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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의 징정한 의미, 모성원리와 여권의 인식
- 정영자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자아와 일 그리고 사랑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자기 주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식의 현실 인식의 적극성을 드러내는 수필은 주로 페미니스트 의식을 가진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수필의 하부장르 중에서 여성인 작가가 세계를 발견하고, 세계와 접촉하면서 그 속에서 여성의식을 어떻게 표출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여성수필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성수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 정체성 확립에 성적인 정체성이 확립이 포함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 작품의 작가가 여성 본인인 경우에 빚어지는 변이를 자연스럽게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특성 중에 가장 페미니즘적인 것은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적극적인 인식으로 자아, 일, 사랑이라는 삶의 내용을 꾸려가는 데 있어서 남성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주체적이 된다는 점이다. 여성의 문제는 결국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의사 결정권을 확보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정영자의 의식을 담은 수필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성을 찾았을 때 남성들이 말했던 자신들이 아님을 알게 되고, 자신이 가치 있고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순간을 경험함으로써 여성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복합적이고 가변적인 장르일지라도 최소한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가능한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과 성인의 세계에 입문하여 작가가 겪는 내면적 갈등과 세계에 대한 각성을 주로 담고 있다는 점 등이 페미니즘수필의 최대공약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광의의 개념을 취하더라도 그리고 작품 속에서 여성의 의식을 노정하고 있더라도 페미니즘수필이라고 했을 때는 여성작가에게만 가능한 사회적 선택의 영역을 상정하게 된다. 때문에 페미니즘수필에서의 전형적 인물은 소설과 달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지칭하게 된다. 여성 작가가 삶의 오류로부터 진리로, 혼돈으로부터 선명함으로,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자연으로부터 정신으로 변화를 이루는 과정을 문제 삼을 때, 이런 과정 자체가 여성 작가의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수필이 전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자아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자아 발견을 위한 경험은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성에 따라 그 역할이나 기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정체성 발현으로 간주되는 여성 의식의 특성을 ‘여권 수호성’에 두고, 정영자 수필의 그 특성을 ‘참여적 사회성’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II. 펼치며
수필가는 생존이 하나의 엄연한 현실인 이상 현실을 자신의 현실로서 문제삼을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문학과 현실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수필집을 일별해 볼 때, 세기말이 지나고 새 세기가 지나고 있지만 여성의 삶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20세기를 시작할 때, 선각적 남성과 여성들이 여성해방을 하나의 신념처럼 외쳤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한 세기가 지나도록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여성에 관한, 여성의 삶의 양태에 대한 뿌리 깊은 가부장적 가치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왜곡된 사회적 관습도 80년대 들어서면서 이전과 달라진 양상을 띤다. 한국도 칠거지악과 남존여비의 시대에서 여남평등이 운위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여권이 신장되고 여성의 시간적 여유가 점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듯이 여성작가들의 수적 팽창과 함께 남녀동등권이 이들에 의해 확산되고 성차별이나 남성들의 성폭력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저물어가는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작가는 적극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사르트르가 말한 문학의 사회봉사 내지 현실 참여는 사회성을 뜻한다. 사회에 대한 봉사와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짐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작품 속에 드러나 보인다. 봉사정신은 작가의 마음에 따라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봉사 생활은 우리 인생에 큰 가치를 가져다주는 생활이다. 여성들이 가정 생활에서 벗어나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특히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국가 사회나 전 인류를 위해 자기의 능력이나 돈이나 시간을 희생시키는 생활이다. 적게는 조기 청소, 불우이웃돕기 운동에서부터 크게는 고아원, 양로원, 나환자 수용소 같은 것을 경영하는 사업, 전 인류를 구원하는 평화운동 사업 같은 일을 하면서 보내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 봉사 생활에는 크든 작든 자기 희생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위하는 박애정신이 없어서는 이런 생활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실적 여건에서 주부로서의 여성이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사회 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안사람이 아닌 바깥사람이 될 수 있다는 여성의 새로운 정체성 정립이라고 보겠다. 그러므로 여성작가도 문인인 이상 사회 참여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지나친 순수에서 참여에로의 큰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수필이 소설처럼 꾸며내는 작업이라면 차라리 허구적 세계로의 추상이나 가상세계에 대한 동경을 마음껏 꾸며 펼쳐 보일 수도 있겠지만 수필은 그런 이상세계를 창조해 내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의 경험 세계는 곧 수필의 내용이 되고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아무리 표현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좋은 경험이 없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는 일이다. 봉사적 생활은 진실한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실한 체험에 더하여지는 작가의 올바른 사고와 도덕적 가치, 사회를 바라보는 바른 안목과 가치관, 객관적 분석력과 비판력이 하나의 행동으로 작용되었을 때, 그 결과로부터 생성되는 게 사회적 수필이다.
21세기를 맞아 이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공업화 사회를 거쳐 제3의 물결의 정보화 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여성에 관한 가치관은 여성 자신의 태도로부터 사회적 통념에 이르기까지 정말 변화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에서 수백 년에 걸친 역사 사회적 변화를 불과 몇 십 년 만에 이루어낸 우리 민족이 여성관에 대해서만큼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로 아직도 구시대적 가치관이 여성 자신의 입을 통해서 당당히 외쳐지고 있는 문화 지체 현상은 흥미롭다 못해 당혹스럽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남녀가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남녀 관계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그러나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상을 지향하는 구시대적 풍조를 지양하고, 진취적이며 자아실현을 이룩해가는 여성상을 구현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수필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들 수필들은 진취적인 생활을 실현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여성의 사회참여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변해야 하며, 직업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정립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수필이다.
정영자는 근대가 여성을 배제하는데서 빚어지는 충돌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례를 보여준다. 굴곡 많은 삶과 문학 속을 배회하던 개인주체를 갈망한 신여성과 현실에서 경험한 모성의 갈등을 여성문학 연구를 통해 드러낸다.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모성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는데 반해 그는 여성적 특성을 인정하는 모성적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련의 글들에 모성 원리와 여권의 인식에 대한 입장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류의 반, 하늘의 절반인 여성이 움직이지 않고는 어떠한 변화 어떠한 변혁과 진보도 가능하지 않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여성 자신의 평등에 대하여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대학마다 여성학 강의가 개설되어 여성의식의 새로운 성찰과 방향을 제시하며 앞 세대의 여성 역할과 그 좌표를 설정해 나가기도 한다. 최근에 오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인간적 평등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여성 지도층의 각성과 함께 젊은 여성들의 욕구가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해방’이란 용어를 만들어 가면서 차별과 억압, 눈물과 체념, 인내와 순종 그리고 무보수의 노동에 대한 여성의 역사를 비판하며 진정한 여성 해방 없이는 평등한 인간해방이 없다는 논리 전개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해방’이란 용어에 대한 과민성 반응과 그 격렬한 의미 수용과 함께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해방이란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빼앗자는 것이 아니며 피해와 억압과 차별받는 것을 되돌려주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근본적인 인간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굵게 강조 : 인용자)
정영자, 「여성해방의 의미」 중에서 -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에 오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인간적 평등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여성 지도층의 각성과 함께 젊은 여성들의 욕구가 강렬해졌기 때문이라 진단하면서, 차별과 억압, 눈물과 체념, 인내와 순종 그리고 무보수의 노동에 대한 여성의 역사를 비판하는 '여성해방'이란 용어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다듬고 있는 글이다. 인간의 생존에 관한 문제와 가치 규명, 보다 보편적 의미의 획득이 문학이 지향하는 바이고, 수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면, 수필적 관심과 창작적 발상은 모든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신뢰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정영자의 수필의 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남여평등 실현을 추구한다. 여성작가가 말하는 여성해방은 근본적으로 인간 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야기하고 있는 남성 대 여성 편짜기식이 여성운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바탕과 문화전통을 고려해서 부분적인 성역할을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여성의 힘이 사회 전반에 필요하고 변화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닫는 여성이 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제창한 '남성여성의 양성동체론과 심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속의 남성, 남성 속의 여성성을 수용하는 진정한 성역할의 조화 속에 여성의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작가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페미니즘 수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필요요건 중에 하나는 '계속 가부장제에 충격을 주며 그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며, 이런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남성과 여성의 말과 글과 행동이 선천적으로 각기 달리 정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데 있다. 여성학에서 역할의 융통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의 수필이 여성적 시각에서 여성의 여성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비록 헌법이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남녀가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에 평등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 사회가 움직여 나가도록 여성 작가가 현실안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학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목적지향의 수필을 쓰는 것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하겠다.
80년대 후반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평가해야 한다는 여성 운동의 활성화로 문학 부분에서도 여성 문제에 대한 이론 작업과 창작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페미니즘 문학'이라 불리워지는 여성문학은 지금까지 부정과 금기의 항목으로 내팽개쳐 왔던 여성의 범주를 좀더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려는 문학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남겨 두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규명하고, 남녀가 함께 해방된 미래상을 꿈꾸는 여성 해방 문학은 본질적으로 가치 지향적이고 실천적인 문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여성소설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단순히 문제 제기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면, 수필에 있어서는 그것이 단순히 문제 제기나 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여성 차별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문학의 모든 장르가 여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수필계에는 사회수필이 별로 많지 않으며, 사회수필 중에서 중요한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즘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이런 작업에 앞장서야 할 여성수필가들조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대부분 여성 수필가들의 작품은 언제나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적'인 시각일 수는 있으나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아니다. 후자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부장적이며, 이런 사회는 평등의 법칙이 아니라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인간적인 사회며, 그러므로 이런 체제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개혁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여성학이다. 이 전제로 출발한 여성학은 1960년대 여성해방 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남녀 차별은 엄연히 상존하고 있지만 이런 현상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이 문제를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몇 가지로 설명한 댈리(Mary Daly)의 사상에 의하면, 첫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시시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이 세상에는 여성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전쟁, 인종차별, 공해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성차별이 제3세계에 대한 약탈, 흑인에 대한 약탈, 지구에 대한 약탈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나 한 듯이. 둘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특수화시킴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그것은 가톨릭의 문제며, 가톨릭의 문제는 중세시대의 문제"라고 말한다. 마치 가부장제도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도 않기나 한 듯이. 셋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늘 보편화시킴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진정한 문제는 여성 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이라고 말한다. 주로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이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제가 성 차별을 외면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는 분명히 옳지 않은 명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III. 닫으며
여권주의적 수필은 여성의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이 점고되고 동시에 남녀동등권이 확충됨에 따라 여성 수필가들을 위해 '페미니즘적 수필'이라는 새로운 주제적 장르가 생긴 것이다. 이런 수필들은 대체로 우리의 전통적 사회 현상이나 문화현상을 여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또 여성문제에 대한 고발과 기존 가치 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며, 나아가 미래 사회의 바람직한 남녀평등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여성수필에 있어서 여성의 문제는 몇몇 페미니스트 수필가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작품에서 억압의 철폐나 사회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메지지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주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는 선에서 제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정영자 수필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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