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ttanipāta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 고찰
- 제4장과 제5장을 중심으로 -
이필원(청주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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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본 논문의 출발점은 고따마 붇다의 원초적인 가르침에 입각해서 불교의 두 기둥인 ‘번뇌’와 ‘수행’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 불교 발전사 가운데 최고 정점에 위치한다고 하는 Suttanipāta(이하 Sn., 숟따니빠-타)의 제4장과 제5장을 선택했다.
본 논문은 1장에서는 Sn.라는 문헌에 대한 개괄을 소개했고, 2장과 3장에서는 번뇌론과 수행론을 다루었다.
2장에서 다룬 번뇌론은 정서적 번뇌와 이지적 번뇌로 구분하여, 최고층 문헌에 서 말하고 있는 번뇌의 성격과 관점을 고찰하였다. 정서적 번뇌는 갈애(Taṇhā)와 욕망(rāga, lobha 등)의 용례를 통해 검토하였고, 이지적 번뇌는 무명(avijjhā)의 용례를 통해 고찰하였다. 그 결과 Sn. 제4장과 제5장에서는 압도적으로 정서적 번뇌의 용례가 많았으며, 무명에 관련된 용례는 단지 3가지만이 확인되었다.
결론적으로 최고층 경전은 이지적 번뇌보다는 정서적 번뇌를 강조하였고, 정서적 번뇌의 극복/소멸을 통해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갈애(taṇhā)와 욕망(rāga)과 같은 육체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kāmā)이 해탈과 열반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제시되고 있음을 보았다. 물론 이지적 번뇌가 무시된 것은 아니지만, 후대와 같이 강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금 더 이지적 번뇌를 강조한다면, 정서적인 번뇌의 통제, 혹은 제거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혜의 발생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번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정려 수행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알고 있듯이 4선정-혹은 4정려-의 체계로 확립되기 이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고층에서의 정려란 ‘떠남’, ‘싸띠’, ‘평정’ 을 주요 요소로 하여, 이들이 각각 정려적 수행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들 각각은 또한 번뇌를 소멸, 제어하는 강력한 기능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최고층 문헌이 성립할 당시에는 아직 위빠싸나 수행이 고안되기 이전의 단계임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주제어 : 숟따니빠-타, 번뇌론, 정서적 번뇌, 이지적 번뇌, 갈애, 욕망, 정려, 떠남, 싸띠, 평정
Ⅰ. 들어가는 말 ▲ 위로
불교라는 종교는 어느 특정 시기에 완성된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고따마 붇다의 출현 이래 끊임없이 시대와 교섭하면서 인류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25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시기만을 꼭 집어서 불교의 완성시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는 어떤 입장을 취할 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고따마 붇다의 원초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궁구하는 것일 것이다. 불교는 고따마 붇다의 등장에서 시작한다는 원초적이며 단순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본 논문의 출발점은 고따마 붇다의 원초적인 가르침에 입각해서 불교의 두 기둥인 ‘번뇌’와 ‘수행’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불교발전사 가운데 최고 정점에 위치한다고 하는 Suttanipāta(이하 Sn., 숟따니빠-타)의 제4장과 제5장을 선택했다.
이 문헌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을 고찰함으로써 애초에 고따마 붇다가 문제시 했던 번뇌란 무엇이며, 그것을 제거 혹은 통제하기 위해 제시된 수행론은 어떠했는지를 고찰하는 것, 즉 최초기 불교 문헌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의 원초적 모습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번뇌’는 크게 정서적 번뇌와 이지적 번뇌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구분은 불교의 수행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즉 번뇌를 정서적 측면에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이지적 측면에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서 번뇌를 제거하거나 통제하는데 가장 유용한 수행방법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종래의 연구는 대부분 무명을 중심으로 하는 탐진치 삼독과 위빠사나(Vipassanā)를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이 연구되었다. 그래서인지 선정(정려) 수행을 중심으로 한 수행법의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한 것 같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최초기 불교 문헌인 Sn의 제4장과 제5장의 내용을 면밀히 고찰하여 그 안에서 붇다가 해탈을 위해 설해 놓은 번뇌론과 수행론의 모습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Ⅱ. 문헌의 개괄 ▲ 위로
본 논문을 기술하기 전에, 우선 Sn.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1) 사실 Sn.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경전이 이른바 남방불교 문헌이라고 하는 태생적인 문제와 더불어, 한역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제 이 경전의 존재는 의식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던 중, 법정스님이 1992년에 번역 출판한 것을 통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이전에 이기영 박사가 1974년에 번역 소개한 것이 국내에서는 가장 처음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법정스님의 번역 덕분일 것이다. 또한 숟따니빠-따에 대한 국내의 연구 역시 최근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는 전재성 박사의 숫타니파타일 것이다. 국내 최초로 원전을 직접 번역 소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세한 주해와 해설은 이 경전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탁월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Sn.는 전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전으로 빠-리 경장 가운데 소부경장(Khuddakanikāya)에 속해 있다. 이 경전의 한역은 존재하지 않으나, 일부가 한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지겸(支謙, AD. 223-253)이 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Sn.의 제4장을 번역해 놓았다.2)
Sn.가 주목받게 된 이유는 경전성립사를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이 경전이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했다고 하는 사실 때문이다. 즉 다른 경전속에서 Sn.가 인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3) 그 내용상에서도 교리가 체계화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어, 교리의 발달사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다른 경전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Sn.는 어느 시기에 현재의 편제로 완성된 형태를 갖춘 경전은 아니다. 앞의 본문과 각주 2)에서 언급했듯이, 제4장, 제5장, 그리고 제1장의 12경이 독립적으로 유포되고 있다가 어느 시기에 나머지 장들과 함께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따라서 1-5장의 성립 시기가 각각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Sn.내에서도 성립의 층차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이 문헌을 성립사적으로 고찰하는 학자들의 입장이 된다.4)
이러한 문헌의 성격으로 Sn.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일찍이 주목받아 연구되어 왔다.5) 그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Sn.의 제4장과 제5장이 가장 빠른 시기에 성립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입장은 약간씩 다르다. 특히 두 장이 모두 최초기 불교의 사상과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는 입장과 제4장의 경우는 불교외부의 수행자 집단에서 유포되어 있었던 것이 불교 내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두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들 중, 대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자의 경우는 荒牧典俊와 並川孝儀, 그리고 후자는 T.Vetter6)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제4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교 외의 수행자 집단에서 유포되었던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제4장과 제5장을 최초기 불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경전으로 간주하고7), 이에 기초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Ⅲ. 최고층 문헌에 나타난 번뇌론 ▲ 위로
불교의 출발점은 ‘번뇌’에 있다. 붇다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번뇌에 맞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파악하게 된다. 본 장에서는 숟따니빠-따의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번뇌론의 모습을 고찰함으로써, 붇다의 번뇌에 대한 관점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소멸방식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번뇌의 분류 ▲ 위로
다양한 번뇌를 총칭해서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낄레싸(kilesa)이다. 그런데 이른바 초기경전으로 분류되는 니까-야(Nikāya)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가 숟따니빠-따 제4장과 제5장에서는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upakkilesa(Sn. 66), saṃkilesa(Sn.277), kilesa(Sn.348)의 세 용례가 확인될 뿐이다. 이들 용례는 Sn.의 제1장과 제2장에서 확인된다.
덧붙여서 말하면, 고층의 문헌에 속하는 담마빠다(Dhammapada, abbr. Dhp)에서도 kilesa 혹은 upakkilesa, saṃkilesa의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8)
따라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양한 현상을 한 마디로 정리한 표현이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9) 그러나 ‘번뇌 kilesa’가 갖는 기본적인 의미인 ‘오염, 더러움, 불순물’과 같은 관념은 존재하고 있다. 즉 명사 kilesa의 용례는 없지만, 동사형 kilissati나, 그것의 과거분사형 kiliṭṭha의 용례는 Dhp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Sn. 제4장과 제5장에서는 Dhp와 같이 동사형의 용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번뇌 각각의 개별적인 특성과 내용에 주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점차 여러 번뇌를 하나의 성격으로 설명하고자 하면서 ‘오염되다’이나 ‘더러워지다’, ‘물들다’와 같은 말로 포괄적으로 설명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먼저 Sn. 제4장과 제5장에서 어떠한 번뇌들이 제시되고 있는지 간략히 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빈도수가 많이 나오는 번뇌로는 갈애와 탐욕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만심(慢心)이 그 다음을 잇고 있다.
그리고 ogha, 즉 번뇌를 폭류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고 있다. 비유적 표현 가운데, āsava는 ‘漏’로 한역되는 것으로 ‘흐름’, 혹은 ‘누출’을 의미하는데, 후대에는 번뇌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흐름’을 의미하는 sotā의 경우는 이후에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는 성자의 계위를 의미하는 예류를 나타낼 때의 용법과 위와 같이 번뇌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구분된다. 아래에서는 번뇌를 정서적 번뇌와 이지적 번뇌로 구분하여 전자는 갈애와 탐욕을, 후자는 무지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2. 정서적 번뇌 ▲ 위로
1.에서 정리한 표에 따르면, 번뇌들 가운데 갈애와 탐욕이 가장 빈도수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번뇌들 보다 Sn. 제4장과 제5장에서는 적어도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주지하듯이 갈애와 탐욕은 정서적 번뇌를 대표하는 번뇌이다. 그러나 이 둘은 거의 의미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Sn.의 게송에서 이 둘의 용법을 보면, 단정적으로 의미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본 항목에서는 갈애와 탐욕이 갖는 의미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1) 갈애에 대한 Sn.의 본 게송에서의 구체적 용례
나는 이 세상에서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서 갈애에 의해 사로잡힌 [채로] 떨고 있는 이 사람들을 봅니다. 다양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 떠나지 못한 갈애를 지닌 통속적인 사람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두려움에 떨며] 탄식합니다.(Sn. 776)10)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죽기 전에, 떠난 갈애를 지닌 자는 과거에 의존하지 않고, 현재에 [새로운 존재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에게는 미래에 기대되어진 [존재가] 없습니다.”(Sn. 849)11)
[존재에] 의지하지 않는 자는 가르침을 알고 있기에 의지하는 성품이 없습니다. 그에게 존재에 대한 혹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알려지지 않습니다.(Sn. 856)12)
또데야여, 모든 욕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갈애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그리고 모든 의심을 뛰어 넘은 자, 그에게 다른 해탈은 없습니다.(Sn. 1089)13)
세상은 [감각적] 즐거움에 의한 속박이고, 사유는 그것에 대한 추구[의 근원]입니다. 갈애의 포기에 의해서 열반이 [있다]고 말해집니다.(Sn. 1109)14)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삥기야여, 갈애에 의해 사로잡혀 고뇌가 생긴, 늙음에 의해 패배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삥기야여, 그대는 그러므로 방일하지 말고, 다시 [이와 같은] 생존의 상태로 이끌리지 않도록 갈애를 버리시오.”(Sn.1123)15)
이상의 게송을 통해서 갈애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갈애는 죽음과 관련해서(776, 849) 설해지고 있고, 다시 해탈과 열반과 관련해서(1089, 1109, 1123) 설해지고 있다. 1123 게송의 경우 직접적으로 해탈/열반이란 말은 사용되지 않지만, ‘생존의 상태로 이끌리지 않는다’는 말에 의해서 해탈/열반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갈애는 죽음의 원인이자 해탈과 열반의 성취를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2) 욕망에 대한 Sn.의 본 게송에서의 구체적 용례
참된 바라문은 경계를 뛰어 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존재의 참모습을] 알고 혹은 보아서 집착이 없습니다. 욕망에 대해서 욕망하는 자가 아니고, 욕망의 떠남에 의해 집착된 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에게는 최고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Sn. 795)16)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뿐나까여, 그들은 희망하고, 칭찬하며, 갈망하며, 공양합니다. 그들은 이득을 인연으로 하여 욕망의 대상들을 갈망합니다. 제사에 속박되고, 존재의 탐욕에 물든 자들은 태어남과 늙음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합니다.”(Sn. 1046)17)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빠씨-와여, 모든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 탐욕을 떠난 자, 무소유를 의지해서 다른 것을 버리고, 최상의 지각인 해탈에서 해탈한 자, 실로 그는 거기에서 되돌아오지 않고 머물 수 있습니다.”(Sn. 1072)18)
헤마까여, 이 세상에서 보여진 것, 들려진 것, 생각되어진 것, 식별된 매혹적인 형체에 대해서, 욕망과 탐욕의 제거가 영원한 열반의 길입니다.(Sn. 1086)19)
멀리 떨어져 지내고, 속이지 않고, 탐하여 구하지 않으며, 인색하지 않고 무모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고 중상을 하지 않습니다.(Sn. 852)20)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은 욕망을 인연으로 하고, 또 세상에서 탐욕도 욕망을 인연으로 일어납니다. 사람이 내세에 대해서 가지는 소망과 그 성취는 이것을 인연으로 합니다.(Sn. 865)21)
탐욕을 떠나 인색하지 않으며, ‘우월하다’든가 ‘동등하다’든가 ‘열등하다’고 성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잣대를 걷어내 허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Sn. 860)22)
내 것이라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온을 보는 성자는 소유를 버리고 유행하는 것입니다.(Sn. 809)23)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자뚜깐니여, 모든 욕망의 대상에 있어서 탐욕을 버리시오. 평온이라는 입장에서 [자신이 욕계로부터] 떠남을 보고나서, 그대에 의해서 욕계에 있는 어떤 것이 취해지거나 버려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Sn. 1098)24)
바라문이여,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것에 있어서 탐욕을 떠난 자에게, 이 사람에게 죽음의 영향 [아래로] 가야하는 번뇌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Sn. 1100)25)
이상이 욕망과 관련된 게송들이다. 그런데 욕망을 나타내는 빠-리어는 여러 형태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인다. 갈애가 taṇhā라는 말로 통일되어 나타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욕망은 rāga, chanda, gedha, lobhā pihālu등의 용어들이 주로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욕망의 용례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는 특징은 갈애와는 달리 죽음이나 해탈과 관련한 용례 이 외에도 윤리적 측면(852), 집착의 대상의 하나(795), 소유(我所)에 관한 것(809), 욕망 일반(795) 등의 용례도 다수 있다. 특히 rāga와 같은 경우는 성적인 욕망, 감각적 향유의 주체이자 대상을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욕망의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음(1046, 1072, 1086)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게송의 내용은 생사의 초월이나 해탈/열반과 관계한다. 이외에 죽음이나 내세와 관련한 것으로는 lobhā(865)와 gedha
(1100)의 용례가 확인된다.
이상의 갈애와 욕망에 관련된 용례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해탈/열반의 성취에 가장 강력한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번뇌는 갈애(taṇhā)와 욕망(rāga)과 같은 육체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kām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그 어떤 번뇌보다도 taṇhā와 rāga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게송이 많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3. 이지적 번뇌 ▲ 위로
정서적 번뇌와는 달리 Sn. 제4장과 제5장에서 무지로 대표되는 이지적 번뇌의 용례는 매우 적다. 우선 그 용례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아지따여, 무명에 의해서 세계는 덮여있습니다. 탐욕과 방일 때문에 [세상은] 빛나지 않습니다. 갈망은 끈끈이 이며, 고통은 이 세상의 커다란 두려움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1033)26)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사띠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고,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1107)27)
또데야여, 모든 욕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갈애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그리고 모든 의심을 뛰어 넘은 자, 그에게 다른 해탈은 없습니다.(Sn. 1089)28)
이상의 세 가지 용례가 지혜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 중 마지막 용례의 katahaṃkathā는 의심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무지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지만, 의심은 이지적인 성격이 강하기에 이지적 번뇌로 분류했다.
여기에서 무명은 온통 세상을 덮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또한 해탈이란 무명이 파괴된 상태로 기술되고 있음을 본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1107게송의 내용이다.
일반 초기불교 문헌에서 무명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교해 보면, 최초기 문헌에서의 무명이란 갈애나 욕망보다는 덜 주목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무명이 무시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지혜를 통해 무명을 밝혀 해탈에 이르는 과정보다는 오히려 정서적인 측면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을 제거 통제하는 것을 보다 우선시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정서적인 번뇌의 통제, 혹은 제거는 자연스럽게 지혜의 발생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게송이 바로 1107게송이 아닌가 생각된다. 1107 게송의 ab구는 바로 4선정 체계에서 선정의 최고 단계인 제4선을 나타내는 것과 일치하며, cd구는 ab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선정 수행으로 정서적 번뇌가 완전히 소멸(평정의 획득)되고 통제될 때(싸띠에 의해) 바로 해탈적 지혜(aññā)에 의한 무명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4. 번뇌의 소멸 방식 ▲ 위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번뇌는 반드시 소멸되어야 할 정서적, 이지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번뇌를 어떻게 소멸시키거나, 통제할 것인가에 있다. 본 항목에서는 번뇌의 소멸 방식을 크게 ‘억제’, ‘초월’, ‘떠남’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번뇌의 소멸 방식을 분류한 학자로는 일본의 並川孝儀(2005)를 들 수 있다. 본 연구자는 나미까와의 분류 방식을 참조하면서, 이에 덧붙여 이러한 번뇌의 소멸 방식을 통해 번뇌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29)
우선 Sn.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번뇌의 소멸 방식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소멸했다. 고요해지다. 억지하고 있다’와 같이 번뇌 등을 억지・제어・차단하는 것으로 소멸하는 예
② ‘떨쳐 내다. 제거하다. 버리다. 분리하다’와 같이 번뇌 등을 분리하는 것으로 소멸하는 예.
③ ‘건너다. 초월하다’와 같이 번뇌 등으로부터 떠나거나, 초월하는 것으로 소멸하는 예.30)
이들 세 가지 소멸 방식의 예를 간단히 제시해 보도록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문은 並川孝儀에 의해 제시되어 있기에, 본 논문에서는 그 중에서 각각 한두 가지의 용례만을 제시하기로 한다.31)
①의 용례 :
색·형태·음성·맛·향기·감촉되는 것에 대한 탐욕을(rāgaṃ) 억제하시오.(sahetha) (Sn. 974d)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ṃ) (1070d)
②의 용례 :
다양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탐욕을(gedhaṃ) 제거하시오(vinaya) (1098a)
다양한 생존의 방식에 대한 이 집착을(bhavābhave saṅgam imaṃ) 버리고(visajja) (1060b)
③의 용례 :
그 사람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면서 이 집착을(visattikaṃ) 초월해 있다(samativattari) (768cd)
모든 욕망의 대상에 대한(kāmesu) 탐욕으로부터 떠난(vītarāgo) (1071a, 1072a)32)
이상의 번뇌 소멸의 세 가지 방식은 번뇌를 중심으로 해서 어떠한 방식을 취하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33) 그러나 이들 세 방식 가운데, 가장 그 용례가 많은 것은 ‘분리’와 ‘초월’의 방식이다. 단순히 세 방식으로 표현된 회수를 비교하면, 분리가 26번 초월이 16번으로 나오고, 이에 반해 억제의 방식은 7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히 ‘억제하다(√sah)’란 의미에서의 억제는 그 용례가 더욱 적으며, 그 보다는 ‘소멸하다(√kṣi)’의 용례가 억제의 방식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34) 이것은 번뇌의 작용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억제’보다는 적극적인 ‘소멸’의 방식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체적으로 억제, 분리, 초월의 방식에 있어서도 후자의 분리와 초월의 방식이 번뇌를 무력화시키는데 보다 나은 방법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Ⅳ. 최고층 문헌에 나타난 수행론 ▲ 위로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수행론이라고 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말하거나 혹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 수행론의 내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초기불교에서 수행론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많다. 예를 들면 사념처, 팔정도, 사성제, 칠각지, 오근, 오력, 사정근 등등의 수행론이 경전에 기술되어 있다.
수행론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하는 것은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는 입장은 고따마 붇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얼마 동안은 개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기존에 붇다가 수행과정속에서 배웠던 혹은 알고 있었던 것은 개념화가 되었을 것이지만, 새롭게 붇다 자신이 깨달음을 통해 체득한 것의 개념화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붇다는 이론가가 아닌 실천수행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행을 그 때 그 때 개념화하면서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Sn.의 제4장과 제5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수행론의 초기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붇다가 완전한 수행론을 구축하기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이다. 그리고 Sn.에서 발견되는 수행론의 모습이 이후의 문헌에서 보이는 발전된 형태의 수행론속에 포섭되고 재조직되고 있다고 한다면, Sn.에 나타난 수행론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를 밝혀보는 것이 수행론의 발전을 더듬어 보는데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절에서는 4정려 수행도에서 제1선의 도입으로 나타나는 ‘떠남’과 제3선 이후에 나타나는 ‘싸띠’의 공능에 대해서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이른바 최고층 문헌에 나타나는 선정수행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떠남’의 방식으로서의 수행 ▲ 위로
‘떠남’으로 번역되는 원어는 viveka이다. 한역으로는 遠離, 즉 ‘멀리 떠남’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러한 번역어로부터 viveka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떠한 것으로부터의 ‘떠남’이 수행의 기본 전제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유추된다.
본 항목에서는 바로 ‘떠남’의 용례를 통해 이것이 어떻게 수행도로 이해될 수 있는지, 그리고 ‘떠남’이 번뇌를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공능이 있는지를 게송의 내용을 통해 살펴본다.
[신체라고 하는] 동굴에 집착된 자는 많은 것에 의해서 덮여 있고, 유혹에 가라앉아 머물러 있는 사람, 그러한 그는 ‘떠남’으로부터 멀리 있고, 이 세상에서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잘 버려지지 않는다.(Sn. 772)35)
떨어져서 행하는 비구는 홀로 떨어진 앉을 곳에 머물고 있다. 생존의 세계에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그것이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해진다.(Sn. 810)36)
존자여, 성행위에 탐닉하는 자의 고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는 멀리 떠남을 배우겠습니다.(Sn. 814)37)
멀리 떠남을 배우시오. 이것이 성자들에 의해서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스스로가] 최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열반의 면전에 [있습니다].(Sn. 822)38)
집을 버리고, 정해진 것 없이 떠돌며, 마을 안에서 친교를 갖지 않는 침묵의 성자는 모든 욕망의 대상에서 떠나, 바라는 바 없이, 사람들과 함께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Sn.844)39)
태양족의 후예이신 위대한 선인께 멀리 떠남과 적멸의 경지에 대해서 여쭙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듭니까?(Sn. 915)40)
바라문이시여, 제가 알고자 하는 것, 떠남의 원리를 자비심을 갖고 가르쳐 주소서. 저는 마치 허공처럼 장애없이 이 세상에서 적정한 자, 의지함이 없는 자처럼 편력할 것입니다.(Sn. 1065)41)
이상의 게송을 통해 ‘떠남’은 ‘욕망의 대상(kāma)’으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욕망의 대상이란 대부분 이성적 존재, 즉 남성 수행자에게는 여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성 이외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어떤 대상도 포함된다. 여하튼 Suttanipāta 제4장과 제5장은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떠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온전히 떠나지 않고는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떠남’ 자체가 열반은 아니지만, 822게송에서는 ‘열반의 면전(nibbānasantike)’이라고 해서 열반에 가까이 다가선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844게송에서는 성자의 조건으로 ‘떠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떠남’은 이후 4선 수행이 정립될 때, 선정/정려 수행체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편입되어, 제 1선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적 단계로 규정된다.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떠나고 나서(viveka ca kāmehi)’의 형식이 그것이다.
2. 독립된 수행체계로서의 싸띠(sati) ▲ 위로
싸띠(sati)는 한역으로는 念으로 번역되는 말로, 우리말로는 ‘새김’(전재성, 2004), ‘알아차림’(인경스님, 2001), ‘수동적 주의집중’(조준호, 2001), ‘마음지킴’(임승택, 2001)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번역은 번역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대부분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난 위빠싸나 행법을 중심으로 고찰한 싸띠의 용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본 항목에서 필자는 싸띠가 위빠싸나 수행법의 용례가 아닌 독자적 수행법의 용례에 주목하여, 싸띠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성격의 해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43)
그럼 Suttanipāta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싸띠의 구체적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그 용례를 통해 최고층 문헌속에 나타난 싸띠의 수행론적 특징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모든 욕망의 대상을 피하는 사람은 발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 [하듯이], 그는 이 세상에서 바르게 자각하고 이 애착을 넘어선다.(Sn. 768)44)
그래서 사람은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피하고, 그것들을 버리고,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 피안에 도달하듯, 거센 물결을 건너야 한다.(Sn. 771)45)
평정하여 언제나 바르게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 뛰어나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번뇌의]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Sn. 855)46)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망상의 사유의 뿌리를 모두 파괴하십시오. 안으로 어떠한 갈애도 그것들의 제어를 위해서,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배우십시오.(Sn. 916)47)
이러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나서, 비구는 깊이 숙고하고,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배우십시오. [모든 번뇌의] 소멸이 적정이라고 잘 알아서, 고따마의 가르침에 대해서 방일해서는 안 됩니다.(Sn. 933)48)
또한 게다가 이 세상에 다섯 가지 티끌이 [있으니], 바르게 자각함을 갖추고 그것들의 제어를 위해서 배워야 한다. 형체, 소리, 또한 맛, 냄새,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어야 한다.(Sn. 974)49)
“바르게 자각함을 갖추고 잘 해탈된 마음을 지닌 비구는 이 현상들에 대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그는 적당한 때에 바르게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통일하여 암흑을 제거해야 한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Sn. 975)50)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며,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설합니다.(Sn.1107)51)
안으로도 밖으로도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수를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바르게 자각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작용은 소멸합니다.(Sn. 1111)52)
모가라자여, 공의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하시오.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자아에 대한 견해를 버리고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죽음을 건널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를 관찰하면,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합니다.(Sn. 1119)53)
이상이 Sn.의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싸띠의 주요한 용례들이다. 이들 용례에서 싸띠의 단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sati라는 명사형이 아닌, sarati(√smṛ)의 과거분사형인 sata가 주로 사용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리고 형용사인 satimā(satimant의 단수 주격형)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sati라는 명사형으로 쓰인 용례는 1107게송 밖에 없는 점이 두드러진다.
게송의 번역에서, 필자는 싸띠(sata)를 ‘바르게 자각(自覺)하다(sato)’로 번역했다.54) 이렇듯, 동사적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 이유는 싸띠가 명사가 아닌 sata라고 하는 분사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분사로 쓰였다는 것은 전문적 술어로 정착하기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최고층 문헌에서는 싸띠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아직 확고하게 개념이 정립된 단계는 아니라는 것을 추측케 한다.
또한 최고층 문헌의 싸띠는 집착 내지 갈애와 같은 번뇌를 제어, 혹은 소멸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쓰임새를 보면 싸띠는 대부분 욕망의 대상(kāma, 768, 77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771), 갈애(916), 다섯 가지 티끌(974), 욕망의 제어(975) 등과 같이 쓰이고 있다. 또한 선정의 요소로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즉 4선정과 관련해서는 1107게송, 무소유정과 관련해서는 1111게송 등이 관련된다.55)
따라서 최고층 문헌에서 싸띠는 크게 두 가지의 용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제 번뇌와 관련해서, 번뇌들을 제어, 통제, 소멸하는 기능으로서의 용법이며,56) 둘째는 선정의 구성 요소로서 해탈과 관련한, 혹은 해탈지와 관련한 용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첫 번째 용법은 싸띠가 독자적인 수행방법으로서 설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띠의 성격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싸띠를 ‘바르게 자각하다’ 혹은 ‘바르게 알아차리다’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음은 이미 언급했다. 여기에서 ‘바르게’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것에 대한 논의는 싸띠의 성격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우선 학자들의 싸띠의 성격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조준호 :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의 흐름이 완전히 쉬었을 때 드러나는 의식 상태 또는 마음의 상태57)
(2) 임승택 :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58)
(3) 인경스님 : sati의 성격은 ‘알아챔’과 ‘대상에의 주목’이라는 두 성격으로 설명된다. 대상에 대한 주목은 그것을 기억하여 붙잡는 의지적인 행위의 측면이라면, 알아챔은 그것의 변화에 주목하여 관찰하는 인지적인 측면이다.59)
(4) 전재성 :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60)
(5) 후지모토 아끼라 : sati는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61)
이상에서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각을 강조한 견해로는 (4), (5)를 들 수 있고, 관찰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2), (3)을 들 수 있다. (1)의 경우는 (4), (5)와 더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Sn.의 게송에서 sati의 성격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우선 게송 1111의 경우 ‘안으로도, 밖으로도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을 즐기지 않는 자, 이렇게 바르게 자각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작용은 소멸한다.’고 하여, 싸띠란 안으로든 밖으로든 즐거움과 고통과 같은 느낌에 흔들림 없이, 바르게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관찰하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의식 작용은 소멸한다.’라고 하는 것을 통해 싸띠에는 분별작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 번뇌와 관련된 게송은 번뇌들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자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Sn.의 게송을 통해서 지지될 수 있는 싸띠의 성격은 위의 다섯 견해 가운데 (4), (5)의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정리하자면, 싸띠는 비판단적 작용이지만, 대상에 대한 왜곡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각을 통해 심리상태의 평정을 가능케 하고 대상에 대한 바른 앎을 제공하는 성격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 최고층에 나타난 선정 수행 ▲ 위로
고따마 붇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은 수행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명확하고도 확실한 대답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제 경전 속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분석하여 그것을 토대로 추측해 보는 것이리라.
선정 수행이라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알라라깔라마와 욷닷까라마뿟따의 선정62)일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독창적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과 비교하여, 불교 외부의 수행을 차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 떠오른다.63) 우리에게 익숙한 사무색정은 확실히 불교 이외의 전통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색계 4선정 역시 그 원천은 불교 밖의 전통일 것이다.64) 그러나 Katz와 藤田宏達(1972, 304)이 밝혔듯이 4선정 수행은 비록 불교 외적인 수행법이지만, 붇다에 의해 독특하게 해석되어 불교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 수행 전통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던 선정 수행을 불교의 독특한 방법론으로 재해석 혹은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크게 네 가지 입장이 불교의 선정수행을 일반인도 수행전통과 구분케 하였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욕망의 대상으로부터의 떠남을(kāmehi vivekam) 전제로 도입하고, 둘째 싸띠(sati)의 도입,65) 셋째 평정(upekkhā/khema)의 도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에서(diṭṭhe va dhamme) 열반/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관념66)의 형성이다.
이 가운데 ‘떠남’과 ‘싸띠’는 앞선 항목에서 고찰하였다. 본 항목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Suttanipāta의 제4장과 제5장에서 볼 수 있는 선정 수행의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미리 밝혀두면, 최고층 문헌에서는 명확하게 4선이라는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무색계선 역시 보이지 않는다. 다만 4선 중 마지막 제 4선의 내용으로 파악되는 게송이 설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확실치는 않지만 무소유정과 비상비비상정의 형태도 설해지고 있다.
본 항목에서는 선정수행이 사선으로 체계화되기 이전의 특징을 고찰하고, 아울러 선정 수행이 번뇌를 소멸시키고 해탈을 성취케 하는 수행도의 성격을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는 위빠사나 행법 위주의 수행법 이전에 선정 수행이 불교의 주된 수행법이었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래에서는 최고층 문헌에 나타난 선정 수행과 관련된 용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고, 그 내용을 검토해 보도록 한다. 편의상 (a)~(g)를 붙여둔다.
(a) [여러 가지]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잘못된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생각하지 않는 자도 없고, 소멸된 생각을 지닌 자도 없다. 이렇게 아는 자에게는 물질적 존재(rūpa)가 소멸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말로 나타난 것들은 생각에 의하기 때문이다.(Sn.874)67)
(b) 눈을 아래로 향하고, 어슬렁거림 없이, 정려에 전념하고, 항상 깨어있어라. 평정을 얻고자 삼매에 들어서, 의심의 경향과 후회를 끊으시오.(Sn.972)68)
(c) 우빠씨-와여, 무소유의 경지를 보면서, 바르게 자각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의해서, [번뇌의] 격류를 건너시오. 모든 욕망의 대상을 버리고, 모든 논쟁으로부터 떠나, 갈애의 소멸을 낮도 없이 밤도 없이 관찰하시오.(Sn. 1070)69)
(d) 모든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 탐욕을 떠난 사람, 무소유[의 경지]를 의지해서, 다른 [경지]를 버리고, 최상[의 경지]인 지각으로부터 해탈에서 해탈된 자, 그는 거기에서 돌아옴이 없이 머물 수 있습니다.(Sn. 1072)70)
(e) 자뚜깐니여, 모든 욕망의 대상에서 탐욕을 억제하시오. 평온의 입장에서 떠남을 보고나서, 그대에 의해서 어떤 것이 취해지거나 버려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Sn.1098)71)
(f)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며,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설한다.(Sn.1107)72)
(g) 무소유 경지의 발생과 [그것으로부터의] 희락은 속박이라고 알고서, 이대로 명확히 알아서, 그곳으로부터 [나와] 그것에 대해서 관찰합니다. 이것이 수행을 완성한 저 참된 바라문의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입니다.(Sn. 1115)73)
이상이 최고층에서 보이는 선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 중에서 4선정과 관련된 게송은 (b), (e), (f)의 세 게송이며, (a)는 비상비비상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c), (d), (g)는 무소유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먼저 비상비비상정과 무소유정에 관련된 게송을 살펴보도록 한다. 874게송의 경우 이 게송과 관련해서는 877게송까지 이어진다. 4게송에 걸쳐서 비상비비상정으로 추정되는 것에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선 게송 (a)가 비상비비상정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게송과 이어지는 게송의 내용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 내용을 간략히 나타내 보자.
우선 876게송에서는 874게송의 내용을 이어받아 874게송을 하나의 경지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 현명한 일부의 사람들은 이것만이 최고[의 경지]이며, 영혼의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그들 중 일부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교묘하게 말하면서(vadānā), 단멸을(samayaṃ) [최고의 경지라고] 말합니다.”가 그 내용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a구에 나오는 ettāvat’aggam으로 표현되는 ‘이것만이 최고의 경지’라고 하는 말이며, d구에 나오는 anupādisese 즉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에 대해서’라고 하는 말이다. anupādisesa는 무여의열반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물질적인 일체의 것이 남지 않는 것74)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비상비비상정이 순수한 정신적인 차원이라는 점과 비교해서 일치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877게송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은 집착된 자들이라고 알고서,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 결국은 붇다에 의해서 거부되는 선정임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무소유정으로 생각되는 게송을 살펴보자. (c), (d), (g)가 무소유정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akiñcañña를 선정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75) 게송의 내용으로 보아 이것을 무소유정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게송 1070에서 싸띠(satīmā)가 같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무소유정이 긍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된다고 보기보다는 싸띠가 갖추어진 것과 욕망에서의 떠남(1072)이 전제될 때만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무소유정은 결국 게송 1115에서는 부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무소유정은 결국 희락을 갖춘 선정으로 upekkhā와 sati에 의해 완전한 평정과 있는 그대로의 앎에 이르지 못하는 선정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무소유정을 대상으로 그것을 관찰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선정과 관련된 게송을 살펴보자. (b), (e), (f)를 통해 선정의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먼저 선정은 욕망에서 떠남을 전제로 하여 취하거나 버리는 분별심을 극복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1098) 그리고 삼매는 평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의심이나 후회라고 하는 제 번뇌가 단절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972)
그러나 무엇보다 선정의 내용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는 것은 게송 1107이다. 이 게송에 따르면 이후의 4선정 체계에서 제4선에 해당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은 진리에 대한 사색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사색(dhammatakka)은 결국 4선 체계에서는 제1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4선의 경우는 언어적 기능(심과 사로 표현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사색)을 완전히 떠나 개념적 사고가 활동해서는 안 되며, 다만 완전한 평정과 바른 자각만이 있게 된다. 1107게송에서는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해탈적 지혜(aññā)에 의한 해탈이 가능하며, 무명이 파괴됨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최초기 문헌에서 비상비비상정과 무소유정, 그리고 (사)선정이 설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전자의 두 선정은 진정한 해탈로 이끄는 수행법이 아닌 것으로 거부되고, upekkhā와 sati를 갖춘 선정이 해탈로 이끄는 유일한 수단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보았다.76)
Ⅴ. 결론 ▲ 위로
이상으로 최고층 문헌인 Sn.의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이 문헌을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무명을 중심으로 한 이지적 번뇌보다는 갈애를 중심으로 한 정서적 번뇌의 소멸을 보다 중시 혹은 강조했음을 우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갈애/욕망을 효과적으로 제어, 통제, 소멸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려/선정 수행이 강조되었음도 아울러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정려/선정 수행은 무명을 대치하기 위한 수행이 아닌 갈애나 욕망과 같은 정서적 번뇌의 소멸 내지 통제에 적합한 수행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려 수행의 경우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4선정-혹은 4정려-의 체계로 확립되기 이전의 모습이었으며, 4선정의 체계속에서 볼 수 있는 ‘떠남’, ‘싸띠’, ‘평정’ 등의 요소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강조되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독립적인 수행법들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4선정이 체계화 되면서 각 지분의 요소로 들어가게 된 것으로 추측케 한다. 이것은 이들 세 요소가 정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또한 번뇌를 효과적으로 소멸시키거나 통제할 수 있는 수행법임을 보여준다.
아울러 위빠사나 수행에 관련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싸띠의 경우는 위빠사나 행법의 싸띠가 아닌 정려 수행의 요소로서, 그리고 독립적인 수행 요소로서 설해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최고층 문헌에 나타난 주요 수행은 정려 수행이었으며, 이 수행은 정서적 번뇌를 대치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수행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고층 문헌이 성립하였을 당시에는, T. Vetter나 L. Schmithausen과 같은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아직 위빠사나 행법이 고안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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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about the theory of kilesa(defilement) and bhāvanā(practice) in Suttanipāta
- Based on the chapter 4 and 5 -
Lee, Pil-Wo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be understand Buddhist original kilesa(defilement) and practice from the teaching of Gotama Buddha standpoint. For this, I choose the chapter 4 and 5
I surveyed of the Suttanipāta in the chapter 1. And I considered kilesa and practice in the chapter 2, and 3.
In the chapter 2, I divided the theory of kilesa into two categories which are emotional kilesa and intellectual kilesa for study what is the character and viewpoint of the most ancient text.
In the case of emotional kilesa, I examined closely examples of taṇhā(craving), rāga(lust), lobha(greed) and so on. And about intellectual kilesa, I considered examples of avijjhā. As a result, I can found that there are more examples about the emotional kilesa than intellectual kilesa which only have 3 examples in the chapter 4 and 5 of Suttanipāta.
Consequently, it is emphasized the emotional kilesa than intellectual kilesa and is stressed that we can attain mokṣa/nibbāna through overcoming or extinction of the emotional kilesa by the most ancient text.
Especially, I found that taṇhā and rāga which are attachment and craving to the body are the most powerful elements obstructing nibbāna. I can also see that it is basically emphasized jhāna practice to remove these kilesa. But the jhāna is not four jhāna system as we know.
The jhāna's main factors are consisted of departure(viveka), mindfulness(sati), and tranquility(upekkhā) in the most ancient text. These three factors are individually suggested to jhānic practice and have an ability to remove kilesa. Through this research, I can suppose that vipassanā system has not established in those day of the Suttanipāta.
Key-words: Suttanipāta, the theory of kilesa, Emotional kilesa, Intellectual kilesa, taṇhā, rāga, jhāna, viveka, sati, upekkhā
■ 각 주 : ▲ 위로
1) 이 장을 따로 만든 것은 최종남 선생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발표 논문을 수정하는데 있어 최종남 선생의 논평은 필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문헌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전재성 박사의 책[숫타니파타(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4)]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2) 뿐만 아니라, 제5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바라연경이나 제1장 제12경의 성자 등이 각각 단독으로 유포되고 있었기에 Sn.일부는 북방에도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並川孝儀(2008, 17면).
3) SN와 AN, Udana, Pali-vinaya에서는 Aṭṭhaka-vagga나 Pārāyana-vagga라고 하는 현재의 Sn.의 장명에 해당하는 명칭이 인용되어 있다. 並川孝儀(2008, 17면) 참조.
4)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Sn. 제3장 제1경과 제2경은 각각 고따마 붇다의 출가와 수행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4장과 제5장에 비해서는 성립이 늦었다고 여겨지지만, 고따마 붇다의 초기 삶의 모습을 아주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5) Sn.에 대한 외국 번역에 대한 소개는 전재성(2005, 36-38면)을 참조하면 좋다.
6) T. Vetter(1988, 101면)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Aṭṭhaka는 아마도 최초의 불교 가르침과 승단과 거의 같은 시기거나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어떤 그룹의 자료들을 포함할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 집단은 불교승단에 통합되었다. 그 후 그 집단은 더 많은 자료를 산출했다. 이 자료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오랜 가르침과 붇다의 가르침을 결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적절해 보이는 것을 취하면서 늘 그렇지는 않았지만 종종 자신들의 초기의 근본성을 잃어버렸다.” 한편 Louis. O, Gomez(1976)의 경우는 Aṭṭhaka를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중관과 선적인 요소와 비교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7)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범위는 본 논문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따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서술해 가는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나타날 것이다.
8) 그러나 Dhp에서는 15게송에서 kammakiliṭṭha(오염된 행위), 165게송에서 saṅkilissati(오염되다, 잡염되다, 더러워지다.), 244게송에서 saṅkiliṭṭha(더러운, 오염된, 타락한, 잡염된)과 같은 용례가 확인된다. 필자가 여기에서 굳이 Dhp를 언급한 것은 문헌성립상의 순서라는 입장 때문이다. 필자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불교 문헌이 몇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구분의 기본적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층을 숫따니빠-따의 제4장 Aṭṭhakavagga・제5장 Pārāyanavagga로 하고, 제2층을 Saṃyuttanikāya의 제1장 Devatāsaṃyutta・제4장 Mārasaṃyutta와 Dhammapada의 Taṇhāvagga・Brāhamaṇavagga, 나아가 제3층을 Theragāthā와 Therīgāthā 등으로 규정”한다는 並川孝儀(2005, 10면)의 설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並川孝儀의 설은 荒牧典俊(1982)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입장에 대한 소개는 강종원 편역, J.W. 드용 지음(2004, 222-229면)을 참조하라.
9) 이필원, 阿羅漢の研究(京都: 佛教大学大学院 博士論文), 99면.
10) passāmi loke pariphandamānaṃ pajaṃ imaṃ taṇhāgataṃ bhavesu hīnā narā maccumukhe lapanti avītataṇhāse bhavābhavesu.
11) vītataṇho purā bhedā ti bhagavā pubbam antaṃ anissito vemajjhe n’ūpasaṅkheyyo tassa n'atthi purekkhataṃ.
12) yassa nissayatā n'atthi ñatvā dhammaṃ anissito bhavāya vibhavāya vā taṇhāyassa na vijjati.
13) Yasmiṃ kāmā na vasanti Todeyyā ti Bagavā taṇhā yassa na vijjati kathaṃkathāca tiṇṇo vimokho tassa nāparo.
14) nandīsaṃyojano loko vitakk' assa vicāraṇā taṅhāya vippahānena nibbānaṃ itivuccati.
15) taṇhādhipanne manuje pekkhamāno Piṅgiyā ti Bhagavā santāpajāte jarasāparete tasmā tuvaṃ appamatto jahassu taṇhaṃ apunabhavāyā ti.
16) sīmātigo brāhmaṇo tassa n'atthi ñatvā va disvā va samuggahītaṃ na rāgarāgīna virāgaratto tassa idha n'atthī param uggahītan ti.
17) Āsiṃsanti thomayanti abhijappanti juhanti-Puṇṇakā ti Bhagavā-kāmābhijappnatipaṭicca lābhaṃ te yājayogā bhavarāgarattā nātariṃsu jātijaran ti brūmi.
18) Sabbesu kāmesu yo vītarāgo Upasīvā ti Bhagavā ākiñcaññaṃ nissitohitva-m-aññaṃ saññāvimokhe parame vimutto tiṭṭheyya so tattha anānuyāyī.
19) Idha diṭṭhasutamutaviññātesu piyarūpesu Hemaka chandarāgavinidanaṃnibbānapadam accutaṃ
20) patilīno akuhako apihālu amacchāri appagabbho ajeguccho pesuṇeyye ca noyuto.
21) chandanidānāni piyāni loke ye vā pi lobhā vicaranti loke āsā ca niṭṭhā caitonidānā ye samparāyāya narassa honti.
22) vītagedho amacchari na ussesu vadate muni na samesu na omesu kappaṃ n'etiakappiyo.
23) sokaparidevamaccharaṃ na jahanti giddhā mamāyite tasmā munayo pariggahaṃhitvā acariṃsu khemadassino.
24) Kāmesu vinaya gedhaṃ Jatukaṇṇī ti Bhagavā nekkhammaṃ daṭṭhu khematouggahītaṃ nirattaṃ vā mā te vijjittha kiñcanaṃ.
25) Sabbaso nāmarūpasmiṃ vītagedhassa brāhmaṇa āsavāssa na vijjanti yehimaccuvasaṃ vaje ti.
26) Avijjāya nivuto loko, Ajitā ti bhagavā vevicchā pamādā na-ppakāsati, jappābhilepanaṃ brūmi, dukkham assa mahabbhayaṃ.
27)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avijjāya pabhedanaṃ.
28) Yasmiṃ kāmā na vasanti Todeyyā ti Bagavā taṇhā yassa na vijjati kathaṃkathāca tiṇṇo vimokho tassa nāparo.
29) 번뇌를 소멸하는 방식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서양의 학자로는 Rune E. A. Johansson(1985)을 들 수 있다. 그는 182-183면에서 Nikāya의 내용을 토대로 번뇌를 극복하는 방식을 7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1)통찰(dassana), (2)통제(saṃvara), (3)사용(paṭisevana), (4)인내(adhivāsana), (5)회피(parivajjana), (6)제거(vinodana), (7)수행(bhāvanā)이다. 이 가운데 (3)을 저자는 use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사전적 의미는 ‘사용’ 보다는 ‘수용’, ‘추구’의 의미이다. 7가지 구분 가운데 並川의 구분 방식과 상응하는 것은 (2)통제, (5)회피, (6)제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Sn.의 번뇌의 제거, 통제 방식을 이후의 문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확장, 발전시킨 것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0) 並川孝儀(2005, 77면).
31) 그 자세한 용례는 並川孝儀(2005)의 책 77-99면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32) 並川孝儀(2005, 79면)는 이것을 ‘초월’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vīta라고 하는 것이 ‘분리하여 가다(vi√i)’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두 번째 용례인 ‘분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나미까와의 해석을 따르면, 초월에 배당하는 것이 맞다. 그이 설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분류 ②는 다음의 분류 ③과 이반이라는 작용으로는 공통하고 있지만, 분류 ②가 번뇌를 주체에서 제거하는 작용을 나타냄에 비해, 분류 ③은 주체가 번뇌에서 밖으로 이탈하는 작용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33) T. Vetter(1988, 30면) 역시 “(갈애를) 완전한 분리, 포기, 거부함으로써, (이 갈애)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리고 더 이상 잡고 있지 않음으로써”와 같이 번뇌를 소멸하는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Vetter의 이러한 견해는 Sn.에 대한 분석의 결과가 아닌, 초기불전 가운데에서도 사성제에 관련된 내용을 분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Sn.의 번뇌에 대한 입장이 이후의 경전에서도 여전히 견지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34) 억제는 1번, 소멸의 방식은 6번 용례가 확인된다.
35) Satto guhāyaṃ bahunābhicchanno tiṭṭhaṃ naro mohanasmiṃ pagāḷho dūrevivekā hi tathāvidho so kāmā hi loke na hi suppahāyā.
36) patilīnacarassa bhikkhuno bhajamānassa vivittam ānasaṃ sāmaggiyam āhu tassataṃ yo attānaṃ bhavane na dassaye.
37) methunam anuyuttassa icc-āyasmā tisso metteyyo vighātaṃ brūhi mārisa sutvānatava sāsanaṃ viveke sikhissāmase.
38) vivekaṃ yeva sikkhetha etad ariyānam uttamaṃ na tena seṭṭho ma ññetha save nibbānasantike.
39) okaṃ pahāya aniketasārī gāme akubbaṃ muni santhavāni kāmehi rittoapurekkharāno kathaṃ na viggayha janena kayirā.
40) pucchāmi taṃ ādiccabandhuṃ vivekaṃ santipadañ ca mahesiṃ kathaṃ disvānibbāti bhikkhu anupādiyāno lokasmiṃ kiñci.
41) Anusāsa brahme karuṇāyamāno vivekadhammaṃ yaṃ ahaṃ vijaññaṃyathābhaṃ ākāso va avyāpajjamāno idh'eva santo asito careyyaṃ.
42) 여기에서 sati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PTSD(s.v., sati)에서는 sati의 어근을 √smṛ라고 밝히고 있다. 즉, ‘기억하다’란 의미가 기본적인 의미로서 제공되고 있다. 이 기본적인 의미에서 ‘recognition, consciou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등의 의미가 파생된다. 이 가운데에서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mindfulness(주의깊음, 유의)’가 쓰이고 있다. 中村元(2002, 174면)과 田中教照(1993, 15면)은 모두 ‘잘 주의해서’로 번역하고, 荒牧典俊(1986, 274면)은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並川孝儀(2005, 87면)는 ‘바른 자각’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 한역으로서는 일반적으로 ‘念’이란 역어가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大念處経(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paṭṭhāna가 sati와 함께 복합어로서 사용될 경우에는, ‘확립(setting up)’의 의미가 된다. 즉 ‘sati의 확립’이란 의미가 된다.(중앙승가대학, 2006, 11면) 이외의 한역어로서는 憶念·持念·守意·意止등의 역어가 사용되고 있다.(임승택, 2001, 14면) 또한, Akira Hujimoto(2006, 1172면)는 “sati에는 언제나 명확한 자각(sampajāna)이 뒤따른다. 대상의 순간을 지각하고, 주의를 기울일 때에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지각하는 그 행위에 대해 완전하게 자각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인경스님(2001, 95면)의 이해방식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Gethin(1992, 32)은 “나는 sati가 의미하는 것이 마음에 ‘가까이 서는’ 혹은 ‘봉사하는’ 마음의 특질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마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사띠가 마음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나 감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국내의 학자들은 번역어를 보면, 먼저 김열권은 ‘관찰’, ‘마음집중’,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였으며, 정원스님은 ‘마음 챙김’으로, 송위지는 ‘주의깊음’으로, 조준호(2000·2001)는 ‘수동적 주의집중’, 임승택(2001, 21ff)은 ‘마음지킴’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인경스님(2001, 95면)은 ‘알아챔’과 ‘대상에의 주목’이란 두 측면에서 사띠를 설명하고 있다. 전재성(2004, 104면 각주282)은 ‘올바른 새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새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조준호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며, 임승택과 인경스님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김준호(2008)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운문경전에 나타나는 사띠의 다의성’이란 말로 어떤 하나의 측면에서 sati를 해석/이해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크게 4가지 측면에서 sati의 의미를 파악한다. (1)명심과 마음 가다듬기 (2)止와 觀의 토대로서의 사띠 (3)주의집중 (4)사띠와 그 밖의 수행도. 따라서 그는 sati를 해석하지 않고 우리말로 ‘사띠’라고 음사하고 있다. 뜻을 취해 번역하게 되면 다의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43) 이 부분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2007)에서 언급한 적이 있으며, 아울러 「아라한 개념과 발전」(2008)에서도 간단히 다룬 적이 있다. 또한 김준호(2008)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독립적인 수행법이란 측면의 고찰이 행해졌다.
44) Yo kāme parivajjeti sappasseva padā siro, so imaṃ visattikaṃ loke satosamativattati.
45) tasmā jantu sadā sato kāmāni parivajjaye te pahāya tare oghaṃ nāvaṃ sitvā vapāragu ti.
46) Upekkhako sadā sato na loke maññate samaṃ na visesī na vīcceyo tassa nosanti ussadā.
47) mūlaṃ papañcasaṅkhāyā ti Bhagavā mantā asmī ti sabbam uparundhe yā kācitaṇhā ajjhattaṃ tāsaṃ vinayā sadā sato sikkhe.
48) etañ dhammam aññāya vicinaṃ bhikkhu sadā sato sikkhe santī ti nibbutiṃñatvā sāsane Gotamassa nappamajjeyya.
49) athāparaṃ pañca rajāni loke yesaṃ satīmā vinayāya sikkhe rūpesu saddesuatho rasesu gandhesu phassesu sahetha rāgaṃ.
50) etesu dhammesu vineyya chandaṃ bhikkhu satīmā suvimuttacitto kālena sosamma dhammaṃ parivīmaṃsamāno ekodibhūto vihane tamaṃ so ti Bhagavāti. ekodibhūta는 4선정 중 제2선에 나오는 ekodibhāva란 용어와 단어의 구성에 있어서 동일하다. 이 두 단어는 eka-odhi-√bhū로 분해될 수 있다. odhi는(=avadhi)는 ‘putting down, fixing’(PTSD., s.v., odhi)이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하나에 고정된 상태’란 의미가 된다. 또한 이 단어는 4선정에 나오는 ekaggatā의 의미와도 관련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항목과는 상관없는 내용이기에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51)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avijjāya pabhedanaṃ. upekkhāsatisaṃsuddhaṃ의 번역과 관련해서, T.Vetter(1988, xxvi, no.9)는 유익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내용은 졸고(2007, 각주29) 「아라한 개념의 발전과 전개」를 참조하라. 본 각주에서는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하도록 한다.
中村元(2002, 234면)는 “평정한 마음의 상태와 생각(念い)의 청정함-그것들은 진리에 관한 사색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荒牧典俊(1986, 365면)는 “근본의 무지를 타파해서 진리를 직접 아는 것에 의해서 해탈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우선 먼저 여러 가지로 진리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있고 …”고 번역하고 있다. 전재성(2004, 511면)은 “평정과 새김으로 청정해지고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앞서가면…”으로 번역하고 있다. 나카무라와 아라마키는upekkhā-sati-saṃsuddha는 진리에 관한 사색 이후에 일어나는 상태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전재성의 경우는 ab구의 관계가 동등관계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a구를 b구의 결과로서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조준호(2001, 62면)는 “완전한 평정심에 이르러 sati가 맑고 깨끗해지는 완성에 도달한다.”로 복합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복합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김준호(2008, 97면)는 ‘捨와 念으로 청정해지고,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으로 하여 지혜에 의한 해탈이요, 무명을 부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제4선의 원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게송이다. 그렇기에 ‘사와 염으로 청정해지고,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으로 하여’란 번역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제4선의 특징은 이미 사색을 초월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 게송에서 말하는 지혜는 결코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혹은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捨와 念으로 청정해진 상태에서 발현되는 지혜로 보아야 한다.
52) ajjhattañ ca bahiddhā ca vedanaṃ nābhinandato evaṃ satassa carato viññāṇaṃuparujjhatī ti.
53) suññato lokaṃ avekkhassu Mogharāja sadā sato attānudiṭṭhiṃ uhacca evaṃmaccutaro siyā evaṃ lokam avekkhantaṃ maccurājā na passatī ti.
54) ‘바르게 자각하다’는 ‘바르게 알아차리다’와 같다. 사실 ‘바르게 자각하다’란 번역은 荒牧典俊(1986)와 並川孝儀(2005)의 번역이다. 아라마끼는 ‘あるがままにいまここの存在を自覚する(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를 자각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나미까와 역시 아라마끼의 번역과 거의 같다. 이것은 싸띠의 성격을 논할 때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내용은 본론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55) 4선정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지만, 표현상의 편의 때문에 4선정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무소유정과 관련된다고 보는 다른 게송(1070 등)에서도 역시 싸띠(satīmā)가 등장한다.
56) 田中教照(1993, 16면)는 “ ‘심층의 욕망’인 갈애조차도 ‘주의하는 것’(念sata)에 의해서 제어된다고 하는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부터, ‘심층의 욕망을 멸진시켜 윤회의 홍수로부터 참으로 해탈해서 자유롭게 되기 위한 석존 독자’의 수행이 ‘선정수행’이었다는 것은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17면에서는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선정수행(jhānānuyutta)’보다 ‘念’(sata)이 수행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荒牧典俊과 中村元、村上真完의 석존 당시부터 선정에 근거한 수행이 강조되었다(14-15면)고 하는 해석에 대한 반론이다. 그러나 그는 선정의 수행이 Sn.의 제4장과 제5장에서 적극적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선정 수행을 석존 독자의 수행으로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1098게송의 nekkhamma와 같이 색계 사선을 연상시키는 것과, 1107게송의 upekkhāsatisaṃsuddhaṃ과 같이 제4정려를 나타내는듯한 표현을 보면, 붓다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선정수행과는 다른 독자의 정려(선정)수행을 가르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명히 Sn.의 제4장과 제5장에서는 사띠가 매우 중요시되고 있지만, 반면 정려(선정)수행의 체계속에서, 이미 정착해 있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57) 조준호(2000, 337면). 조준호의 논문은 이후 한국에서 싸띠논쟁의 촉발점이 되었다. 그는 싸띠를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인용과 같이 싸띠를 정의한 것은 사선에서 언어적 작용이 완전히 지멸하는 제3선 이후에 싸띠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어도 초기경전 내에서 싸띠는 제3선부터 등장하고 있음은 명확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하는 번역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58) 임승택(2001, 25면).
59) 인경(2001, 95면).
60) 전재성(2004, 104면 각주282).
61) Akira Hujimoto(2006, 1172면). 후지모또의 싸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기본적으로 Bhante Henepola Gunaratana, Mindfulness in Plain English(Boston : Wisdom Publishing, 2002)의 견해에 근거한다. 그는 싸띠의 가장 큰 특징으로 ‘비판단적 관찰’을 제시하고 있다.
62) 이 두 선인에 관한 내용은 MN I, no. 26, 163-166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Vin I, Mahāvagga, 7면에도 두 선인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붇다가 첫 설법의 대상으로 누가 좋을지 생각할 때 두 선인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나온다. 여하튼 붇다가 수행자 시절 두 선인과의 만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T. Vetter(1988, xxii)는 바로(A. Bareau)의 견해를 빌어 이 전승은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Norman 역시 불전에서 사무색정을 삽입한 것은 붇다의 선정법과 비교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안양규, 2000, 17면 참조) 그리고 藤田宏達(1972, 305면)는 DN. I, 34-5면 ; 장아함경 권14(T 1, 93b) 등의 내용을 토대로 “원시경전 가운데에서는 사무색정을 62견 중 ‘단멸론(uccheda-vāda)’가운데 포함해서” 설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63) Nathan Katz(1982, 63면)는 Bhikkhu Nāṇamoli의 견해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Vipassanā는 붇다의 독창적인 기여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른바 4선정 수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려 수행에 있어서도 붇다는 독특한 해석을 통해 인도체계의 수행과는 구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64) 藤田宏達(1972, 298-299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바라문교 문헌에서 dhyāna와 samādhi가 명상·정신통일의 의미로 명확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중기 혹은 후기의 古우파니샤드와 서사시에서이지만 그러나 dhyāna(및 dhyāyati)는 아마도 ‘명상’에 가까운 의미로 이미 찬도기야우빠니샤드에 사용되고 있고, 또 samādhi와 같은 어근의 samāhita도 아마도 ‘마음을 통일한 것’이란 의미로, 브리하드아랸야까 우빠니샤드 속에 사용되고 있다. 한편, 원시 자이나교 문헌을 보아도 jhāṇa(=dhyāna)와 samāhi(=samādhi)가 함께 명상·정신통일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불교 흥기시대에는 이 두 가지의 말은 일반적으로 선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널리 상용되었던 것이고, 불교는 그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65) 앞서 소개한 田中教照(1993, 16면)의 설 참조. 다나까는 선정수행보다는 싸띠(sata) 수행이 보다 중요한 수행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66) Bronkhorst(1993, 96ff)는 주류 고행주의 명상 전통은 해탈을 죽음 이후에 가능한 것으로 보았지만, 불교는 현재의 삶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불교도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유여의열반(saupādesesa)과 무여의열반(anupādesesa)의 관념이 도입되면서 진정한 열반을 죽음 이후로 연기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도들은 현재의 삶속에서(in this life)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並川孝儀(2005, 102ff)는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산문문헌에서는 풍부하게 그 용례가 확인되고 있으나, 최고층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운문문헌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후대에 성립한 Itivuttaka라는 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67) na saññasaññī na visaññasaññī no pi asaññī na vibhūtasaññī evaṃ sametassavibhoti rūpaṃ saññanidānā hi papañcasaṃkhā. papañca-saṃkhā의 해석이 어렵다. 필자는 인도철학 제24집 논문에서 ‘허망분별의 나타남’으로 번역했었다. 이에 대해서 김성철 선생은 papañca를 ‘허망분별’로 번역하는 것은 ‘유식’의 용례이기에 번역에 보다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이러한 지적은 초기문헌을 다루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주의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후대의 기술적 용어를 초기문헌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개념의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아울러 개념의 발달 과정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papañca에 대한 번역은 Norman(1984, 145면)의 경우는 ‘diversification’ 즉 ‘다양화, 다양성’으로 번역하고 있고, 中村元(2002, 192면)는 ‘ひろがりの意識(다양하게 확대되는 의식)’로 번역하고 있다. 並川孝儀(2005, 162면)는 ‘虚妄に区別立てして対象を捉え言語に表現すること(허망하게 구별을 세워 대상을 파악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68) okkhittacakkhu na ca pādalolo jhānānuyutto bahujāgar’ assa upekham ārabbhasamāhitatto takkāsayaṃ kukkuciy’ ūpacchinde.
69) ākiñcaññaṃ pekkhamāno satīmā Upasīvā ti Bhagavā n’ atthī ti nissāya tarassuoghaṃ kāme pahāya virato kathāhi taṅhakkhayaṃ nattamahābhipassa.
70) sabbesu kāmesu yo vītarāgo Upasīvā ti bhagavā ākiñcaññaṃ nissitohitva-m-aññaṃ saññāvimokhe parame vimutto tiṭṭheyya so tattha anānuyāyī. saññāvimokhe parame를 해석하는데 어렵다. saññāvimokhe의 복합어를 해석하는데 있어, 학자들간에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Norman(1984, 170면), 中村元(2002, 225면), 並川孝儀(2005, 161면)은 해석의 차이는 있어도 복합어는 4격 tappurisa로 처리하고 있다. 荒牧典俊(1986, 355면)는 ‘究極的にあらゆる概念構想から解脱して’로 번역하여 역시 4격 tappurisa로 보고 있다. 반면 전재성(2005, 495면)은 ‘최상의 지각이 있는 해탈 가운데’로 해석하고 있고, 田中教照(1993, 37면)는 ‘最上の想解脱において’로 해석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saññāvimokha를 여러 해탈 가운데 하나의 단계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param에 의해 한정되는 해탈로 볼 것인가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후자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일단 Sn.의 제4장과 제5장에서는 적어도 선정의 단계적 구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선정의 단계가 확실히 구분된 시점에서야 여러 단계의 선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지만, 선정을 단계로 구분했다는 확실한 기술이 발견되지 않는 한, saññāvimokha를 어떤 단계의 선정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71) kāmesu vinaya gehdaṃ Jatukaṇṇī ti Bhagavā nekkhammaṃ daṭṭhu khematouggathītaṃ nirattaṃ vā mā te vijjittha kiñcanaṃ.
72)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avijjāya pabhedanaṃ.
73) ākincaññāsambhavaṃ ñatvā nandī saṃyojanaṃ iti evam evaṃ abhiññaya tatotattha vipassati etaṃ ñaṇaṃ tathaṃ tassa brahmaṇassa vusīmato ti.
74) 전재성(2005, 432면)은 ‘물질적 존재가 남김 없이 소멸할 때에’로 번역하고 있으며, 並川孝儀(2005, 163면)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에 관해서’로, 中村元(2002, 193면)은 ‘(정신도 육체도)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 가운데’로 번역하고 있다. 荒牧典俊(1986, 306면)는 ‘각각의 수행자의 신체 존재가 소멸해’로 번역하고 있다. Gomez(1976, 44면)는 이 게송을 ‘완전히 육체와 정신을 그치게 하는 것(making body and mind to cease completely.)’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가능한 이해 방식은 두 가지 열반의 방식-무여의열반과 유여의열반-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Vetter(1988, 105면)는 이것을 육체적 심리적 ‘소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Gomez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75) 대표적으로 荒牧典俊(1986, 254면)는 “いかなる存在も存在しなくなった禅定の世界(어떠한 존재도 존재하지 않게 된 선정의 세계)”이라고 하여, 선정임을 매우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76) 그런데 並川孝儀(2005, 163-164면)는 이 외에도 공무변처와 식무변처로 볼 수 있는 게송도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게송 1119을 들고, 후자는 게송 1111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실체적 자아관의 부정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고, 후자는 sati수행자에게 고통과 즐거움의 느낌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 작용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이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 위로
[출처 : 선문화연구 Vol.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