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고속도로 얘기했어?” 박정희와 통한 ‘韓 아우토반’ (3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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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의 도정에 공백(空白)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앞에 있을 때는 미지(未知)의 세상을 열어 나갔고, 뒤에 물러났을 땐 방치(放置)된 문제를 풀어 나갔다.
5·16 혁명 2, 3년 뒤에 있었던 나의 이른바 1, 2차 외유는 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일선을 떠난 아쉬움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나라의 빈곤을 물리치고 국민에게 항산(恒産·재산이나 생업)의 기회를 제공할 숱한 일이 곳곳에서 보였다. 1차 외유(1963년 2월 25일~10월 23일) 때 나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녔다.
1963년 7월 초순 서독에 갔더니 신응균 대사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그는 “서독은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정책 추진으로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부족한 노동력을 아프리카, 동남아로부터 충당해 오고 있다. 57년부터 일본에서 매년 400명을 유입해 왔으나 올해 말이면 계약 기간이 만료된다”고 전했다.
신 대사에 따르면 62년 5월 서독의 M·A·N사(社)가 우리 대사관에 한국인 근로자 500~1000명을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고, 63년 5월에는 서독 노동부가 한국인 광부 250명을 고용하겠다고 희망해 와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당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를 맞아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이 절실했다.
노는 인력의 해외 송출도 시급한 때였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본국에서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냐”며 혀를 찼다. 나는 우선 “광부들이 오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신 대사에게 부탁했다. 이튿날 신 대사와 루르 지방에 있는 함보른 탄광으로 갔다. 서독 정부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지하로 수직 1000m, 수평 700m를 들어가니 탄광의 막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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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9월 ‘1차 외유’(63년 2월 25일~10월 23일) 중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다. 맨해튼 5번가의 호텔로 김정렬 주미대사가 찾아왔다. 유엔 주재 파라과이 대사를 만났는데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1912~2006) 대통령이 나를 초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육군총사령관이던 54년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마침 아르투로 일리아(Arturo Umberto Illia·1900~1983)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남미 여행 일정을 잡아두고 있던 참이었다. 10월 7일 김정렬 대사와 함께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을 방문했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옛 친구를 만나기나 한 듯 막 껴안고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냐. 오늘 처음 만나지만 평소 당신을 존경했다.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곤 가슴팍에 주먹만 한 대십자훈장을 달아줬다.
그때 난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이 왜 그리 환대했는지 진의를 잘 몰랐다. 나중에 알아 보니 그는 언론에 코리아에서 굉장한 반공지사가 와서 훈장을 줬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댔다. 결국 비슷한 입장에 있는 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에게 미리 구상한 한국인 이민을 제안했다.
“우리 민족이 해외로 나가는 발판을 만들고 싶다. 일본을 통해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파라과이에 근거지를 만들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여러 중남미 나라로 이민 가는 길을 열어야겠다. 당신의 나라는 땅은 굉장히 넓은데 인구가 400만 명에 불과하지 않으냐. 한국에 우수한 노동력이 얼마든지 있으니 이민을 받아들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