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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4:1-4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칼빈
이 시편 말씀에는 기도와 찬양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긍휼을 높이 찬양하면서, 동시에 다윗은 전 인생의 여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시련들을 생각하면서 또한 다윗은 아직도 악인들과 갖는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은총을 끝까지 보여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이 시와 18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18편은 완전한 승리로 나라가 견고하게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계속 번영할 것을 말하는 반면에 이 시는 두려움과 불안을 나타내는 한두 가지 일들이 섞여 있으며 아직도 조심해야 할 원수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입니다.
다윗이 나라를 얻게 하고 놀라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 찬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힘’(칼빈 ; 나의 반석-한글)이라고 한 것은 다윗이 가졌던 것이 어떠한 용기든지 위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한낱 목동이었다가 힘센 전사로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가졌던 인내와 변함없는 태도가 특별히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반석”으로 주석하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해 줍니다.
설명을 통해 그가 나중에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호전적인 기질을 가졌지만 이는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 변화를 거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시작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러한 시도는 인간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은밀한 도움에 힘입은 것 외의 다른 추측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삼상17:40).
시편 144 편
2. 2절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입니다.
히브리어에서처럼 그 말을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라틴어에서는 거칠게 들립니다. 다른 곳에서처럼(시18:50)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왕’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임명받은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기에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자기가 소유한 선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 것임을 뜻합니다.
언어의 반복은 불필요하게 보이나 이는 믿음을 크고 강하게 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극심한 시련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잘 압니다.
우리가 급한 상황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설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다 해도 우리는 매우 흔들리기 쉽고 우리의 마음을 거의 압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단지 감사의 표시로 다윗이 여러 말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모든 공격과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항하여 무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עמי (아미; 내 백성)를 עמים (아밈; 백성들)으로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거창한 번역을 좋아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윗은 단지 자기 왕국의 안정된 상태가 자신의 권위나 힘, 용기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은총에 의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רדד (라닷)은 보통 ‘퍼뜨리다’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백성이 퍼져 나간다는 말은 한 백성이 번영되고 복된 상태에 쉽게 이른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몇몇 사람들의 개념은 억지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가 한 민족을 굴복케 하되 발 아래 짓밟을 정도로 억압한다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우리는 강력히 반대합니다.
이런 난폭한 지배는 택한 백성(주의 거룩한 기업)에게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한 민족이 율법에 기꺼이 순종하고 모두가 자기들 처지에서 평화스럽게 적응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복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착한 곳에 교란이나 혼란이 없을 때 위에서 말한 대로 그 백성은 퍼져 나간다고 묘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방 적과 싸워 승리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나라가 안정된 상태에 이른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44 편
다윗이 비천한 상태에서 일어서게 되었고 중상모략으로 미움을 받았기에 다윗이 평화스러운 통치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믿기 어려웠습니다.
백성들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다윗에게 복종했기에 그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3-4절은 “(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 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비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선하심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받았던 은총을 특별히 선포한 후 눈을 안으로 돌려 묻습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이같이 알아주시나이까?’
여기서 다윗은 사람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는 것은 그 상황만이 주목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다윗은 인간의 비천한 상태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흔한 본성을 언급하여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이 인간의 본성을 논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으며 사람은 헛것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부하신 선하심이 무가치한 사물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잊어버리기 쉬울 때와 우리가 보잘 것 없으면서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 인생이 짧다는 사실로 우리의 모든 교만을 꺾어야 함을 경고 받습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하면서 관련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우리에 대한 안정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진리도 배웁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무가치한 피조물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시편 8편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우리에게 거의 같은 진리가 주장되었습니다.
시편 144 편
시144:5-8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이미 본 시편 1절에 말한 바와 같이 다윗은 전쟁에 승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원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바 아니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있어서 부절히 악으로 더불어 싸울 자입니다.
다윗은 이 부분에 있어서 그 원수에게서 구원해 주시기를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 있어서 다윗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1. 본문 5-6절은 “(5)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 기가 발하게 하소서
(6)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하심을 마땅히 찬양한 후에 다윗은 현재의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자기 나라의 보존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영웅적인 용기로 하나님께 영광돌림을 보았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다윗은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을 드리우고 산들로 연기를 발하게 하시며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신다는 등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말을 사용함으로서 다윗은 우리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이해하는 자들 사이에 있는 모든 장해물을 그 신자들에게서 제거해 버립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 사용된 거의 같은 어귀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가 기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보호받은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도움을 구한 데에 있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실 때 그러한 표적들이 항상 일어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특별한 일들을 언급함으로서 예기치 않은 종류의 일들이 그에게 일어난 것을 찬양할 만큼 좋은 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뜻하는 바는 다릅니다.
그가 절망에 압도될 정도로 여러 종류의 파멸로 위협을 당했음에도 다윗으로서는 모든 종류의 장해물이 사라지기 전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다윗이 구원을 인간적 치료책에 국한시키지 않으려는 선한 이유 때문에 이런 비유적 어귀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보통 방법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44 편
2. 본문 7-8절은 “(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 여 건지소서
(8)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앞에서 사용된 비유, 즉 세상적인 모든 도움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손을 펼치사 위급한 상태에 특별한 도움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명확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크고 깊은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출생이 달라서가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다윗의 말이 무할례를 가리킨다는 것은 실수입니다.
오히려 거기서 다윗은 육체를 자랑하는 타락한 유대인들을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에 다윗으로서는 공공연히 폭력과 무기로 그를 공격했던 외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의 오른손”을 다윗이 기대하고 수행했던 성급한 시도가 좌절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이는 거짓 맹세하듯 맹세하는 엄숙한 의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것을 혀로 거짓말할 뿐 아니라 손으로 사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말한 대로(잠11:21, 16:5) 손으로 약속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다윗이 여기서 거짓되고 배신하는 불성실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데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병행되고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혀와 속이는 손으로 하는 그들의 약속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입으로 발하고 손으로 주는 것은 속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4 편
시144:9-11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다윗은 현재에도 난관을 당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원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원수들의 특징은 거짓으로 행함입니다(8-11).
성도를 가장 괴롭히는 자는 거짓된 자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극히 사랑하여 추구하는 것은 진리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지 못할지언정 진리와 진실을 따라갑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궤사”한 말과 그런 행위의 소유자가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본문 9-11절은 “(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해하며 열줄 비파로 주를 찬 양하리이다
(10)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 시니이다
(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 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으로서는 다시 침착하게 의심 없이 하나님께서 한번 베풀어 주신 은혜를 계속하실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 노래”가 특별히 흔하지 않은 종류의 노래를 뜻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대가 사람의 판단을 넘어서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기대하는 의도에서 다윗으로서는 보통 감사와는 다른 그 본질상 전례없는 찬양의 노래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줄 비파”에 대해서는 교회가 초창기에 복종했던 율법 하에서 훈련 체제의 일부를 형성한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새 노래의 주제입니다.
즉 왕들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이 칼에서까지 건져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해 왕으로 임명한 다윗을 보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왕들” 이란 많은 평민의 반대되는 개념을 시사하는데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다윗은 평민들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자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144 편
다윗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특히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되는 원천인 정치질서 유지에 특히 나타난다고 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 다윗 스스로 하나님을 자기 나라의 방패로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은밀한 하나님의 통찰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정부를 시시하게 보며 누구도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 상태보다는 멍에를 벗어 버리고 왕위를 전복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다른 왕들과 구별하여 다른 곳에서처럼 자신을 “열왕의 으뜸”(시89:27)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다윗에게 분명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에게 분명하게 주어진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다윗은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분된 칭호로서 다윗으로서는 특별한 이름인 ‘하나님의 종’임을 주장합니다.
모든 왕들이 하나님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어떠한 이방 왕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인정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레스 왕에게는 그러한 명칭이 강조하여 주어졌습니다(사45:1).
다윗은 세상 누구보다도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권위를 가졌습니다.
또 권리를 가지고 구분된 명칭이 다윗에게 붙여진 것은 다윗 스스로가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해하는 칼” 이라는 말은 다윗이 여러 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윗 스스로가 당했던 모든 위험을 뜻합니다.
시편 144 편
시144:12-15 우리 아들들은
다윗은 자기의 다스리는 나라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안정될 것을 확신한 고로, 여기서 그것을 현재의 사실처럼 묘사합니다.
1. 본문 12절은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돌과 같으며”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 결론 구절을 소원이나 기도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통하여 온갖 종류의 복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다윗이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여주신 관대하신 사실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려움과 혼란 속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사악한 자들과 내부의 원수들에게 모두 끊어졌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동시에 보존되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갖는 종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실패하고 좌절하는 짐을 지우게 하는 두드러진 복을 내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아이들을 언급함으로서 말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남자 아이들의 탁월함을 찬양하면서 ‘어릴 때 자라는 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나무들은 일찍부터 크게 자라지 않는 한 좀처럼 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자들을 건물을 아름답게 하는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에 비유합니다.
다윗은 건물이 모퉁이 돌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의해 장식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고상하고 잘 훈련된 후손들을 하나님의 지상 복의 제일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되는데 이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좀 더 넓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윗이 모든 백성의 이름으로 말할 때 자신의 일도 그 공동체와 혼합해 말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가 오직 개인적 유익에만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측합니다.
2. 본문 13절은 “우리의 곳간(모퉁이 - 칼빈)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입니다.
시편 144 편
“곳간”이라는 번역을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앞절에서 “모퉁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זוה (자바)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되었기에 우리가 ‘구석이나 모퉁이가 가득하다’ 라고 번역한 말과 아주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사 מפיקים (므피킴)을 타동사로 취급하여 소출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즉 모든 복의 풍요함이 모든 모퉁이에서부터 흘러나옴을 뜻합니다.
מזן אל־זן (미잔 엘잔)은 어떤 주석가들이 생각하듯 다른 종류가 혼합되어 정리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게 쌓이는 것이기보다는 복의 다양한 면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자연한 과정어귀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그 단어 자체로는 그 의미를 충분하게 나타내지 못하므로 뒤섞여 쌓인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זן זן (잔 잔)이라는 표현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의미는 말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소출이 풍성하여 모든 구석까지 꽉 채우는 일이 사람들 사이에 흔히 있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3. 본문 14절은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늘 무거운 짐을 지는 우리의 수소는 날뛰는 일이나 돌아다니는 일이나 우리 거리에서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 칼빈)” 입니다.
히브리어 סבל (싸발)은 ‘운반하다’ 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מסובלים (므수발림)을 ‘건장한’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힘센 황소가 아니라면 짐을 운반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살이 쪄서 괴로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요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그 점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유익에 관계되는 모든 작은 것들에 관심을 쏟을 정도이기에 하나님의 어버이 같은 보살핌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 절에서 다윗이 소와 양떼의 번식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보았던 것처럼 지금은 수소의 살찜을 말하면서 우리와 관련된 것 중에 하나님께서 방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길 수 없다면 모든 것의 풍성함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백성들이 평화롭고 고요하게 되기 위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의 일부로 보았던 것입니다.
“침로하는 일이 없으며” 라는 말은 무너진 성문이나 성벽을 통해 들어오는 원수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믿습니다.
시편 144 편
“나아가” 라는 말을 국경 부근에서 포로들이 이리저리 고난받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뜻하는 바는 단지 우리 의견에 의하면 원수들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폭동이나 짓궂게 구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라는 표현도 갑작스런 반란이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원수들을 멀리 두셨기에 성읍에서 방해되는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4. 본문 15절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의 백성들에게 충분하고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결론합니다.
그러한 덧없는 복으로 인간의 복을 평가하는 세상적인 생각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즐기는 자는 복되다는 것과 그러한 덧없는 복으로부터 참된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을 연결하여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 받은 자들이 그들의 조물주를 어리석고 태만하게 무시하지 않고 그가 베푸신 은혜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 데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주는 자를 복되다고 하는 데는 잘못이 없습니다.
삶의 어떠한 수단도 부족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한 섭리는 그의 놀라운 사랑의 표시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부터 그가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살핀다고 충분히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무엇이 더 바람직한가!
모든 것은 이 점과 관련하여 보아야 합니다.
단지 짐승 같은 만족을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선택한 자만이 복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부족하여 한때 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며 어느 정도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반면 가난과 부족 때문에 일생동안 투쟁하는 성도들이 비참한 것은 아니다 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위로로 부족을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