑같은 복종이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2. 본문 8절은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입니다.
이 친숙한 질문은 야곱이 정중하게, 또 격의 없는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나 그 답변이 더욱 중요합니다.
답변에서 야곱은 자기의 순례 연한이 130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히브리서에서(11:13-16) 바울 사도는 믿음을 간직한 선진들의 나그네 여정에서 놀라운 교훈을 이끌어냈습니다. 즉 하나님은 족장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족장들이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로 고백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의 조상들에게서 교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그 자손들에게 전승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을 모두 한 마디 칭찬으로 찬미하였습니다.
족장들은 자기들 인생 일생을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헛된 방식으로 체면을 세워 나가는 일이 없이 자기들이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에게 비길 데 없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늘 상속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족장들이 차지한 가나안 땅보다 더 독특하고 좋은 유산을 지키고 있는 자들 또한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측량줄을 던져 각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경우에처럼, 세대에서 세대를 걸쳐 영원히 물려 줄 수 있는 그런 소유권은 어느 민족에게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한 평안도 영구한 약속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공통 조건은 이 땅에서는 "영원이 거할 곳"이 없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고전4:11).
이 말씀의 본 뜻은 모든 사람이 유배자가 되어 한결같이 쫓겨다녀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나팔소리를 통해서 자기 모든 백성을 나그네가 되라고 통고하시사 땅에다 영원한 보금자리를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 고향에 머물러 있는 자든지 할 수 없이 끊임없이 자기 거처를 바꾸어야 되든지 간에 성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깊이 명상하는 법을 연마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지상에 잠시 머무는 체류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과정이 끝나면 영원한 하늘 나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3. 본문 9-10절은
"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 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 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⑩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입니다.
1) 야곱은 여기서 자기는 불과 얼마 살지 아니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생을 겪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왜 온갖 역경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자기 연수가 얼마 안되었다는 불평은 알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세기 하고도 3분의 1정도 살았으면 족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야곱이 하는 말을 잘 관찰해보면 그는 자기 조상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중에 스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야곱이 자기 노쇠를 탄식했다기보다는 자기 조상들에게 원기를 허락해 주셨던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지 나이가 많아 이내 무덤에 온 사람이 쇄패하여 일어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말한 바대로 본문에 나온 비교법은 야곱이 자신보다 훨씬 위대했던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복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쓰인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자기 조상들이 자기를 함부로 내던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들보다 더 고생을 했다고 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가 아는 대로 온갖 유혹을 만났지만 잘 선처했었습니다.
야곱은 단지 자기가 그분들의 나이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사실 남들이 말하는 식으로 하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의 조상들에게는 이런 한계를 넘어서까지 살도록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 또 10절 끝에서 야곱은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나이 때문에 쇠진해진 것이 아니라 고생과 수고 때문에 쇠진해졌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만일 지나친 노동, 계속되는 근심, 어려운 환난을 당해서 기력이 쇠약해지지만 않았어도 내 감각기관들이 아직 제대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라는 방식의 말입니다.
사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그가 자기 선조들의 나이보다 적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앞날은 얼마 남지 않아서 선조들 나이만큼도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자기 몸이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답은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이삭은 그가 죽기 30년 전에 이미 시력이 흐려지고 사지가 떨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마치 무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매 순간을 죽음에 임한 사람처럼 살았다고 보면 별로 무리가 없습니다. 매사 마다, 매 순간마다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붙여주셔서 산다' 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얼마간 시한을 허락해 두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그는 여생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3) 특히 10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는 주의를 기울일 말씀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인도로 바로 앞에 나아가서도 먼저 바로에게 "축복"하였습니다(7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는 기관이 됩니다
그것은 창세기 12:1-3절에 선언된 그대로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을 관대하게 동정하는 바로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어디까지나 축복할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복이든지, 특별한 복이든지 우리에게는 대부분 감추어져 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남에게 축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종과 겸손한 성도의 심리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참으로 안다면 "내게 주신 은혜와 복을 이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이웃을 위한 기도가 되겠고 전도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하심이 선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고 주의 뜻이면 그 기도와 그 전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4. 본문 11절은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입니다.
요셉은 그 부친과 형제들의 가족을 접대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라암세스"는 고센 땅에 대한 별명입니다. 그 이름은 얼마 후에 바로를 위하여 세운 성 이름 때문에 유래된 듯 합니다(출1:11). 또 식량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행할 때에 자기 뜻(自意) 대로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바로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서 행하였습니다(11절).
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런 방식으로 임하게 되는 줄로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국가 질서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바른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온 우주의 창조주로 또 창조하신 만유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알아 모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5. 본문 12절은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입니다.
1) 이 말씀의 본뜻은 요셉이 야곱 가문에 속한 모든 자들, 곧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공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집안에는 모두 식량이 넉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 요셉이 어린아이들 몫까지 세심히 공급하여 준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와 요셉의 경건한 생활 전반을 모두 찬미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이 굶주린 농민들을 자기 비용으로 모두 먹게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랑의 실예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은총이요 복으로 있습니다.
2) 이제 말씀을 다시 한번 간추려서 마치겠습니다.
(1) 야곱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국가 통치자들이나 당국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옳은가? 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을 위한 기도의 의무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받은 은혜와 분복입니다.
그리고 그 분복을 증시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 또 야곱이나 족장들의 경우처럼 이 땅위에서 우리 인생 여정을 묻는 자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 합니다.
또 이 땅위에서는 나그네이며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야곱의 경우에서처럼 우리 인생여정을 총결산하려고 할 때에라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그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 생명이든지 영원한 생명이든지 우리의 일상이든지 우리의 은사들이든지 우리의 직분이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붙여주셔서 살고 있다" 는 정신에 확고해야 하겠습니다.
(4) 또 우리는 야곱의 경우와 요셉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을 먹고 사는 자들답게 크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 준행 하는 일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여깁시다. 또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만 감사하며 찬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바 하늘에 속한 모든 은총과 복이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만 있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창 47: 13-19
기근이 더욱 심하여
모세는 ① 기근이 심함에 따라 애굽 땅과 가나안 땅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양식을 사므로 그들의 돈이 갈진하여 진 사실(13-14)
② 애굽 백성이 돈이 없으므로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다 주고 식량을 받은 사실(15-17) ③ 요셉이 백성에게서 토지를 받고 식량을 내어주기 시작되는 사실을 기록합니다(18-19).
1. 본문 13절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입니다.
1) 먼 나라에까지 곡물을 풍성히 대 주던 가장 비옥한 지역이 그 지역 주민들조차 살지 못할 정도로 기근이 들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습니다.
(라하: 쇠약하다) 라는 말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이는 기근 때문에 그들이 미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에게까지 식량을 공급해오던 자들이 굶주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따라서 비옥한 땅에서 경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풍요를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나아가서 풍성한 식량은 땅의 대지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처럼 은밀한 하나님의 복이 하늘로부터 내린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 대신 소금을 뿌리면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불모지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2) 한편 이런 기근 중에도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시편 37편 전체와 특히 19절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근을 주사 우리로 연단하시고자 하신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온유하고 평온한 마음을 주사 그 시험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들짐승처럼 굶주림 때문에 으르렁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38편에서 41편의 내용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38:21-22, 39:12-13, 40:17, 41:12-13).
3) 애굽의 경우에 아마도 큰 결핍이 계속될 때는 고통스러운 동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애굽인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기근으로 쇠약해졌고 죽은 사람들처럼 되었습니다.
모세가 기근 역사를 추적한 것은 요셉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서 요셉의 지각에 의해서 가장 큰 위기가 잘 대처되었다는 것입니다.
애굽도 그 위기에서 구출된 것은 요셉의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근의 역사는 하나님의 일로 있습니다.
요셉의 예언이나 요셉의 지혜, 요셉의 덕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섭리가 있습니다.
2. 본문 14절은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이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이 곡물 처리를 요셉에게 맡긴 것은 슬기로운 처사였다고 밝힙니다.
그 다음에 요셉이 수행한 신실하고 성실한 행정을 칭찬합니다.
왕실의 돈을 횡령하지 않고 잘 보관할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또 돈이 엄청나게 많고 보면 횡령의 기회를 스스로 자제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요셉이 모든 돈을 모두 왕의 창고로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 중에 깨끗한 손을 간직한다는 것은 여간 귀한 정직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소명이 요셉에게 굴레를 씌어주셨기 때문에 그토록 절제하게 된 것입니다. 도둑질과 탐욕을 잘 절제한 사람도 사람들의 눈과 판단을 겁내지 않게 되면 전리품에는 쉽사리 손을 대는 법입니다. 사실상 요셉은 아무 목격자 없이 죄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정직한 것은 그 가슴 속에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말했던 살아 계신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도둑들도 자기 잘못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만일 잔인무도한 사람을 섬기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의 편익을 위해서 많은 이익 중에 일부를 착복하는 일이 위법이 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명백한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그는 남의 희생을 통해서 치부하고 싶은 모든 욕망을 강력히 떨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받고 받은 것을 관리하고 관리된 것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5절은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입니다.
1) 모세는 애굽의 모든 돈이 왕실 보고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근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사는 많은 고관들이 궁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단순한 의미는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서민들은 곡물을 살 충분한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제 말하게 될 차선 방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애굽인들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들이 건방지게 요셉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애굽인들은 오히려 요셉에게 동정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따라서 '어찌 우리가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라고 말한 것은 요셉이 동정을 베풀어 자기들을 살려주지 않으면 자기들은 죽고 말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그때에 가나안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필경 그들도 다른 지역에서 도움을 받든가, 비참하지만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지 않았다면 기근과 그에 수반되는 무서운 질병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지역은 기근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서 평년작의 절반 또는 3분의 1정도는 수확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13-14절에 나타난 대로 요셉의 현명한 양곡정책(糧穀政策)의 결과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돈을 모두 애굽의 국고금(國庫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으로 하여금 부국(富國)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한 그 사람이 나라에 대해서도 얼마나 유익한 일을 많이 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택을 증시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방면의 일반 은총 영역으로 바르게 나아가서 공헌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만이 사람을 키워내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인재가 길러집니다.
4. 본문 16-17절은
"(16) 요셉이 가로되 너희의 짐승을 내라 돈이 진하였은즉 내가 너희의 짐승과 바꾸어 주리라
(17) 그들이 그 짐승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곧 그 모든 짐승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 에 식물로 그들을 기르니라" 입니다.
1) 이전에 부자들이 거지가 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잔인한 인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대신에 그들의 가축까지 몰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또 한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그의 엄격성을 '잔인' 이라 할 수 없습니다. 풍년 7년 동안 요셉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곡물을 강제로 받아들였다면 지금 그들의 가축을 강제로 수탈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자유로이 개인 창고에 곡물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또 왕에게 그것을 팔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들의 무관심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서 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 대신 왕만 부자가 되리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요셉으로서는 곡물을 돈 받고 파는 것이 합당했기 때문에 곡물과 가축을 교환하는 것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진실로 그 곡물은 하나님께서 내셔서 요셉을 통해서 보관하게 하신 것으로서 1차적으로는 애굽 왕 바로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매자는 값을 내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가축의 값을 바로 정하기만 했다면 그의 처신에 잘못이 없습니다.
요셉이 지금 팔고 있는 곡식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 하에서 왕을 위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요셉이 왕에게 '왕은 이미 충분한 돈을 확보했으니 그것으로 자족해야 된다' 고 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모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많은 내용 중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중대한 일을 요셉이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왕의 허락을 받고서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농부들이 가축대신에 그 해 동안 먹을 양식을 받는다면 그것은 왕의 고문들에게 공평한 협정으로 여겨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판단만이 우리를 세우고 넘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법이 미결로 남겨둔 것을 우리가 정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결국 이 부분에서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애굽 사람들은 돈이 없으므로 곡식을 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백성들이 짐승을 나라에 바치도록 하고 곡식을 내주었습니다.
그 짐승의 가치가 곡식 값을 대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본문에서 도무지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요셉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힘이 미치는 대로 곡식 값을 대상(代償)케 한 듯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백성이 살 수 있는 방침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백성에게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란 칭찬을 받았습니다(25절).
요셉이 그 백성에게 양곡을 무상(無償)으로 내어 주지 않은 것도 잘 한 일이었습니다.
백성에게 양곡을 무상으로 준다면 그들로 나태한 민족이 되게 합니다.
또한 무기력하게 무위도식 함으로써 남을 의뢰하는 자들이 되게 합니다.
"그 해 동안에 식물로 그들을 기르니라" 는 말씀은, 곧 '그 해 동안' 에 백성에게 식물을 주어서 살아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뭇 백성들이 살아 남았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5. 본문 18-19절은
"(18) 그 해가 다하고 새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고하 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짐승 떼가 주께로 돌 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전지뿐이라
(19)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 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1) 모세가 '새해' 라 한 것은 기근 시작 제2년이 아니라 돈이 떨어진지 제2년 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기근 종식이 다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식으로서 뿐 아니라 씨앗으로서 곡식도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장래를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만 너무 늦게서야 지혜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돈과 가축이 다 떨어졌다고 말한 뒤에 그렇게 했으니 그것은 요셉에게 청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은 그에게 부당하게 돈과 가축을 빼앗겼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식과 씨앗감으로 곡식을 사려면 이제는 땅을 파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런 구매법을 쓰지 않는 한 자기들은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값이나 보상을 하지 않겠다 하면 뻔뻔스런 일이 될 일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전답을 사주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동정심을 자아내기 위해서 만일 요셉이 자기들 땅을 사주지 않으면 사람도 땅도 다 망한다고 간청했습니다. 땅은 그것을 경작해 주지 않으면 황폐하게 됩니다.
사막으로 변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특별히 이 본문에서 애굽사람들이 이제는 양식을 사기 위한 짐승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과 자기들 자신을 나라에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동기는 정부의 일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현명한 정치는 그만큼 바로 왕과 백성에게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와 배려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요셉과 야곱의 일족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그분의 선하신 역사의 효과요 열매입니다.
창 47: 20-26
그러므로 요셉이
모세는 계속해서 요셉이 백성에게서 토지를 받고 식량을 내어준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0절은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입니다.
1) 요셉이 농민들에게서 전지까지 취한 것은 잔인성과 탐욕의 극치다 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구매 방법은 정당하였습니다.
혹자는 요셉이 그들의 빈곤을 이용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가 애굽인들을 궁핍하게 만든 것이 어떤 술수나 독재력이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충분한 해명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한결같은 공평과 성실로 왕의 업무를 대신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어김이 없이 자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기근이 임박했을 때는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 곡식을 파는 것이 합법적이었습니다.
그 후에 가축을 사들인 것도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값을 치르고 왕을 위해서 땅을 구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그는 아무것도 강제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요청에 따른 것 뿐 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겠다는 것은 닥치는 대로 마구 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극심한 궁핍이 닥칠 경우 그것에서 헤어나려는 사람은 어떤 악조건에도 굴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에 궁핍을 기회로 탈취하는 행위를 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은 자진해서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숨을 구해야겠다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이유에서는 요셉을 변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공정했지만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아니했다는 점 또한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만약 자진해서 영구히 노예가 되겠다고 동의해 왔더라면 그 조건은 더욱 가혹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금 그들에게 인격적 자유권을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밭을 살 계약만 했습니다. 아마 그 밭이란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게서 이미 사들인 것이었으리라 고 생각됩니다.
요셉이 자기에게 곡식을 제공해 주던 자들의 옷을 탈취했더라면 이것은 그들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격이 되었으리라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굶어 죽으라고 하는 것과 얼어서 죽으라고 하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애굽인들을 잘 구제하여서 장차 그들이 자유로이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수고로 적절한 생계비를 벌 수 있게 조처했습니다. 그들은 주거를 변경해야 했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모두가 왕의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전지 뿐 아니라 자기가 구입했던 용구를 되돌려 줍니다.
따라서 요셉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자비를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2) 한편 제물에 지나치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요셉의 본을 핑계삼아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사5:7-12).
또 자비의 규칙에 따라 해결되지 않는 모든 계약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우리에게 은밀히 명령하는 본성을 따라서 내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해야겠습니다.
2. 본문 21절은 "요셉이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입니다.
이런 이동 방식은 사실상 가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노예 살이를 하는 것보다 다른 곳에 이사가서 자유로이 땅을 경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관대한 조처요, 인정의 발로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밭을 경작했더라도 세의 강제 징수는 고통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중간 노선을 취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무거운 짐을 완화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각자에게 새로운 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모든 농민들에게 명하여 도회지로 나가서 식량을 수급받고 거기서 공적인 계산을 마치라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애굽이 도(道 ; provinces 나중에는 '노메스' 헬라어로는 ; 노모이)라고 불리웠던 지역이 구분된 사실은 그 기원이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고를 원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의 뜻도 애매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결로 두겠습니다.
한 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그런 기근을 통하여 공평한 토지 개혁 정책이 시행된 것이 아닐까? 혹은 천지의 주재자께서 그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되돌리시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3. 본문 22절은 "제사장의 전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의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 전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입니다.
1) 그 당시에 바로에게 속한 제사장들은 일반 법률에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생계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재 필요에 응해 주었다는 말인지, 바로가 자기 비용으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말인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제사장들의 전지(田地)를 말하는 것을 보아서 그들은 전에는 부유했으나 기근이 수입을 탈취해 버렸기에 왕은 그들에게 이 같은 특권을 부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지는 그들의 손에 맡겨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 역사가들은 그 땅 상태에 대해서 많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함부로 꾸며냈습니다. 우리로서는 이 말이 농부들이 작은 임금을 받고 만족하면서 왕과 제사장들을 위해서 곡식을 뿌리고 수확했다는 뜻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 그러나 이러한 일은 간과하고 모세가 말하고자 했던 그 목적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교도인 왕도 자기 신에게 드리는 예배에는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자기 제사장들을 무상으로 부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지와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생계 수단을 지켜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거울과 같은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없는 경건이 인간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가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제사장들을 공양한 것은 사악한 미신이고 우행(偶行)입니다.
그러나 신께 대한 예배를 몰락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나름대로 칭찬할 만합니다
제사장들이 기근으로 인해서 굶어 죽었더라면 신께 대한 예배도 종말을 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솔한 열성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종교가 천박하고 하찮은 일거리로 변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부패한 인간 본성에서는 더더욱 잘못 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각없는 신앙심이 올바른 원리에서 우러나왔다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위정자들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바로가 자기 제사장들에게 그토록 관심을 쏟아 자기 자신과 나라 전체가 결판나는 판국에도 그들을 부양하여 스스로 거짓 신들에게 대해서이지만 불경죄를 짓지 않으려 했다면, 그리스도인 위정자들은 얼마나 신성 모독적인 죄인들이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고 자신들에게도 유익한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신성한 직임을 맡고 있는 합법적이고 성실한 주의 종들을 무시합니다.
오히려 온갖 방식으로 이용해 먹습니다.
4) 그러나 요셉이 그런 임무를 이행한 것이 옳았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미신 숭배자들을 도와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은 잘못 실수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을 전적으로 정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가 대담하게 미신을 거부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제사장들을 굶어죽게 버려 둘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왕의 곡물을 전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만일 왕이 무상으로 제사장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싶어한다면 요셉은 궁중 조신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들에게도 식량 공급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셉 자신으로서는 그 같은 부양 임무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바로 왕이 그런 임무를 부여하자 요셉은 그런 자들이야말로 황소의 오물을 먹기에도 미흡한 자들인 줄 알면서도 거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5) 다만 이런 경우에는 그들의 길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 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갈 수 있을 뿐입니다. 다니엘처럼 그의 친구들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4. 본문 23-24절은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듬어 놓으신 요셉의 뛰어난 인간성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시기 적절한 것이었고 당시 요셉을 비난하던 일체의 잡음을 침묵하게 했습니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유랑자가 된 사람들을 요셉은 원상대로 소유지를 되찾게 해주고 아주 평온한 처지에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 산물을 5분의 1을 왕에게 바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대체로 왕이 십일조를 받는 것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실은 잘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시에는 왕이 이 세율을 배가시켰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추수의 5분의 1을 내라고 전지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것을 왕에게 가져갔다 해서 애굽인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땅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기름져서 조금만 일을 해도 경작가의 생계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혹자는 왕이 그 전지(田地)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 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겠는가 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실예였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데도 좋다는 사실만으로도 답이 됩니다
더구나 분명한 사실은 요셉이 추수의 5분의 1을 내라고 한 이 간접적인 조처는 애굽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땅을 보다 열심히 경작하게 하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계약이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푼 처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능히 그렇게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5. 본문 25-26절은
"(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입니다.
요셉이 집행한 정책이 나타난 결과로 그들의 고백이 나왔고 그것을 모세는 기록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요셉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둘째로, 그들 스스로가 바로 왕에게 종이 되는 것을 거절하지 아니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두 편 사이에 서서 잘 처신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백성을 압제도 학대하지도 않으면서도 동시에 왕을 치부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모든 정치가들이 이런 중용을 지켜 주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할 것입니다.
즉, 백성에게 가해함이 없이 또 그러한 한에서만 나라의 유익을 힘쓰는 그런 길 말입니다.
디베리우스 황제의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양떼의 털을 깎는 것이 목자의 임무이지 가죽을 벗겨 내는 것이 목자의 임무는 아니다" 그러나 이 당시 왕들은 자기들이 백성의 가죽을 벗겨 완전히 그들을 잡아먹어 버리는 일은 없어야 잘 통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살육을 맹세한 자들이 아니면 권한을 조금도 부여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자비는 그 시대에 비견한다면 그만큼 더 찬미를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 비견해 보아도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는 애굽의 국사를 잘 처리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에게 막대한 이득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조건을 유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반 은총 영역으로 나아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일들이 이런 것입니다.
창 47: 27-31
이스라엘 족속이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이 요셉을 불러서 맹세케 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7절은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입니다.
모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바로는 애굽 다른 지역을 애굽인들에게는 영구적 소유지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허락한 것은 소유지로 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평화로이 살게 된다면 당분간 자유로이 기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넓은 땅에 마음놓고 살았고 짧은 기간동안 놀라운 수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음 세대 역사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자기 해설 중에서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여러 죽을 고비에서 얼마나 잘 지켜 주었는가를 말합니다.
이렇게 고센 땅에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고 강조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복 주심으로 외국에서 왕성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창세기 처음에 있었던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하나님 자신의 일로 되어진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교회의 일입니다.
2. 본문 28절은 "야곱이 애굽 땅에 십 칠 년을 거하였으니 그의 수가 일백 사십 칠 세라"입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가나안 땅을 떠나서 유배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나이 많은 성도에게는 비상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근이 끝난 다음, 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것은 야곱이 활동의 정지상태로 멍청히 지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나들이를 할 수 없어서 조용히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하나님은 그의 인내심을 연단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굽의 즐거움이 컸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거룩한 나라의 산 상징이었던 땅, 가나안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불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상적인 이득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육신의 복만 주어지고 신령한 복을 상실한다면 그 어떤 육체의 이득도 소용없게 되는 것이 성도의 경건한 심정입니다.
또 야곱은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욱 침통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약속된 유업을 박탈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믿음도 별로 없는 자손들을 남겨 두고 그것도 애굽에서 묻혀야 된다는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루한 전투의 권태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단이 우리 마음을 죽음에로 돌아가게 하려고 애쓰면 우리는 그만큼 더 열심히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늘 보좌와 그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거기에 심판주가 계십니다. 거기 생명의 주가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 부활의 보증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에게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그분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인하여 우리를 영접해 주실 분이 거기 계십니다.
3. 본문 29절은 "이스라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답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입니다.
1) 야곱은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큰 도량 때문에 요셉을 부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재물이나 어떤 쾌락도 언제나 수고스러운 삶을 영위해야 했던 가나안 땅에 대한 염원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것은 야곱이 위대한 용기를 가진 증거입니다.
2) 또 자기 자손들에게 출애굽의 희망을 고무해 주면서 돌아갈 때, 자기 뼈도 가나안으로 가져가 달라고 당부한 것은 그의 시종일관된 믿음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임종을 맞아서 뒤에 남는 자들에게 승리의 나팔소리와 같은 말로 활력을 고무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 후손들에게 이루어 질 것을 확실히 믿은 것이 아니라면 자기 유골에 대한 이 같은 세심한 배려는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신앙은 격랑을 겪고 있었지만 결코 난파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더욱이 그는 아들 요셉에게 불신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일의 중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1) 분명 그가 경솔한 맹세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약속이 그만큼 거룩하고 엄숙하면 그만큼 자손들이 잘 기억하게 되어 자기 아버지의 유골을 모셔가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또한 자기 아들 요셉에게 대해 가졌을지도 모를 일체의 반감을 무마시키겠다는 지혜로운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애굽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애굽 나라 전체에 대한 어떤 비난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이 나그네는 그 찬란하고 고귀한 나라에는 자기 뼈를 묻을 곳이 없어서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격이었습니다.
(3) 그러므로 야곱은 요셉이 맹세를 하고 나면 왕에게 그 같은 간청을 보다 담대히 하게 되고 또 맹세를 했기 때문에 보다 쾌히 응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요셉은 이것을 핑계로 왕에게 노여움을 사는 일을 면했습니다.
(4) 또한 바로 이것은 야곱이 자기 아들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임무를 요셉에게 부탁한 이유가 됩니다.
다른 형제들은 왕에게서 그 같은 호의를 얻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감히 그런 행동을 할 생각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 나그네요 서민인 자들은 왕의 총애도 어떤 권위도 역시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5) 한편 요셉에게는 점차로 동족을 잊어버리고 애굽의 꼬임에 빠져 함정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도 필요했었습니다.
4) 어쨌든 이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의도적으로 엄숙한 맹세를 하게 했고 자기가 푸대접을 받은 땅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그 자신을 위한 헛된 소망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가 묻히고 싶어하는 그 땅은 그가 많은 수난을 당했고 결국에는 굶주림 때문에 할 수 없이 떠나 유랑의 길을 나섰던 그런 곳입니다.
또 야곱이 자기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으라고 요셉에게 말한 뜻은 24장 2절에서 설명된 상징입니다.
4. 본문 30절은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입니다.
1) 이렇게 야곱이 임종시에 요셉을 불러서 자기를 가나안 땅에 매장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상 때부터 믿어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앙을 다시 확고히 하는 한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5:12-21). 이 또한 교회에 대한 약속입니다.
2) 특별히 이 구절에서 '눕다' 란 말은 '죽는다' 란 뜻으로 쓰일 때는 언제나 영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말인 것 같습니다.
이중 동굴에 자기 조상들과 함께 매장된다는 것이 죽은 다음에 그들과 연합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야곱에게는 어떤 뜻이 있었겠습니까?
또 죽음 자체도 그들의 신앙의 힘을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야곱과 그 조상들이 어떤 관계(끈)로 서로 연합된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무덤에서 이 같은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도 우리는 공통 유업을 누리고 있도다" 라는 소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 모두 교회 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은혜롭고 복된 말을 야곱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였고 요셉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서 전인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5. 본문 31절은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표현법을 빌어 모세는 다시금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아버지의 장례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면 그것을 특별한 친절로 생각하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마치 자기가 가장 소원하던 것을 이룬 사람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쇠약한 몸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2) 본 절 후반은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입니다.
(1) 그가 자기 침상 머리 쪽에서 경배(예배)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누워있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으나 기도하는 사람의 엄숙한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2) 다윗에 대해서도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왕상1:47).
그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나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했습니다.
(3) 헬라어로는 이것을 '지팡이 꼭대기에서' 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에서(11:21) 이것을 따랐습니다.
그 단어들의 유사성 때문에 그런 해설이 나온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미타-)는 '침대'를 (모-타-)는 '지팡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미숙한 신자들에게 불필요한 반감을 주지 않으려고 당시에 통용된 대로 '지팡이' 쪽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한편 야곱이 자기 아들의 홀(왕권을 상징하는 지팡이)을 경배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또 야곱이 자기의 지팡이를 의지하여 머리를 숙여 절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에는 아무런 애매성이 없기 때문에 이미 말한 사실 즉 이 의식은 야곱이 자기 큰 기쁨을 겉으로 표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으로 족합니다.
3) 이렇게 "침상 머리에서 경배"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아래서 보이신 야곱의 놀라운 신앙입니다. 그의 몸은 노쇠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약하여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답게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왕상1:47-48).
이것이 참 신자가 받은 바 신령한 복이요, 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 가고 있는 노년의 길입니다.
4) 이제 말씀을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1)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교회아"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교회를 이루어 사는 것입니다.
(2)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이 70이며 80일지라도 인간적으로는 수고와 고통과 슬픔 뿐 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지상 생활에서 최상의 열심이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항상 이런 소망을 말하고 응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4) 몸은 쇠해도 신앙을 쇠하지 않는 그런 길을 간구하십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인의 길을 가십시다. 그리고 감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