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철도와 부동산 투기 -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대표적인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리고 식민지근대화론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의 철도이다. 철도는 근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 땅에 철도와 함께 부동산 투기를 가지고 왔다. 일본은 철도가 동반하는 부동산 투기에 대해, 모르지 않았고 잘 알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은 부동산 투기를 막으면서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책을 제대로 세우면 부동산 투기를 충분히 방지하면서 철도를 건설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도에 동반된 부동산 투기를 악용하여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 증거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철도가 동반하는 부동산 투기에 대해 일본이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
1) 우에노~구마가야 간 철도 개통 관련 부동산 투기에 대한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
일본에 철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1872년이었는데,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橫浜) 사이의 노선이었다(유모토 고이치, 88쪽). 그리고 철도망은 계속 늘어갔는데, 그와 더불어 철도 역사 주변에서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 토지 가격이 폭등했다. 아래는 1883년, 일본 최초의 사철(私鐵)인 우에노~구마가야 간 철도 개통을 3개월 남짓 앞둔 때, 이미 일어난 부동산 투기와 토지 가격 폭등에 대한 신문 기사이다.
“우에노 야마시타초(山下町)에서부터 구루마자카(車坂) 근처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일본철도회사의 개업이 가까워지자 지가(地價)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소유자들이 이 기회를 틈타 3배 가까이 지가를 올리는 바람에 이미 노른자위 장소라고 할 만한 오카무라(岡村)의 덴푸라점(天麩羅店) 부근 등은 3천 250엔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는데, 원래의 땅값은 1천 600엔 정도였다고 한다.”(〈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 1883년 4월 21일자; 유모토 고이치, 89쪽에서 재인용).
2) 서울역 부지와 관련된 일본공사관의 공문
1899년 8월, 주한 일본 영사 秋月이 대한제국 한성부 판윤 金永準에게 보낸 공문인 “南大門 밖 토지에 관한 照會案”에 의하면, 외국인이 서울역 부지 가운데 사유지를 매입할 경우, 후일에 “매우 곤란한 문제”가 생길 것이며, “매매 양도의 금령”은 대한제국이 그 곤란한 문제를 예상했기 때문에 내린 것이지만, 그 금령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그 곤란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구를 모두 황실 또는 정부의 소유지로 하고 현재의 거주자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전 비용 등을 지급”하는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소식이 누설될 경우에는 즉각 투기꾼들이 틈을 타게 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극비에 부쳐”야 한다. 여기에서 투기꾼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그 곤란한 문제가 바로 서울역 부지에 대한 투기 문제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 점은 1900년 5월 8일, 일본 공사 林이 외무대신 朴에게 보낸 공문인 “南大門 밖 停車場 用地 등 確定促求 件”에 의해 명시적으로 확증된다. 이 공문에 의하면, 그 곤란한 문제는 바로 “정류장 부지 안에 있는 민간 소유의 토지에 대해 투기 매매” 문제였던 것이다.
요컨대 일본은 경부철도의 종착역이자 가장 큰 철도역인 서울역을 건설하기 전에, 서울역 부지를 둘러싸고 부동산 투기가 발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은 서울역 부지를 둘러싸고 외국인에 의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부지에 대한 “매매 양도의 금령”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해당 지구를 모두 황실 또는 정부의 소유지로 하고 현재의 거주자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전 비용 등을 지급”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고 대한제국에 요구할 정도로, 철도역 부지에 대한 투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일본은 대한제국에 서울역 부지를 경부철도회사에 교부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1899년 9월 27일에 한성부 판윤 李采淵이 일본 영사 秋月左都夫에게 보낸 공문인 “漢城 崇禮門 밖 蓮池契와 石橋契 토지 需用의 件”에 의하면, 그 경부철도회사는 바로 “귀국 회사”, 곧 일본 회사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울역 부지 가운데 사유지를 수용해서 관유지로 만들게 하고, 그것을 다시 일본 경부철도회사에 제공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3) 평남철도와 관련된 일본공사관의 공문
1905년 7월 1일, 주한 일본 공사 林이 동경에 있는 대신(大臣) 小村에게 보낸 공문인 “平壤·鎭南浦 철도에 관한 件”에 의하면, 일본은 평남철도(평양과 진남포 간 철도) 건설과 관련하여, “그 부설 실행에 설사 외국인이 관여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또는 일본인 투기꾼의 관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종래의 실례에 비추어 지금 예상할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곧 일본은 평남철도에 대해 “투기꾼의 관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종래의 실례에 비추어” 예상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일본은 철도가 동반하는 부동산 투기에 대해 결코 모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2. 일본이 철도에 동반된 부동산 투기를 악용했다는 증거
일본이 철도에 동반된 부동산 투기를 악용하여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일본군 사령관이 일왕과 수상에게 제안한 의견서 가운데 “朝鮮政策上奏”에 의하면, 일본이 경부철도와 경의철도의 건설을 추진한 배경에는, 철도의 주요 지역에 일본인들을 “移植하여” 일본인들이 “商業과 農業의 권리를 장악”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루어져서 한일합병 전에 이미 일본인 수십만 명이 철도 연선에 거주하면서, “經濟上의 실권”을 “占有”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으로서 仁川~義州간을 유린한 山縣有朋은, “釜山에서 京城을 거쳐 義州에 鐵道를 부설할 것, 또 平壤以北 義州에 이르기까지 樞要의 지역에 邦人(日本人)을 移植하여······商業과 農業의 권리를 장악”(주: 山縣有朋, “朝鮮政策上奏”, 『山縣有朋意見書』, 原書房, 1968, 224-225쪽)케 할 것을 明治天皇과 伊藤首相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京釜·京義鐵道의 부설과 일본인의 韓國植民을 一體化시켜 구상한 것이었고, 한국 농산물의 수입과 일본 공산물의 수출도 결국 日本人 移住者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日帝의 이러한 구상은 경부철도의 개통에 의해 實踐的 문제로 대두되었다. 경부철도 총재 古市公威는 경부철도의 영업 개시 후, 곧 各 停車場 區域內에서의 日本人의 상업행위를 독단으로 허가했던 것이다(주: <皇城新聞>, 1905년 9월 5일). 한국정부는, 이것은 日本이 철도영업에 대한 無稅의 조항을 이용하여 철도 연선에 상업기지를 건설하려 한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日帝는 강제적으로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버렸다(주: <皇城新聞>, 1905년 9월 5일, 10월 18일). <京釜鐵道合同>에는 외국인의 개항장 이외 (철도 연선) 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鐵道營業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일제는 철도 정거장에 상업과 농업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20~100만 평 이상의 정거장 부지를 요구해 왔었다). 일본인의 철도 연선에의 이주가 불법적으로 용인되게 된 것이다.”(정재정b, 159쪽).
“식민지화 이전에 벌써, “鐵道沿線에 있어서 本邦人(일본인)의 在留者는 幾十萬人, 經濟上의 실권 역시 이들 本邦人의 占有”(주: 靑柳網太郞, 『韓國植民策』, 日韓書房, 1908, 28-29쪽)하에 있다고 보도된 것처럼, 경부·경의철도의 연선은 이미 日帝의 植民據點으로 변모되어 갔던 것이다.”(정재정b, 160쪽).
일본은 전쟁을 명목으로 철도역 인근의 토지를 한국인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 토지를 일본 정부로부터 싸게 넘겨받아, 자기들만의 상업 지구를 만들고, 또한 토지가격 폭등에 따른 개발이익을 불로(不勞) 수익했다.
“맥켄지도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일제의 토지수탈에 대해 “토지는 명목상 전쟁을 위하여 군대가 몰수했다. 몇 개월 안에 그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 건축업자와 상점 주인에게 되팔았으며, 일본인 거주자의 수는 점차로 증가했다. 이와 같은 토지수탈은 약소민족에게 자행할 수 있는 가장 범죄적인 포학이었다. 이로 인하여 지난날에는 호강스럽게 살던 많은 사람들이 거지가 되었다”(정재정a, 191쪽)고 증언한다.
철도역 주변의 금싸라기 땅은 거의 일본인 수중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철도 정거장 부지를 넓게 책정하고 그 일대 농민을 내쫓은 후 일본인들에게 싼 값에 넘겼다. 철도역 주변으로 새로운 도로와 도시시설을 세워갔다. 일본인 상업지역이 형성되었고 기존의 전통적인 도시체계도 이를 중심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철도역 주변으로 땅값이 치솟았고, 일본인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반면 한국인들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전통적인 도시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되고 말았다.”(박천홍, 201쪽).
“開發利益의 獨占 : 서울(남대문)역은 용산의 일제군사시설, 그들의 주거지역인 후암동, 원효로, 용산지역에 가깝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당시 만리동고개, 염천교가 마포에서 서울로 물자가 이동되는 길목이라는 것과 서대문에도 가까운 것에 착안하여 그 일대를 驛勢圈으로 조성하여 상업적으로도 완전 장악을 기도한 것이다. 더구나, 경인선이 경부선과 연결되어 서울역에 들어오게 되면 한국의 각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되는 대부분의 물자는 서울역에 집중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일본인들은 철도역을 자기네 거주지역 근처에 위치시켜 자기네들의 편리를 도모하고 개발의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부산진, 서울역, 용산, 영등포를 필두로 모든 역들을 자기네들이 경제공간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직 자본주의적 토지경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이들에게 모든 경제적 개발이익을 거저 준 것이나 다름없다.”(주경식, 306쪽).
“明治 36년(1903), 京釜鐵道工事가 진행함에 따라 大邱에 來往하는 日本人은 점차 증가하고 (日本) 料理店의 景氣가 좋아졌으며 停車場 부근의 土地를 買占하는 자도 많았다.”(大邱府史 沿革編, 189쪽; 손정목, 96쪽에서 재인용).
철도역 인근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은 “高利貸金業 또는 不動産業 등으로 단시일내에 크게 致富하게”(손정목, 98쪽) 되었다.
3. 요약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철도 건설과 함께 부동산 투기가 발생했다. 일본은 철도가 동반하는 부동산 투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를 막으면서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철도에 동반된 부동산 투기를 악용하여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었다.
부동산 투기가 옳지 않은 것이라면, 일본이 부동산 투기를 동반한 철도 건설을 추진한 것 역시 옳지 않은 것이며, 그것을 악용하여 일본인들에게 불로(不勞) 이익을 안겨준 것은 더더욱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부동산 투기의 측면에서, 일제강점기의 철도가 상징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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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府史 沿革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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