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열반송(涅槃頌)
幻人來入幻人鄕 환인내입환인향 仄平仄仄仄平平
五十餘年作戲狂 오십여년작희광 仄仄平平仄仄平
弄盡人間榮辱事 농진인간영욕사 仄仄平平平仄仄
脫僧傀儡上蒼蒼 탈승괴뢰상창창 仄平仄仄仄平平
허응보우<虛應普雨>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로 들어와
오십년 넘도록 미친 짓 하였구나
인간 영욕의 일을 다 희롱하고서
중의 탈 벗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노라.
등오도산송(登悟道山頌)
以道名山意欲看 이도명산의욕간 仄仄平平仄仄平
杖藜終日苦躋攀 장려종일고제반 平平平仄仄平平
行行忽見山眞面 행행홀견산진목 平平仄仄平平仄
雲自高飛水自湲)운자고비수자원 平仄平平仄仄平
허응보우<虛應普雨>
도란 이름 가진 산을 보고 싶어
짚팡이 짚고 종일 고생고생 올라왔네.
오르고 오르다 문득 산의 참 모습을 보니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흐르네.
이 게송(偈頌)은 허응(虛應) 보우(普雨) 선사(禪師)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열반송(涅槃頌)이다. 압운(押韻)은 향(鄕), 광(狂), 창(蒼)은 하평성(下平聲) 양통(陽統) 운족(韻族)이다. 이 열반송(涅槃頌)은 하평성(下平聲) 양통(陽統) 운족(韻族) 중에서, 작게(作偈)한 것은 근체시(近體詩) 작시(作詩)에 맞게 작송(作頌)을 하였다. 평측(平仄)은 기구(起句) 결구(結句)에서 하삼측(下三仄)과 승구(承句)가 하삼평(下三平)이 걸린 것이 흠(欠)이나 선사(禪師)님들 작게(作偈)로 본다면 평측운통(平仄韻統)에 맞게 지은 열반송(涅槃頌)이다. 보우선사(普雨禪師)께서 이 열반송(涅槃頌)을 지을 때가 제주도(濟州道)로 유배(流配) 가서 옥중(獄中)에 고문(拷問)을 받으면서 지은 게송(偈頌)인데도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 맞게 지은 것은 보우선사(普雨禪師)님의 지적(知的) 면모(面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우선사(普雨禪師)님은 유생(儒生) 사대부(士大夫)의 질시(嫉視)로 억울하게 요승(妖僧)으로 누명(陋名)을 씌워 비통(悲痛)한 장살(杖殺)을 당해 입적(入寂)하셨다. 고려(高麗)가 멸망(滅亡)하고 이씨조선(李氏朝鮮)이 건국(建國)되자,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政策)으로 스님들은 팔천(八賤) 천민(賤民)으로 신분(身分)이 하락했다. 도성(都城) 사대문(四大門) 안에는 출입(出入)도, 못하게 했다. 정치 이념이 유교(儒敎)를 숭상하다 보니, 불교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이조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면 유생들의 갖가지 수탈(收奪)로 곤욕(困辱)을 당했다. 이씨조선(李氏朝鮮)의 5백년 역사(歷史) 속에 불교 탄압사(彈壓史)는 연산군 이전과 이후로 나눠본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政策)은 불교폐단(佛敎弊端)을 시정(是正)하려 하였으나 태종(太宗)에 이르러서는 배불정책(排佛政策)이 노골화(露骨化)되어 사찰(寺刹) 토지(土地)를 몰수(沒收)하고 사찰 소유의 노비(奴婢)를 관원(官員)에 편입(編入)시키고 승려(僧侶)들을 대규모(大規模) 환속(還俗)시켜 군대(軍隊)에 편입(編入)시키고, 금승절목(禁僧節目), 금승법(禁僧法), 승려도첩제(僧侶度牒制)를 폐지(廢止)시켜 버렸다. 세종(世宗)대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던 경전독경(經典讀經) 행사도 폐지하고 사찰 전답에 따라 승려(僧侶) 수(數)도 제한(制限)을 했다. 여러 종파도 선교양족(禪敎兩宗)으로 통폐합(統廢合)해서 기존의 232개 사찰 가운데 36개 본산(本山)만 인정(認定)했다. 성종대(成宗代)에 이르러서는 도성(都城) 안에 비구니(比丘尼) 사찰(寺刹)은 모두 폐지(廢止)하고, 염불당(念佛堂)도 폐지하고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들은 모두 군인(軍人)으로 환속(還俗)시켰다. 불교탄압(佛敎彈壓)은 연산군(燕山君) 때 극(極)에 달(達)한다. 도성(都城)안에 사찰은 모두 폐지하고 사찰전답(寺刹田畓)은 모두 몰수당(沒收當)하고 거의 모든 승려는 환속을 시켰다. 승과제도(僧科制度) 도첩제(度牒制)까지 전면(全面) 폐지(廢止)시켜 승려배출(僧侶輩出)이 원천봉쇄(源泉封鎖)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불교(佛敎) 교세(敎勢)는 쇠락(衰落)해 갔다. 사찰(寺刹) 소유재산(所有財産)이 국유화(國有化)가 되어서 사찰경제(寺刹經濟)는 퇴락(頹落)해 갔다. 지방군현(地方郡縣)의 각종 잡역(雜役)까지 승려(僧侶)들이 도 맡아 감당(堪當)해야 했다. 이렇게 탄압(彈壓)을 받던 배불정책(排佛政策) 속에서 불심(佛心)이 깊은 문정황후(文定皇后)가 선교양종(禪敎兩宗) 승과제도(僧科制度)를 잠시나마 허응보우(虛應普雨) 선사(禪師)를 통해서 부활(復活)하려 했으나 문정황후가 죽자, 바로 사대부(士大夫) 유생들은 불교탄압에 앞장을 서게 된다.
”조선(朝鮮) 11대 왕 중종(中宗)의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13대 왕 명종(明宗)의 모후(母后)였다. 수렴청정(簾聽政)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는 불심이 매우 깊었다. 중종이 폐불(廢佛)을 할 때도 왕실(王室)의 재산을 관리했던 내수사(內需司)를 통해 여러 사찰(寺刹)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불교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왕권이 강화돼 나라가 안정된다고 확신(確信)했다. 왕후는 인수사(仁壽寺)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불사 계획을 세웠다. 그때 금강(金剛山)에서 명망(名望)이 높은 허응 보우(虛應普雨) 선사(禪師)와 만나는 인연(因緣)된다. 유불선(儒佛仙) 3교(敎)에 밝았던 스승 덕에 선사(禪師)은 불교를 비롯해 유교까지 폭넓게 섭렵했고, 양반가(兩班家) 자제(子弟)들에게 경학(經學)을 지도(指導)할 만큼 안목(眼目)을 지녔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3에 따르면 선사(禪師)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천도(薦度)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열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선(禪)의 부흥(復興)을 위해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스님과 속인(俗人)에게 추앙(推仰)을 받아 그 명성(名)이 서울 대궐(大闕)까지 이르렀다. 1548년 명종(明宗) 3년에 9월, 금강산(金剛山)에서 내려와 호남(湖南)으로 가던 보우선사(普雨禪師)은 문정황후(文定王)의 부름을 받았고, 뚝섬 봉은사(奉恩寺) 주지(住持)를 맡아달라는 요청(要請) 받았다. 봉은사(奉恩寺)는 그 당시 불교계(佛敎界)의 중심사찰(中心寺刹)이었다. 보우선사는 봉은사(奉恩寺) 주지(住持)를 맡고 헌신적(獻身的)으로 불교중흥(佛敎中興)에 온 힘을 쏟았다. 사찰(寺刹)에 난입(亂入)하여 소란(騷亂) 행패(行悖)을 부리거나 기물(器物)을 파손(破損)한 유생(儒生)들의 출입(出入)을 금지(禁止)시켰다. 몰수당한 사찰 토지 부지도 되돌려 받았다. 1550년(명종 5), 48년 전 사라졌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부활(復活)했다. 봉은사(奉恩寺)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봉선사(奉先寺)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어서 불교계(佛敎界)를 이끌었다. 보우선사(普雨禪師)는 문정황후(文定皇后)의 요청(要請)에 따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직함을 받고, 조정에서 내린 정식직함(正式職銜)으로 제도적(制度的)으로 활동(活動)을 보장(保藏)받았다. 조정(朝廷) 사대부(士大夫)들과 유림(儒) 유생(儒生)들은 즉각(卽刻) 반발(反撥)하고 상소(上疏)가 빗발쳤다. 양종복구(兩宗復舊) 반대상소(反對上疏)가 423건(件)이고, 보우선사(普雨禪師)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上疏)가 75건(件)이다.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숭유배불(崇儒排佛) 세상(世上)이라 없는 죄(罪)도 만들어 누명(陋名)을 씌웠다. 퇴락(頹落)한 사찰(寺刹)을 중창(重創)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復活) 설치해서 유능(有能)한 인재(人才) 승려(僧侶)를 양성(養成)시키겠다는데도 이이(李珥)는 보우(普雨) 선사(禪師)를 상소(上疏)에서 요승(妖僧)이라고 했다. 보우선사(普雨禪師)가 죽음을 각오하고 헌신적(獻身的)으로 승과(僧科)를 실시한 결과 선발(選拔)된 인물(人物) 가운데 훗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맡아 임진왜란(壬辰倭亂) 전란(戰亂) 때 전국 승병(僧兵)을 조직(組織) 이끌었던 분이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나오게 된다. 이조(李朝) 오백년간(五百年間) 그토록 탄압(彈壓)받고 멸시(蔑視) 천대(賤待)를 받았어도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쟁(戰爭)이 나자,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나라를 구한 것이 승병(僧兵)들 이었다. 명종(明宗) 20년 문정황후(文定皇后)가 승하(昇遐)하자,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며 불교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불온(不穩)한 사상으로 몰아세웠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보우선사(普雨禪師)의 처단(處斷)을 강력히 주장했다. 보우선사와 율곡과의 인연을 살펴보자. 율곡이 친모 사임당(申師任堂) 타계(他界) 후 계모(繼母)와의 불화(不和)로 집을 나와 봉은사(奉恩寺)에 머물렀다. 스님이 되겠다는 율곡을 보우선사는 만류(挽留)하며, 유생(儒生)이 불문(佛門)에 들어오지 말라는 시(詩)를 써 주었다. “더디 더디 절에 머물면 끝내 좋지 않으니(遲遲淹寺終非好) 빨리빨리 고향 가서 편안함을 시작하게(急急歸鄕始得安) 아버지가 말한 자네의 잘못 생각을 하지 말고(莫念父當論汝罪) 다시 만나 얼굴 보면 반드시 기뻐할 걸세(重逢而面必生歡). 그런데 율곡(栗谷)은 ‘의암’이란 법명으로 스님이 되었다. 율곡은 금강산(金剛山)에서 출가 수도(修道)한지 1년도, 채 못되어 20세에 환속(還俗)하고 불교를 거세게 비난하여 결국 자신을 거두어준 보우대사의 은혜를 원수로 갚아 보우대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퇴계(退溪) 이황은 이렇게 말했다. 역적(逆賊)을 쳐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名分)으로, 보우(普雨)를 처벌(處罰)하는 것은, 이미 그의 죄에 합당(合當)한 죄목(罪目)이 아니다. 반드시 죄목이 실제의 죄에 합당한 다음에야 임금의 뜻을 돌릴 수 있다고 하여 보우선사의 처단은 잘못된 일이라 했다.” 역사는 강자(强者)의 편이다.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세상에서 불교(佛敎)를 중흥(中興)코자 애쓴 고승(高僧) 대덕(大德) 보우선사(普雨禪師)를 요승(妖僧)이란 누명(陋名)으로 죽임을 당해 순교(殉敎)하셨다. 숭유(崇儒)의 서푼도 안 되는 오만(傲慢)한 잣대다. 불교(佛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삼국 모두가 국교(國敎)의 위상(位相)을 누렸는데, 이조 오백년간 탄압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훼손(毁損)된 불상(佛像)은 성물(聖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요즘도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개신교인들이 성물 불상과 사찰을 방화를 저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21세기 한국불교(韓國佛敎)는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가, 화두다. 보우선사(普雨禪師) 순교(殉敎) 열반송(涅槃頌)으로 반추(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