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2(일)_사14:1-23_긍휼히 여기시며 다시 택하사_
시작기도.
사랑의 주님, 주의 은혜로 새아침을 시작합니다. 죄로 물든 나를 주의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하늘양식을 주셔서 나로 살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해묵상.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바벨론 왕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14장은 놀라운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그날, 오랫동안 유리 방황하던 이스라엘은 드디어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이 그랬고, 여기 이스라엘로 모인 우리 또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회복이 이스라엘의 노력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떤 공로도 아닌, 오직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이 모든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족속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여기서 쓰인 긍휼(רָחַם)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라함(רָחַם)’은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마 9:27, 시 6:3)이자, 절박한 상황에 처한 자를 향해 끊임없이 염려하고 깊은 관심을 쏟는 사랑을 뜻합니다. 나아가 이 단어는 엄마의 태(womb,자궁)를 의미하기도 하여 엄마가 태중의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보호하듯, 우리를 품으시는 무조건적이고 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1절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나는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택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역시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나를 ‘다시’ 택하고 또 택해주십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1년 365일 매일 배신하고 죄짓는 사람을 어떻게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지체 없이 용서하라 하셨고(눅 17:4), 베드로에게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1-22).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적게는 일곱 번, 많게는 490번씩 주님을 아프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 정말 너무한 것 아니냐, 이젠 끝이다’라며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회개하며 나아갈 때, 기다렸다는 듯 지체 없이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품어주십니다.
본문에서 ‘다시’로 번역된 히브리어 ‘우드(עוּד)’에는 두 가지 놀라운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두 팔로 감싸 안다(encircle)’이고, 둘째는 ‘증인으로 부르다(call to witness)’입니다.
창세전에 나를 택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내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 두 팔로 꼭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을 증언할 ‘그분의 증인’으로 우리를 다시 세상에 세우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 3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을 괴롭히던 세 가지 고통—곧 슬픔과 곤고,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고역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하시고,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안식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며, 이사야 14장 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이사야 14:3,새번역>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고통과 불안을 없애 주시고, 강제노동에서 벗어나서 안식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은 과거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의 잔혹한 포로 생활, 그 고된 고역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주는 온갖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누아흐(נוּחַ)’는 아주 특별한 순간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로 온 세상이 물로 심판받았을 때, 구원의 방주가 마침내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안식했을)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이 ‘누아흐’입니다.
구원의 방주는 곧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수개월 동안 거대한 홍수와 심판의 풍랑에 휩쓸렸던 방주가 마침내 아라랏 산에 온전히 닿았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나의 마음’에 닿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오셔서 마침내 참된 안식을 선물하셨습니다.
성경이 선포하는 안식의 날은 단순한 쉼이 아닙니다. 나를 괴롭히던 대적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의 날입니다(신 25:19).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채찍 소리와 강제 노동 속에서 육신이 부서질 듯 고통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역의 현장에서 곤고함에, 매 순간 몰려오는 깊은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된 노동으로 몸도 마음도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날은 육체를 짓누르던 그 혹독한 강제 노역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날이요,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분노와 불안에서 마침내 완전히 자유케 되는 은혜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3절이 선포하는 ‘안식을 주시는 날’은 과연 언제이겠습니까? 바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삶과 마음에 찾아와 완전히 닿으신 바로 그날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에 닿으신 그날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세력은 여전히 우리의 이 육체를 통해 날마다 우릴 괴롭힙니다. 선한 일을 하려 하는 나의 의지를 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며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3절부터 20절은 바벨론 왕을 향한 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거대한 권력으로 이 땅을 호령하는 자들이 스올(음부)에 떨어져 참담하게 멸망한 바벨론 왕을 조롱하며 맞이합니다.
성경에서 이 바벨론 왕은 단지 역사 속의 한 왕에 그치지 않고, 세상 권세를 쥐고 흔드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즉, 본문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스올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질 세상의 왕, 사탄의 비참한 종말과 운명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이사야 14:12,카톨릭성경>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네가! 민족들을 쳐부수던 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다니.
빛나는 별이었던 그는 왜 하늘에서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4:13,쉬운말>
너는 일찍이 마음속으로 장담하기를 ‘내가 하늘 높이 올라가리라. 내가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거기에다 나의 보좌를 펼쳐 놓으리라. 머나먼 북쪽 끝, 신들의 회의 장소인 그 산의 꼭대기에 내가 자리 잡고 앉으리라.
피조물인 사탄은 마음 속으로 결심했습니다. ‘하늘 높이 올라가겠다. 그곳에 나의 보좌를 펼쳐 놓겠다’.
그리고 급기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14:14,쉬운성경>
구름 꼭대기까지 올라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겠다
바벨론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과도 같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멸망을 감히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그가 내뱉는 말은 곧 진리이자 절대적인 법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신처럼 군림하며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던 그 절대권력자도, 결국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도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었고, 자신의 말에 책임조차 질 필요가 없었던 자만함의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비참하게 추락하였습니다. 조상 때부터 쌓이고 쌓여 온 가증한 죄악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렸듯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 아니 490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죄를 짓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 죄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죄는 동일하며, 죄지은 자의 비참한 마지막 운명은 본문 말씀처럼 구더기와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스올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 중에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사는지 우린 직면해야 합니다. 죄가 모두 동일하게 단번에 우릴 스올로 데려간다는 점에서 그 죄는 사탄의 죄와 같습니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내가 내 자리를 높여,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교만입니다.
비록 입술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도 ‘내 자리를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삶, 그것이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요, 사탄이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비참하고 무력한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선택받은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에 무너지는 우리는 이 육체에서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대로 낙심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홀로 지셨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헤매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죄를 깨달을 때마다 즉시 용서하여 주십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내 자리를 높이리라’ 하며 세상 욕망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를 주께서 멈추어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어미가 자식을 태에 품은 것처럼 우리를 ‘긍휼히(라함)’ 여기셨습니다. 죄로 무너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따뜻한 두 팔로 꼭 감싸 안으시며 우리를 ‘다시(우드)’ 선택하셨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거룩한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아멘.
나의묵상.
내가 무엇이길래 주께서는 이렇게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것일까? 이렇게 많은 죄를 짓고 사는 나를 주님은 왜 이렇게까지 매일.. 아니 매순간 용서해 주시는 것일까? 주님은 나를 다시 택하시고, 다시 택하시고.. 또 다시 택하셔서 세상이 준 슬픔과 곤고와 수고와 고역에서 놓으시며 안식을 주신다. 이 안식은 이 아침 주께서 나와 우리 더함교회 가족에게 주시는 안식이다.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께서는 하늘에서 내리신 주의 양식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며 만족하게 하신다.
묵상기도.
주님, 나의 자리를 높이고 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주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만물을 통해 말씀하시니, 모든 일에 경청하게 하시고 주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