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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리나와 올렉 그리고 바실아저씨>
4/21(토)
주말이라 아침운동이 없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대장님께서 나를 호명하셨다.
“은재야~”
순간 그 낮고 작은 목소리가 너무 두려웠다.
“넌 나랑 조깅하러 가자.”
허걱.
써니쌤께서 덧붙이셨다.
“은재는 갔다와야지!”
으으윽. 갑자기 신경이 곤두섰다. 토요일 아침에 조깅이라니..
하지만 하반하 최고 권력자인 대장님과 써니쌤의 명령이기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얼른 신발을 신고 나가는 수밖에.
나는 대장님, 써니쌤과 셋이 특별 조깅에 나섰다.
대장님은 엉금엉금 뛰어오는 내가 답답하셨는지 줄넘기를 내 몸에 감고 나를 끌고 가셨다.
뒤쳐지려고 하면 줄넘기에 턱 걸려서 계속 뛸 수 밖에 없는 그런 장치였다.
항상 조깅하던 공원까지 가서 이제 돌아가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대장님 왈.
“이 산을 정복하자!”
그렇게 나는 가파르고 울퉁불통한 산길을 넘어 산까지 정복하게 되었다.
암벽 등반을 하는 것 같았다. 대장님은 언제나 크고 넓은 길보다는 좁고 비탈진 길을 택하신다.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실 것이다.
산에서 가장 높은 바위에 올랐다. 리비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대장님께서는 그 작은 건물들 중 우리 숙소와
우리가 자주가던 마켓, 올드타운,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 손가락으로 짚으셨다.
“여기서 이렇게 가서 이렇게 가면 되겠네”
내 눈엔 다 똑같은 네모들로밖에 안보였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대장님은 또 그 속에서 집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으셨다.
대장님은 정말 신통방통하신 분이다.
처음엔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조깅이었다.
날 끌고 가주신 대장님과 써니쌤께 감사하다.
*대장님께서 알려주신 산 정복 비법: 사람들이 많을 때는 맨 앞에 서서 제일 먼저 길을 밟아야 한다. 그래야 숲속의 동물들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 (동물들이 바로 달아나기 때문)
우리 숙소 옆집 아가씨, 카텔리나가 리비브 시내 구경을 시켜줬다.
우리는 먼저 오페라 하우스를 지나 시장거리 같은 곳에 갔다. 야시장 같은 곳이었다.
또 돈 타령이지만, 아마 돈이 있었다면 이것저것 주워담았을 것들이 정말 많았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소시지와 바베큐, 신기한 모양의 초콜릿, 시원하게 한 잔 딱 마시면 좋을 생과일 주스, 와플, 잼, 과자.
원래 이런건 정말 천천히 구경하면서 하나씩 사먹어줘야 하는데 참 아쉬웠다.
우리는 올드타운 쪽으로 갔다. 올드타운은 1240년에 지어져서 올드타운이라고 한다는데 그렇게 낡아보이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베이커리에서 또 흑임자빵을 봤는데 카텔리나가 이 빵이 우크라이나 전통빵이라고 했다.
어쩐지 흑임자빵이 유난히 많다 했다.
초콜릿 카페에 갔다. 원래 리비브에 진짜 큰 초콜릿 공장이 있다고 했는데, 이곳은 그냥 작은 카페라고 했다.
초콜릿 우유를 마시며 카텔리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카텔리나에 대해>
-이름: Katya Tishchenko(우리는 그녀를 ‘카텔리나’라고 부른다)
-나이: 22살
-현재 대학생임_Lviv에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 중 하나가 있는데, 처음 학사로 그 대학교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기차를 놓쳐서 지원서를 못냄. 그래서 동네의 다른 대학에 갔다가, 현재 다시 이곳 대학교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음.
-전공: account, economy
-직장: 처음 호스텔에서 일함. 그런 다음 우체국에서 일했는데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둠. 현재 international finance company에서 일하고 있음.
-대학 때문에 Lviv에 혼자 살고 있음. 이제 거의 1년됨. 고향은 우크라이나 중심부에 있음.(개 2마리와 고양이 3마리를 키움)
-구사언어: 우크라이나어, 영어, 러시아어
-공부하고 싶은 언어: 폴란드어(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모두 비슷하다고 함.
단,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를 알아듣는데, 러시아, 폴란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를 못알아듣는다고 함)
-가장 좋아하는 쿠키: 오트밀 쿠키
<카텔리나에게 들은 우크라이나>
-화폐 단위: 흐리브냐(25흐리브냐=1달러)/하반하 전체가 아침 한끼 먹을 때 500흐리브냐(약 3만원)씀. 저녁 한끼 먹을 때 1000흐리브냐 씀. 물가가 매우 쌈(그러나 우크라이나 현지인들에게는 비싼 편이라고 함)
-러시아와 중동지역의 혼혈이 많아 미인들이 많다고 함.
-식사: breakfast(아침)-dinner(여기서는 점심을 dinner라고 함)-snack(간식)-supper(저녁)
-음식: 감자, 토마토, 누들, 죽 등을 먹음/수프에 비트라는 보라색 무 같은 걸 넣어서 많이 먹음/감자전(우리나라 것과 맛이 거의 똑같음)/음식에 사워크림을 많이 찍어먹음(수프에도)
-간식: 오트밀 쿠키, 바프야(비스켓 같음), 빕산니아(웨하스 같음. 우크라이나 전통 과자라고 함)
-종교: 카톨릭계 동방정교회(카톨릭+무슬림)_모두 일어서서 예배를 드림. 부활절이 가장 큰 holiday임.(부활절 전날, 당일날, 다음날 쉼)->달걀에 페인트칠을 한 장식품이 많음.
-다른 나라로 여행가기가 매우 힘들다고 함->몇달 전부터 document를 작성해서 기관에 제출해야 함.
기관에서 승인해주면 그때 갈 수 있음/특히 먼 곳에 여행가기는 더 힘듬->직장을 오래 떠나있을 수 없음.
우크라이나에서는 직장을 구하기 어렵고, 그래서 한 직장에 오래 머물며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함.(그래서 함께 여행을 다니자고 했을 때 카텔리나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함)
-우크라이나의 상징: 1. 헤르브 2. 태양 3. 국기(하늘색과 노란색)
-간단한 우크라이나어: 도브레(좋다), 도브레 흩냐(좋은 하루 되세요), 자쿠야(감사합니다)
오덴(1), 뚜아(2), 뜨리(3), 쵸뜨가르(4), 비야즈(5), 쉬즈(6), 심(7), 비심(8), 데비야즈(9), 데스트(10)
-우크라이나 학교: elementary school_middle school_high school 또는 college_university(보통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면 박사까지 해야한다고 함)
카텔리나가 소개해준 우크라이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카텔리나가 설명해준 음식들을 많이 먹어볼 수 있었다.
소시지-보라쉬(붉은색 수프-감자,양파,고기를 넣음)-만두-감자전-감자구이와 돼지고기-도넛과 차.
우크라이나 음식이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았다.
오고 가는 길에 카텔리나와 많은 얘기를 했다. 그녀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대해.
우크라이나와 이곳의 사람들, 거리, 집, 마을, 짖어대는 개들까지 모든 것들이 그새 너무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헷갈리고 외우기 힘든 동유럽 나라들 중 하나로만 알고 있었던 우크라이나가 이제는 내 세번째 마음의 고향이 된 듯 했다.
슬로바키아 다음으로.
카텔리나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우크라이나에 다시 여행을 오면 카텔리나가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리비브도 좋고 다른 도시들도 구경시켜준다고 했다.
여행하는 곳마다 나중에 꼭 다시 가고 싶단 생각이 든다.
슬로바키아엔 미로 아저씨를 만나러, 우크라이나엔 카텔리나를 만나러 가야지——
4/22(일)
요리 경연 대회를 했다. 4일동안 한팀씩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우리 팀이 첫날 요리하게 됐다.
우리는 오랜 고민 끝에 돼지고기 덮밥을 메인 메뉴로, 호떡을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주방장은 정우. 다른 것에는 항상 어리버리한 정우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날 때가 딱 두 번 있다.
음식을 먹을때. 요리할 때.
정우가 필요한 재료들을 읊어줬고 우리는 그대로 장을 봐왔다.
“토마토 소스는 이 정도면 되고, 고기는 3키로 정도 사면 돼.
감자랑 버섯이랑 양파, 당근 넣고 토마토 소스 베이스로 소스 만들면 되고.
호떡은 밀가루 2키로로 소금이랑 물 넣어서 내가 만들게”
정우가 이제까지 했던 말들 중 가장 멋진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정우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유일하게 맡은건 밥 만들기였는데, 나는 그것마저 태워버렸다.
분명 두 눈을 똑똑히 뜨고 20분 가량 밥만 바라봤는데, 탄 냄새가 났다. 덮밥의 밥이 타다니.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식사를 만들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라웠다. 물론 그 속에서도 내가 한 일은 없었다.
대장님께서는 ‘소스가 너무 짜고 고기 크기가 너무 크지만 초보 수준에서는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평가해주셨다.
그래도 한명도 굶은 사람이 없으니 그것으로도 감사하지 않은가ㅎㅎ
모두들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도 정우는 호떡 반죽을 했다. 미리 해놔야한다며 반죽을 힘껏 밀었다.
정우가 어떤 일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은 처음봤다. 그것도 밥 먹기를 제처두고 말이다.
호떡은 밀가루에 적절히 소금과 물을 넣어 만들었고 속은 설탕과 해바라기씨를 넣어 만들었다.
사먹는 호떡과는 달라지만 그래도 호떡 맛이 났다. 달달하니 맛있었다.
내가 호떡을 2개나 먹었으니 맛으로써는 검증됐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이 모두 다른데, 정우는 오늘 주방에서 가장 빛났다.
요리사라는 꿈을 접지 말고 끝까지 가보기를.
4/23(월)
college에서 공연을 했다.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꽤 큰 무대였다.
미세한 잡음도 공연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북을 치지 못했다.
200명 가량의 학생들이 구경을 하러 왔다.
처음엔 사진도 열심히 찍고 박수도 크게 쳐줬지만, 가면 갈 수록 어수선하고 집중을 못하는 듯 보였다.
우크라이나 애들이나 한국 애들이나. 다똑같은 애들인데 어쩌면 우리가 너무 큰 기대를 했는지도 몰랐다.
한국에서 16살,17살 중고딩들을 앉혀놓고 공연을 보여주면 어떤 난리가 날지는 안봐도 비디오니까.
공연이 끝나고 앞에서 사회를 보던 선생님이 무어라 무어라 질문을 했는데 학생들이 하나같이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우리와 사진을 찍고 싶은 학생들 손 들라고 한 줄 알았다.
‘그래, 집중은 못해도 사진은 같이 찍고 싶어 하는구나.’
우리는 계단에 사진찍기 딱 좋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선생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출구로 향하는게 아닌가.
굳었던 얼굴을 싱긍벙글 펴고 모두 좋다고 우르르 나가버렸다.
아마도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나보다.
나는 이들의 도발적인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익숙한, 많이 봐왔던 이들의 행동에 씁쓸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어린 관중들만큼 솔직한 관중도 없으니 이번 충격은 충고로 받아들여야겠다.
누가봐도 더 재밌고 빨리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공연을 만들라는 충고로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우르르 나가는 떼무리 속에서 빠져, 우리와 사진을 찍은 학생들이 두명 있었다.
올렉과 나탈리아. 이들은 학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인듯 보였다.
이들은 우리 숙소까지 함께 걸어왔고 나는 올렉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올렉에 대해>
-이름: Oleg Stasiv
-나이: 16살
-현재 college 1학년, 학생회장
<올렉에게 들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현재 독재 중이고 국가의 돈을 많이 훔쳤음.
이 정부는 국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돈만 가지려고 함.
정부의 이상한 정책으로 5년전 많은 수감자들이 풀려나면서 우크라이나가 많이 위험해짐.
이웃끼리 가족끼리 훔치고 죽이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고 함.
-우크라이나는 5년전부터 러시아와 전쟁중임.(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우크라이나를 먼저 공격함)
->올렉은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길 원하고 나라를 개혁하고 싶어함
-전에도 개혁을 꾀한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협박을 당하다가 죽임을 당함.
->올렉은 학생회장을 하며 자신의 학교부터 바꿔가려고 노력 중임.
하지만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고 무섭기 때문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고 함.
올렉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공격적이고 위험하다고 했다. 의외의 말이었다.
우리가 만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모두 너무 친절하고 좋아서,
나는 모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그런줄로 알았으니까.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독재정권이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청년을 만나기 전까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다녀가는 여행지로서 우크라이나를 봤을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체감한 분위기는 우크라이나의 매우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의 이야기가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너무 비슷했다.
얼마전까지도 돈을 횡령하고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떠올랐다.
나는 올렉에게 분명 나라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올렉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가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우크라이나를 떠날게 아니라,
이곳에 남아 우크라이나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청년 전태일을 만난 것 같았다. 올렉은 어쩌면 우크라이나를 바꿔낼 인물인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런 청년을 만났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인 것 같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더이상 나와 상관없는 나라가 아니다.
내 친구가 살고 있는 소중하고 중요한 땅이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올렉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나는 우크라이나가 독재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렉이 전태일과 같은 최후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4/24(화)
바베큐 파티를 했다. 고기와 소시지, 빵과 과일을 싸들고 공원에 갔다.
‘너희가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고 고기를 너희 입에 넣어주지 않을 거야’
대장님 말씀을 듣고 나는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고기가 구워지면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면 되는거 아니야?’
물론 나의 거만한 생각이었다. 우리는 여느 바비큐 파티처럼 고기를 구울 불판이 없었다.
그말인 즉슨 고기를 꽂아서 바로 구워먹을 수 있는 꼬치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꼬치? 꼬치를 사와야 하나?’
이 또한 나의 착각.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나뭇가지인데,
그걸 다듬어 꼬치를 만들라는 대장님의 깊은 뜻을 나는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우리는 각자 자기 꼬치를 하나씩 만들어 고기와 소시지를 꽂았다.
그리고 피워놓은 불 앞에서 꼬치를 들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성급한 아이들 중에는 나무를 다듬지 않고 거친 나무 그대로 고기를 꽂아버리는 아이도 있었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다 못해 벌겋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 고기를 먹는 아이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 식사가 그 어느때보다도 매우 공평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꼬치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한 점의 고기도 입에 넣을 수 없었고,
각자의 꼬치에 꽂아질 만큼의 고기만 한번에 구울 수 있었으며,
뜨거운 열기를 참아내고 열심히 능력껏 고기를 구워낸 사람만이 잘익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때만큼은 빠른 먹기 속도나 큰 배꼴 따위가 통하지 않았다.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뜨거운 열기와 바람에 날려오는 재를 묵묵히 견뎌냈다.
고기를 바라보는 우리는 눈빛은 불만큼이나 활활 타올랐다.
나는 꼬치 네개를 먹었고, 이것은 누가 구워준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었다.
태우기도 하고, 덜 익히기도 하며 적당한 상태의 고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마지막 꼬치에서 이뤄낸 적당한 식감과 육즙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나의 상상 속 바베큐 파티와는 많이 달랐지만, 매우 신선하고 재밌는 바베큐 파티였다.
리비브에서 오데사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이동하던 날의 악몽이 떠올라 생각만해도 괴로웠다.
나는 ‘가방을 들 수 없을만큼 힘이 약하다면, 가방을 가볍게 하는 게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내 가방에서 덜어낼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달치 소화제. 처음 한달간 먹었어야 했는데 안먹고 이렇게 쌓여있었다.
이걸 드느라 무거워서 체하는 것보다는 이걸 버리고 가볍게 소화시키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을 전부 대장님께 드렸다.
다음은 고글과 장갑. 스키복 바지 버릴 때 같이 두고 왔어야하는데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카텔리나에게 이별선물로 주기로 했다.
우크라이나도 눈이 온다고 하니 나중에 스키장 갈 때 쓰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장갑도 고글도 카텔리나에게 잘 맞았고, 그녀가 매우 좋아했다.
스키양말은 해인쌤께 드렸다. 이런 두꺼운 양말은 나중에 운동할 때 신어도 된다고 해서 버리려다가 다시 갖고 다녔는데,
해인쌤이 지난번에 좋다고 얘기한 것이 기억나 바로 양도해드렸다.
아빠가 나의 장을 위해 사준 유산균 약 30봉은 하반하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함께 장건강을 위해 힘쓰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나는 나의 많은 것들을 나누었다.
가방이 가벼워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하고 너무 좋았다.
스키복 윗도리는 아직 버릴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끝내 들고 다니기로 했지만,
앞으로 준비가 단단히 되면 하나씩 하나씩 더 버릴 생각이다.
옷과 양말과 약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일단 살고 봐야지.
나는 배낭드는 것도 몇번 연습했다. 지난번 같은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이동은 내 배낭도 많이 가벼워졌고, 이동거리도 짧았다.
우리는 12시간 기차를 타고 우크라이나의 남쪽, 오데사로 향했다.
우리가 리비브에서 10일동안 묵었던 호스텔의 주인아저씨를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영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손짓,발짓으로 무리없이(?) 소통했다.
<바실 아저씨에 대해>
-이름: Basil
-나이: 60살(마음은 32살이라고 함)
-Coffee Hostel 운영자임
-영어는 아예 못하심.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써니쌤을 ‘써~니~’라고 부를 때 그 소리를 들으면 옆에 있는 사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음.
-인맥이 매우 넓으심. 옆집 카텔리나도 바실 아저씨가 소개해주셨고, 우리가 북공연을 한 college도 아저씨가 소개해주심.
우리가 공연하러 갈때마다 우리 북을 자신의 친구가 날라 줄 수 있다고 말하심.
친구들이 참 많으심. 쉬지 않고 전화가 오고, 거의 볼때마다 통화를 하고 계심.
우리가 숙소를 떠나는 날에도 마을 버스 아저씨와 협상을 해서 우리가 모두 그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직행으로 갈 수 있었음.
4/25(수)
10년간 세계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10년 세계여행했을 때 좋은점:
1.한국에만 있었을 때는 보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사람,유적지 경치..)
2. 세계 여러 나라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발판이 넓어진다.
3. 상황 대처 능력이 생긴다-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대장님을 보면서 정말 많이 느낀다)
4. 직장에 다니고, 공부를 하는 것보다 자유롭다.
5.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
10년 세계여행했을때 안좋은점:
1.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불안하다.
2. 여행하면서 소비할 일은 많은데 생산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다.(써니쌤과 대장님 같이 여행하지 않는다면)
3. 피곤하고 힘들다.
4.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너무 답답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5. 혼자 이상주의에 빠질 수 있다.(각박한 현실은 파악하지 못하고 낭만과 이상에 빠져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나라면 10년 세계여행을 가겠는가?
지금은 안가겠다. 일단 지금 하루하루 여행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 돈을 벌어서 남편과 혹은 엄마와 둘이 여행을 가는 것은 좋을 것 같다.
은퇴하고 노인이 되어서 천천히 돌아다니며 여행해도 좋을 것 같고. 배낭을 드는 것도 좋지만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여행이라면 더더욱 좋겠다.
사고 싶은 것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여행이라면 10년도 괜찮을 것 같다.
4/26(목)
조깅을 하다보니 바닷가에 도착했다. 파란바다와 모래가 보였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양말을 벋고 바다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나는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
들어가면 시원하겠지만 분명 나올때 모래가 잔뜩 묻어 다시 양말을 신기 찝찝할 것이고,
안들어가면 발은 깨끗하겠지만 왠지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고.
나와 같이 우유부단하여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고 있는 자가 한명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민수였다.
우리 둘은 나머지 모두가 바다에 뛰어들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더이상 이득과 손실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애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로 모래를 밟고 바다에 발을 담궜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좋았고, 물은 얼음짱같이 찼지만 시원했다.
우리는 모래에서 배구도 하고 게임도 했고, 몇몇 아이들은 물에 완전 입수를 하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수영복, 수경 하나 없이 그대로 몸을 흠뻑적시는 아이들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민수도 끝내 물에 들어왔고, 우리는 한명도 빠짐없이 발을 더럽혔다.
뒷감당은 나중이라고. 일단 저지르고 봤는데, 생각보다 나중에 양말을 신는 것이 그렇게 찝찝하지 않았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우리의 모습은 한편의 그림 같았다.
양말을 벋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멋진 그림에서도 맨 변두리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뻔 했다.
다행히 나는 그림의 중앙에서 주인공이 되길 택한 것이다.
양말 벗길 참 잘했다.
4/27(금)
토요일 이동을 앞두고 배낭 싸기를 했다.
이제는 이동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대장님께서 가방을 싸는 제대로 된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가방 싸는 법>
1.가볍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것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갈수록 무거운 짐을 넣는다
2.등에 가까운 곳에 무거운 짐을 넣는다->바깥쪽 주머니에는 최대한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그림의 순서대로 무거운 것을 넣는다)
3.가방 주변의 끈들은 모두 제대로 채워주고 꼭 메준다(이렇게 하면 가방을 단단하게 압축할 수 있음)
<가방 메는 법>(내려놓을 때는 반대로)
1.배낭을 멜 때는 오른쪽 어깨에 먼저 끈을 멘 후, 가방을 들어올리고 늘려져 있던 왼쪽 끈을 어깨에 메준다
2.끈을 꼭 맞게 조여준다
3.이때 살짝씩 뛰면서 조이면 팔힘이 덜든다
4.몸을 흔들어봤을 때 가방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도록 양쪽 끈의 길이를 똑같이 잘 맞춘다
<디베이트-미성년자(청소년)에게 개성존중이라는 이유로 성인문화를 허락한다>
나는 ‘미성년자(청소년)에게 개성존중이라는 이유로 성인문화를 허락한다’라는 논제에 찬성한다.
(청소년이 성인문화를 따라하는 것을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것에 반대한다)
첫째, 청소년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자제력을 갖고 있다.
청소년들은 중독이 되기 쉽고,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몇몇의 청소년들이 있는 것일 뿐 모든 청소년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어른들 중에도 절제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즉 이것은 개개인의 문제이지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청소년들은 억압하고 금지할수록 그것을 더 하고 싶어한다.
안된다는 것은 괜히 더 해보고 싶은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에 맞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규범을 깨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이들에게 자유를 준다면, 오히려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성인문화를 따라하진 않을 것이다.
셋째, 건전하지 못한 성인문화를 따라하는 청소년일수록 가정형편이나 교우관계 혹은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인문화를 따라한다.
강해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이것을 무조건 억압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청소년들이 불건전한 문화를 따라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로 찾아 해결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공부를 잘하기가 쉽지 않다. 학원비에, 과외비에 사교육비가 엄청나니까.
그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번 뒤쳐지게 되면 다시 그 속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과 우리 사회는 어떤가?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은 아이들만 인정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뒤쳐졌거나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인정받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눈에 띄게 과한 화장을 한다거나, 금지된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우리는 이런 상황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문제들에 먼저 반성해야 한다.
토론후 느낀점: 나와 지원형님을 빼고는 모두 반대를 했다. 예전의 나같으면 별 고민없이 바로 반대를 지지했겠지만,
지난 겨울방학에 청소년 권리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들은지라 찬성을 한번 지지해보고 싶었다.
사실 화장이나 복장규제에 대해서는 똑똑히 반박할 근거들이 있지만, 술, 담배에 대해서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건강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대책없이 허용했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선에서 허용을 하고 금지를 할지는 항상 어렵고 애매한 문제인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것, 어른들의 방식대로 길들이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저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수동적인 아이로 길들이려는 수많은 장치들과 부당한 규제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토론을 하며 청소년들은 불완전하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절제력이 없다는 반박을 많이 받았고
여기에 더 명확한 반론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른들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닌데, 청소년들은 왜이리 신뢰받지 못하는 걸까?
같은 청소년에게 청소년에 대해 비판받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첫댓글 글이 너무 생생해서 마치 그곳에 함께 있는 느낌이다. 다들 장 건강은 괜찮니? 아빠 고글을 카텔리나에게 준 건 잘했어.
무엇보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되고 그들의 생각과 삶에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가는 은재 모습이 정말 멋지다.
은재가 의미부여하는 모든것이 평범함을 벗고 특별하게 바뀌는 과정이
정말 유쾌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유산균 배분의 현장 설정샷은 진짜 완전 웃김 ㅎㅎ
은재양 레베루가 다른 보고서네요 꼼꼼함과 넓은 통찰력을 비병친구들께 전수하심이
가는 곳마다 의미있는 경험들을 기록하고 그곳에 좋은 친구를 만들어 그들의 삶을 이해한 후 다음에 꼭 가야할 이유를 만들어가는 은재는 참 여행자답다.
너의 명석함과 통찰력 덕분에 읽는 사람도 동반자가 된 기분이네~~^^
삶의 철학이 담겨진 은재의 글 사진들
볼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비우는 즐거움을 벌써 터득하다니 은재 멋진걸?^^
사진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들으니 거기에 있지 않아도 마치 함께 한듯한 느낌이야~ 읽을때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우가 요리할때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을 은재를 통해 처음 알았네 고마워^^
보고서 읽을때마다 감탄하며 대단하고 멋지다는 생각이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화이팅!!
은재 참 멋지다!!! 비병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겠는걸~~ <준형맘>
멋지다는 표현 외 떠오르는 단어 없음!!!
은재야-. 너의 올드 팬 희우이모다. 순전히 우연히 네 글을 발견하고 어제 밤이 이슥토록 7편을 다 읽었네...ㅋㅋㅋ. 완죤 흥미진진...은재라는 렌즈랄까 필터가 참 멋진 성능을 가졌구나 다시 한번 감탄.
주로 7시간 내외 시차일테니 아침 7시에 라디오들으며 커피랑 빵 먹을 때는 '은재는 햇살이 얼굴에 따끔따끔한 곳에서 점심 먹고 있겠군...근데 썬크림은 발랐을까? 썬크림 우습게 무시하면 귀찮고 괴로워지는데 -' 뭐 이렇게 생각이 이리저리 튀곤한다. 지금은 곯아 떨어져 자고 있겠지. 여긴 저녁 6시 43분. 너는 아마 12시 -1시쯤 되겠지...잘 자라..아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