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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 생활 김유정
삼새
“광부는 말이여, 빛날 광이 아니라 미칠 광에 광부, 광쟁이라니까! 감독해봐야 공짜 술과 둔, 담배라는 아리랑, 가시나 뿐이 더 있나! 고도리 판은 뒷돈이 없으면 자금을 빌려 판을 벌리지만, 광산일은 광산권이 있다하여도 사기당하는 일도 부지기수, 뒷돈이 없으면 회생불능이오. 그러니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버력 한 방에 뫼이요. 거대한 태산 같은 빚더미 올라앉는 것이 노랗게 때깔 나는 개살구처럼 빛만 좋은 미칠 광쟁이오.” 모 광산 김 사장은 전하는데.
사직동에서 동생 김유정과 함께 살던 누나, 어느 여름 광업소 기사라는 정씨와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광업소”란 회사명을 주시하기로 해본다. 그 이후 느닷없이 식객인생이 된 김유정, 분가 이야기가 나온다. 재산 소송까지 갔으나 실레마을로 내려와 고소를 취하하고 1931년 형이 얼마 안 되는 돈을 손에 쥐고 다시 경성으로 상경을 하게 된다.
한편, 김유정이를 보고 못 마땅히 여기는 매형, 처남 김유정이에게 취직독려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유정이는 충청도에 있는 광업소현장 감독의 직책인 몸으로 가게 되는데, 일정 말기 1931년 유정 나이 24세다.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금 따는 콩밭과 금’이란 소설을 썼다.’---------------------------이선영 연구 자료에서.
한국의 광상은 마그마에서 포함되어 있던 금이 땅속 지층에 균열된 틈을 따라 올라오다가 식으면서 녹던 광물이 침전해 만들어진 광상 중에 한 광상이라 한다.------------모 대학 교수 연구 자료에서.
1931년 일제 강점기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31년부터 1945년 까지는 일정 말기 시대로 병참기지화와 전쟁동원 시기다. 그러나 금 부치를 보고 누가 욕심내지 않을까! 갱 작업은 계속된다.
갱 굴진작업은 노미라는 정으로 시작된다. 생석인 경우 무 동발, 파석엔 동발을 세운다. 이 작업을 하기위해 무너질 위험요소의 갱내 벽에 설치되는 동발의 재료는 길이 다섯 자 정도의 적송이 사용된다. 수분형성조건에 나무가 썩을 것 같지만 밀폐된 공간이나 수장 시에는 송진이 함유된 적송이 더욱 더 견고하다. 지금은 쇠말뚝이나 시멘트가 조합된 와이어 파일 공법이나 일정시대의 다릿발을 해체 해보면 지반 기초는 나무 말뚝을 박은 공법이다. 쇠말뚝 보다 나무 말뚝이 수중에서 더 오래 간다는 평이다. ----광권을 소유하고 실제 사장으로부터 들어보다.
자연법칙의 의거 쇠와 물은 상극이지만 나무와 물은 상생 조건이다. 쇠는 부식이 되지만 나무는 수장 시에 잘 썩지 않는다는 지론이다.
지질 조사 후 금이 다량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이면 철로가 집중적으로 놓였다.
경성에서 양수리, 양수리는 일정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다. 춘천과 원주를 오가던 삼거리 철로가 형성된 지역이다. 이 부근의 철로가 끊어지는 날에는 완전 마비다. 일정시대 양수리, 원주 반곡, 신림 똬리굴, 제천, 영월, 신동, 정선, 여량, 송계(임계)에 철로가 놓인다. 왜 이런 산골짜기에 철로가 놓였을까! 주된 속셈은 정선 동면에 있는 천포광산의 노다지다. 1922년부터 1945년 일정말년까지 금이 지속적으로 채굴된다. 화암동굴 자체가 천포광산이라 하는데 생산 5위다.
임계에는 덕암광산, 골지리 새우광산, 공영광산으로 금이란 금이 보이면 지하에 수은을 중독 시키고 채취했던 것이다.
춘천에는 심성암층이 모여 있다. 그것도 시생암층이 빙 둘러 애어 싸 섬 모양을 이루었다. 이런 부근에 금광이 있었던 덕두원과 서면 일대의 북배산 자락이다. 북배산 동남에 동 서면에는 오월광산과 덕흥광산,
북배산 동남에 남 덕두원은 우일광산, 덩덕광산, 한일광산 총 오개 광산이 자리를 잡는다. 아울러 가평 북면에는 가평광산, 무성광산이 있었다.
해방 전후 강원도에서 최다 광산이 산재하고 있는 곳이 홍천일대다.
두촌에서 일을 하다가 들은 이야기다. 선조가 일정 때 광산 일을 했었는데 근방의 산에 노다지를 숨겨 놓았다고 한다. 후손들은 오늘 날까지 그것을 찾아다닌다고 하는데, 노다지는 숨바꼭질 하는지 산 속에서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웃고 말았지만 노다지를 보면 누구나 챙기지 않을 자 없다. 시간은 금이라 하는데 금은 밝은 미래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두촌에는 가족광산, 도목동광산, 동양홍천광산이. 내촌에는 백우광산, 대곡광산, 화상대 광산, 광암광산이. 남면하면 양덕원 광산이다.
화촌하면 장평광산, 제2삼화광산, 야시대 광산이고, 홍천하면 중앙광산, 삼호광산이다. 서석에 풍암 90호 광산, 성지광산, 제2 풍암 광산. 동면에
삼봉광산이다. --해방 전후 자료집에서.
인제 기린면에는 연 아연이 나오는 금대광산이 자리 잡았다.
일정시대에 춘천에서 소양강 줄기 따라 관대리, 인제, 현리 상남, 창촌 까지의 철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충청도에 있던 금광과 일정시대에 놓인 철로와 함께 자료 속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삼대 광산이라면 구봉광산, 무극광산, 삼광광업소로 손꼽을 수 있다. 광산에서 나오는 금의 매장량으로 볼 때 충청도에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현재도 살아계시지만 그 당시에 이북에서 남하를 했던 사람들도 알 정도다. 일정 시대의 지질조사 지도에 생생히 나타난다. 지도를 탐색하면서 알게 되었다.
충청도 일대는 심성암층과 시생암층 즉 양양에서 군산에 이르는 사선으로 이런 암석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광물생성조건의 원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봉광산---청양 남양면 구룡리에 있다. 금맥이 모여 있는 곳 9호까지 금맥이 밀집되어 있다. 지하 일천칠백이십 미터 아홉 개의 금맥 1971년 1월 20일부터는 대명광업에서 채굴을 시작했다.
무극광산--충북 음성 금왕면 무극리
1974년 3월 19일 동아일보,
“60년의 역사 어디 금이 안 나와 폐광했나요. 중간 간부들이 훔쳐 먹는 것을 경영자들이 못 막아 그랬지요.” ----광구 관리자 즉 광구 경비 자 박병규 증언에서.
말을 바꾸면 무극광산은 일제 강점기 1914년에 개발이 되는 것이다.
광맥은 흰 석영 맥 사이로 들어있는 검은 띠 부분으로 형성되어 가는 맥이라 한다. 검은 수분의 함유와 더불어 옥수수 열매처럼 치약으로 닦지 않는 누런 이빨 색으로 형성된 것이라 하는데, 금이 차돌박이 수정 속에 뭉쳐있는 것이 노다지라 하는데.
삼광광업소--금북정맥이 흐르는 국사봉, 생석이 아닌 파석으로 이루어진 지층 속에 과도한 무 동발 설치로 인한 죽어간 광부의 삶을 달래주듯 국사봉 정상에는 현재 십자형 탑이 놓이고, 남서 남향으로 삼광광업소가 둥지를 틀고 있다.
항도는 오번 즉 다섯 개의 금갱 입구 번호와 항도 길이 일천 이백 미터로 하루에 깊이 1m 20에서 40cm 즉, 네 척의 굴진작업이다. 년 수로 계산하면 삼년이 넘는 작업량이다.
충남 청양군 운곡면 신대리 매미실 마을과 예산군 신풍면 봉갑리 상갑패 마을 사이에 있는 이 광업소는 일정 시대 일본의 대재벌 미쓰비시 운영, 말기에 금산정비로 작업 중지한다.
동소에 있던 기계를 다른 곳에 이동한다. 항도는 오번, 항도 길이는 일천하고도 이백 미터 해방 전까지 엄청난 금을 채취해 증기차를 이용하여 예산에서 광천, 보령, 웅천, 서천, 군산으로 운반한 뒤 군산에서 배편으로 남해를 돌아 한국의 땅이라 하는 현해탄을 건넜던 것이다.
“우리 금 돌려주소!? 그렇지 않으면 지하에 수은 중독으로 얼룩진 땅을 완벽하게 복구해주던가?!”
대마도라는 그네 땅 현해탄이란 지명은 언제부터 생겼나! 진정한 한국인이라면 훗날 연구해볼 일이다. 대마도의 지질은 낙동강 부근의 지질과 같다. 일본 노 지질도를 보면 한반도를 어떻게 연구하였는지 일본이란 본주와 함께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 엄청난 지질 조사와 생물조사보고서 두고두고 탐구해 볼만 하다.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대낮처럼 훤히 보인다.
또한, 일정 시대의 지질을 탐구한 지도를 보면 남한의 중요한 역은 경성과 춘천, 군산, 대구, 부산, 다섯 개의 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철로 노선은 광물의 운반목적이다. 광물질의 매장량이 많은 곳까지 집중되어 있다.
금강산도 춘천에서 가는 철로 노선이 있었다.--일정 시대 지질도에 나타난다.
“금강산은 최대의 철 생산 중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벌집처럼 맨 갱이다.”--일정 시대를 살아왔던 증언자 말 중에서.
삼광광업소를 바라보며,
“그 주의에는 냇가가 있고 논두렁이 있다”
-------산을 탐색하러 다니는 등반가 간산 이야기 중에서.
“갱 감독하면 파워가 엄청 나겠지요?”
“지금이나 그때나 두말 하면 잔소리 아닌가! 엄청나지. 현장감독이란 총 감독도 하겠지만 갱 입구로 출입하는 광부들을 갱 출입구에서 감시 역할. 노다지가 나오는 날이면 주야장창 보초를 서는 것이 주된 임무. 그러나 잘 봐달라고 눈감아 주는 대가로 술이나 돈이 슬쩍 오가면, 밤이 새도록 금방아 노다지 빵구듯 새각씨 가슴을 품는 것이 낙이지 뭐 있겠소!”
“하하하, 돈이 좋지요. 돈이면 저승사자도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던데, 아따 심청이가 둔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몸보신 하라고 지렁이를 삶아서 드렸다고 하던데.”
“고기를 잡을 길 없어 임당수에 빠졌나!”
일정 때 어느 광산에서 일한 분과 대화 중에서.
이 주위의 지명을 알아보니 개울 건너 서쪽에는 큰골이 놓이고, 남쪽 상갑리 원동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동소와 동리 사람들” 역시 여러 소설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 지명이 아닌, “같은 장소,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 의미를 부여한다.
“광부 삼백여명을 부리는 노다지판......” ---김유정 소설 편에서.
광부삼백명이면 그 당시로 보아 굉장히 큰 광산과 버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일백 명이 관리자라 하면, 실제 일하는 광부는 이백 명 갱 속에 한 조당 열 명씩 잡아도 이십 개의 팀이 주야간 운영되는 곳이라는 것이 예측이 된다.
광업소의 운영은 굴진(굴착) 조, 채광 조, 운반 조, 선별 조, 관리 조로 편성된다. 갱의 형상은 금맥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사갱, 수직갱, 수평갱으로 이루어진다. 굴진 조는 광부들의 안전을 위해 갱내에 동발을 세우며 굴진한다. 채광 조는 즉 막장인생으로 광석을 채취한다. 운반 조는 광석을 운반한다. 선별 조는 금방아를 운영하면서 수은을 이용하여 금을 선별한다. 관리자는 시설관리 유지보수와 노무, 광부들의 이동 감시다.
몇 개월 동안의 광산 일, 빛날 광이 아닌 미칠 광이라 하는 광부, 광쟁이, 거칠어 보이는 현장 말투의 광부들 속의 김유정 감독 생활은 24세 삶으로 보아 장대비라도 오는 날이면 고독하고 죽을 맛일 것이다.
“북 삼호 구뎅이......” -----김유정 소설에서.
여기서 “북 삼호”란 북쪽으로 갱을 파 들어간 갱 입구의 명칭일 것이다. 백여 척 길이 하루에 온종일 파들어 가봐야 깊이 1m 20에서 40cm굴진 작업, 그러니까 1척은 한 자로 30.3cm 백 여척이면 삼십 미터 넘는다. 하루에 네 척 일한 날을 계산하면 꼬박 이십오일, 정으로 쪼아 휴일을 제외한 한 달에 거쳐 굴착을 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삼광광업소에 일신산업에서 30억을 투자한다.
------------매일 경제 신문 1987년 10월 31일 자.
간접경험이든 직접 경험이든 금광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금과 금 따는 콩밭”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부는 갱 입구에서 몸수색으로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되어 몸수색으로 하루 일과가 끝난다. 그것도 알몸수색이다. 이유는 전이 되는 노다지 때문.
김유정은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 회상을 했을 것이다. 금광에서 생활하는 언어와 생활사가 자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생생히 기록된다.
김유정이가 금광생활을 했다는 예산을 알아보기로 한다. 충절의 고장이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운의 고장이다. 이곳 부근에는 대술면 영창광산과 당진과 예산사이에 있던 대영광산이다. 여기서 특이한 사건이 전개된다. 1933년 6월3일자 “조선중앙일보” 란에 대영광산에서 일천오백원의 금괴가 도난 되었다는 기사가 실린다.
이선영 연구 자료에서 김유정 생애는 1931년 충청도 광업소 현장 감독생활 몇 달이이라고 기재 되어 있고, 최근의 자료에는 1932년에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하다고 표기하고 있다. 아무튼 김유정이가 예산 어느 광업소에서 떠난 후 아이러니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티브로 삼아 “금” 이란 소설을 작성했을 법도 하다. 옳지! 바로 그거야 그거, 꿀떡처럼 노다지를 꿀꺽 입에 넣고는 병아리 물 먹듯 검은 막장 천장보고 삼키고 나오는 장면을 그릴까! 아니면 항문에다 숨겨 나오는 장면을 그릴까! 결국 다친 몸에 노다지를 숨겨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금” 이란 소설 속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금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일장춘몽 금광생활 몇 개월이란 세월을 통하여, “인생은 굵고 짧게 그리고 반 미치도록 겸허한 마음으로.” 가공된 이야기라 하지만 김유정이는 생명을 다하여 그 시대의 금광생활을 훗날 되새기며 소설로 또박또박 퇴고했을 걸로 본다.
“금광이 있는 맞은 쪽 험한 산골 흩어진 동백, 개나리, 철쭉이 있고 금광 아래 산 중턱 발동기는 채신없이 퐁, 퐁, 뭇 사내가 감석을 나르는 모양......” -------------김유정 소설, “금”에서.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금광 옆에는 반드시 버력이 있다. 개나리와 발동기, 요 아래 즉 금광에서 가까운 중턱이다. 즉, 개나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임시 거처할 광부의 숙소와 중턱에는 발동기를 이용한 금방아가 설치된 평바닥이 형성되어 있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그 밑에 골물이 돌에 부대끼며 콸콸 흐른다. 그리고 물방앗간을 향하여 구르다시피 내려온 산비탈......’ 어딘가에 마을로 향하는 쪽으로 물방아가 돌아갈 물세 자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광산 옆 버력이 있고 요 아래 중턱 발동기를 이용한 금방아가 설치되었던 지형을 찾아라! 그리고 바로 그 밑에 골물이 돌에 부대끼는 콸콸 흐르는 계곡은 과연 어디일까!---1990년 상상 속에서.
간접경험이든 직접 경험이든 금광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금과 금 따는 콩밭”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부는 갱 입구에서,
“일렬횡대로 집합?! 피죽 먹었나! 꾀꼬리 죽 먹었나! 으이?! 동작 봐라 옷 벗는다 실시?!”
알몸수색으로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되어 알몸검사로 하루 일과가 끝난다. 이유는 비몽사몽속의 환상적인 전이 되는 노다지 때문.
소설은 가공된 이야기라 하지만, 특히 김유정은 실제 삶의 경험을 통하여 사실적인 지형묘사와 더불어 그 당시의 행위적인 삶을 토담위에 능구렁이 똬리를 틀 듯 능굴 맞게 광부들의 삶을 소설로 그렸다.
요즘, 구상은 본인이 하고 실제 작품은 업체나 제자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본인의 작품을 사랑한다면 몸소 뼈를 깎는 일을 하면서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 소인배는 이런 면에서 김유정이를 진정한 작가 인생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슬프고 고된 삶이 있었기에 더욱 더 가치가 있는 소설이 탄생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떠난 자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역사의 생명은 갱 굴과 자연 속 어딘가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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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선영, 김유정 연구 자료에 김유정 탄생일을 1908년 1월 12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전집에는 1908년 1월 11일로 되어있다. 누가 탄생일이 이틀이라는 것을 보고 논쟁하겠지만 자연으로 떠난 김유정 선생님이 알면 생전에 제대로 못 챙겼을 법한 생일을 더블 생신의 인생으로 간주하고 즐겁게 웃을 일이다.
많은 자료들을 대조해보니 생활사들이 일 년 차이로 지하에서 통곡할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 자료는 자료일 뿐이다. 역사의 진실은 확실한 증거물이다. 증거물이 나올 때 하나둘 진실 된 새로운 참된 역사가 탄생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요즘, 수 조원, 수백 억 원이 사건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백억 다음에 천억인데 몇 천억이란 말인가! 수치의 개념은 수억 원 수조원의 태산일수도 있고 눈꼽만치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하면 확대하지도 말고 축소하지도 말고 초심 속 추정으로 발표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